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또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호불호가 갈리는 우남 이승만 (1875년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입니다.
그는 임시정부 시절 자신이 대통령이 아니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윽박을 질러 결국 초대 대통령을 지내며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는 단 한번도 온 적이없고 국내외에서 백성들이 임시정부에 보낸 독립자금으로 미국 호텔방에서 호위호식
하며 지냈고 당시 고가였던 자동차를 타며 스피드를 즐기다 범칙금을 많이 물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승만이 쓴 하루 식비와 호텔 사용비
를 합치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의 1주일 식량치를 확보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독립자금으로 얼마나 사치를 부리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써 최악의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통치청원서" 제출한 것
입니다. 이에 단재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없는 나라까지 팔아 먹으려 한다"며
신채호
분개 했고 곧바로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탄핵 된 대통령이 되고 임시정부는
신채호와 이회영을 중심으로 한 창조파와 안창호,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개조파로 나뉘게 됩니다. 현상유지파 김구가 없었다면 임시정부
는 이승만에 의해 자멸할뻔 하게 됩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권한을 잃고 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다 이후 하와이에서 의형제인 박용
만과 대립하여 조선인들 끼리 박용만파와 이승만파를 만들어 지역감정을 일으킵니다. 이에 안창호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며 당대의
지성인인 안창호 입에서 "이승만은 미치광이다" 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고 박용만은 "이승만과 같은 작자가 나라의 지도자가 된다면 그보
다 불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며 독설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는 독립후에 1945년 9월 7일 여운형의 요청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과 가족
조직하지만 당시 정치적 거물들이였던 김구(한국 광복군, 임시정부), 여운형(건준), 김규식(미군정), 박헌영(좌익세력)등에 비해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약해 현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을 조직한 친일파들과 북한에서 탄압받아 월남한 기독교인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닦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당시 사진
같은 해 12월 좌익과 우익의 대립을 폭발하게 만든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립니다. 미국과 소련은 일정기간 신탁통치 뒤 조선의 정부수
립과 자유 선거를 지지 하였으나 미국은 즉각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려고 한다는 동아일보의 오보(세계 3대 오보중 하나로 지정
됩니다.)로 좌익과 우익 둘다 반탁운동을 전개하였고 소련은 민심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회의 내용을 전문 공개하며 미국
과 같은 입장이라 밝히자 좌익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아일보의 내용만 알고 회의 내용은 전혀 몰랐던
민중들은 좌익을 비난하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에 반해 우익은 반탁, 반소련 입장을 확고히 하며 반공 = 애국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독립군이 대부분이였던 좌익들을 빨갱이라 탄압 하고(이때 임시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독립군 고문 담당이였던 친일파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분개하여 월북하게 됩니다.) 친일파가 대부분이였던 우익은 애국자로 변하게 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는 자신이 평생에 가장 후회한다는 반탁에 가담하여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김구에게
찾아가 반탁을 하는것은 좌우합작에 반대되어 민족이 분열될 수 있다고 설득하지만 김구는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계속 반탁을 지지
하게됩니다. 다음해 1946년 3월 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미국은 좌우합작 단체에 의한 조선의 정부 수립을 내세웠고, 소련은
찬탁 단체에 의한 정부를 수립을 내세워 서로의 입장차가 생기자 결국 5월에 휴회하게 됩니다. 이때 이승만이 친일파와
정읍발언 당시 이승만
기독교인들을 앞세워 전라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우자며 정읍발언(1946. 6)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족분단의
위기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에 대해 좌,우익 사이에서도 절대 발언하지 않았던 민감한 사항이였지만 이승만은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미국에게 관심조차 못 받자 이승만이 위기감에 했다는 설도 있습
니다.) 이에 여운형과 김규식이 민족 분열 위기를 느껴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우합작운동(1946. 7 ~ 1947. 12)을 벌이고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여운형이 직접 북한에 가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 3월 트루먼독트린에 의해 냉전이 시작되어 좌우익 또한 사이가 벌어지고
