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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실패 속에서 1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다
시험과 고난은 거듭나는 자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을
파쇄하고 흩어지게 해서 양심이 주어지게 하거나
주어진 양심을 더 강하게 만들어 그가 거듭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 쓰임 받는 것이 지옥의 악한 영들이다.
그들은 두려움, 속임수, 낙심 등을 통해
시험과 고난 중에 있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악과 거짓을 흥분시켜 영혼을 파멸시키려들지만
인간이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자신의 악과 거짓에 대항할 수만 있다면
그들은 도리어 선과 진리를 확고히 해주는 수단이 되어
영혼 구원에 필요한 쓰임새의 역할을 하게 된다.
악한 영들이 그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의심과 부정을 심어 그를 괴롭힐 때
주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인 빛으로 바라보던 시험과 고난을
천국의 빛 속에서 볼 수 있도록 그의 눈을 열어주신다.
그러면 시험으로 어둡던 마음에
진리에 의한 깨달음의 빛이 환히 비추이고
영혼은 다시 악한 영들과의 투쟁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결국 시험과 고난이 아무리 가혹하게 인간의 본성을 충동하여
그의 추악하고 탐욕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지라도,
또 그로 인해 깊은 좌절과 자기정죄에 빠지게 할지라도
그들은 오히려 그의 거듭남을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
더 이상 그에게 저주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혹 그때 드러난 자신의 모습이 아무리 지옥적으로 보일지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라한 패배로 보이는 순간에도 그것은 외관상일 뿐
실제로는 그 뒤에 오는 영광스런 승리가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으심이 그와 같았다.
겉으로는 주께서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그저 무력하게 목숨을 잃으셨다.
게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구세주로서의 사명과 강인함을 잃어버리신 듯
일순이나마 고난의 잔 마시기를 피하려 하셨고
우리처럼 극심한 두려움을 겪기까지 하셨다.
이 모두는 분명 인간적인 시각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그분의 죽으심과 그러한 허약한 모습들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인성을 지옥의 영들에게 내어줌으로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그 인성을 완전히 짓밟아 제거하게 하는
실제적 승리의 외관에 불과하였고
그 시험에서의 승리로 말미암아 영화되신 주님은
옛 인성 대신 새롭게 마련하신 자신의 신성한 인성 안에서
신성이 인간의 저급한 차원에까지 내려와
그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실 수 있는
실로 놀라운 축복의 길을 열게 되셨다.
인간의 시험 역시 승리가 있기 전 먼저 그와 같은 죽음이 있다.
새 사람에 속한 것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옛 사람에 속한 것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악령들이다.
그들은 온갖 술수로 그의 악을 맹렬히 흥분시켜
그 스스로 자신을 지옥과 동일시하는 비참한 상태로까지
그의 영혼을 몰아가지만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하게만 느껴지는
그 지옥적인 상황에서조차 주님의 도우심은
그만큼 더 큰 권능으로 그를 지켜주고 계신다.
비록 맹렬한 시험 한가운데 지옥과도 같은
심정 상태로 내몰리는 까닭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도움이 끊어진 채
자신이 완전히 버려진 듯 여겨지는 상태에 있다고 해도
사실 그때 주님은 그 어느 때에 비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그를 돕고 계심을 그는 믿어야 한다.
시험에 완전히 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
그의 의지는 악령들의 공격으로 인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지옥으로 기울어 있지만
그것은 시험이 만들어낸 망상과 같을 뿐
실제로 그는 주님의 보호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선과 악 사이 영적 평형이 잘 유지되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어렵지만 그는 믿어야 한다.
이 경우 주님이 유입하실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선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는 아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치 않고 그 선에서 나오는 믿음으로 주님의 구원을
끝까지 붙들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육체의 감각으로는 보고 느낄 수 없지만
영으로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마침내 그 스스로 악과 거짓 대신
선과 진리를 택하여 승리하게 되는데
이는 악과 거짓에 대한 혐오가 투쟁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험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 / 이스라엘의 세 왕 브루스 강해 중에서..
