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BhF0-hN4I8k?si=RyPhahnSuMTLujns
Charles Ives: Three Quarter-Tone pieces (1903/1923)
아이브스 Charles Edward Ives 1874~1954
미국의 작곡가. 일반적으로 미국의 현대적 음악을 창작을 선도한 작곡가로 평가받는다. 아이브스는 군악대 악장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많은 음악을 듣고 배울 수 있었다. 그는 13세 때 이미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했고, 예일 대학에 입학하여 작곡(스승:H.Parker)과 오르간을 공부했다(1894-98). 대학 졸업 후 오르간 주자로 활약하다가 그만 두고 사업에 몰두했다. 1907년 이후 보험회사 전문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보험회사를 운영하면서 그는 작곡에도 많은 시간을 내었다. 그의 창작생활은 주로 밤, 주말, 휴가에 이루어졌다.
아이브스는 미국의 철학자 에머슨(R. W. Emerson), 호돈(N. Hawthorne), 쏘로우(H. D. Thoreau) 등의 영향을 받아서 "음악과 일상적 삶의 통일"을 추구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찬송가, 대중가요, 군대행진곡, 미국 민요, 오락음악을 자신의 작품에 융화시키려 노력했다. 즉 그의 음악의 원천은 그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공휴일 마을 밴드의 퍼레이드, 토요일 밤의 댄스파티에서 들었던 바이올린 선율, 마을 장터와 작은 극장에서 들었던 메들리 등이었다. 아이브스의 무조성 음악 역시 이러한 사상적 배경, 즉 일상을 음악에 수용한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은 쇤베르크 식의 음악사의 혁명적 전환을 의도한 것과는 다르다.
아이브스의 작품에는 20세기 음악의 중요한 특징들이 거의 나타난다: 다조성(polytonality), 무조성, 복합리듬, 4분음, 공간적 음향, 우연음악 등. 이 때문에 그는 당시 동료 작곡가들로부터 고립되었으며, 20세기를 예고하는 그의 작품은 발표 당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아이브스는 카논기법을 즐겨 썼으며, 전위·역행·확대·축소 기법을 통하여 불협화음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화성 뒤에는 항상 명확한 조성이 온다. 또한 재즈리듬의 사용, 규칙적 마디줄이나 박자기호 없는 자유롭고 불균형적인 리듬을 사용하여 대칭적 반복에서 벗어난 형식의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위한「콩코드 소나타」(Concord Sonata, 1911-1915, 수정 1940-47)는 조성이나 박자가 없거나, 복조성으로 구성된 4악장으로 이루어졌다. 돌연한 분위기의 변화와 높고 낮음, 크고 부드러움, 빠르고 느림의 대조가 나타나며, 복잡한 리듬과 불협화음적 부분과 단순하고 서정적인 부분 조화를 이룬다.
아이브스 인생관과 음악관의 본질을 설명하는 글들은 1962년『Essays Before a Sonata』로 편찬되었고, 여기에는 1888-1921년 작곡된 114곡의 가곡이 함께 실렸다. 아이브스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썼다: 4개의 교향곡, 실내음악, 오르간음악, 피아노음악, 합창, 가곡 등.