5월에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여운형의 암살(1947. 7)로 실패하게 됩니다. 이후 조선의 문제는 유엔 총회(1947. 11)에 넘어가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정하지만 북한의 거부로 민족분열의 분위기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김구는 반탁입장을 철회
하고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 남북협상운동(1948. 2~ 4)을 전개하지만, 남한에서는 이미 5월 10일 제헌국회로 불리는 단독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주도에서
방북하는 김구
남한 단독선거 반대 평화 시위를 벌였고 이를 막기 위해 이승만이 보낸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과 경찰의 좌익분자 색출 명분하에
무차별 민간인 테러를 가하자 제주도민들이 분노하여 민중봉기를 일으킵니다. (1948년 4월 3일 ~ 1950년 초)이에 미군정은 군대를 보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여 당시 제주도민 13만명 중에 6~7만명이 학살당하는 최악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기 전까지 정부에서 쉬쉬 되어 왔습니다.) 이때 4.3이라는 숫자를 말 만해도 잡혀갔다고 하니 어느정도로 탑압을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제주도민들 중에 좌익세력을 추려내는 모습
제주에 파견되기 전에 서북청년단과 경찰을 위로하는 이승만
최근에 발견된 학살된 유골들
민족분열 때문에 단독 선거 반대의 의견이 많았으나 결국 남한에서 1948년 5.10 총선이 실시되고(김구, 김규식, 좌익세력 불참)
7월 17일 헌법 제정, 결국 독립한지 3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됩니다. 이로써 통일 정부는 사실상 물거품이 됐으며 다음달인
9월 9일에 북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워 분단이 되고 맙니다. 미국과 소련의 지지로 민족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었으나
이승만의 주도하에 여운형, 김구 암살과 박헌영과 좌익세력에게 테러를 앞 세워 방해 결국은 지금까지도 분단된 민족을 만드는데 김일성
과 함께 1등 공신이 됩니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1948. 9)를 만들어 박흥식, 최린, 이광수, 최남선,
노덕술등을 체포하지만 이승만은 좌익 잡는 애국자들을 왜 잡아가냐며 화를 냈고 국회에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있다며 국회의
원들을 고문하고 사형 시키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일으키고 노덕술 휘하의 경찰들은 국회를 습격하는등 친일파들의 입김에 의해 결국
우리 민족의 염원이였던 과거 청산을 실패하게 되며 이후 이 친일파들은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화등등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지금
반민특위원회
까지도 우리나라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한달 뒤 1948년 10월 19일 이승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제주도민 토벌대를 강화하기 위해 여수와 순천의 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내리
지만 당시 경상도 지역은 좌익 세력이 경찰과 군대 곳곳에 있었고 좌익세력이 주 인원이였던 14연대 군인들은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
반대와 남북통일을 앞 세워 좌익단체와 동맹휴학에 들어간 학생 청년들과 함께 오전 5시 여수 읍내를 장악하고 우익세력을 색출한 뒤 곧
바로 순천을 오후 3시경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이에 이승만은 21일 10개 대대 병력을 보내 여수와 순천을 포위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여순사건 희생자들
진압 작전을 펼치게 되고 대대적인 시가전이 펼쳐지지만 화력과 진압군의 병력 앞에서 반란군은 대부분 진압되 일부는 지리산과 산악
지역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게됩니다. 여순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간인들이였고 특히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 셔츠를 입은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삶을 마감하게 되었고, 남한 좌익 최고의 단체였던 남로당원 박정희의 배신 활약으로 좌익
세력이였던 많은 군인과 경찰들이 숙국작업으로 대부분 사형됐습니다. 이후 미국에서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되고 공산
당에 의해 중국 본토가 장악 되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에 무기를 원조 받고 남한을 공산화 하기 위해 조선의용군과 김원봉을 선두
로 하여 6월 25일 남침을 합니다. 이승만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당황하게 되고 이승만은 라디오를 통해 "우리 국군이 북한군을 막고
있으니
북한을 민주기지로 하자며 북한을 도발했던 이승만(오른쪽)과 아침은 서울 점심은 평양에서라며 자신만만했던 낙루장관 신성모(왼쪽)
안심 하라며 민심을 추스리곤 정작 자신과 대부분 정치인들은 대전까지 내뺐고, 북한군은 미아리까지 치고 내려왔다는 소식에 민중
들은 급히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때 정부는 한강다리를 건너는 민간인을 무시한체 폭파를 감행하여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고 너무나
이른 시간에 폭파로 라디오만 믿다가 미쳐 피난가지 못한 민간인과 전방 전투에서 후퇴한 군인들은 북한군에게 많은 피해를 받습니다.
폭파된 한강다리, 부교가 놓이고 나서야 피난을 가는 민간인들
이윤열 당시 사회부장관의 회고록에는 이승만이 이범석 국무총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기위해 한강 다리를 폭파
시켰다고 주장하여 윗선에서 결정 됐음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애꿎은 채창식 공병감만 사형 당한 체 아직도 누가 명령했는지 확실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립니다. 이때 김규식과 친일파 최린, 이광수등이 납북되고 서울에서는
북한군에 의해 인민재판이 열려 많은 우익들과 지주, 군인, 경찰, 공무원등이 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총살되거나 죽창, 꼬챙이등으로
사형에 처해집니다.