시험, 곧 전쟁에는 정복하는 이들 편에 항상 패배의 외관이 있다.
주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한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은
이러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죽음은 어둠의 영들에게는 그들 능력의 승리로 여겨졌다.
즉 그들은 마침내 그분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
그분이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모든 권세를 가진 영화된 인성으로 일어나셨을 때
그들의 외관상 승리는 압도적인 패배로 바뀌었고
그들 자신은 영원한 복종 속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이 한 예에서 볼 수 있었지만
모든 시험은 이것과 동일한 외관과 실재를 가진다.
모든 시험이 극에 달하면 절망이 뒤따른다.
시험당하는 자에게는 절망이 승리이지만
시험하는 자에게는 외관상의 승리일 뿐이다.
또한 모든 시험에는 죽음과 부활이 뒤따른다.
옛 사람에 속한 것이 죽고 새 사람에 속한 것이 살아난다.
옛 사람의 죽음은 악령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그들의 외견상의 승리다.
그리고 새 사람의 부활은
천사에 의해, 또는 천사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악령들의 실제적인 패배다.
따라서 악령들은
‘주도애’(ruling love, 主導愛)라는 전체적 측면에서나
애정과 욕망이라는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옛 사람의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매개체로 허용된다.
즉 악령들 역시 그들의 죽은 자를 매장하는 죽은 자이고
반면 새 사람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신성한 명령에 순종한다.
마태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 이스라엘 군대의 패전 등을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시켜 이해해 볼 때
그것은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우리와 관련해서 사도들은 이를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곧 육의 죄를 벗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참고 /
천비 8165
출 14:10,11 “..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 이는 절망에서 오는 말이 분명하다.
더욱이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때 그들은 마치 비탈길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으며
천사들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데
이는 시험이 그의 능력의 한계점에 이르게 되면
모든 사람의 능력이 제한되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점, 즉 그가 비탈길에 서서 미끄러지기 시작할 때
그는 주님에 의해 일으켜지고 절망에서 구원을 받는다.
(and then they are as it were on the slope, or are
as it were sinking down toward hell.
But at this time such thought does no harm whatever,
nor do the angels pay any attention to it,
for every man’s power is limited, and when the temptation
arrives at the furthest limit of his power,
the man cannot sustain anything more, but sinks down.
But then, when he is on the downhill course,
he is raised by the Lord and thus liberated from despair;)
그러면 대부분의 경우 희망의 밝은 상태와 그에 따른 위안,
그리고 또한 지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시험의 목적은 진리와 선이 확증되고 함께 결합되어
신앙과 사랑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은 사람이 시험을 이길 때만 달성된다.
반면에 그가 굴복하면 이 경우에는 진리와 선이 거부되고
거짓과 악이 확증되어 그들은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천비 1740
악과 거짓이 시험과의 투쟁에 의해 정복되며
대신 선과 진리로 옷 입혀지게 된다는 것은
악과 거짓이 먼저 흩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오게 된다.
이와 같이 악과 거짓이 흩어지고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대신 메우게 될 때
이 선과 진리는 더욱더 확증되어 강건해진다.
악과 거짓은 악령에 의해 선동되며 악과 거짓이 흥분되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것이 악인지 또는 거짓인지 거의 알 수 없다.
따라서 흥분되어져야 뚜렷이 보인다.
그리고 시험으로 인한 갈등이 오래 지속될수록
그러한 악과 거짓은 더욱 분명해지며
마침내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악과 거짓이 추방되면서
선과 진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더 많이 혐오하고 두려워할수록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더 많이 심어 주신다.
더욱이 악과 거짓에 대한 혐오가 커질수록
악령은 감히 접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구성하는 악과 거짓에 대한
이러한 혐오와 두려움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접근하기 시작하는 순간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리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천사들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이것이 천사들에게 천국인 것은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가 그들과 함께 존재할 때
그들 자신의 생명도 그들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천비 1717
.. 시험에 속한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악령이나 악마의 패거리들을 제압하는 힘을 점점 더 얻게 되어
마침내 그들은 더 이상 그를 감히 시험하지 못하게 된다.
