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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1일 수요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세계 평화의 날)]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갈라 4,4-7
복 음 : 루카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복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오늘 독서가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결같지 못할지라도, 충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변함없는 보호와 돌봄이 축복이겠지요.
문득 창세기 25장과 27장에 나오는 에아우와 야곱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하느님의 축복인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빵과 불콩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에사우의 일화는
신앙의 악화 일로를 걷는 오늘날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빛을 던져 줍니다.
결국 하느님의 축복은 그것을 간절히 바란 동생 야곱에게 이어졌습니다.
축복을 놓고도 경쟁하였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하느님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하느님께 기대어 그분의 사랑과 돌봄을 체험한 야곱에게
축복이 이어졌다는 메시지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또한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를 맞아 서로 축복을 나누는 이날, 교회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참으로 뜻깊게 다가옵니다. 모든 축복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평화입니다.
참사랑과 존중을 체험하여 자신의 귀함을 알고
다른 사람의 존귀함도 배워 아는 이들이 북돋워 갈 수 있는 것이 평화입니다.
우리 교회는 평화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평화는 한결같은 위대한 사랑의 뒷배인 하느님 없이는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분 사랑의 동반자인
우리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한 해를 보내기를 바라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2025년 을사년 (乙巳年)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지난 2024년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연말에 찾아온 많은 아픔은 우리를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났는지….
새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해지시길 기도합니다.
여행 등을 통한 다양한 경험을 해야만
복잡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말 그럴까 싶었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녀오신 분과 성지순례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셨으니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분 덕택(?)에 너무 힘든 순례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싫은 것이 많은지, 그리고 자기 다녀온 경험과 계속해서 비교하시는지,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여행 안에서만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존주의 철학가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인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의 경험 통로는 책과 사람들과의 대화뿐이었습니다.
여기에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가르치는 데 몰두했습니다.
여행 등의 경험이 전혀 없지만, 그는 엄청난 철학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경험의 객관적 형태보다 자기가 마주한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더라도 해석하는 힘이 없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해석은 우리 신앙 안에서 묵상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안에서 분명 깊이 있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냅니다.
구세주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신 어머니를 기리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시지만,
앞에서 먼저 말씀하시지도 또 행동하시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특별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또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으셨을 때도 보여주셨던 모습입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뜻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모습,
즉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지금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믿지 못한다는 생각으로써는
절대로 하느님의 뜻을 알 수도 따를 수도 없게 됩니다.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모습을 따르면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24년과는 다른, 보다 의미 있는 2025년이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2025년을 여는 새해의 첫 날이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요,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새해 첫 날’이라 함은 한 해의 다른 날들의 ‘어머니인 날’입니다.
무엇에든지 어머니가 있다는 것, 참 신비로운 일입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있을 수가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참 소중합니다.
나아가 모든 어머니들의 어머니이신,
스스로 계신 오직 한 분이신, ‘어머니이신 하느님’은 그지없이 존귀합니다.
이제 어머니께서는 새로이 한 해를 잉태하시고,
잉태한 한 해를 365일 매일 매일 하루씩 탄생시키실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존귀하신 하느님의 탄생을 우리에게 가져다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이를 두고 우리는 ‘강생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그야말로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강생을 담은 신비로운 그릇이 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이 사실은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좀 듣기에는 거북한 비유이지만,
실로 사람이 개를 사랑한 나머지 개로 태어난 가당치않는 사건에 해당합니다.
더욱 당혹스런 것은 이제 사람이 하느님을 낳았다고 해서
사람을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일컫습니다.
이는 마치 개가 사람을 낳았다고 해서
개를 보고 사람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참으로 당혹스런 일입니다.
대체 이 당혹스런 신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체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품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신 일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하느님의 어머니 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당신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어머니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기 몸 안에 잉태되어 있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탄생시키며 살아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입니다.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이 신비의 그릇이요, 통로요, 그 첫 번째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비를 꿰 뚫어보았던
중세의 유명한 신비신학자 마에스트로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
이 얼마나 놀랍고 어마어마한 일입니까?
