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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제1독서 : 1요한 3,22―4,6
복 음 : 마태 4,12-17.23-25
그때에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24 그분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을 그분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25 그러자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오늘의 묵상>
김동희 모세 신부
오늘 독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는지 그러지 않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주요한 기준 하나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음을 믿고 고백하는가 그러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이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표현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참인간’이시라는 믿음의 여부입니다.
이를 믿고 고백할 때 우리는 성탄과 공현의 의미를 깊이 되새길 수 있습니다.
주님 공현 뒤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뒤 유다 광야에서 갈릴래아로 물러가시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하는 선포를 시작하십니다.
당신이 오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여기’ 이 세상에 왔음을 말씀과 행적으로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4,23)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러한 복음 선포가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4,16)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든 당신의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먼저 찾아가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구원이 내게 필요함을 아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회개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인식의 문제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배움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배움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릇이 바뀌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치다 다쓰루, ‘무지의 즐거움’ 중).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지도 않고 그릇이 바뀌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배움이 아니라는 말에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 본당에서 매주 성경 강의를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강의했던 것이 아닙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즉, 앞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공부하며 성경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공부하기 전과 비교하면 많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그릇이 바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배움은 우리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이 배움을 멈춰야 할까요?
아이들은 공부가 싫다고 말하고, 청소년은 공부가 지겹다고 합니다.
중장년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고, 노년이 되어서는 이 나이에 무슨 공부냐고 합니다.
그릇이 바뀌지 않으니 계속 똑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이 바뀌어야 행복할까요? 바뀌지 않아야 행복할까요?
자기 마음에 드는 새 물건을 사게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배움의 시간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배움을 통해 바뀌게 되는 나의 모습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똑같은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도파민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도파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배움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 다가설수록 새로운 배움이 계속됩니다.
그 새로운 배움으로 행복이 계속해서 자기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실제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고,
사람들이 데려온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고쳐주신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환자들만 치유하시는 의사의 역할만 하셨을까요?
항상 말씀이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구원의 길로 갈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그릇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알리게 됩니다.
우리의 그릇이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겨 알아가면서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빛의 축제일인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입니다.
오늘도 어제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빛의 공현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빛을 받으며, 빛 속에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빛을 증언하러 왔던 요한은 물러가고,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6-9)
오늘 복음은 이사야가 예언한 빛이 이미 도래했음을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 빛은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에서부터 비추어왔습니다.
질곡의 땅 갈릴래아, 이곳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당신 ‘사명’의 내용을 밝혀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먼저 이방인의 압박,
곧 죽음의 그늘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먼저 선포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은 어두움 속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으로 오시는 분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빛 안에서 걸어야 하는 첫걸음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회개하여라.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슈브,שב)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돌이키다’, ‘돌아오다’라는 뜻인데,
원래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자신이 ‘이전에 살던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에 거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전에 살던 집’이란 우리가 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우리가 이전에 행하던 행위나 지식까지도 포함합니다.
곧 우리의 행위와 앎으로부터 벗어나 새집으로 돌아와
하늘의 양식을 먹는 새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옛사람의 행위와 지식(옛집)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것)”(콜로 3,9-10)이라고 말합니다.
곧 ‘우상의 집’을 무너뜨리고 하느님의 집인 성전으로 돌아가
하느님의 양식인 말씀을 먹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죄악을 버리는 것보다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의 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만든 하느님의 처소(집)임과 동시에,
마지막 때에 다시 회복될 ‘새 예루살렘’(묵시 21,2)입니다.
‘회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호세 14,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게 하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요한 14,23 참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거처를 함께 하시면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 안으로의 전환이 곧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건설되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일,
곧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거처가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
주님!
당신께서는 어둠이 덮인 곳에 큰 빛을 비추셨습니다.
질곡의 땅, 핍박받는 이들에게 의로움의 빛줄기를 뿌리셨습니다.
오늘, 저희의 오류와 완고함을 뚫으소서.
