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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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외는 교장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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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 친구가 어느 날 동창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습니다.
우리 병원 근처에 정신 지체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는데 정진학교다. 오늘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오셔서 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시더니 “성경 암송도 좋지만 나는 시 암송을 합니다.”하면서 내리 두 편을 암송하신다.
<아침의 향기> -이해인
아침마다 소나무 香氣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知慧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 … …
<봄길> -정 호승 … … …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아~ 올해 환갑이신 교장선생님이 시를 암송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요새 우리 사회는 분열의 영(靈)이 극심하게 작용하여 내편 네편을 가리는데 아름다운 시는 지루하기 쉬운 한여름에 시원한 냉수를 마시는 맛이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려는 교장선생님에게서 훈훈한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러면서 친구는 감성도 풍부해지고, 치매 예방에도 좋으니 좋은 시를 많이 읽거나 암송하라고 친구들에게 권했습니다. 덕분에 평소 산행, 여행, 건강이 주류를 이루던 친구들의 화제도 잠시 시로 격상(?)돼 고상한 댓글이 한동안 오르내렸습니다.
의사 친구가 동창들에게 소개한 교장선생님은 서울 구로구 궁동에 있는 서울정진학교의 박해평 선생입니다. 정진학교는 정신지체나 지체부자유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수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는 느티나무, 꽃은 목련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느티나무처럼 바르고 튼튼하게, 목련처럼 순수하고 아름답게 자라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주위의 다른 학교 학생들과는 다른 환경 속에서 자칫 정서가 메마르기 쉬운 학생들이 박해평 교장선생처럼 시의 샘물을 퍼 나르는 분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한결 부드럽고 따뜻한 가슴을 갖게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사실 소설, 수필은 그림으로 말하자면 구상화요 시는 추상화라, 풀어쓰는 산문보다 사물을 보는 생각과 정신을 응축해 놓은 시 편이 아무래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추상화를 꺼리듯 시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 않았습니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 … …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좃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 … …
이렇게 <오감도(烏瞰圖)>를 읊은 이상(李箱)의 시는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김해경(金海卿)이라는 본명과도 너무 동떨어진 아호(雅號), 오감(五感)을 죄는 극도로 난해한 시 구절이 시에 대한 공포감을 갖게 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아니 우연찮게(?), 마주친 이재금 시인의 <코고는 아내>를 읽고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거니 시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이거늘.
먼산 부엉새 소리에도 잠 깨어 뒤척이는데
지겨워라 집사람 코고는 소리 몹시도 성가시더니 오랜만에 친정길 옷투정하며 훌쩍 떠나버린 빈 자리 코고는 소리 없어 잠 오지 않는다
한평생 살 맞대고 살면 미움도 쌓여 결 고운 사랑 되는가 … … …
세상살이가 고달파서인지 아내도 곧잘 코를 곱니다. 처음엔 정말 성가시더니 요즘엔 귀가 무디어진 탓인지, 게을러진 탓인지 정말 자장가처럼 편안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더욱 가까이 느껴집니다.
강은교 시인의 <그 여자>를 만나면 어린 시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어쩌면 가슴에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피난 시절 부산 해변가 어느 골목길의 정서를 이렇게 한 대야 가득 푸짐히 퍼 담아 주는지.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 … …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언젠가의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최영섭의 금강산, 가장 좋아하는 시는 윤동주의 서시였다고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 …
서시를 읽노라면 일본 후쿠오카의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광복된 조국의 파란 하늘을 그리고 있었을 시인의 맑은 눈동자가 머릿속에 떠오를 듯합니다. 가슴을 저미는 그의 시를 읽다보면 누구라도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착하고 바르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예전 아내가 제멋대로 재일동포 여학생 둘을 하숙생으로 들여놨던 적이 있었습니다. 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싶다는 그 부모들의 갸륵한 마음이 와 닿아 그들이 돌아갈 때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한 권씩을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미 중년이 된 그들 중 한 사람은 일본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글 선생님으로, 또 한 사람은 여성 사업가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꼭 윤동주의 시 때문은 아니겠지만.
본격적인 매미의 합창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찬바람이 일 때까지 매미들은 짝을 찾는 사랑의 합창을 목이 터져라, 아니 울음통이 부서져라 불러대겠지요. 이 한철을 위해 길게는 17년이나 땅속에서 뜸들여왔으니 그들의 연가도 예사 열정이 아닙니다.
무더위가 시작되면 동굴음악회니 산사 시 낭송회니 피서를 겸한 문화행사가 도처에서 벌어지곤 합니다. 꼭 그런 격식을 갖춘 모임이 아니라도 좋겠지요. 한낮 나무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매미 소리 들으며 시 한 편 읽다 졸다 꿈꾸다 하는 것도 운치 있는 피서법이 아닐까요. 열탕 같은 무더위, 머리 아픈 일상을 탈출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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