승리를 쟁취할 때마다 주님은 전투를 수행한 선과 진리들을
질서의 상태로 되돌려 정결케 하신다.
그리고 그것들이 정결케 되는 만큼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겉 사람 안에 심어지고 (속사람과의)상응이 이루어진다..
겉 사람의 이 같은 상응이 시험의 투쟁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 이유로 시험은 악과 거짓을 쫓아내고
그곳에 선과 진리를 도입시키는 수단이며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복종시켜
내면적인(interior) 인간, 즉 합리적(rational) 인간을 섬기게 하고
또 이를 통해 속사람을 섬기게 하는 수단이 되며
속사람은 주님이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가 시험으로 인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시험을 통하여 거듭 나아진 사람 외에는 알 도리가 없다.
이렇게 거듭난 자라해도
이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넓은 의미로도 거의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과정은 언제, 어떻게 라는 것을
인간이 알기도 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이 과정이 주님의 신성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측면도 있다.
시험에서의 승리라고 하면 대개 삶의 여러 방면에서 찾아온
자연적, 영적 문제 꺼리 앞에 주님의 도우심으로
신앙의 선과 진리를 굳건히 지켜낸 것을 생각한다.
그것은 시험의 가장 기본적인 승리 형태에 속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시험을 만나면 그런 승리를 얻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험의 승리와 실패라는 외적인 결과를 떠나
그 시험 이후 그의 영적 상태를 어떻게 관리하였는가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목적과 형태를 가지고 찾아오는 시험들을
인간이 단번에 종식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속과 겉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에
외적 결과로는 승리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완전히 제압하지 못해
여전히 시험의 요소가 남아있을 수 있고
반대로 외적 결과로는 실패로 나타났을지라도
내적으로는 많은 부분 시험의 요소들을 제압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볼 때는 시험에 졌을지라도
그 후 그 실패를 통해 더 큰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한 과정일 수 있겠고
반면 외적으로는 시험에 성공했을지라도
내적인 변화는 충분하지 못해
그 후 그것으로 영적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더한 실패로 추락하는 한 과정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시험의 성격이
단편적인 성공이나 실패로 끝나는 것만이 아닌 것은
많은 부분 시험은 악령들의 단체 공격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험의 주된 목적에 있어서는 실패로 끝났을지라도
거기 따르는 몇몇 다른 유형의 시험에 대해서는
악에 대항할 힘이 그 시험을 통해 내면에 축적되었을 수도 있다.
인간 개개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
그에게 시험을 허용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처음부터 목표하던 외적 성공이라는 결말에만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지난 후 그의 영이 맞게 될 지속적인 변화까지 고려하여
거기 맞춰질 수도 있다.
즉 주님은 영원을 바라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일시적인 결과로 그것이 시험의 실패, 아니면 성공으로
단정 짓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험에 졌다고 낙심치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으로 회개하여 돌이킬 기회를 삼을 때,
다시 말해 이전의 실패와 회개를 통해 그의 내면이 악에서 떠나
선으로 더 높이 오르게 될 수 있다면
그 시험은 외적 형태로는 실패이지만
내적으로는 승리로 나아가는 한 과정이고
나아가 실제적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이전보다 선과 진리를 더 확고히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은 영적 전쟁에 져서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의 돌이킴에서 여실히 발견된다.
‘비록 죄에 완전히 무너져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전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그건 표면의식일 뿐
속에는 그 사랑이 여전히 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또 그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는 그것으로 주님을 붙들 수 있다.
본인은 끝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베드로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그 사랑이 있었다.
낙심하여 고기 잡고 있을 때 ‘요한이 주님이시다’ 소리치자
지체 없이 바다에 뛰어들도록 한 것이 바로 그 사랑이었다.
육신의 약함으로 영적 전쟁에 져서 넘어졌어도
그 믿음으로 다시 돌이키면 된다.
그러면 그는 더한층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실패가 얼마나 큰 영적 진전을 불러왔는지
그는 훗날 알게 된다.
