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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신선봉 ( 596-845m : 충북 제천)
*일 시 : 2005. 6. 5(일), 제30차(13명), 날씨(맑음)
*코 스 : 하학현 금수산가든-미인봉 입구 안내판-수리봉골지능선-미인봉-545봉
-680고지 삼거리(학봉)-774봉-묘지-835봉-신선봉-야생화군락지대-사태골계곡
-상학현리농산물직판장(버스 종점)
*소 시 : 오전 9시 25분 ~ 오후 2시 55분 → 총 9Km (소요시간 4시간 30분)
미인봉과 신선봉.
지난 산행기를 훑었더니 미인봉은 1999년 4월 18일(학현3교-도화동천-반석지대-큰궁둥이 바위-조가리봉-널적바위-저승봉-손바닥바위-암반지대-안부-정방사-능강교 ; 4시간 40분소요)에, 신선봉은 1차 답사(1997. 6. 15)와 2차 산행(1997. 6. 22 : 제천시 학생수련원장-말바위-손바닥바위-전망대-정상-동금대-상학현-학생수련원) 기록이 보인다. 당시엔 두 개의 산을 각각 분리해서 올랐고, 오늘은 두 개를 산을 다이제스트로 꿴 산행이다.
각설하고 미인-신선봉은 정녕 오랜만의 반가운 邂逅다.
미인봉(저승봉) !
충북 제천시와 단양군 매포읍과 郡界를 이루는 금수산 줄기인 신선봉에서 서쪽 청풍 도화리로 뻗은 지능상에 위치한 산이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 위치한 조가리봉(까리봉)-미인봉-학봉-신선봉은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산세는 전반적으로 굴곡이 심하고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진 암릉부분이 육산부분을 앞선다. 암릉에 박힌 고색창연한 노송군락은 식재한 분재를 연상케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수려함에 발길이 오래도록 머문다.
암릉에서 내려다보는 충주호 전망은 가히 극상이고 환상이다.
과거에는 미인봉을 일명 저승봉이라 불렀는데 이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마을사람들이 이 협곡에 들어서기만 하면 돌아오지 못했다하여 그 골짜기를 저승골이라 부르고, 정상을 저승봉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그 하나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옛날 멧돼지가 많이 오르내렸다 하여 돼지 <猪>자와 오를 <昇>자가 합쳐 '저승봉'이라 명명했다는 猪昇봉이다. 저승봉의 저승이 死者 마을과 동음이라 꺼름직한 이름이라 언제부터인가 <美人峰.>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정상에 걸린 표지에도 미인봉(저승봉)이라 쓰여 있어 이제 저승봉은 死名化 되어버렸다.
처음엔 다소 어색하게 들리더니 개명한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은 퍽 자연스럽게 들린다. 이름이란 이렇게 사람은 물론 자연까지도 그 원초적 의미를 바꿔놓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신선봉 !
충북 제천시 청풍면 학현리와 수산면 능강리 사이에 솟은 산으로 작성산과 동산 사이 서북쪽 청풍 방면으로 뻗어 내린 ∋字 형태로 그 줄기 모두가 충주호에 침몰하는 俗離와 비경지대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암릉 코스가 일품인 神仙봉은 산자락에 비상하려는 학을 닮은 바위가 있어 일명 “鶴峰 바위”로 불려 마을 이름인 ‘학현리’도 이 鶴바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신선봉 일대가 온통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자락으로 조각공원을 연상케 할 정도다. 바위 이름도 킹콩바위-손바닥바위-못난이바위-물개바위 등 유머러스한 이름의 바위들이 즐비하여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산행 들머리가 되는 학현리는 제천시-청풍 間 남북으로 연결된 597번 도로를 타고 성내리를 지나 청풍대교 직전에서 정동방향 90도 각도로 우회전해 들어선다. 우회전하는 입구에는 커다란 자연석에 학현리를 알리는 石碑가 우람하게 서있고, 영아치 고개를 숨 가쁘게 오르면 十勝之地로 꼽아도 손색없는 학현계곡이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좌측의 동산과 우측의 저승봉 사이 암골로 둘러싸인 움푹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이곳을 혹자는 이곳을 소금강산이라고 부른다. 곳곳에 널려있는 기암 노송이 6월의 푸르름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천혜의 요새로 이승이 아닌 俗離 마을이다. 마을 북쪽에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북쪽 동산에서 서남쪽으로 내려 온 능선 사이에 있는 ‘모래재’와 ‘중고개’ 사이에 있는 옛 성터를 기준으로 ‘작은 성안’이라 하고, 학현리 분지를 ‘큰 성안’이라 이곳 주민들은 부른다고 한다.
들머리는 대략 3군데로 정리된다.
첫 번째는 제천에서 82번 도로를 따라 남향, 금성을 거쳐 청풍대교 500미터 직전 좌측의 <제천학생야영장> 입간판을 보고 좌회전하여 영아치 고개를 넘어 2km를 가면 금수산가든 맞은 편 우측 도로변에 미인봉안내판에서 시작하는 코스다.
두 번째는 학현 3교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여근석이 있는 미인봉(저승봉) 안내 표지판에서 출발하는 곳과, 학현교에서 2.5km 동향해 제천학생야영장(학현슈퍼) 우측에 세워진 ‘신선봉’ 표지판을 보고 오르다가 만난 임도를 따라 신선봉으로 오르거나, 아니면 예서 저승봉으로 가려면 산 입구 리본이 많은 곳에서 우측으로 간 후 나무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미인봉-신선봉 갈림길 표지판에서 우측으로 가면 된다. 우측 아래로 좁은 시멘트길 입구에 산악마라톤코스라는 팻말이 세워져있다.