그는 동시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1400년 전 마리아한테서 태어났을 뿐,
지금 내 인격, 내 문화, 내 시대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첫날에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기념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진정으로 사는 길은 우리도 이처럼 '하느님을 낳는 일'일 것입니다.
평화이신 하느님을 낳는 날이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이 특별한 날, 한 해를 잉태하는 날을 맞아,
우리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다'는 이 엄청난 신비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신비에 깊이 뿌리내려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지고한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진정한 축복이 이루어지길 빕니다.
또한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4년 '세계 평화의 날'을 맞이하여,
<형제애, 평화의 바탕이며 평화로 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담화를 발표하셨습니다.
이 메시지에서 교황께서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형제간의 우애', 곧 '형제애'였습니다.
교황께서는 ‘평화의 근본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도 우애를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곧 형제애를 회복함으로써 참된 평화를 회복할 수 있음을 일깨우셨습니다.
형제애'야말로 가난한 형제들을 구하고, 경제를 정의롭게 바로 세우며,
참혹한 전쟁을 중지하고, 온갖 부패와 범죄까지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임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이 새해의 첫 아침,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빌며,
주님의 축복과 기쁨 속에 우애로 이루어진 평화가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주님!
지난 한 해 동안 당신이 하신 일, 그 큰 자비를 제 마음 한가운데 새겨 주소서.
그 자비가 제 중심이 되고, 제 기쁨이 되게 하소서.
그 자비를 늘 맨 첫 자리에 두고, 그 어느 것도 그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올해도 그 자비가 날로 커지고, 그 기쁨이 새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새해 첫날에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민수기에 보면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6,24-26)
복을 주시는 주체가 우리의 주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복을 잘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복을 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상기해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들을 너희가 듣고 따르면 복이 내릴 것이다”(신명11,27).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명심하여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주 너희 하느님의 눈에 드는 좋은 일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므로,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영원토록 잘될 것이다”(신명12,28).
결국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더군다나 그 복은 당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다면 그는 분명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편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 몸의 소생과 너희 땅의 소출도,
새끼소와 새끼 양을 비롯한 너희 가축의 새끼들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 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에서도 밖에서도 복을 받으려거든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 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주님의 말씀에 머물면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머물지 못하면 마음이 허전하고
그 공허를 채우려 엉뚱한 곳에서 위로받으려 합니다.
술을 찾는 사람도 있고, 쇼핑에 매달리는 사람,
도박이나 다른 무엇에서 찾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모님은 순종의 모범이십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 복된 여인으로 부릅니다.
여러분도 말씀대로 행하는 가운데 복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행복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1,45)으로 불리었습니다.
사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갈라3,9).
시편 24,4에서는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허망한데 뜻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복을 누려야 되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께 마음을 두지 못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복을 잃어버립니다.
올 한 해는 세속적인 복을 얻으려 헤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복을 만들고 또 빌어주며 복을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흔들려서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언제라도 그분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우리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는 까닭은
많은 경우 내 입에 맞는 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올 한 해는 주님의 복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며
그분께서 원하시고 기대하는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복을 누리기 위해 과거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복에 감사하길 바랍니다.
과거에 매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지금 받은 복을 감사할 줄 모르면 더 큰 복을 주어도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앞으로 받을 복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처지에서 감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을 감싸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뱀’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구리뱀 이야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사명과 십자가의 구속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모세의 구리뱀 이야기는 민수기 21장에 등장하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으로 인해 독사에게 물리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도록 명령하십니다.