어둠에 갇혀 있는 저희의 속박을 풀고, 묶인 이들을 해방하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밝혀주시어, 진리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우리의 관심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공적인 일을 시작하신 곳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육지 속의 섬이라 부르는 변두리, 소외된 땅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여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지역이었으나
가장 착취를 받던 곳이 또 갈릴래아 지방입니다.
대부분 땅은 부유한 사람들의 소유였고,
많은 사람은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억압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고통스럽게 착취 받는 땅이 갈릴래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첫 말씀은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4,17).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부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은 멀리 사라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나 하느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가르치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은 가르치는 일을 하는 교육기관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허약한 이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운영하고 사회복지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와 병원 복지시설은 이미 우리 마음에 설립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심은 부유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잘나가는 사람, 멋진 사람, 편안한 사람에게 더 쏠립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에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도둑질하는 사람이 회개했다면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길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든 어렵고 힘든 사람은 항상 있습니다.
힘겨워 지친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힘든 사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든 사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알아봐야 합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든 것은
그분에게 넘치는 사랑과 자비가 있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다면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또 하나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할 소명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자선 음악회를 마치고, 수익금은 장애인 학교에 전달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는 18세 이상인 학생과 18세 이하인 학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8세 이하의 학생들은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일반 학교에는 장애인 학생을 위한 학급이 따로 있어서 선생님들이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토요일에 장애인 학교에 와서 지낸다고 합니다.
18세 이상인 학생들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장애인 학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수익금 전달하는 날은 학생들의 성탄 파티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이사진이 선임되었습니다.
저는 장애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봉사자를 보았습니다.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는 목사님,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목사님,
그림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 음식을 준비하는 봉사자,
학생들의 머리카락을 잘라주시는 미용 봉사자,
학생들의 건강을 챙겨주시는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다운 증후군 학생과 자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일반 학생과 조금 다른 자녀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님이 있었습니다.
작은 정성이지만 장애인 학교를 도울 수 있어서 제게도 큰 기쁨이었습니다.
내년에도 자선 음악회를 한다면 그 수익금을 기꺼이 장애인 학교를 위해서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위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 논쟁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비인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과 같습니다.
교회와 다른 교리를 이야기한 사람은 이단이 되어야 했고,
교회는 처음으로 이단을 단죄해야 했습니다.
두 번째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공격입니다.
중동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는 막강한 힘으로 교회의 턱밑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는 십자가의 이름으로 싸워야 했습니다.
자비와 용서의 종교는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류와 역사 앞에 용서를 청했습니다.
세 번째 위기는 내부의 분열과 갈등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생겼습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같은 배를 탔던 교권과 왕권은 각자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도래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풍요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인류의 영성과 지성을 물질의 ‘틀’에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네 번째 위기는 신앙과 삶이 다른 겁니다.
교회의 전통과 유산이 사라지고, 세속화의 바람이 들어온 겁니다.
성소의 감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지 않고, 세속의 가치와 판단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가진 걸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나쁜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하여야 한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이 밝아지듯이,
빛이신 예수님 곁에 머물러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2025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으로 내 마음 안에 있는 거짓된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사랑을 담아 빛이신 주님께로 가까이 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세상을 변화시키듯이, 신앙 안에서 작은 실천은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힌 것을 아시고
갈릴래아로 가신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우선은 때가 되었을 때, 수난 하시기 위해서였고,
우리에게 유혹의 위험에서 피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는 주님께서 유혹을 두려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모든 유혹을 다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그분을 따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혹이라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피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 위험에 빠졌을 때는 이겨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유대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시려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셨고 이사 9,1-2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즈불룬과 납탈리 지파는 맨 먼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분노가 내렸던 사람들이 먼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영적 속박에서 풀려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가려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율법 아래에서도 그들은 많은 빛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과 많은 예언자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빛이셨고 그 빛이 그 지방을 비추고 있다.
여기서 큰 빛은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며 밝게 빛나는 복음의 가르침이다.