미국의 작곡가. Charles Edward Ives (1874 댄버리, 코네티컷 주-1954 뉴욕) 그의 음악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뉴잉글랜드의 미국적인 전원풍경과, 군악대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시골 마을의 브라스밴드와 합창단을 이용하여, 연주 중에 음악집단을 겹쳐서 복합적이고 혼란스러운 리듬과 화성을 만드는 동시성 음악의 실험에 즐겨 몰두했다. 아이브스가 흔들리고 움직이는 전체, 리듬이나 화음, 조성(調性)을 중복시키는 데 흥미를 가진 것도 그러한 시도를 통해서임에 틀림없다. 여기서의 불협화음은 전체적인 조화, 즉 깊은 통일감에 의해 해소되고 있다. 현대음악의 혁신을 예고하는 많은 새로운 서법(書法)이 혼잡하게 찰스 아이브스에게 주어지고 있다. 다조성(多調性), 무조성(無調性), 음열기법, 미분음정(微分音程), 폴리리듬, 공간에 배치되는 공간 음악, 다양한 연주에 의한 가변적인 형식, 클러스터의 화음(동시에 울리는 소리의 고밀도적인 덩어리), 기존 음악의 콜라주나 인용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수법은 그의 음악에 있어서는 단지 개인적인 의미밖에 갖고 있지 못하며, 형식이나 양식의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아이브스는 독립성을 지키는 방법을 스스로 알고 있어서, 작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매우 특이한 것이었다. 14세 때부터 고향 마을의 오르간 반주자가 되어 생활의 대부분을 교구의 음악가로서 활약하고, 파이프 오르간을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1894년부터 1898년에 걸쳐서는 예일 대학에서 호레이쇼 파커에게 배웠다. 그러나 고전적인 교육은 그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학업을 마친 뒤에 그는 실업계에 투신할 결심을 했다. 그리하여 1899년 그는 줄리어스 마이릭 Julius Myrick과 함께 보험 대리점을 설립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자신이 보험회사의 경영 지침서를 집필하여 권위있는 책으로 인정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작곡도 계속하고 있었다.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작품은 생전에는 연주되지 않았으며, 만년에야 겨우 음악적 가치를 인정받아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1908년에 하모니 트위첼 Harmony Twichel과 결혼하여 뉴욕으로 옮겨 살았으나, 주말과 휴가는 코네티컷에서 보냈다. 그가 의욕적으로 창작에 몰두한 기간은 20년이 채 안 된다(1900~18). 1918년 그는 만년에 고통을 받게 되는 심장 발작에 걸리고 1930년에는 반신불수가 되자 사업에서 은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시에 음악 창작활동도 중지하고 말았다. 활동을 하지 못한 나머지 25년의 여생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광이 시작되는 시기가 되었다. 1929년 이후 시인인 헨리 벨라메인 Henry Bellamain이 그를 칭송하는 글을 써서 그의 음악 보급을 도왔다. 또한 작곡가 헨리 코웰, 피아니스트 존 커크패트릭 John Kirkpatrik도 그의 음악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아이브즈는 미국 문예협회 회원으로 선출(1946)되었고 1947년에는 1901년부터 1904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3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그의 음악이 호평을 받아 그때까지 연주되지 않았던 그의 많은 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위대한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찰스 아이브스의 작품은 작품번호가 186에 이르며 그 중 100곡 이상이 가곡이다. 집중적인 창작기간에 구상된 이들 야심적인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렸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서도 합창을 위한 시편 제67번(1894)은, 이미 리듬과 화성을 겹치는 수법을 사용한 동시성 음악의 예가 되었다. 교향곡이라는 쟝르는 그에게 환기력 있는 묘사와 몇 개의 프레스코화를 창조케 했다. 교향곡 제1번(1895~98), 교향곡 제2번(1897~1902), 그리고 후기의 작품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소년시절 뉴잉글랜드에서 자주 들은 찬송가를 곁들인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3번, 3개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제4번(1910~16), 고향 시민의 축제와 종교적인 축제를 모티브로 한 축제 교향곡 Holidays Symphony(1904~13) 등이 그것이다. 유니버스 교향곡 Universe Symphony이라 불리는 교향곡 제5번(1911~16, 1927~28)은 미완성 작품이고, 크로마티멜로드튠 Chromatimelodtune이라 불리는 작품도 미완성이었으나 1967년에 작곡가 군터 슐러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들 색채감이 넘치는 대작(아이브스는 야외의 축제를 상기시키는 금관악기의 음향을 좋아했다)외에, 아이브스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짧고 조용한 고전적인 작품 몇 곡을 남겼다(2곡의 명상인 저녁의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 in the Dark[1906]와 대답 없는 질문 The Unanswered Question[1906]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밖에 묘사적인 작품인 뉴잉글랜드의 세 장소 Three Places in New England, 즉 관현악곡집 제1번 First Orchestral Set(1903~14)은 다른 많은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곡자의 역사적, 지리적 뿌리의 깊이를 말해 주고 있다. 