그 실패가 베드로를 바꾸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시험에서 거듭되는 외적 형태의 실패가 회개를 통해
돌이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를 확증하는 도구가 되어
한층 더 지옥 가까이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되는 죄로 인해 신앙에 무척 해로운 자책과 정죄에
시달릴 수 있음도 경계되어야 한다.
죄에 자꾸 무너지고
그런 뒤에 주께 나아가 무릎 꿇어 죄용서 받고..
그런 몹쓸 죄악을 용서해주고 받아주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짓고
그것으로 온 마음이 정결해져 주께 한층 더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지고..
이런 신앙 패턴이 계속될 때의 문제는
마음이 죄짓는 것에 대해 더 민감해지기보다
더 무감각해지거나 담대해지고
또 죄가 주님 사랑과 은혜로 용서되었다고 믿지만 실은
거듭되는 죄가 마음에 점점 쌓이고 있는 것을 본인이 지각하기에
한편으로는 자책과 자기정죄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죄가 더할수록 거기 은혜도 더한다.’는
가르침 등으로 안위를 삼으며
(롬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언젠가는 주체할 수 없는 주님 은혜의 감격 속에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변화되리라는 소망으로
오직 주께서 임하실 때만을 고대한다.
마음속 주님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커질수록
주님의 임하심은 더욱 가깝게 느껴지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주님이 임하시면
그동안 죄로 인해 남모르게 겪어야 했던
자신의 온갖 고통과 슬픔도 끝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가르침은
죄로 어두워진 마음을 은혜로 감동시켜
주님을 향한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해주는 만큼
은밀하게는 그 안에 강한 중독성도 지니고 있어
계속 무력하게 죄악의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갈 위험도 크다.
사실 저 원리는 주님의 구원 역사에서
악이 증가할 때 그보다 더 큰 선이 유입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실제로는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
당연히 징벌이 주어져야 함에도
주님 대속의 은혜로 그 죄가 용서되었다는 의미로 통용되어
그것이 자칫 악을 합리화하는데 사용될 위험이 크다.
이와 같은 원리로 떠오르는 것이 '어둠 속의 빛’이라는 주제다.
이 말은 사실 생각만 해도 거기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득 느껴져
마음이 평안해지고 위로가 넘친다.
하지만 그 주제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고
사실 무척 위험하기까지 한 것은
자칫 그 적용을 잘못하면 영혼을 크게 해치게 되는
양날의 검과도 같기 때문이다.
인생에 왜 시험과 고난이 있고 근심과 슬픔이 있으며
어려움과 실패와 좌절이 있고 약함이 있으며
왜 밤이 있고 어둠이 있고
또 우리를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죄가 있는지..
그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가르침들,
즉 깜깜한 밤일수록 별빛이 더욱 찬란하고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더 가까우며
또 근심과 슬픔 속에 부르는 찬송이 더 위대하고
수많은 실패 뒤에 오는 성공이 더 가치 있으며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또 내 넘어진 곳에서 새로운 시작이 일어나고
죄로 인해 상한 심령에 주님이 찾아오시며
죄 사함을 많이 받을수록 주님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눅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들은 주님이 오시는 통로가 되고
주님이 내 안에 일하시며 높이 좌정하사 영광 받으시는 수단이 되어
궁극에 인간을 천국에 들여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과 함께 길이 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가르침들이 지속적으로 올바르게 적용될 수만 있다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바울의 말은
영혼의 변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경계를 위해 거기 이 말도 덧붙인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그렇다면 이런 바울의 경고를 이미 알고 있을 경우
사정은 달라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여전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기 때문이다.
이는 죄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바울의 경고를 무시해버릴 만큼 너무 달콤하기 때문이다.
죄에 눌릴수록 그 어둠에 비치는 죄 사함의 빛은
얼마나 그를 감격케 할까..
또 그로 인해 주님에 대한 사랑과 기쁨은
얼마나 더 그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더해줄 것인가..
가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는데
과연 죄가 혐오스럽게 여겨질지 의문이다.