물린 사람들이 그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자신의 십자가 희생과 연결 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결과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뱀은 원래 인간의 죄와 타락을 상징하지만,
하느님께서 이 상징을 구원의 도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을 자신이 짊어지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이 사건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이는 단순히 구리뱀을 보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명령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신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구리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의지함으로 치유와 구원을 얻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십자가 희생이
영적 치유와 구원을 가져올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가는 인간에게,
십자가는 죄 사함과 새로운 생명을 주는 도구가 됩니다.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들에게 치유와 생명이 약속되었듯이,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청중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약 사건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사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구리뱀처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들리실 것이며,
이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뱀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시고 저희에게 복을 내리소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새해 첫날이며,
성 바오로 6세께서는 1968년부터 이날을 세계 평화의날로 제정하셨다.
마리아께서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낳아 주시면서
새해의 모든 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가 그들에게 알려준(루카 2,11) 구세주를 찾아가는 장면이 소개하고 있다.
목자들의 관심은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에게 있다.
그들이 찾고 있던 것도 아기였고, 그들이 본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도 아기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아기에 대해 말하면서 그 옆에 있는 어머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19절) 간직하는 마리아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목자들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기쁨이 퍼져나가도록 하지만,
마리아는 그 일에 담겨 있는 보다 깊은 의미와 주님의 가르침들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리아의 모성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들의 신비에 언제나 보다 철저히 참여하고자 하는 사랑에 불타는 모성이다.
그 모성은 갈바리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까지 동화하는 모성이다.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준 이름이었다”(21절).
할례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 계약의 징표였다(창세 17,11).
남자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다는 징표이다.
예수께는 구원업적인 수난의 전표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처할 운명을 타고난 아들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 때문에 마리아의 모성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더욱 풍요롭다.
마리아는 십자가 아래에서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피로써 생겨난 자기의 자녀들(요한 19,26)로 받아들인다.
마리아는 항상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역할에 종속되어 있는 모습을 우리도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갈라티아서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고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극하여 악의 힘에 억눌렸던 우리를 속량하시어(참조: 갈라 4,5),
당신 자신의 신적인 자녀 관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5).
이 자녀는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보다도
우리의 존재를 다시 나게 하는 내적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갈라 4,6)로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7).
하느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기 위해 마리아가 필요하셨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들을 구원해 내시고.”(갈라 4,4-5).
때가 찼을 때, 즉, 하느님의 구원이 실현되려는 때,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아들은 율법의 속박을 없애기 위해 율법의 지배하에 태어나신 것처럼
마리아에게서 살과 피를 취하실 필요가 있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없었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갖는 우리의 하느님의 자녀 관계도
어느 정도 마리아의 모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리아의 역할을 볼 때, 마리아가 어떻게 평화의 주인(이사 9,5)이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해의 평화에 대한 표징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평화는 바로 자녀들-형제들의 관계를 생기게 하는 모성이라는 표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녀-형제 관계에서 사람들은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용서하고, 섬길 수 있게 된다.
결국, 평화는 우리의 어머니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이며,
그 모성을 통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대한 공격은 모성을 파괴하는 것이며, 따라서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태중에 잉태된 생명을 파괴하는 것도 안 되는 일이다.
또한, 젊은이들을 그릇된 길로 몰아가는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란,
바로 폭력을 쓰는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성적 사랑의 결핍에 있다.
그 사랑의 결핍으로 모든 것을 헛되이 여기고 누구에게나 반항한다.
마리아는 이렇게 평화의 상징이며, 마리아의 모성을 펼침으로써
평화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평화의 창출자이시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찬가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51-52).
