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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5일 주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60,1-6
제2독서 : 에페 3,2.3ㄴ.5-6
복 음 : 마태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제1독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이는 솔로몬 임금이었습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면 솔로몬의 뛰어난 지혜와 그가 이룬 업적들로
사방에서 그를 칭송하며 선물을 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아무 업적도 없이 그저 태어나시기만 하였는데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경배를 받으십니다.
그분께서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온 세상은 축복받았다는 뜻이겠지요.
하느님께서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일하시면서도
당신의 존재와 움직임에 대한 단서(또는 흔적)를 세상 곳곳에 남겨주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지만,
별은 최종목적지까지 이끌어 주지 않고 길 중간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오던 길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찾아와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그리고 그곳에서 결정적인 답을 찾아 듣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펴라.”(2,6)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미카 예언서 5장 1절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아 들려준 것이었지요.
사람의 힘과 지식만으로는 구세주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열어 보여 주신 ‘계시’의 도움이 필요하였지요.
그들이 제대로 된 목적지를 찾고 방향을 잡아 나아가는데
또다시 별이 나타나 그들을 인도합니다.
마침내 동방박사들은 별이 멈추어 비추는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경배하고 예물을 드립니다.
주님의 공현(에피파니아, epifania)은
이렇게 주님께서 당신을 온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 주심을 뜻합니다.
공현은 주님 성탄의 절정이며 장엄한 선포입니다.
그래서 공현을 ‘제2의 성탄’이라 부르나 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월요일 새벽 미사가 끝나면 미사에 온 아이들과 라면을 끓여 먹습니다.
처음에는 미사에 오는 아이들이 복사 외에 없었지만,
이제는 꽤 많은 아이가 새벽의 어둠을 뚫고 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라면 먹는 즐거움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탁구를 하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목청껏 부르기도 합니다.
또 몇몇은 숨바꼭질을하며 놀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친구들과 많이 놀았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더 자고 싶어도 억지로 일어나 성당에 갔습니다.
솔직히 미사 자체는 재미없었지만, 친구들과 노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이제야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었음을 깨닫습니다.
즉, 당시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제게 주어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기회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렇게 50대를 사는 제가 어렸을 때 놀던 놀이의 순수한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영원할 것 같은 그 순간도
또 기회가 무한하다는 생각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지금 삶이 영원하리라 생각하면서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렇게 살다가는 이 모든 것이 후회로 남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빛이신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날인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 주님의 별을 보고 예물을 가지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들의 여행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별에 의지해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가는 여정은
힘들기도 하지만 정말로 위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백성의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동방박사들을 통해 메시아 탄생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곳이 유다 베들레헴인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경배하러 가지 않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편하고 쉬운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봉헌합니다.
그러나 헤로데 임금과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봉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얻을 것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주님께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행복한 지금이 아닌,
후회만 가득한 지금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임을 찾아 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또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길 떠남’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빛을 볼 수 있으며,
그 별을 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떠나와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마침내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허황한 왕궁인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빛'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비로소 ‘참된 빛’이 낮게 엎드린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 낮아져 예물이 되면,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과 동행하여 빛을 비추며 가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분의 별'(마태 2,2)
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19년 8월에 미국에 왔습니다.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려면 ‘쇼셜넘버’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은 기억에 없는데, 사무실 직원이 도와주어서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은 신분증과 같기에 운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비행기를 탈 때도 필요하기에 면허증을 취득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이민 변호사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신청했고,
신문사에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영주권이 나왔다고 주교님께 보고드렸고, 주교님께서는 이왕 영주권이 나왔으니,
미국에 더 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작년 2월 교구 인사이동으로 저는 뉴욕의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준비된 본당 신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뉴욕에서 5년 살다가 왔기에 미국 생활에 필요한
쇼셜넘버, 운전면허증, 은행 계좌가 이미 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브루클린 한인 성당 주일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영주권이 있기에 비자를 얻기 위해서 한국에 다녀올 필요도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외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갖추었지만, 내적인 준비는 부족했습니다.
사제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기도’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이유로,
신문 홍보 다닌다는 이유로 꼭 해야 할 기도를 소홀히 한 적이 많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기도로 자라는데, 기도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건 ‘말씀’입니다.
매일 미사를 위해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지만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말씀이 제 안에 머물지 않고, 세상의 것들이 제 안을 채웠습니다.
사제에게 필요한 건 ‘시대의 징표’를 보는 안목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책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고통 중에 있는 이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뉴욕에 5년 동안 있으면서 이런 내적인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린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하느님의 아들로 드러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공적으로 드러나는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입니다.