이 빛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16절)을
즉 무지라는 오류 속에 있는 백성들을 비추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16절)는 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드는 죄의 힘에서 오는 것으로
아직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그들을 이미 그 빛이 비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붙잡히자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17절)고 선포하셨다.
그 선포는 요한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참된 증인임을 알리고자 그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신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 상태는 바로 하느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상태이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루카 17,21)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악마에게 붙들린 육신을 풀어주시고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신다.
“사람들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24절)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질병은 육체의 병을 뜻하고, 고통은 영적 질병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병은 신성의 권능으로 영적인 병은 자비의 말씀으로 낫게 해 주셨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분에게 가서 죄의 용서를 청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께 용서받고 하느님의 참 자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수많은 은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그 누구에게든 ‘최초 활동 무대’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의 베이스캠프로
당대 가장 잘나가던 도시, 거룩한 도시의 상징 예루살렘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혹시 유다 지방에서 활동을 개시할 것인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부들과 농부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한적한 시골,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고, 종교적인 관습이나 전통, 신앙생활에 있어서
유다 지방과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던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깡촌 갈릴래아, 카파르나움을 선택하신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교만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휘황찬란, 위풍당당한 당대 대도시들의 위선과 타락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 작고 낮은 도시에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작고 낮은 도시에서 소박하게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잔뜩 부풀린 사람들, 자칭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서로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에게 크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성탄 대축제 기간을 끝내고 이제 다시 한번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회개해야겠습니다.
회개할 때 얻게 되는 은총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작은 것도 아름답고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고통이나 십자가도 은총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회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이 온통 기쁨 꺼리로 가득한 축제의 장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상처나 고통을 안긴 이웃들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새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력들, 아주 좋은 회개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한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하셨다가
철퇴를 내리시는 징벌의 하느님의 아니라,
돌아갈 때마다 활짝 팔을 벌리시며 또다시 안아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고통스럽고 힘겨웠던 지난 삶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니라
사실은 선물이요 축복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세상, 갖은 결핍과 죄투성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란 존재, 흙 부스러기처럼 나약하고 머리칼보다 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애지중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나 같은 중죄인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안심하고 기쁘게 지상 생활을 엮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에?’가 아니라
‘저 사람도 당연히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하는,
그래서 그를 귀히 여기고 그라는 존재 안에 깃들어계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찾아 나서는 노력이 회개입니다.
꽉 막힌 마음 여는 법: 작은 틈새 찾기
전삼용 요셉 신부
어떤 분이 요즘 믿음에 불타 그 깨달음을 타인에게 전하려 하는데
거기에서 반작용이 너무 커서 조금은 힘이 빠지는 상황입니다.
그분에게 저는 ‘너만 잘났냐?’라는
반발의 마음이 들지 않게 살살 다가가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이 이야기를 해 보아야겠습니다.
가끔 고해성사를 주다 보면 부모에게 떠밀리다시피 들어오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한 번은 한 청년이 들어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고해본 지 얼마 되었는지, 죄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꽤 오래 냉담하던 입이 반쯤 나와 있던 그 청년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진짜 죄 없어요.”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십계명을 읊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 사람은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빛 자체이십니다. 빛이 의미 있는 곳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둠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죄가 없다고 굳게 믿게 하는 무언가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 임언기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주려고 간암 말기 환자를 찾아갔을 때도
그는 고해성사를 거부하며 “나 죄 없어!”라고 외쳤습니다.
임 신부님은 속으로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하며 돌아섰습니다.
꽉 막혀 말해봐야 소용이 없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옷 유다처럼 완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이 어둠임을 알지 못하여 스스로 빛을 거부해
목을 매 자살하게 된 상황이 아니라면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완전히 빛을 차단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빈틈을 찾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사탄만이 빈틈을 주지 않습니다.
저도 나름 잘 산다고 교만해질 때가 많습니다.
이때 저의 빈틈을 공략하는 말들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고해성사를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
강론 때 조금 합당하지 않은 농담을 하는 것,
아주 가끔이지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새벽 미사를 했던 것,
감기 걸리고 마스크 안 쓰고 미사 하는 것 등입니다.
