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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1일 화요일(성탄 팔일 축제 제7일)
제1독서 : 1요한 2,18-21
복 음 : 요한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오늘의 묵상>
김재덕 베드로 신부
부임 첫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에 사제관에 전화가 왔습니다.
본당 총회장님이었습니다.
“신부님, 이른 아침부터 죄송해요.
저희가 성전에 모여있는데, 잠깐 오셔서 강복 좀 주실 수 있나요?”
성전에 들어가 보니, 몇몇 교우들이 성체조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웬일이세요?”
“신부님, 다른 사람들은 일출 보러 바다로 산으로 떠났는데,
저희는 예수님 만나고 싶어서 왔어요.”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1,16)라는 복음 말씀처럼,
그분께서는 은총의 샘이십니다.
그러나 사목 현장에서 만난 교우들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총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1요한 2,20)
제1독서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또한 예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은총과 생명, 구원의 빛이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좋았던 모습도 그러지 못하였던 모습도 모두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얻어 나가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살았다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매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아내, 엄마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분이었다.
또 이웃에게도 친절했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죄짓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매님에게 충격적인 일이 다가왔습니다.
글쎄 말기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의사에게 암이 생긴 이유를 물었습니다.
뭘 잘못 먹어서인지,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인지,
뭐든지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분명히 자기 탓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그냥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같은 것이에요.”
무엇이 잘못되면 원인을 찾고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이때 드는 생각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평으로 삶 전체가 부정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일상 삶 영역을 넘어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하느님의 영역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하느님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의 영역을 넘어 진정한 행복이 있는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고 또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맡길 때 바뀔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요한은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한이 과연 아무런 문제 없이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역시 많은 고통과 시련으로 겪었고, 그러나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더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 뜻을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벌써 2024년의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올 한 해 과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어도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탄 8부 내 7일이며, 2024년을 마감하는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다보며, 오늘을 가져다준 지난날들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결코 보낼 수 없었던 한 해를 보냈습니다.
오늘 우리는 독서를 통해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는 ‘한 처음의 날’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한 처음’의 놀라운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것으로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하고,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오셨고,
사람이 되시어 오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아들이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가운데 천막을 치고 함께 거주하고 사신다’는 믿음은
초기 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이자 핵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가 인용한 초대교회의 찬미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 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엄청난 사랑’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인간이 하느님 되기 위함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변모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변모’와 ‘인간이 하느님이 되는 변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 있고,
그와 ‘같아지는’ 일이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본받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심도 깊은 신비적 차원의 일이 벌어집니다.
곧 베드로가 표현한 대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2,4) 되는 일이 있고,
바오로가 표현한 대로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1코린 15,49),
“그리스도를 입고”(로마 13,14; 갈라 3,27; 콜로 3,10), “같은 모습이 되는”(로마 8,29)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 내어주어,
그로 하여금 당신께서 누리는 가장 귀하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는 것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타자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주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자신이 그의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어주는 것은 곧 들어가는 일이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고, 나아가 상대에게 들어가기에,
동시에 자신의 그 빈자리에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대를 취하고 상대를 받아들여 상대와 같아지고,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 전통에서 전해져 오는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직 같아지는 것만이 구원 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비우는’ 행위의 종착지는 ‘같아지는’ 것이요,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것은 또다시 당신에게로의 변형을 가져옵니다.
곧 이러한 변화는 변화 자체에 머물지 않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변화로 끌고 갑니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같아짐’을 통해 우리와 자리를 바꾸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본질 자체로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이를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이 되는' 길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바로 그 길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곧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그저 자기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 안에 머물면,
하느님께서 그 안에 들어와 ‘전부’가 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제 발길이 당신을 향하여 있는지,
제 마음에는 당신의 평화가 들어와 있는지를 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생명의 빛을 불어넣으셨으니,
이제는 죽음의 어둠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제가 당신 생명으로 새로워지고,
세상에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온 세상이 생명의 빛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생명 그리고 빛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한 해의 끝자락에 왔습니다.
‘코로나19’와 싸우다가 모두가 지쳤습니다.
마음이 추운 가운데 다시금 더 나으리라는 희망을 갈구하며 마무리를 합니다.
들리는 소식은 맑고 밝은 소리보다는 어둡고 가슴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대선과 총선이 기다리고 있지만 후보자들에 대한 호감도는 바닥입니다.
그래도 일어서야 합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절망의 구렁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어둠을 비추는 빛이 필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 서로의 소리를 귀담아듣는 경청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 됩니다.
좀 더 힘을 냅시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시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큰 은총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기쁘면 기쁜 대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내 감정의 기복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지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시며 당신의 품에 머물기를 기다리셨습니다.
좋아서 호들갑 떨 것도, 좋지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는 주님의 품을
내 마음대로 들락거리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대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 싶게 속이 보이도록 웃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하게 주님의 품을 읽고 주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새해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을 살 수 있는 은총을 감사하고 내일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기쁨에 목말라해야 하겠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1,3-5). 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빛인 생명이 주어졌지만, 어둠에 가리워졌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사는 것이 생명이건만
그 참 생명을 깨닫지 못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받아들이지도 못했습니다(요한1,10-11).
그러나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얻게 됩니다(요한1,12).
따라서 빛을 받아들이는 눈, 생명을 받아들이는 삶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육안으로는 그 생명을 볼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영적인 그분의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도록 허락된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보내는 몇 년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성 세실리아).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2,17).
생명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는 곳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이, 하느님의 법칙이, 하느님의 뜻이 삶 안에 녹아나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권력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명에 순종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생명은 곧 빛입니다.
