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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1. 유다가 바벨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정복당합니다.
1) 바벨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다니엘 1장 1~2절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 와서 포위하고. 주께서 유다의 왕과 하나님의 집의 물품들의 끝으로부터 그 손에 주시고 그가 그 물품들을 그의 신(神)들의 보물의 집에 가져오게 하였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네부카드네차르)는 바벨론의 왕 이름인데, 우리 성경에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로 번역됩니다(왕하 24:1).
네부카드네자르는 무적으로 일컬어지던 아시리아를 쳐부수고 난 후에 이집트의 군대마저 꺾고 당시 중동의 최강자가 된 정복자였습니다.1)
그리고 그에게 유다의 왕 으호야킴이 3년을 종이 되어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으호야킴은 3년 후에 그에 반대하여 반역하였습니다(왕하 24:1).
네부카드네자르가 유다를 전진기지로 이집트를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이집트의 필사적인 방어로 공격에 실패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2)
그러나 바벨론은 병력의 손실을 막기 위해 작전상 후퇴한 것일 뿐이며 이집트가 바벨론의 공격을 막아낸 것은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에 병력을 보내 유다를 도울 힘이 전혀 없었지만, 바벨론은 유다를 공격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여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으호야킴은 네부카드네자르에 반대하여 반역합니다(왕하 24:1). 으호야킴은 이집트파의 말을 듣고서 반역하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3)
유다 왕의 반역은 바벨론 왕의 분노를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4) 그가 유다의 예루살렘 도시에 침입하여 성벽을 포위하였습니다(단 1:1).
야훼께서 유다의 왕과 성전 물품의 일부를 바벨론의 왕에 주셨습니다. 바벨론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물품들을 꺼내었으며 바벨론의 그의 신(神)들의 보물 창고에 가져가 거기 두었습니다(단 1:2).
2)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선택되어 훈련을 받았습니다.5)
다니엘 1장 3~7절에 “그 왕이 그의 관리들의 우두머리에게 말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부터 그 왕위의 씨로부터 그 귀족들부터 데려오게 하니. 그들에서 모든 흠이 없으며 시각의 좋은 자들과 모든 지혜로 지혜로우며 지식과 학문을 알고 왕궁에 서 있기에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을 데려오고 칼데아 사람들의 책과 혀를 그들에게 가르칠 것을 말하였고. 그들에게 그 왕이 그 왕의 맛있는 음식과 그의 축연들의 포도주에서부터 그의 날 안에 날의 것을 계산하고 3년 동안 그들을 성장하게 하고 그것들의 끝으로부터(at the end) 그들이 그 왕의 앞에 서 있을 것이고. 그 안에 유다의 자손들로부터 다니엘 하나냐 미샤엘과 아자르야가 있고. 그들에게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가 이름들(new names)을 놓았고(gave), 그가 다니엘에게 벨트샤차르 하나냐에게 샤드라크 미샤엘에게 메샤크와 아자르야에게 아벧네고라고 놓았고.”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 왕 정책이 무엇이냐 하면, 끌고 간 똑똑한 소년들 있잖습니까? 소년들에게 바벨론의 학문과 바벨론의 언어를 공부시킵니다(단 1:3~4).
소년들을 공부시킨 후 그들 중에도 특별히 더 뛰어난 소년들을 뽑아서 그들을 바벨론의 높은 지위에 올려서 인재로 사용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인재로 사용할 때 그냥 똑똑하다고 데려다가 사용하면 안 되니 그 소년들을 바벨론 정신으로 가르쳐 바벨론 사람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국에서 잡아 온 소년들을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없애 버리고 포로로 끌어온 소년들을 바벨론 사람처럼 만드는 정책을 세운 것입니다. 바벨론 정부에서 사용할 인재들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바벨론의 왕은 그들을 3년 동안 가르치고 자라게 하였습니다(단 1:5). 그 소년들이 바벨론의 왕을 위해서 일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 소년들을 가르치면서 왕은 좋은 음식을 먹여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관리가 소년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었으므로 그 관리는 그 소년들을 잘 성장시켜야 하였습니다.
그 소년들 가운데 “다니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고(단 1:6), 6절에 유다의 다니엘을 비롯하여 소년들 4명의 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Daniel)은 “신(神)께서 심판자시다”입니다. “심판하다”라는 “딘”과 “신(神)”이라는 “엘”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 책에서 다루는 예언자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에스겔에 언급되고 있습니다(겔 14:14, 28:3). 그는 노아와 욥과 함께 의인으로 언급됩니다. 그리고 또 다니엘은 은밀한 것을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언급됩니다(겔 28:3).
