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다닐 때였든가.
국어책에 이런 속담이 소개된 적이 있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
어릴 적에 생각하기로는, 얼마나 무식했으면 낫을 놓고도 기역자를 모를까?
국어책에까지 나왔으니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마도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많이 모순된 속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들어볼 것이다.
첫째, 낫을 놓고 낫이 ‘ㄱ’자를 닮았다는 것을 알면
이 사람은 이미 ‘ㄱ’자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역자를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을 비유하는 속담으로서는 이미 가치를 상실했다.
기역자를 아는 것과 낫의 모양이 기역자와 같음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보는 사람에 따라서 낫은 ‘ㄴ’자로 볼 수도 있다.
낫을 놓기에 따라서 ‘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지적하기 위해 그 낫에 대한 ‘ㄱ’자가 비유로 동원됐다면, 그 낫은
‘ㄱ’자라는 한 가지 모양 이상을 나타내서는 안 된다.
기역자 뿐 아니라 니은자로도 볼 수 있으니, 낫은 적당한 비유 대상이 아니다.
셋째, ‘ㄱ’자를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낫이 ‘ㄱ’자를 닮았다는 데까지 사람들의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있다.
낫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무디어 있다고 생각도 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벨 염려는 없을까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낫을 보면서 기역자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낫을 놓고 기역자를 생각해내야 할 이유 또한 전혀 없다.
낫을 놓고 기역자인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엔 천재 아인슈타인도 끼어있을지 모른다.
넷째, ‘ㄱ’자를 모르면 낫이 아닌 ‘ㄱ’자를 갖다 놔도 ‘ㄱ’자를 알 수 없다.
기역자를 모르는데 낫을 갖다 놓은들 그것이 기역자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
‘ㄱ’자를 아무리 잘 표현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ㄱ’자 보다 ‘ㄱ’자를 잘 표현한 ‘ㄱ’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속담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속담이 갖는 내부 갈등의 문제 때문에 거의 자멸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