사열식하는 좌익들
인민재판 당시 시체
9월 15일 맥아더 유엔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기사회생하게 됩니다. 13일 뒤 서울을 재탈환 하고 10월 1일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가는등 통일이 눈 앞에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데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배우
故이은주씨가 죽는 장면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보도연맹사건 입니다. 보도연맹은 전쟁 직후인 1949년부터 좌익세력에서 회원들을 받았
으며 전쟁이 전개될 당시 회원들은 30만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가입자들 대부분이 북한군에게 살기 위해 가입했거나 가입만
하면 쌀이나 식량을 배급해줬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위해 가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전쟁중에 언제라도 북한군에게 협조 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려 대전으로 피난시에 그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명령을
받은 시라소니 이성순의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헌병과 함께 마을마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합니다.
배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사형당한 아낙들
당시 학살당한 시신들
사형집행중
사형직전의 한 청년
이때 학살 당한 사람만 최소 20만명에서 최대 50~100만명 가까이 죽은것으로 추산되고 재판으로 사형을 했다지만 앞 줄 사형 뒷 줄
무기징역이라는 애들 장난과도 같은 재판이 열렸다니 전쟁 동안 법 집행이 얼마나 개판이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후 이승만 정부는 또
한번 민심을 잃는 짖을 저지르는데 이른바 국민방위군 사건입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 전선에서 밀리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12월 11일 국민방위군설치법 시행으로 만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강제 징집했습니다. 하지만 졸속 행정과 병력수송, 훈련, 무기
국민방위군
무장 등을 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확보되지 못했고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등 5명이 국민방위군에게 가야할 현금 23억 원과 쌀
5만 2천 섬을 착복하여 추운 겨울이였던 1.4후퇴때 9만명이나 젊은 장정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게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국민방위군들은 4명당 쌀포대기 하나로 난방을 해결했으며 막사와 텐트가 부족해 난방도 안되는 학교 교실에 100여명씩 쑤셔넣어 버리는
바람에 이가 들끓어 장티푸스가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부산까지 피난에 성공한 사람들은 배가고파 마을 잔치집이란 잔치집은
모두 찾아가 음식을 먹었지만 몇 달씩 굶다가 급하게 먹어 급체해 죽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민중들에게
알려져 민심은 극도 나뻐졌으며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사임하고 이회영의 동생 부통령 이시영 또한 사건을 확실하게 처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부통령 자리를 사임합니다. 이에 김윤근과 윤익헌등 5명은 사형되고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이기붕은 정계에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1950년 많은 국군 장병들이 목숨을 바치고 있을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정권 유지를 위해 11월 30일 대통령직선제를
발췌개헌 당시 기립투표하는 국회의원들
국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이유는 1950년 5월 30일 총선 결과 이승만을 반대하는 야당이 승리하자 본인의 정권 유지가 어려울 것을 예상하
여 생각해 낸 치졸한 방법이 였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 대해 더 설명 하자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어야 당선됐고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투표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이승만에 반대하는 야당이 다수였던
국회를 봤을때 이승만이 낼 수 있었던 최상책이 대통령 직선제였습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가 이를 부결함으로써 이승만 정부와 국회
에 알력이 생기자 5월 25일 국회 해산을 하기 위해 이승만은 부산과 경상도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김일성의 사주를 받았다며 국회의
원 12명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쇄도하자 이승만은 6월 4일 국회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하고, 국회의원 장택상
의 중재로 대통령직선제 정부안과 내각책임제 국회안을 발췌,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마련합니다. 이에 7월 4일 백골단과 경찰들을 이용
해 반대하는 국회의원들 가로막고 기립투표방식으로 출석의원 166명 중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이승만
은 자신의 독재 기반을 확고히 하게 됩니다. 1년뒤 19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채결되고, 다시 년이 지나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개헌이 일어납니다. 5월 20일 다수당이였던 자유당은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을
골자로하여 9월 8일 국회에 제2차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였으나, 11월 27일 국회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2/3이 찬성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가결정족수 136명에서 한 명이 모자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당시 136명이였던 자유당에
서 모두 찬성만 찍으면 됐던 상황에서 자유당 의원중 한명이 투표 용지의 한자를 몰라 용지 가운데에 도장을 찍어 1표가 모자르게 나왔다
고 합니다.) 이에 따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부결을 선포했지만 이틀후 자유당은 서울대교수를 앞세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를
수학 계산하면 135.33...으로 4사5입하면 135명이 된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키는 코메디에서도 안나올 해괴한 짓을 저지릅니다.