처음에는 신선하던 그러한 감격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면
그는 여전히 죄에 거하게 된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죄 사함의 달콤함을 맛본 후 힘을 얻고
그 후로는 같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함에도 은혜만을 탐한 나머지
어느 새 마음이 느슨해져 그것을 계속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악한 영들의 공격에 시달린 마음은
자책과 정죄로 점점 어두워지고
마침내 의지마저 무기력해져 긴 영적 침체에 빠져들게 된다.
자책이 지나치면 자기 정죄가 되고 이는 신앙에 커다란 해를 가져온다.
그것은 사단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쓰는 수단임에도
마치 양심의 발로인 것 같은 인상을 줌으로
옳은 것인 양 신앙인을 속인다.
자책과 자기 정죄는 명백히 해로운 것임으로 그것을 피하고
대신 죄에 대해 회개를 해야 한다.
이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회개가 참으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오셔서 하신 첫 복음의 말씀이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는 것이었고
일생의 사역을 다 마치신 후 승천하실 때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죄인이 회개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인만큼
회개가 어찌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은 언제나 당신의 한없는 사랑의 진리로
인간에게 오셔서 그의 모든 죄악들과 싸울 힘을 주시며
연약하고 상처 난 부분들을 고쳐 새롭게 해주시지만
주님의 이 역사가 인간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게 있는 어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필요하다.
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회개인데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공급받을 수 있는 수용그릇이 되기 위해
먼저 내게 속한 모든 어둠들, 즉 내 욕망, 내 고집이 실린
이기적인 것과 모든 부정하고 악한 것들을
하나씩 비우는 준비 작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적 회개는 입술의 진실한 고백은 물론
이에 더하여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는 것까지다.
이러한 회개 없이 죄인에 거저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이로부터 오는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이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가 아무리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주께 드리고
그 은혜에 눈물로 감격하며 주를 높이고
또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속 깊은 데에서 간절하게 올라올지라도
이 모든 행위가 오직 한 가지,
곧 실제적 회개로 이어져 죄를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
그러한 것이 바로 주를 한 인물로 바라보고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그분과 달콤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신앙의 핵심적인 것으로 여기는 가르침들의 한계다.
영이 유약할 때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에 반해 그것을 취한다.
그때는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그리고 영적인 기쁨과 평안보다는 세상적인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에 마음이 더 이끌리기 쉽다.
처음 주님을 대할 때가 그러한데
그때는 그분이 자신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가
너무 선하고 달콤해 여기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감격이
주님을 사랑하는 주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때 그의 사랑과 감격은
다만 자기 욕구가 채워지는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이기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 영이 좀 자라면 좀 더 순수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서
그의 사랑과 감격의 대상도 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주님을 바라보던 시각이 차츰 달라지면서
이어 성경 말씀도, 또 그동안 정립했던 교리도 변화를 보이게 된다.
그 결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위해 주님이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그들을 죄의 심판에서 해방시키고 의롭게 하셨다는
그런 이기적인 시각 속에서 주님이라는 한 인물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전 인류를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들 속에 드러나 보이는
그분의 순수하고 의롭고 공정한 성품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선과 진리
그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또한 사랑하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참고 / 브루스 목사 강해에서
.. 기독교인들 사이에서조차
사랑이란 하나의 느낌(feeling)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개인적으로 그분을 향한 자신의 느낌의 열렬함으로 판단한다.
물론 우리는 주님을 한 인물로(as a person, 개인으로) 생각하며
그분을 향한 사랑의 느낌을 깊게 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사람들을
인물로(개인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품성(character)에 따라 그들을 대하고 사랑하시듯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즉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를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그분의 본질 측면에서 사랑과 지혜이시고, 선함과 진리이시다.
그런고로 그분은 자비, 관대, 용서, 진리, 정의, 거룩하심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구성하는 위와 같은
품질(quality)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는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품질을 사랑하여 심정 안에서 흠모할 때만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이런 품질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그런 품질을 획득하여 소유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들을 실천하는 길뿐이다.)
