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대한 칼럼을 읽고서 필자에게 자신의 전생을 물어 보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물어 보신다고 모두 다 알려 주지는 않는다. 알아야 할 이유가 있는 분, 즉 인연이 있는 분에게만 전생을 일러준다. 고통스러운 현생이 지난 생의 업보에 따른 것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 생에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깨달음으로 업을 끊어버리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해준다.
Y씨는 정말 운이 없는 사나이였다. 태어나자마자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양친이 모두 죽고 홀로 남았다. 그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상하게 그러나 그를 돌봐주는 친척마다 몸이 아파 일찍 죽거나 문제가 생겼다. 그 바람에 결국 고아원에 맡겨졌다.
시설이 좋은 고아원도 많지만 하필 그가 간 곳은 악덕 고아원 중 하나였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아이들을 강제로 노동시켰다. 매질도 심하게 했다. 온갖 고생을 다하다 뜻이 맞는 원생끼리 집단 탈출해 사회로 나왔다. 그에게는 그러나 사회도 만만치 않았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자격을 따내는 동안 온갖 노동이란 노동은 다했다.
그에게 한 가지 재주가 있다면 10대 때 우연히 배운 도배일이 전부였다. 전국을 누비며 하루 종일 목이 부러져라 도배지에 풀을 붙여 생계를 이어갔다. 결국 같은 일을 하는 아내를 맞아 살림도 차렸다. 한동안은 정말 행복했다. 식구도 늘었고 보금자리도 장만했으니 더 이상의 불행은 없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또 불행이 찾아왔다. 어느 날 도배를 하던 중 천정에서 석면가루가 떨어져 왼쪽 눈에 들어갔다. 눈이 약간 충혈되고 간지러웠지만 병원 갈 시간과 돈이 없었기에 무심코 넘어갔다. 설마 가루 좀 들어갔다고 별일 있겠나 싶었는데 그만 실명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불행은 아기가 없었다는 것. 아기를 낳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석면 뜯는 일을 했던 것이 불임의 원인인 듯 했다. 2세를 포기하고 부부끼리 의지하고 살던 중 세 번째 불행이 찾아왔다. 그만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었다.
“아내가 허망하게 떠난 뒤, 제 수중엔 땡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아내의 병원비로 모아둔 돈마저 모두 날리고 말았죠.” 그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법사님, 지하철 한쪽 벽에 ‘거센 파도는 일등 항해사를 만든다’는 문구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말만 보면 정말 울화통이 터집니다. 도대체 저는 얼마나 훌륭한 일등 항해사가 되려고, 살면서 거센 파도만 줄기차게 맞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쓴 장문의 편지를 전달하며 “희한하게도 죽을 마음은 안 생겼습니다. 요즘 걸핏하면 자살하는데, 그럼 저 같은 사람은 벌써 1000번도 넘게 자살했을 겁니다”라고 했다. 그의 구명시식 부탁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기구한 Y씨의 업장은 전생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아무에게나 전생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필요한 사람은 꼭 알아야 한다. Y씨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전전생(前前生)에 살수(殺手), 즉 사형수의 목을 베던 사람이었다. 1905년 참형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조선은 사형을 행할 경우 참형을 실시했다. 엄연히 살수로서 자신의 직분을 다한 것이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수많은 이의 목숨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업은 너무도 컸다.
일제 때 환생했지만 사형장의 그늘을 벗어나진 못했다. 이번엔 교도소 사형집행관이었다. 이렇듯 무의식중에 중대한 업을 지었던 전생의 비밀을 말해주자 그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늘 꿈을 꾸면 목을 맨 사람들이 천정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왜 그런 끔찍한 꿈을 꿨지 의문이 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한동안 Y씨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전생에 지은 업으로 마흔 다섯 해 동안 숱한 고난을 겪었던 그는 영적으로 크게 성숙해있었다. “극한 괴로움은 큰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제 인생의 일등 항해사가 되십시오.” 얼마 후 Y씨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수행을 위해 산으로 떠난다는 짧은 전갈을 남기고 속세를 떠났다.
전생의 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한 번에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다음 생이 조금 나아질 뿐이다. 나아지는 것이 반복되다 보면 해탈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안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H씨는 특이한 전생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예순살에 가까운 그는 한국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한국 역사와 문화에도 박식한 호남이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갈 때마다 보디가드처럼 내 곁을 지켜 주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한 계기로 전생의 자신을 위한 구명시식을 청해왔다.
1995년 고베 대지진 때 현지에 살고 있었지만 극적으로 살아났던 그가 위암으로 위의 7분의 3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게 된 것. 평소 담배, 술, 커피, 콜라 등 몸에 해롭다는 것은 일체 입에도 안 댔기에 위암에 걸렸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더군다나 철저하게 모든 것을 금욕하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
수술 후, 나는 H의 병문안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건축업에 종사하며 황소 같은 힘을 자랑하던 그가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는 멀리서 온 나를 반갑게 맞으며 내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선지 유쾌한 농담을 건넸다.
“법사님 말씀대로 전생에 사무라이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수술한 부위를 보여줬다. 배 위에 크게 댄 거즈와 붕대를 보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심각한 상황에 웃음이 터진 이유는 평소 둘이 주고받던 농담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는 심각하게 자신의 전생을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로 할복으로 해서 죽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토목업에 종사하는 평상시엔 상당히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또 만능스포츠맨으로 운동을 할 때면 무사 같은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할복해서 죽었다는 말에 놀랐는지 “저는 그렇게 죽는 일은 없을 겁니다”라며 허허 웃었다. 그는 그러나 오래 전부터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오래된 성곽에 무릎을 꿇고 배에 천을 감은 뒤 큰 대도로 자신의 배를 가르고는 푹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느낌이 너무도 생생해 배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깬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전생처럼, 또 꿈처럼 배를 가르게 된 것이다.
“전생에 할복해서 죽었다고 현생에도 그렇게 죽으란 법은 없습니다”라고 나는 그를 위로했다. 고베 대지진 때 극적으로 살아난 것처럼 위를 제거한 대수술에도 그는 오뚝이처럼 살아났다. 이후 배에 상처가 난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전생을 궁금해했다.
만약 사무라이였다면 어느 성의 누구를 위해 일했던 무사이며 전생에 어떤 연유로 할복을 했는지 소소히 알고 싶어했다. 또 전생에 자신의 칼에 쓰러진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원했다.
나는 일본에서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며 암 투병을 하고 있는 H를 위해 한국에서 구명시식을 올려줬다. 그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며 차가운 칼로 적을 제압하던 사무라이였다. 자신이 지키던 성이 함락되자 주인과 함께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음이 밝혀졌다.
보통 전생의 흔적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처럼 그러나 수술 등 후천적으로 갖게 되기도 한다. 비록 전생의 상흔은 깊게 남았지만 그가 곧 쾌유되리라 믿고 있다. 구명시식 결과 그의 명은 전생과는 달리 길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