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누상동 발자취
金 宇 鐘
윤동주는 한국문학사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세계 속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시인이다. 그것은 그의 고귀한 문학 유산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인류를 향한 너무도 아름답고 비극적인 삶이 우리들의 가슴을 영원히 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작품들 중 가장 주요한 대표작 들 대부분이 서울의 인왕산 자락 누상동 하숙집에서 쓰여진 것이다.
윤동주는 중국의 간도지방에서 태어나 약 20년 4개월 쯤 살고 서울에서 4년 그리고 일본에서 약 3년을 살았다. 일본 3년은 반이 대학생활이고 나머지 반은 독립운동 사건으로 체포되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기간에 해당된다.
27년 10개월쯤의 짧은 생애지만 그의 삶은 한반도에 그치지 않고 중국 한국 일본으로 넓게 걸쳐 있으며 그의 생가가 중국에 있고 그가 처절하게 생을 마감한 자리가 일본이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발자취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렇지만 태어나고 자라고 생을 마감한 사실 외에 그가 시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가장 많이 쓴 자리를 찾으면 그것은 그가 정병욱과 함께 하숙하던 서울 종로구 누산동의 김송 소설가의 집이 된다.
그는 21세 되던 1938년 4월에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자리는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41년 5월부터 9월까지 인왕산 밑 누상동 9번지에서 일생 중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가장 왕성한 활동 시기였다는 것은 작품 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도 많았지만 그의 일생 중 그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시인으로서 가장 처절하게 번민하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명시를 쓴 곳이 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 크리스토가 당대 로마 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번민하고 주저하다가 마침내 십자가를 받아 들인 게세마네 동산에서처럼 인왕산 기슭에서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십자가>라는 사명시를 쓰며 그 길을 걸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누상동 시절은 한국문인 다수가 두려움에 떨며 변절하고 혹은 침묵하고 있을 때 가해자에 대한 단호한 저항정신을 아름다운 서정성과 탁월한 기법으로 써나가며 최고의 명시를 남긴 윤동주의 가장 소중한 창작 시절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 쓴 작품이 <십자가>(5.31) <새벽이 올 때까지>(5.) <태초의 아침><또 태초의 아침)(5.31) <못 자는 밤> <돌아 오는 밤>(6) <간판 없는 거리> <바람이 불어> (6.2) <또 다른 고향>(9) <길>(9.31)등이다.
그리고 두 달 뒤에 <별 헤는 밤>(11.5) <서시> (11.20) 肝(11.29)을 썼으며 누상동에 있기 2.3개월 전에는 <무서운 시간>(2.7) <눈 오는 지도> (3.12) 등을 섰다.
이 작품들은 그가 자선 시집으로 원고지에 써서 정병욱에게 남겨 주고 해방 후 다른 작품들과 함께 빛을 보게 된 시집<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중에서 가장 주요한 작품들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대개 인왕산 기슭 누상동 시절의 작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윤동주는 1934년에 <초 한 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를 발표했다. 이 때가 17세 사춘기인데 작품은 이 때 이미 시적 기법으로서나 주제가 매우 성숙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주제 속에는 이미 그가 장차 걸어가게 될 험난한 길의 방향이 암시되고 있었던 셈이다.
초 한 대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 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푸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맡는다.
이 시에는 광명을 위한 자기 희생의 위대함과 그 정신의 순결성이 촛불의 이미지를 통해서 형상화되고 있다.
이것은 물론 그가 일평생 지니고 있던 기독교적 신앙심과 함께 십자가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희생의 눈물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무너진 광명의 제단은 빼앗긴 조국을 의미하며 그 제단의 촛불에다 윤동주는 자기 자신의 미래상을 그려 놓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그것이 약 10년 뒤 후쿠오카 감옥에서 그가 흘리고 있는 눈물이며 피다.
그는 물론 다른 아이들처럼 사회적 역사적 문제를 떠나서 자기 고향과 자연을 동시 속에 에 담고 서정적인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어린 나이 때도 항일 민족주의적 사상에서 잠시도 떠난 일이 없다. 어릴 때부터 고향인 간도지방이 우리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고 그가 다니던 명동소학교 교장 김약연을 비롯해서 같은 학교의 송몽규 문익환 강처중 김정우등 그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항일 민족주의자엿음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송몽규는 이미 그 때 어린 나이에 동아일보에 소설로 등단하고 35년에는 중국낙양의 군관학교에 입학했었고 훗날 윤동주의 독립운동사건을 주도했고 함께 옥사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에 <새로운 길><산울림>같은 밝은 시를 썻다. 중일전쟁시기였음에도 이렇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생을 찬미하는 시를 쓴 것은 아마도 연희 전문학교에 들어가서 교정에 피어 있는 무궁화도 보고 한글을 가르치는 최현배선생도 만나면서 삶의 기쁨과 용기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1940년 12월경의 <八福 > < 위로>(12.3) <병원>(12)등에서는 극심한 좌절감과 회의가 나타난다. <팔복>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반복하고 마지막에는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끝맺은 시다.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며 제시된 여덟 가지 복을 마치 “몽땅 거짓말이오.”하며 우리는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며 하나님에게 대든 것 같다.