그런데 소년 다니엘이 딱 보니까 그들에게 매일 고기반찬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고기반찬이 어떤 고기냐? 정육점에서 사 온 고기가 아닙니다.
바벨론의 신(神)들 있잖습니까? 다른 신(神)들에게 먼저 제사 드리고, 사람들이 설날에 제사상에 음식을 올려놓으면 조상들이 와서 먹습니까? 못 먹잖습니까? 제사 드리고 나서는 그 음식을 사람들이 먹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神)들에게 제사 드린 후에 그 소년들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유대 나라에 살던 때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섬긴 사람이었는데 다른 신(神)들에 제사 드린 음식을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3) 다니엘은 채소들만 먹을 것을 그의 마음에 두었습니다.6)
다니엘 1장 8~9절에 “다니엘은 왕의 음식과 그 축연의 포도주에 의해 그가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할 것을 자신의 마음에 놓고, 그가 관리들의 우두머리부터 자신을 더럽히게 만들지 아니할 것을 찾고. 하나님께서 그를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 앞에 자비와 동정에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제사 음식을 먹으면 안 되겠다 결심하고 자기를 교육하고 기르는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에 가서 요청한 것입니다. “관리님, 저희가 제사 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까 채소만 먹게 해 주세요.”
사람이 하나님께 좋게 평가될 때에 사람들에게도 좋게 평가될 것이니, 우리는 사람에게 아부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합니다(시 106:46).
그가 말하기를, “너희의 양식과 마실 것을 계산하신 왕을 두려워하니, 그 젊은이들로부터 초조해하는 너희의 얼굴을 그가 보실 것이 무엇이냐, 나의 머리를 그 왕께 위험에 빠뜨리노라.”라고 하였습니다(단 1:10).
왕이 그들을 잘 먹여서 잘 키우라고 했는데 그들의 얼굴이 초조해지면 그 관리들 우두머리의 머리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자기 목이 잘려 자기 머리가 높은 곳에 매달리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가 계산한 그 관리인에 다니엘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종들을 열흘을 시험하시고, 채소로부터 먹고 물을 마실 것이며. 우리의 외모와 왕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의 외모가 보일 것이고 당신의 종들에게 당신이 보시는 것처럼 행하옵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이 말에 듣고 그가 열흘을 시험하였습니다(단 1:11~14).
4) 그들의 외모가 다른 모든 젊은이보다 좋았습니다.7)
다니엘 1장 15절에 “왕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의 모두로부터 그들의 외모가 좋고 살찐 육체인지라.”라고 하였습니다.
3')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계속 채소들만 먹었습니다.8)
다니엘 1장 16~17절에 “관리인이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거하고. 젊은이들에 하나님께서 학문을 주시고, 문서와 지혜에 총명하게 하시고, 다니엘은 환상과 꿈들에 이해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 관리인이 그 소년들의 식단에서 맛있는 음식과 포도주를 제거하고, 그 소년들의 요청대로 채소만 먹을 수 있게 허락해 주었습니다(단 1:16).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학문을 주시고 문서와 지혜에 총명하게 하시고, 다니엘은 환상과 꿈들에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단 1:17).