그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난 것은 주님의 성탄, 동방박사의 경배, 세례 때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창과 칼, 권위와 권력으로 세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 공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성서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그리고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빛은 정의롭게 비추지 않습니다. 빛은 공정하게 모든 곳을 비추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영광도 정의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것은 공정을 위해서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혈연이나, 능력, 학벌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고,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야
참된 상속자가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과 교회는 성탄을 맞으면서 트리를 만들고 그 위에 예쁜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도시의 밤에 많은 십자가가 붉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불을 밝히고, 트리의 전구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의 불을 밝히는 것,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께 경배하는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별”, 삼왕에게 경배받은 아기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이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분이 만민의 주님이심을 공적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과 교회의 보편성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의 주제는 찬란한 빛이다.
이 빛은 어둠을 이기고 앞길을 밝히는 희망의 표지이다.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의 동방이란 동쪽 즉 다마스쿠스 쪽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성서를 열심히 읽으며, 시대의 징표를 잘 살폈던 히브리인들을 말한다.
별은 사람의 아들 징표로서 영광의 십자가의 모습이다(마태 24,30).
박사들이 찾아온 아기는 수천 년 기다려온 분이며, 오셔야 할 분으로 성서에 예언된 분이시다.
박사들은 동에서 본 별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그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어 빛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이 아기는 왕이며 성서적으로 구세주이신 분이시다.
복음에 나오는 박사들의 의미는 깊다.
그들의 고국이 어디든 간에 그리고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드는 이방인들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오시는 그 백성은 온 인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을 맺는 선교 사명의 내용이 이미 동방박사들의 이야기 속에 예고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28,19).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시다.
항상 이 선물을 받으면서 그분을 알아봐야 하기에 항상 새로운 신비이다.
공현이 우리의 삶 속에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을 내어주실 때 당신을 아는 방법과 수단도 주신다는 것이다.
박사들에게는 별을, 헤로데에게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4절) 성경의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빛은 겸손하고 준비된 마음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헤로데나 대사제들에게는 성경의 증거도 그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에는 부족하였다.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 왕들에게는 불확실한 증표도 도움이 되었다. 은총의 작용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찾던 왕을 베들레헴의 보잘것없는 한 아기에게서 발견하였고 경배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11절).
이 등장인물들의 여러 가지 태도는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게 될 운명을 어렴풋이 그려주고 있다.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헤로데는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7-8절).
그러나 박사들은 별을 따라 온갖 일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고생 끝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 별을 다시 발견하고 “더없이 기뻐하였다.”(10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사건이 암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주님 공현축일의 의미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느냐,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느냐 아니면 헤로데의 경우처럼 감추어져 있느냐,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제거해 버리려고 하는 삶인가 하는 것의 신비가 될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시대의 징표를 깨어 기다리던 삼 왕들은 구세주를 만났다.
삼 왕은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모두가 당신의 모상이며 당신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그분을 닮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것(에페 1,4-5),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인류 전체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분의 원하심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복음 선포는 매우 중요한 우리의 사명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증거하는 삶이 있어야 한다.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부터, 나를 통해서,
나 자신을 통해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이며 사명이다.
우리만이 아닌 모두가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 구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그 안에서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영광의 주님을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러한 삶은 생명의 십자가에서 나타난다.
오늘 이방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주님은 아기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주님, 구세주로 오신다.
이 신비가 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 있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많은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도 하여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한 형제자매임을 느끼도록 하여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교회를 위하여서 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한다고 실천해 나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갈 순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피정이 들어올 때, 제 하루 마지막 일과는 보일러실에 들러 난방 상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나긴 하루를 마치고 수도원으로 올라오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세상에! 별이란 별들이 총집합해 있습니다.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인생무상함을 온몸으로 체험합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크고 위대하심 앞에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아무리 난다 긴다, 잘난체하지만, 티끌이요 먼지인 것을...
동방 박사 세 사람도 밤길을 걸으며 그런 생각을 했겠지요.
박사들은 탄생하실 구세주의 별을 목격한 후, 즉시 그 멀고도 오랜 여행길을 시작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세 명의 이름은 멜키오르, 가스파르, 발타사르입니다.
당시 동방이라는 지역은 페르시아나 아라비아로 추정됩니다.
그들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과거 박사란 칭호는 가방끈이 긴 사람들을 대상으로 폭넓게 적용되었는데,
아마도 별자리 연구를 통해 미래의 일을 예언하던 천문학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박사들의 시선은 온통 주님의 별을 향했습니다.