만약 신자들이 “신부님은 회개하셔야 해요!”라고 말하면
저도 “본인이나 잘하세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어린 관심으로 그러한 것들을 말해줄 때는
‘아, 바꿔야겠구나!’라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가가야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비극은 잘못된 ‘믿음’ 때문에 시작되고
그 믿음을 파괴할 작은 틈을 찾아 누구도 빛을 넣어주지 못한 데서 비극으로 끝납니다.
예를 들어 ‘멕베스’를 생각해 봅시다.
맥베스의 비극은 세 마녀의 예언을 맥베스가 맹목적으로 믿고,
주변의 누구도 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하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로 전개됩니다.
마녀들은 맥베스에게 글래미스의 영주, 코더의 영주,
그리고 미래의 스코틀랜드 왕이라는 칭호로 인사를 건넵니다.
이들의 애매모호한 말은 맥베스의 마음에 야망의 씨앗을 심어줍니다.
마녀들의 말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맥베스는 이 예언을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가 코더의 영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이 신빙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를 들은 레이디 맥베스는 그의 야망에 불을 지피며,
맥베스가 직접 행동해 던컨 왕을 살해함으로써 예언을 이루라고 부추깁니다.
만약 레이디 맥베스가 던컨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나,
던컨이 친척이자 집에 초대받은 손님임을 상기시켰더라면,
맥베스의 결심은 약화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조언은 맥베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운명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맥베스는 예언에 대한 확신으로 인해 이성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는 마녀들의 반쿠오 후손에 대한 예언 때문에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는 반쿠오와 그의 아들 플리언스를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을 암살하려 하지만,
반쿠오는 살해되었지만, 플리언스는 도망칩니다.
누군가 마녀들의 말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예언이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더라면,
맥베스는 자신의 행동을 재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언의 확실성을 믿는 그의 집착은 그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맥베스의 불안감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마녀들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녀들은 새로운 애매한 확신을 제공합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를 해칠 수 없다.”라는 말과
"버넘 숲이 던시넌 언덕으로 움직일 때까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러한 말은 맥베스를 더욱 대담하게 만들며, 그를 파멸로 이끄는 자만심을 심어줍니다.
누군가 숲이 인간의 위장으로 인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점이나, 제왕절개로 태어난 사람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로 간주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논리적 가능성을 지적했더라면,
그의 자만심은 누그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맥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맥더프 가족을 몰살시키는 등 더 많은 악행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한편 레이디 맥베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미쳐가며, 결국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의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말콤과 맥더프가 이끄는 군대가 버넘 숲에서 나뭇가지를 잘라 위장하며 던시넌 성으로 진격하자,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는 마녀들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고, 맥베스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믿음을 굳게 유지합니다.
맥더프가 자신이 제왕절개로 태어났음을 밝히자, 맥베스는 마침내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습니다.
마녀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은 그의 행동과 의미를 성찰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맥베스가 맥더프에게 죽임을 당하게 만듭니다.
맥베스의 비극은 마녀들의 예언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덕적 논리를 제시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제어되지 않은 야망과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맥베스를 파멸로 몰아넣었고, 그의 길에는 파괴와 비극만이 남았습니다.
꽉 막힌 사람을 설득하려면 그가 믿는 믿음의 빈틈을 공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해봐야 이미 세 마녀를 믿고 있는데
어떻게 그 생각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방법을 되새겨야 합니다.
그녀는 하느님은커녕 사람에 대한 신뢰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도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녀의 믿음을 조금씩 허뭅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남편과 살아도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참 생명의 물을 주는 분이 당신임을 알리십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면 그녀는 귀를 더 막아버렸을 것입니다.
항상 꽉 막힌 사람은 그 사람의 믿음을 깰
아주 작은 것부터 찾아서 그 안으로 빛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어둠의 믿음을 깰 작은 빈틈으로 들어오는 믿음의 빛으로
자신이 어둠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차차 빛을 받아들이게 되어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