성경을 읽을 때 죄인에게 부어지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 지나친 시각으로 해석하여 읽다 보면
지옥이 초래한 악과 거짓,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인간의 역할은 완전히 거부한 채
오직 죄와 실패 속에 찾아오시는
주님의 달콤한 은혜만 고대하는 허약함에 빠져 살면서
이것이 올바른 신앙의 길인 양 인식하게 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참고로
‘주님만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면 된다.’ 라는 글을 함께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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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만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면 된다.
.. 근본이 악한 인간은 어차피 힘써봐야 거기서 거기다.
노력해서 정결해지려는 건 그리스도의 의 대신
자신의 의를 세움이다.
인간은 자신의 악을 치우려 노력하지 말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듯 차라리 그 악을 통해 주님을 모시는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자꾸 자신의 악을 바라보면 어둠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를 바라보라.
인간의 노력으로 살지 말고
주님주시는 은혜로 살라.
인간은 자신의 근본이 악밖에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런 자신에 어떤 기대를 걸거나
노력으로 성덕을 이루려 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랄 때 그 빈 영혼을 하나님은 직접 채워주신다.
.. 신앙은 내가 어떠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가,
그리고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의 문제다.
주님만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면 된다.
신앙이 잘 되고 안 되고 그게 뭔가?
흥하던 망하던 거기 주님만 계시면 족하다.
내게 악한 영들의 유혹이 많고 죄가 많고 그런 것 신경 쓰지 말라.
나는 이미 주께 속하였다. 이것이 믿음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어느 날 레오 형제와 길을 가던 중 시냇물을 건널 때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너무 맑은 시냇물을 보며 감탄하다가
그 맑은 물에서 순결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맑은 시냇물을 보며 상념에 젖은
레오 형제에게 말을 걸었다.
"형제는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 물이 가진 깨끗함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넘치도록 벅찬 기쁨과 매력을 지닐 텐데요."
"가세."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길을 재촉하였다. 말없이 길을 걷다가
프란치스코가 물었다. "깨끗한 마음이 어떤 건지 아는가?"
"비난 받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레오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사람들에겐 언제나 비난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슬프다는 말로 들리는군."
"바로 그 때문에 저는 깨끗한 마음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아, 레오 형제, 날 믿게.
마음의 순결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지 말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그분을 찬미하게.
지극히 거룩하신 그분이 계시다는 걸 기뻐하게.
바로 그분을 위해 그분께 감사드리게.
내 형제여, 바로 그것이 깨끗한 마음일세.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결코 자네 자신을 돌아보지 말게.
어떻게 자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지 묻지 말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불완전한 사람으로, 죄인으로 여기고 슬퍼하는 것은
아주 인간적이며 너무나도 인간적인 감정일세.
우리는 시선을 훨씬 더 높이, 아주 더 높이 두어야 하네!
거기 하나님이 계신다네!
무한한 하나님이,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기 계시네.
살아 계시고 진리이신 하나님을 흠숭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 마음은 깨끗하네. 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의 생명에 깊이 참여한다네.
그리고 그때 그가 느끼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함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그가 아무리 불행한 처지에 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네.
그런 마음은 이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자리할 수 없어
비어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가득 차 있다네.
그런 마음은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네.
그런 깨달음에서 모든 평화와 모든 기쁨이 얻어지네.
그러므로 마음의 성덕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을 통해서 얻어진다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노력을 요구하시고
당신께 충실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맞아. 그럼에도 성덕은 자아실현 중에 얻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성덕은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하고,
완전히 비워진 자신을 인정하는 것일세.
그 빈곳을 하나님은 바로 그만큼 채워주시고
사람은 그분께서 채워주시는 것에 마음을 열면 된다네.">
우리도 역시 때로 레오 형제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완전해지길 원하고,
자신의 불완전함과 문제에 완전히 몰두한다.
죄나 자책감에 완전히 몰두한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바꿔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이
얼마나 강력한 변화의 힘을 가져다주는지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지속적인 의식과 신뢰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인간을
정화시키고 고양시킨다.
나타나는 죄를 보며 자신이 정결하다는 인식이 깨지고
마음에 걱정, 불안이 온다면
이는 여전히 자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고 그런 불신앙 속에
긴장과 압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의 의에 서 있음을 깨닫고
얼른 그 높은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라.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더 변화되고 더 정결해져 봤자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그것으로 어찌 완전하신 하나님의 용납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봤자 어둠이 아니런가..