생명의 빛이 우리 모두를 비추도록 은총을 갈구하는 오늘이기를 빕니다.
한 해를 감사하고 새해를 주님의 이름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늘의 명, 하늘의 말씀, 하늘의 법칙이 살아있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느님의 복을 누리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하느님께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손님들이 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날 운동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9명이라서 한 명이 남았습니다.
제가 양보하려고 했는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빠질 수 없었습니다.
한 분이 양보하겠다고 해서 8명이 운동하려고 출발했습니다.
날씨도 제법 쌀쌀했지만 즐겁게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본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르신 한 분이 위독하신데 병자성사를 청한다는 전화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가겠다고 했고, 양보하기로 한 분에게 저 대신 운동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날씨도 춥고, 피곤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제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르신도, 어르신을 모시는 따님도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저는 이번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저를 보살펴 주시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잘 거절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을 아시는지,
하느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곤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을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영적인 스승을 괴롭히기도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를 끊임없이 공격하였습니다.
복음은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죄지은 이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성령의 은사는 겸손한 이들이 열매를 맺도록 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함께하는 2024년의 마지막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말씀이셨고,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 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 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 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기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 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여지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 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
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 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나는 절대 죽지 않아, 한 말씀만 있으면.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말씀이 어떻게 생명이 될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말씀을 갈망합니다.
‘책 도둑’은 나치 독일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인공 리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말씀’을 통해 글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의 잔인한 폭정에 반대하는 책들은 다 불태웠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리첼은 그래도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불타다가 남은 책들을 주워 읽습니다.
그가 글을 배우고 읽고 쓰는 작은 지하실은 독일에 남은 작은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유대인을 숨겨주며,
훔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시켰습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파괴된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그 작은 지하실에서 글을 쓰다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잔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면 결국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리젤의 이야기는 암흑 속에서도 빛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의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었던 흑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 안젤루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큰 고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는지 안다’라는 그녀의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래합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야 안젤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바라는 이는 새의 날개처럼 힘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그녀의 삶에 잘 들어맞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오며 깨달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너는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여
믿음을 키웠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오프라 윈프리를 절망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말씀은 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한 번은 성체를 영하면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사제로서의 길로 확실히 정하게 했습니다.
사제직의 여정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제 길의 빛이옵니다.’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이끄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진리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이를 믿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한 말씀은 나의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말씀으로 나의 길을 닦는다면,
“난 결코 쓰러지거나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도 지금도 내일도 계시는 하느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주님 성탄 팔일 축제 7일째이자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31일,
오늘 미사의 복음으로는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가 봉독 된다.
우리는 이미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이 복음을 들은 바 있다.
요한복음의 심오한 가르침과 사변적인 신학은 어렵기로 定評이 나 있다.
따라서 요한복음을 단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제4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은
요한 스스로가 에필로그(맺음말)에서 맑히고 있듯이,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 복음서는 저마다 나자렛 예수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피력하고 또 증명한다.
우리는 복음서에 선포된 진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그리스도론’을 정립한다.
좀 어려운 말을 쓰자면,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내용을 토대로
나자렛 예수에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도달하는 ‘上向 그리스도론’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나자렛 예수로 향하는 ‘下向 그리스도론’을 논한다.
상향 그리스도론에서 출발점은
나자렛 예수의 유년시절과 십자가 죽음에 이르는 공생활이며,
하향 그리스도론의 관점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탄생 사건이다.
이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同一化하는 작업을 놓고
아래에서 출발하는 관점과 위에서 출발하는 관점을 말하는 것이다.
더러는 아래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함축적인 그리스도론’,
위에서 출발하는 그리스도론을 ‘현현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그리스도론을 논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양방향의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분히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론에 기여하는 점은
그리스도론의 또 다른 하나의 분야인 ‘先在 그리스도론’이다.
다른 말로는 ‘前實存的 그리스도론’이라고도 한다.
공관복음서가 고백하는 ‘예수는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신학적 解題가
천지창조 이전의 시점에서도 거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재 그리스도론의 핵심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갈라 4,4)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신 聖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으로서
성자에게 붙여진 전인격적인 호칭이다.
성자이신 말씀이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1절)는 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같은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창세기의 ‘한 처음’(1,1)은 시간상 모든 시작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요한복음 프롤로그의 ‘한 처음’은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뜻한다.
그 이유는 시간 또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창세 1,3)
우주의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존재하며 시간이 있기 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밖에 없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이 생겨났고,
생겨난 모든 것이 말씀으로부터 그 존재와 생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육을 취하여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되신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살았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이며, 예수 성탄의 심오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으로서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신다.
한해를 마감하는 오늘,
시간을 창조하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그 이유 주신 말씀의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함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란 멈추는 법이 없지만
우리들 사람이 그 시간을 어제, 오늘, 내일로 나누어 쓰기 때문에
한해를 마감하는 이 시간,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귀한 시간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 못내 아쉽다.
많은 사람들이 찬미와 감사로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하기보다는
억울함과 불만으로 접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일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것이기에 희망을 갖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도 많고 예민하기까지 하다.
왜 우리나라의 정치는 이 모양일까?
우리나라 전체 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 비율이 약 9%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많은 신자들이 정치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치하는 것과 믿는 것이 그렇게도 다른 것인가?
기원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인정한 다음 해
314년 교황에 등극하여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비해야 할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었던 성 실베스터 1세 교황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심을 수 있는 새해를 기원해 본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