2')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선택되어 왕을 모셨습니다.9)
다니엘 1장 18~20절에 “그리고 왕이 말한 날들의 끝으로부터 되었고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가 그들을 네부카드네자르 왕 앞에 들어가게 하고. 그 왕이 말하고 그들처럼 발견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 왕 앞에 서 있고. 그들로부터 그 왕이 찾은 이해의 지혜의 모든 일(every matter) 가운데에 그가 왕권 안에 모든 마술사와 마법사들 위에 10배를 발견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1') 다니엘은 고레스 왕에게 하나의 해까지 있었습니다.10)
다니엘 1장 21절에 “다니엘은 고레스에 하나의 해까지 있었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바벨론이 미국처럼 힘센 나라여서 강하였는데 어느 날 하루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페르시아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제국 시대에서 페르시아 제국 시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보통 왕권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면 관리들도 다 물갈이되게 됩니다. 새로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물갈이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왕국 자체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바뀐 것인데, 왕이 바뀌고 왕국이 바뀌었어도 총리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멸망하였으나 다니엘은 페르시아 왕국에서도 총리였습니다. 그만큼 다니엘은 지혜로운 자였고 왕들이 다 다니엘을 아끼는 것입니다. 이 인재를 잃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시대에 등용된 사람이었는데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 등용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1장은 바로 이런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오늘날을 디지털 바벨론 시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바벨론을 “세상”이라는 뜻으로도 말씀하는데 이 세상은 바벨론이고 이 세상의 정신은 바벨론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바벨탑 정신을 계승한 바벨론 정신은 곧 선악과를 따먹은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 어떤 정신입니까? 뱀이 여자에게 와서 뭐라고 유혹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라고 교만을 부추기는 것이 바벨론 정신이며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바벨론 정신인 교만을 품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정신은 우리가 하늘에 구름까지 닿는 탑을 쌓자 우리가 그런 탑을 쌓아 올리자는 교만한 정신이고 세상 정신이었습니다. 이 바벨탑 정신, 바벨론 정신이 인류 역사의 세상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원어에 의하면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바벨”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바벨 도시가 바벨론 왕국이 되고, 나중에 바벨론 제국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 없이 사는 교만한 정신이 바벨론 정신인데 이 세상은 바벨론이고 오늘날은 디지털 바벨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을 “디지털 시대”라고 합니다. 저희가 손가락이 열 개잖습니까? 그런데 디지털 나라에는 손가락이 두 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1과 0으로만 구성된 나라가 디지털 나라. 컴퓨터 나라입니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바벨론 유배지에서 사는 것입니다.
“미디엄”(medium)은 “중간”을 뜻하며 복수형은 “미디어”(media)인데,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중간체, 즉 “매체(媒體)”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어원적으로 “중앙의”, “중간의”를 뜻하는 영어 어근 “mid”와 관련됩니다.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사회적인 매체)는 웹 2.0시대의 도래로써, 타인과의 관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개방화된 온라인 플랫폼입니다.11)
아이들의 영적 갈망이 소셜 미디어에 넋을 빼앗김으로 사라집니다.12)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적 존재로 만드셔서 하나님을 찾게 만드신 것인데, 아이들이 휴대전화를 보며 정신을 빼앗겨 하나님 찾을 시간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직사각형의 작은 화면이 자체로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하지 않으면 디지털 세상이 우리의 시간을 빼앗고, 삶의 더 중요한 것들을 추구할 기회를 누릴 수 없게 방해할 것입니다.13)
젊은이들은 손안에 있는 작은 화면을 상담사, 교사, 강사로 씁니다. 이 화면은 사람을 토끼 굴보다 많은 곳으로 이끌 수 있는 문입니다.14)
이 디지털 도구는 세상에 완벽하게 접근 가능하다는 신기루를 줍니다. 이런 기술 문명이 모든 곳에서 사람의 일을 더 쉽게 만들고 있습니다.15)
고대의 바벨론은 이교 문화의 중심지이자 자극적이며, 다문화적이고, 모든 부와 권력을 쟁취하려는 인류의 욕망이 가득한 실제 장소였습니다. 다문화적인 디지털 바벨론도 인류의 부와 명예가 우상인 장소입니다.16) 세상 사람들은 부와 쾌락과 권력을 우상으로 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즐거운 살아갈 것인가?
사람들의 욕망이 가득한 그런 세상이 바로 바벨론 세상이었던 것인데, 오늘날도 다르지 아니하고, 이 세상 정신 그 자체가 바벨론 정신입니다.
내가 서울대 들어가야지 이 경쟁 사회에서 높이 올라가고 부자가 되고 좋은 남편 만나서 편하게 살게 되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욕망을 이룰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러면,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이런 정신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서울대 다니고 좋은 직장 다니고, 연봉 많이 받고, 부자가 되고, 좋은 남편이나 아내 만나서 즐겁게 살고, 높은 권력을 가지고 살아야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과 안 다니는 사람과 어떤 점이 다른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모든 인류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러한 바벨론 정신, 세상 정신을 가지고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상은 세상에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17)
고3이 되면 ‘교회 1년 쉬고 대학 들어간 다음에 교회 열심히 하면 돼!’, 그런데 대학 입학하고 교회 돌아오면 다행인데 안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대학교 들어간 후에 보니, 몰랐던 여러 문화를 접하거든요. 지금까지 학교 다니고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여서 세상 문화를 몰랐는데 대학교에 들어가서 보니까 알지 못하였던 다양한 문화가 널린 것입니다. 내가 못 보던 문화, 그것 즐기느라고 교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 교회 다닌 사람은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첫 번째 부류는 탕아며, 두 번째 부류는 유랑민, 세 번째 부류는 출석자, 네 번째 부류는 역동적인 제자입니다.