낮에는 휴식을, 밤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기약 없는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유다 지방에 이르러서는 구세주의 별빛이 사라지는 난감한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박사들은 예루살렘 성읍으로 들어와서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본인 말고 또 다른 임금이 유다 땅에 태어났다는 말에
헤로데 임금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겠지요.
겉으로는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경쟁자를 신속히 해치울 계략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들은 진리의 빛이자 생명의 빛이신 메시아를 뵙고 경배드리기 위해
오랜 나날의 수고와 갖은 위험을 감수했던 참된 순례자였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난 후 박사들이 봉헌한 선물도 참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진정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는 유향과
구세주의 희생을 상징하는 몰약을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이 바친 봉헌의 결과로 되돌려받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뵙고 싶어 했던 아기 예수님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뵈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풀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경배했습니다.
멀리서부터 가져온 선물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황금)을 바칩시다.
매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외치며
내 의지를 접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유향)합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매일 직면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통(몰약)을 기쁘게 견뎌냅시다.
현대의 현명한 동방박사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던 사람들일까요?
일단 ‘행복’을 찾았던 이들임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결정은 행복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던 때는 언제일까요?
친구들이 생겼을 때일 것입니다. 혼자 가는 길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가면 좋은 친구들이 생깁니다.
내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면 그 사람은 좋은 목적지로 가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에서 성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많은 재산이 성공이 아닙니다.
돈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줄 때 그게 성공입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관계가 잘 형성되고 있다면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에서 폰 트랩 대령은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장군이고 아이가 일곱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가 죽어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폰 트랩 대령은 아이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호루라기로 명령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한 명의 군인 상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행복이 없습니다.
이때 가정교사로 마리아가 들어옵니다.
마리아는 고아로 자랐습니다. 마리아는 수련 수녀입니다.
워낙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수녀원에서 쫓겨나
폰 트랩 대령의 자녀들을 돌보는 일로 파견을 받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이것은 폰 트랩 대령의 가정에서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유로워지면 감당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폰 트랩 대령은 마리아를 쫓아냅니다. 그리고 귀부인 한 명과 재혼하려 합니다.
그러자 가족은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마리아는 수녀원에 다시 들어갑니다.
아이들은 한 번 느낀 자유와 행복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노래로 아버지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수녀원에 가 마리아를 찾습니다.
마리아는 다시 대령의 집에 돌아옵니다.
대령은 마리아가 없는 집에서는 행복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대령은 말합니다.
“당신이 이 집에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자녀들과의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귀부인과 헤어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마리아는 엄격한 군인인 폰 트랩을 자상한 남편이요 아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장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집과 재산을 포기하고
마리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를 탈출합니다.
폰 트랩과 아이들은 참 행복을 찾는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저도 대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희생해야 했지만,
아이들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만나는 교사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모든 공동체는 이러한 동방박사들이 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게 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과 교만과 육욕을 봉헌하게 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한국 영화 ‘친구’도 있습니다.
시골 친구들이 어떤 아이들은 조직 폭력배가 되고
어떤 아이는 공부를 잘해 유학도 다녀옵니다.
조금이라도 착해지려는 친구는 착한 친구와 사귀고,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길 원치 않는 친구는 친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영화입니다.
사람의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세속-육신-마귀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있다고 친구가 되지는 않습니다.
‘감동의 운동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아이들은 키가 작아서 달리기를 못 하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같이 걸어서 꼴찌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황금은 재산이고 유향은 기도이고 몰약은 육체의 절제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일시에 포기하게 할 수 있는 대상을
사랑할 때만 그 동료들과 함께 진정한 친구가 됩니다.
자기를 포기해야 사랑할 수 있는 이를 사랑하는 이들이 동방의 현자들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성탄 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대축일은 이 세상에 오신 그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을 보도하는 記事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말은,
하느님에 대해 알려 줄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외면하였고,
먼 異域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그분을 영접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서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하는 사람인지, 몇 명이며 어디서 왔는지,
베들레헴에 왔다가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할 것 중, 어느 하나도 복음서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박사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나서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후 500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敵意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들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씁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고 말하려는 마태오복음서의 의도가 엿 보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길을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고, 행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진흙, 곧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고,
懷疑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지위가 꾸며주는 온상에는 하느님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나은 지위를 얻어,
우월감을 가지고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온상을 떠나서 만나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마음을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한 이웃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에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우리의 보살핌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妄想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사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이나,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삶의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양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자기 안에 살아계시게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말씀과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 우리 삶의 기원이십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