아이브스의 교향 작품으로는 그밖에도 교향악곡집 제2번(1909~15)과 로버트 브라우닝 서곡 Robert Browning Overture(1908~12)이 있다. 소편성을 위한 작품은 종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보다도 실험적이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소리의 중복을 여기에 익숙하지 못한 청중에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관현악의 풍부한 울림이라는 구제수단이 없는 만큼 적어도 실험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령, 베베른의 희박한 서법(書法)을 예고하는 듯한 톤 로드 ToneRoad(1911~15), 현악4중주와 피아노를 위한 가변적인 작품 할로윈 Hallowe'en(1906), 스케르쪼인 포장도로 위에서 Over the Pavements(1906~13), 연못 The Pond(1906), 무지개 Rainbow(1914),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4개의 소나타(1902~16), 2개의 현악4중주곡(1896, 1907~13), 피아노 3중주곡(1904~11), 2대의 4분음 피아노를 위한 4분음의 3개의 피아노곡 3 QuarterTones PianoPieces(1923~24) 등을 들 수 있다. 피아노를 위한 그의 수많은 작품 중 소나타 제1번(1901~09)을 비롯하여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Concord Mass. 또는 흔히 콩코드 소나타 Concord Sonata라 부르는 대작 소나타 제2번(1911~15)이 대표작이다. 이 소나타 제2번은 콩코드 마을에서 살면서 알게 된 초월주의자인 철학자나 작가, 에머슨, 호손, 올코트가의 사람들, 소로 등에 대한 헌정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그는 해설과 주석을 위해 소나타 앞의 에세이 Essay before a Sonata라는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이것은 그의 사상과 착상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아이브스는 모방이나 이미지의 환기를 지체없이 실행에 옮겼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의 창조는 세계,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의 근원이 되는 것을 꾸밈없이 드러내는 일이었다. 직업과 창작활동을 분리한다는 당초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일상과 예술적 착상 사이의 단절 및 딜레마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분열하고 세분화된 현대 음악 속에서 아이브스의 경우를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부조화를 감수하고 화해시켜 나가는 이 낙관주의인 것이다. 아이브스에게 있어서 혁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새로운 원리에 음악의 언설(言說)을 묶어 놓고, 그것을 억제해 버리겠다고 하는 욕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혁신이란, 파괴적인 무정부 상태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으로서 자연의 무질서한 상태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은 원심적인 것이지 구심적인 것은 아니며, 수법에 구애받아 자신을 폐쇄하는 것도 아니다. 또 그의 음악에 대해 다조성(多調性)이나 폴리리듬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브스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개개의 음악적인 요점이 아니라 자율성과 형식의 과정, 음악적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다음악(多音樂)을 논의해야 할 것이다. 소리를 겹친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 없이, 그 한가운데서 공기와 우연성을 순환시키는 것이다(그러기에 존 케이지와 같은 사람이 찰스 아이브스에게 애착을 느끼는것 같다).
동시에, 그의 음악과 아주 친한 콜라주의 미학(그는 많은 작품 속에 찬송가나 민요의 한 절, 또는 군대의 음악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도 긴장감이나 문화적인 아이러니같은 성격은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태어난 고향과 어린 시절의 체험의 연상에 위치한 그의 작품은 모두, 그 안에 매우 자연스럽게 음악적인 추억을 포함하고 있다. 이 혁신적인 음악가가 그의 유년시절과 아버지의 모습 또는 이 연장선상에 있는 몇몇 모범이 되는 사람, 예컨대 랠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82)이나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62) 같은 뛰어난 인물들, 즉 대지와 자연의 연속성 및 융합을 제창한 평화주의자들에게 가장 집착해 있던 사람이라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찰스 아이브스의 음악작품은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 할수 있으며, 양식의 통합과 동질화 작용에 의한 소화 및 동화를 거부하고, 이질적인 인상과 영향의 혼합으로 존재한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작품을 유럽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그의 작품이 서법상의 대담성에 있어서 예언적이었다기보다는(지금은 이미 감명을 주지 못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의 놀라운 존재의 자유성, 세계와 사회에 대한 공감, 낙천적인 생활방식, 그가 쉽게 다원성을 소화하여 이질적인 것, 조화되지 않은 것을 통합해 버린 것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byop1qqmXlY?si=bBf9G1rdhznafQFV
Charles Ives: "Robert Browning" Overture (1911/1914) Nashville Symphony Orchestra diretta da Kenneth Schermerho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