탕아는 ‘나는 이제 기독교인이 아니에요’라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고 유랑민은 한 달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사람인 것입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에 교회 나오고 몇 달에 한 번 교회 나오는 사람입니다.
‘당신 종교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면 ‘제 종교는 기독교에요’라고 하나 정작 교회는 몇 달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이 바로 유랑민과 같은 자입니다.
출석자는 매주 교회에 출석할 수 있으나, 예배 마치고 끝인 자입니다. 교회는 주일에 습관적으로 나오고 물어보면 기독교인이라고 대답하는데 교회에 출석하는 것 외에는 불신자들과 거의 다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나 매주 예배드려요’라고 말하여도, 그는 교회 출석만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매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중에 참 제자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서울대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공부 열심히 안 해도 되는구나!’, 이런 말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높아지고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충실하게 살아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제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고 매주 예배드린다면서 세상 정신을 가지고서 사는 사람들, 바벨론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소년들은 매우 많았는데 그들은 어땠습니까? 소년들은 바벨론의 왕이 먹으라고 하면 먹고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고 바벨론의 정신을 열심히 배워서 그렇게 물결이 흘러가듯이 산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문화를 아무 생각 없이 받고 바벨론의 정신에 동화되어 바벨론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직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그렇게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물결이 흘러갈 때 죽은 물고기는 물결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게 되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결이 흐르는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정신으로 사는 때에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세상 정신이라는 물결을 거슬러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바벨론 정신이 기준이 아닙니다. 네모난 휴대전화 화면이 대답하여 주는 답이 우리에게 진리가 아닙니다.
무엇이 우리의 기준이며 무엇이 우리의 캐논(canon), 즉 표준입니까? 우리의 캐논은 바로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곧 우리의 캐논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세상 정신은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역동적인 믿음, 즉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정신은 부모 세대와 자녀들 세대를 나누고 남자와 여자를 나누고 ‘세대 차이가 나서 부모님하고 할머니하고 말 안 통하네.’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예루살렘에서 산 반면 자녀들은 바벨론에서 살고 있습니다.18) 우리의 자녀들은 교회의 문화와 세상의 문화 사이에 끼여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나이 차이가 결코 문제가 아닙니다. 50살 차이가 나든, 60살 차이가 나든, 나이는 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문화가 다르니까 말이 안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씀들을 우리의 마음 위에 놓고 마음에 새겨야 하며 우리의 손에 표시에 묶고 우리의 미간에 표에 있어야 합니다(신 11:18). 그것들을 자손들을 그것들에 대해 말하기에 가르쳐야 합니다(신 11:19). 자녀에게 성경을 교육할 때 문화 차이가 안 나고 세대 차이가 안 납니다.
사람이 성경을 기준으로 삼을 때 세대 차이가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늘 바뀌는 세상 정신이 기준이 되니까 세대 차이가 나는 것이죠.
좌파 선생들이 ‘여자도 평등해야지’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치니까, 남녀 차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그렇게 나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경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때, 이 모든 세대 간의 장벽, 남녀 간의 장벽, 그 밖의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언어의 혼잡을 넘어 대화가 통화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로 대화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나 자기 동호회 사람들하고만 대화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하고 대화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때 모든 장벽이 무너지게 될 것이고 부모와 자녀들이 대화가 통하고 남편과 아내가 대화가 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삶을 사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한홍, 『왕들의 이야기 2』 (서울: 두란노, 2008), 392.
2) 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94.
3) 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94.
4) 한홍, 『왕들의 이야기 2』, 394.
5) David A.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류근상 역 (고양: 크리스챤출판사, 2003), 412.
6)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412.
7)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412.
8)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412.
9)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412.
10) Dorsey, 『구약의 문학적 구조』, 412.
11) https://www.google.com/search?q=%EC%86%8C%EC%85%9C%EB%AF%B8%EB%94%94%EC%96%B4+%EB%9C%BB&sca_esv
12) David Kinnaman·Mark 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조계광 옮김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0), 13.
13)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13-14.
14)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15-16.
15)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17.
16)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18.
17)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19.
18) Kinnaman·Matlock, 『디지털 바벨론 시대의 그리스도인』, 20.
첫댓글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잠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