그리고 다음에 <무서운 시간>이 나타난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하며 자신이 해야할 일은 많은데 자꾸만 밀려 오는 죽음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을 나타낸 것이 <무서운 시간>이다.
그리고 석달 후 그는 누상동 하숙집으로 옮기고 시는 달라졌다. 여기서 <십자가>를 쓴 것이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로마 총독 지배하의 식민지 백성 예수가 그랬듯이 윤동주는 마침내 일제 지배 하에서 죽어가는 동족과 다른 모든 죽어가는 것을 위해서 모가지를 드리우고 피를 흘리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어두워 가는 하늘 밑”은 일제 말 가장 암담하던 역사적 시기를 말한다.
그런데 이 작품이 쓰이고 반년쯤 지난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조선문인협회가 조직되고 창씨개명령이 떨어지고 우리말 말살정책이 극도에 달하더니 일제는 전시총동원체제로 학생들을 전선으로 몰아내고 징병 징용 정신대로 온 민족을 죽음으로 몰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윤동주는 마치 몇 달만 지나면 이렇게 죽음의 태평양전쟁이 터질 것을 미리 예견했던 것처럼 누상동 하숙방에서 이 시를 쓴 셈이다. 그리고 12월 8일의 선전포고 직전인 11월 5일에 <별 헤는 밤>을 쓰고 다시 18일 전인 11월 20일에는 <서시>를 썼다.
<서시>는 아마도 시집을 묶기 위해서 서론 서문 등의 형식처럼 맨 앞머리에 붙이려 했던 대표적인 시라고 여겨진다. 원래 원고에는 <서시>라는 제목은 없었다.
<서시>는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한 거룩한 희생정신과 가장 순결한 문학정신을 나타내고 자기 갈 길을 밝힌 작품이다. 끝 줄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십자가>에 나타나는 “어두워 가는 하늘밑”처럼 일제말기의 암담했던 역사적 현실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서울의 인왕산 자락 하숙방 시절을 중심으로 해서 쓰인 작품들을 보면 윤동주가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희생시키고 불사르려 하며 아름다운 서정적 기법으로 민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여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멀리 떠나온 고향의 옛 친구들과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별 헤는 밤>은 죽음을 선언하며 <십자가>를 쓴 다음의 마지막 고별시다. <십자가>가 스스로 죽음을 선언한 작품이라면 예삿 일이 아니다. 그는 그 직후부터 수없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고향의 옛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그런 작별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마다 별을 바라보는 그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시가 11월 작이라 하더라도 이미 5월에 누상동에서 <십자가>를 쓴 직후부터 그것은 계속 쓰여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정병욱과 기숙사시절부터 자주 산책을 즐겼다.
"그는 곧잘 달이 밝으면 내 방문을 두들기고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나를 이끌 어 내었다. 연희 숲을 누비고 서강 들을 꿰뚫는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기고야 돌아오곤 했 다. 그 두어 시간 동안 그는 별로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가끔 입을 열면 고작 “정형, 아까 읽던 책 재미 있었어요?”하는 정도의 질문이었다."
(정병욱<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
이것은 기숙사 시절 이야기인데 그후 정병욱과 함께 하숙하던 누상동에서도 저녁밥 먹고 언덕 길을 올라 인왕산을 얼마쯤 오르며 산책을 가끔 했을 것이다. <십자가>이후에는 그렇게 언덕을 오르다가 풀밭에 앉아서 가을 하늘의 무수한 별을 바라보고 어머니 어머니라 불러 보고 또 불러 보고, 그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그의 이름짜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렸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거외다.
별을 바라보고 고향집을 생각하며 풀밭에 앉아서 “부끄러운 이름”을 쓰고 지워 버렸다는 <별헤는 밤>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 가서 도쿄의 릿쿄대를 거쳐서 일본의 도시샤대학에 다니다가 체포되어 후쿠오카에서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주사를 맞다가 2월 16일 새벽 3시에 일생을 마감했다.
윤동주와 함께 하숙하던 정병욱은 그의 연희전문 2년 후배였다. 그리고 해방후 서울대를 마친 그는 나의 국문과 4년 선배이며 은사님인데 내게 이런 말을 한 일이 있다.
“그 때 내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면 윤동주의 시집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윤동주가 먼저 도쿄로 떠난 후 학병으로 도쿄에 가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 온 얘기를 상도동 집에서 30여년전에 내게 하던 끝에 나온 말이다.
윤동주는 자필 시집 3권중 한 권을 연희전문 이양하 교수에게 주고 한 권을 정병욱에게 전했는데 이양하 교수의 것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오직 정병욱이 맡아서 고향 집에 숨겨 두었던 것(19편)만 그가 살아 동아와서 강처중(6.25 전쟁발발 직후 월북한 사형수)이 보관하던 작품들과 함께 31편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누상동 9번지 김송 소설가 하숙방에서 함께 지낸 정병욱 교수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200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