당시 민주당의 대선 홍보포스터
2년뒤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이승만과 자유당은 56년 대선을 치루게 됩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부통령에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
웠고 민주당은 대통령 신익희, 부통령은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
혈(또는 심장마비라고도 합니다)로 급사하자 대선은 자유당의 이승만과 무소속의 조봉암의 대결이 됩니다. 대선이 시작되자 이승만은
70%에 가까운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됩니다. 하지만 놀라운건 조봉암의 30% 득표율이였고 이승만
은 이를 경계해 1957년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조봉암을 빨갱이라 모함하여 진보당사건을 일으키고 1년뒤 1958년 조봉암은 서대문 형무소
에서 사형집행 5분전 담배 한 가치를 피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형을 집행 받고 있는 조봉암
2년뒤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 떠날대로 떠났고 운명의 1960년 대선이 다가옵니다.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을 후보
로 민주당은 대통령 조병옥, 부통령에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하늘이 이승만을 도우는지 조병옥이 위암 수술 중
미국에서 죽자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확실시 됩니다. 이에 승계권을 쥐기 위해 이기붕은 부통령 선거를 부정으로 조작하여 전국적으로
없는 사람을 유령유권자로 조작, 비밀이 아닌 공개투표, 임화수의 동대문상입연합회를 이용해 야당참관인 축출, 부정개표 등을 자행해
이승만과 이기붕은 유래없는 득표율 99%~95%를 얻자 너무 높다 생각했는지 70%대로 낮춰서 발표합니다.
부정선거를 주도 했던 임화수(완쪽)와 유지광(오른쪽)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
부정선거로 화가난 민중들
대선 바로 전 대구에서 1960년 2월 28일 민주당 후보의 유세가 있던 날 학생들이 유세장으로 갈까봐 정부에서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강요합니다. 이에 학생들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며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데모를 일으킵니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서울과 대전, 부산에서 산발적으로 데모가 일어났고,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이자, 시민들도 선거포기하며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에 경찰과 동대문폭력배들은 무자비한 제지를 했고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이후 4월 11
일 마산 앞 바다에서 낚시꾼에 의해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수업 도중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민과 함께 시위를 했고
서울에서
김주열군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된 시신
4월 18일 고대생들이 대학생 최초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하고 귀가 도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동대문폭배들에게 피습을 받자
민심은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됩니다.(고대생 피습사건)
피습당한 고대생들과 민간인들
다음날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하자 오후 1시를 기해 서울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 오후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습니다.
발포 명령을 내린 경무대 서장 곽영주 그는 이승만의 신임으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경찰이 세운 철조망을 넘어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명이 학생 4.19에 쓰러져간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시가지에서 평화적 시위를 하였습니
다. 이는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고 결국 26일 이승만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며 성명을 발표해 12년 이승만, 자유당
독재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이후 이기붕과 박마리아 부부, 둘째 아들 이강욱은 이강석이 쏜 총에 맞아 죽고 이강석 자신도 자살하면서 비
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4월 30일 9시 50분 육군수도병원에서 장례가 치뤄지고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장례식에 참가해 눈물을
이기붕 부부와 두 아들의 관이 나란히 서있다.
흘리며 5월 2일 하와이로 망명을가 5년뒤인 1965년 그곳에서 7월 19일 오후 7시 35분 9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영구는 7월 23일 서울로 돌아와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룹니다. 그는 독립활동부터 권력욕과 자신의 이득만을 챙겼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이승만의 영결식
민족의 염원인 통일과 친일파 처단을 막았으며 헌법을 농단, 12년 장기 집권을 하며 그가 집권하는 동안 100만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지
만 아직도 국회 입구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를 도왔던 자유당은 현재 한나라당이 되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며 국민을 우롱
하고 아직까지 건국의 아버지라며 이승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 孔子
|
첫댓글 다음은 박정희에 대하여
난 현대사에서 이승만, 김일성이 제일 싫음^^ 분단도 분단이지만 김구,여운형,김규식,안재홍,김원봉 등 민족지도자분들 그리고 만주, 중국 내에서 무장투쟁으로 목숨걸고 나라에 청춘바친 분들 다 제치고 저 두인간이 해방된 한반도를 지들 입맛대로 해먹은게 너무너무 짜증남...
22 다차려놓은 밥상에 지가 숟가락얹고 온리 대통령이 목적이였던게 존나빡침 스테이크썰면서 독립운동했던 나쁜놈진따
3 아 ㄹㅇ 진짜 목숨 걸고 나라 위해 일하신 분들은 따로 있는데 시밯...
이새끼 진짜 병신같은 새끼임...글에 나온대로 독립운동에 오히려 방해되는 짓거리만 하다 임시정부에서 쫓겨난 주제에 손톱 호호 불고 다녔다고함ㅋㅋㅋㅋ누가 왜그러냐고 물어보면 일제강점기때 고문받아서 손톱 밑이 시리다고 했다고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존나 윳긴 새끼네;;
하.. 진짜 외곡된 일들이 얼마나 많은거냐
이런글올려줘서고마워 몰랐던거알고간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