폭력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민수기의 대사제가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이유를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제 이 축복이 마리아의 미소와 함께, 그리고 우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서
한 해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새해를 봉헌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이토록 큰 부끄러움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은총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는 인간 역사의
잔악함과 남루 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무리 슬프고 스산함에도 불구하고
힘과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주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로 받은 이 은혜로운 첫날,
우리 모두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슬픔에 잠긴 이웃에게 그분의 복음을 선포하며
따뜻이 위로하는 사랑의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교회 전례는 새해 첫날을
세상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성모님 대축일로 정해 경축하게 합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마리아는 지극히 작은 존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산골이자 변방 나자렛 출신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토록 작은 존재 마리아를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첫째가는 협조자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휘황찬란한 영광의 길, 떠들썩한 권력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큰 것을 작은 것 안에, 참나무를 도토리 안에,
말씀을 육신 안에, 영원을 순간 안에 담아두기를 좋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화려한 겉모습이나 번쩍거리는 빛
또는 성전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먼
하느님의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실
거친 지푸라기로 만든 구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아기는 젖이먹고 싶어서 훌쩍거리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으며
우리를 향해 아주 작은 손을 내뻗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까이 오신 아기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신앙 여정의 가장 좋은 모델이요 본보기가 되시는
나자렛의 마리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소개하는
짧으면서도 유익한 소책자가 하나 출간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종 수도회 소속 사제이며
대 영성가인 에르메스 론키의 ‘마리아는 길을 떠나’(바오로딸)입니다.
열심히 책을 읽다 보니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너무나 적합한 기도문이 눈에 띄길래 소개합니다.
평범하고도 거룩한 여인 마리아님,
저희가 평범한 일상의 삶을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는 터전으로 여기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나자렛 집의 냄비와 베틀 사이에서, 눈물과 기도 사이에서,
양모 실타래와 성경 두루마리 사이에서
당신은 진정 온전한 여성의 품위를 지닌 모습으로
회한 없는 기쁨, 절망하지 않는 슬픔, 기약 없는 이별을 체험하셨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사랑했던 마리아님, 저희와 함께 걸어주십시오.
하늘의 모후 관을 쓰시기 전 가련한 이 땅의 먼지를 먼저 맛보셨던 마리아님,
저희가 하느님의 업적에 경탄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에게 위안을 받는 그리스도인이기보다
그리스도와 사랑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안토니오 벨로 신부)
어머니는 자녀의 어떤 미래를 지원했느냐에 따라 공경의 수준이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
개신교에서는 성모님을 한 신앙인으로서 공경하지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처음부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알고 지지하고 어머니의 역할을 했기에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공경받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을 낳고 키우시며 그분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평생을 헌신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묵상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구원의 계획에서 하느님과 깊이 협력하신 마리아의 역할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과 자녀의 진정한 목적을 위한 변함없는 헌신입니다.
진정한 어머니는 자신이 받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미래를 위해 주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1열왕 3장 16-28에서 솔로몬 왕의 유명한 판결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의 어머니라고 주장하지만, 솔로몬은 희생정신을 통해 진짜 어머니를 알아냅니다.
참된 어머니는 아이가 다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희생할 수 있다면 어머니가 확실합니다.
성모님도 요셉 성인과 함께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이집트로 피신하셨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이십니다.
성경에서도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보여준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탈출기 2장 1-10절에서 그녀는 파라오의 명령에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석 달 동안 모세를 숨기고,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맡겼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지도자로 모세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 강물에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장을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파라오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키는 인물인 모세가 되었기에
구약의 모세의 어머니로서 공경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아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떤 자녀든 그 정체성에 대한 사명이 존재합니다.
그 사명에 협조했다면 어머니는 그 사명을 수행한 자녀의 어머니로 공경받습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어머니인 투르 페카이의 삶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문맹이었고, 여아 교육을 금기시하던 사회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딸의 여성 교육에 대한 꿈을 지지하며
위험에 직면해 있던 말랄라를 끝까지 응원했습니다.