나에게 주님이 계셔 빛을 발하면 되지
내가 빛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내 의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의에 서지 않는다. 주님만 의로우시면 된다.’
늘 자신이 변화되어 하나님 앞에 정결한 자로 살기를 꿈꾸지만
자칫 그것이 헛된 욕심인 줄 모른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정결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구원이란, 또 신앙이란 죄인에 베풀어진
주님의 값없는 은혜이지 행위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은 결코 그 자신에게서 정결하고 깨끗한 것이 나올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존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나아가 인간 그 자체는 어둠일 뿐이어서
그는 빛을 받아 행복한 존재이지
결코 빛이 되어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 믿기 전부터 믿은 후 영원까지
인간 그 자체는 변함없이 어둠이다.
인간적으로 조금 잘하고 못하고는 있을 수 있으나
그 근본은 여전히 변함없는 어둠이다.
인간은 은혜로 살 수 있을 뿐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내가 조금 낫다든가 조금 못하다든가
그런 비교의식은 아무 쓸 데가 없다.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인식 자체가 벌써 얼마나 나 자신을 의뢰하는 상태이런가..
나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지옥이런가..
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정결한 것이 나오기를 바라고,
정결한 자가 되고 싶고, 그 심중에 늘 자신이 변하기를 고대하고..
그런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벌써 자신은 영원한 어둠인 것을 잊고 똥이 변하여
아름다운 꽃이 되는 것과 같은 헛된 망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어둠에는 빛이 비추지만 빛에는 빛이 비출 수 없다.
인간이 정결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잘 되리라 여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다.
홀로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 그 근본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인간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까지 어둠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은
그런 어둠인 나에게 빛으로 와 계신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 빛이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정결이 되시고 우리의 의가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나를 변화시키려 애쓰지 말라.
그러면 긴장, 불안으로 마음이 어두워진다.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둠일지언정 그리스도만 내게 계시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물러나고 내 안이 환해진다.
나를 보지 말고.. 내 어떠함도 보지 말고..
초점을 나에게 맞추지 말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라.
내가 이렇게 되고 싶다고.. 내가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변화되고 싶다고 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것 같지만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주체가 되고 내 노력이 나타나고 내 의가 나타난다.
그러면 긴장하고 불안해진다.
그냥 주님 안에서 나는 어둠으로 그분은 내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그렇게 그분과 함께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
때로 구석 여기저기 희미하게 남아있는 어둠에 불결함을 느껴
이를 자신이 처리하려고 다가서지 말라.
그런 나를 비워야 주님으로 채워진다.
그것은 빛의 영광을 위해 주께서 남겨두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어둠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그 마음은 깨끗하다.
그러니 어둠에 긴장하지 말고 그것을 주님께 맡기고 안식하라.
자신의 어둠이 보여 마음 상하거든
차라리 고개를 돌려 주님의 부드럽고 고요한 눈을 보라.
그리고 그분의 따스한 사랑의 마음에 기대어 편안히 쉬라.
그러면 그분이 일하시고..
마음에 상처를 주던 어둠은 어느 새 물러가고 환해진다.
이것이 은혜로 사는 삶의 방식이다.
태생부터 어둠인 나인데 내가 어떠면 어떤가..
나는 죄가 많아도, 더러워도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빛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주님만 의로우시면 된다.
어차피 신앙은 내가 어떠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그분이 어떠하신가..
그리고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의 문제다.
신앙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심을 느끼는가..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 그분이 나의 전부이신가..
내가 그분과 얼마만한 친분과 신뢰를 지니고 있으며,
얼마나 마음의 교제를 깊이 나누며,
또 얼마나 그분이 나를 점유하고 계시며..
얼마나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런 갈망이 내게 있으며.. 또 얼마나 그분이 내 안에서 편안하시며..
얼마나 그분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 등 이런 것이다.
반면 내게 죄가 많이 나타나고
얼마나 더러우며 악질이고 치한이고 똥이고..