말랄라가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계속 활동할 수 있었던 힘은
어머니의 도덕적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말랄라는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고,
어머니의 믿음과 희생이 세상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투르 페카이는 그냥 어머니가 아닌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 사명을 위해 지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은 처음부터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명은 당신 희생으로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메시지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한 순간부터 마리아는 믿음과 용기로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사가 지시한 대로 그녀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며(루카 2,21),
그분이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맡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의 삶 동안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매 순간 지지했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는 종들에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첫 번째 기적을 행하고 공생활을 시작하도록 도왔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아래에서도 마리아의 침묵 속의 존재는
그녀가 아들의 사명에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의 삶은 어머니의 역할이 단순히 생물학적 관계를 초월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사명을 지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지혜가 자랐다고 합니다.
부모가 예수님의 사명을 지원하며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드님, 곧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불리시고 공경받아야 당연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교육받지 못하고 자라셨습니다.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라셨지만, 아들 셋을 잘 키웠고 그중 하나는 사제가 되었습니다.
성당 가면 사제의 어머니로서 존경받으십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어떤 공경을 받을지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구의 어머니가 되느냐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하느님 자녀를 낳고 성장시키면
하느님 자녀의 어머니로서 하늘에서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이 어떻게 하늘에 들어가고
하늘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보여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은 마리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가까이 이끄는 삶을 살 때,
우리도 이 거룩한 사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가 땅에서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양육하고 지원했는지에 따라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계획에 봉헌하며,
우리의 희생이 영원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믿음, 용기,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을 올바른 목적을 향해 인도하는 영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됩시다. 아멘.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한 해일 것을 빕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여러분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실 것을 빕니다.
한 해 동안 하느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실천되어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빕니다.
오늘 시작하는 정월 초하루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고,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표현입니다.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 전,
콘스탄티노플 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예수가 출생할 때는 인간이었지만,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로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예수 안에 우리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예수가 출생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예수님은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에 모였던 교부들은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앙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는 다른 뜻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분은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와는 다르게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된 것입니다.
그 표현은 그 시대 신앙인들이 예수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위해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품위를 격상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가 참다운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창시자인 예수를 자리매김하는 데에 필요했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을 사용한 오늘의 축일은 1970년에 제정되었습니다.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가 결의하여 선포한 표현을 가져와 축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오늘은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
하나의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고 굳이 고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표현이라고 우리가 알아들으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세계 평화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축일은 1967년에 제정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통치자 한 사람이 보장하는 평화였습니다.
통치자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고 살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계 평화의 날을 1967년에 제정한 것은
이제 평화는 통치자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야 하는 가치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평화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를 의미합니다.
성탄 날 밤, 베들레헴의 하늘에 울려 퍼진
천사들의 환호 소리라고 루카 복음서가 알리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도
“복되어라,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니.”(마태 5,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웃의 자유를 빼앗으며, 평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명령하고, 지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그 섬김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살피시기에 이웃을 보살피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칼로 닦은 이야기가 루카복음서(7,36-50)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평화 안에 가시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으니 평화 안에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보살핌이며, 어떤 은혜로우심인지를 깨달았고,
이제 그 깨달음을 안고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갑니다.
우리 앞에는 또 한 해의 세월이 펼쳐져 있습니다.
은혜롭게 받아들여 살아야 하는 세월입니다.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은혜로운 세월이 되게 해야 합니다.
새해 아침에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새해입니다.
은혜롭게 살자는 우리의 인사말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 것 같이 착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욕심과 허영에 사로잡히고, 이웃에게 무자비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작가 솔제니친이 고국인 구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공산주의 체제였던 구소련이 무너지자, 고국 러시아에 돌아와 기차여행을 하면서
동내마다 폐허가 되어 서 있는 성당 건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저 건물들이 있어서 그래도 사람들이 두 발 가진 동물이 되지 않았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해 주는 성당 건물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두발 가진 늑대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이웃에게 은혜로움을 실천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물질과 명예를 위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욕구는 흔히 사람을 두발 가진 동물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존이며,
세월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이웃에게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섬기는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한 해를 오늘 우리는 또 시작합니다.
베푸심이 흐르고 또 흘러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빌며
새로운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분이 베푸신 은혜로운 한 해를 맞이합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