내가 얼마나 간사하고 이기적이고..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욕심과 치사함과 쾌락을 탐하는
마음과 자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이런 것은 인간적 관점일 뿐 문제꺼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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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본래 인간 자체는 태생부터 어둠인 만큼
아무리 애써도 죄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스스로의 노력에 기대이지 말고
오직 빛이신 주님이 임하시기를 갈망해야 한다는 것,
그 갈망이 내게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신앙은 내가 어떠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이 어떠하신가.. 내가 그분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런 것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얼마나 더러운지 등에 상관없이
주님만 의로우시면 되고
그러면 한 분 주님의 의로 인해 그분 안에 있는 자
모두 깨끗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죄에 골몰하지 말고
빛 되신 영광의 주를 바라보며 그 은혜 안에 살라고 가르친다.
내용의 흐름으로만 보면 이러한 생각은
일견 그럴 듯하게 여겨지고 퍽 매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글 안에 많은 오류들이 있다.
교회의 근간이 되는 교리가
기본부터 잘못 설정된 채 출발하기 때문이다.
(카페 메뉴 중 ‘기독교의 잘못된 속죄교리’ 에 올려진 글들 참고)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죄 문제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는 협력을 무시한 채
주님 은혜의 역사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저 글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신앙에는 실제와 허상의 구별을 혼동케 하는 두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이해성의 깊음과 그 날카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진정성과 감정의 뜨거움이다.
즉 그들은 악과 거짓을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삶은 없이
그들 자체의 화려함만으로도 넉넉히 천국에 거하고 있는 양
거짓된 빛으로 신앙인의 눈을 가린다.
특히 마음의 진정성과 감정의 뜨거움은
인간의 애정 계열에 속해 있는 까닭에
이해가 의지로부터 분리되어 많은 경계를 받는 것과 달리
아무런 경계도 없이 선뜻 선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워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진리에 대한 이해성이 아무리 깊고 날카로워도,
또 애정에서 나온 주님을 향한 사랑이
아무리 순수하고 뜨겁게 느껴져도
그들이 궁극에 의지를 통한 삶으로 표현되지 않는 한
그의 영혼을 오히려 상하게 할 뿐이다.
신앙이 자신의 진정성과 감정의 뜨거움에 의존될 경우
오직 모든 관심을 한 인물로서의 주님께 맞추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인 양 인식하게 된다.
한 분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 뜨겁고 열렬한지,
그리고 그분을 향한 그리움과 갈급함이 얼마나 사모 치는지..
이런 것들이 신앙의 모든 것으로 인식 되어 있는 까닭에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로써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경시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그토록 갈급함으로 기다리던 때가 이르러
마침내 주님이 임하시면 그분의 현존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해결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때 성령의 강한 빛에 감화를 받은 영혼은
그동안 칠흑 같은 어둠에서 이제 환한 빛 가운데로 나와
주님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기쁨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런 설레임과 기대감 속에 언제 주님이 오실지
그때를 애타게 기다리다 보면
주님을 향한 그의 그리움과 갈급함이 더해지고
그럴수록 스스로 자신의 진정성과 감정의 뜨거움에 취해
인간의 모든 더러움은 기억에서 까마득히 사라지고
주님만 더 높이 영광이 되신다.
그리고 그런 것이 실제적인 신양인 양 느껴지고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영혼을 기쁘게 하고 삶의 평안을 넘치게 하기에
그와 같은 신앙의 길을 가는 자는
‘주님만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면 된다.’ 라는 가르침 등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악과 힘들게 투쟁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며 그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위해 자신의 죄악을 버려야 한다고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경고하건만
위에 인용한 글은 이 가르침과 달리
인간이 보기에 아름답고 가슴 벅찬 길을 발견하고는
감동과 눈물로 한 인물로서의 주님과 달콤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은
이해성의 깊음과 그 날카로움에만 의존된 신앙이 그렇듯
인간적인 마음의 진정성과 감정의 뜨거움에만 의존한 신앙이어서
천국의 빛으로 보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천국에서나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길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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