세 번 째는 청풍대교 3거리에서 좌측으로 꺾어 도화리 도화교에서 내려 도화동천 입구 조금 지난 지점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조가리봉으로 올라가는 코스다.
어느 코스나 모두 급경사 오르막이지만 그 중 도화교에서 오르는 세 번째 코스는 다소 부담스럽고, 학현3교-금수산가든에서 미인봉-학봉으로 산행하거나, 학생야영장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다소 편하다.
당초 계획은 세 번째 코스였으나 기온을 감안한다면 6~7시간 산행이 된다. 결과적이지만 오늘만큼은 다이제스트 코스가 천만다행이었고, 선택한 들머리는 첫 번째 코스다.
지난 5월 28일 토요일 오후 남한산 산행 후 중식 도중 타의로 마신 막걸리 한 잔에서 비롯된 소화기관 이상증세는 다음날인 29일 두위봉 산행을 어렵게 했고, 이것이 몸살이 겹친 종합감기로 발전하여 교실 위층계단을 올라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리만치 힘겨운 일주일이었다. 어제 토요일 아침부터 다소 호전됐지만 그 후유증은 당분간 지속되리란 예상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신체적 노쇠현상에서 나타난 결과로, 한마디로 ‘늙어간다’는 의미일 께다.
정신적-육체적인 과로에서 저항력의 쇠퇴가 뒤따르고 이를 감내 못하는 생체의 한계가 노정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누구나 겪는 필수적 과정이다. 이즈음에서 한 번쯤 뒤돌아보는 여유나 용기가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단거리 走者처럼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던 현재까지의 생활에 間隙이 생긴 것이리라. 그러하거늘 허락하지 않을 현안이 여전히 外傷으로 남아있다. 無대책이 대책이고, 無念이 眞念인지 혼란한 요즘이다. 성격이 따라가지 못하는 천연의 고통인가?
9시 25분.
반복하는 새벽의 분노를 곱씹으며 학현 3교 금수산가든 앞에 닿은 시각이다.
영아치 고개를 넘어서는 순간 刮目相對의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죄악처럼 불신을 반복하는 인간세상과, 정확한 신뢰를 주는 자연과의 차이를 생각하는 처연한 지금이다. 어느새 유상, 무상한 세월은 흐름은 2005년 절반을 꺾은 6월의 초입이다. 당초 계획했던 도화교-도화동천 부근 제일강산 휘호가 있는 수백 평 너비의 반석지대 좌우에 큰 바위에 음각된 시가 떠오르는 미인봉의 상징이 불현듯 떠오름은 憤怒의 稀釋이리라.
第一江山, 吹笛臺
明月淸風 吹笛臺 幾年無主 待人來
奇巖怪石 名言刻 爲是靈區 曲曲開
손님을 기다리는 기암괴석의 주능선을 향해 들뜬 행보를 시작했다.
노변의 입간판 안내도를 일별하곤 이내 리본이 무수한 들머리 숲속으로 빨판에 흡착되듯 빨려 들어갔다. 꼬리진달래와 노린재 새잎이 유독 시선을 자극한다. 先登한 그룹산행꾼들을 만났다.
예상대로 두 다리에 뻐근한 통증이 전신에 전달되며 온 몸의 힘이 새어나간다.
시차를 두고 회복되리란 신념 하나로 우직하게 내딛는 발끝에 맺힌 진땀은 어느새 구슬땀으로 변했다. 박관례씨가 새벽에 든 식사가 다소 어려웠나보다. 안색이 변한 그가 소화제를 먹는 동안 시작부터 가팔랐던 오르막에서 잠깐의 머무름을 가졌다. 심호흡으로 전신을 조율하는 시간이다.
09시 55분.
지능선 안부에 올랐다. 산새소리를 간주삼아 내려다본 좌측의 수리봉골과 우측의 산지당골 계곡이 오늘따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늪으로 보인다. 학현3교를 통해 오르는 지능선상의 큰 궁댕이바위-조가리봉 등 기암이 빠진 것에 대해 홍기오대장이 다소 서운한 표정이다. 그러나 835봉에 이르는 구간에 펼친 암릉구간을 맞으면 생각이 달라지리란 확신이다.
10시 4분.
작은 암봉에 소나무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전망대 넓적 암반이다.
비로소 서쪽의 영아치에서 동쪽의 갑오고개로 연결된 포장도로가 확연하게 들어온다. 19976년 당시 초등학교 분교터(학생야영장으로 변함) 앞 김충성씨 농가를 구심점으로 신선봉을 올랐던 당시의 그림 대신 지금은 미끈하게 닦여진 지방도로가 산뜻한 여인의 가르마처럼 다가오고, 그 지점에서 약 5~600m 동쪽 신설된 농산물집하장을 중심으로 작은 타운이 형성된 시외버스 버스종점에 주차한 두 대의 관광버스가 보인다. 그 중 한 대는 우리들을 기다리는 김기사님의 버스다.
10시 8분.
미인봉(저승봉)에 닿았다.
정상임을 알리는 미인봉이라 쓴 표지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있다.
그리고 그 아래 놓인 두개의 바위모양이 이채롭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개의 사발을 엎어놓았거나, 풍만한 여인의 젖무덤이거나, 또 엉거주춤한 상태애서 허리를 구부린 여인의 궁둥이 같아 보인다. 약 15분간 후미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북쪽 방향으로 급박하게 깎인 암릉 아래로 상, 하 학현리 전체가 들어온다. 서북쪽 아래 계곡은 듣기에도 거북한 저승골이다. 계곡을 타고 상승하는 여름바람에 온 몸을 맡겼다. 북쪽 학현골 위로 작은 동산-큰 동산줄기가, 충주호 건너 서북쪽의 옥녀봉-부봉 줄기가, 서남 방향 영아치 너머로 남쪽으로 이어진 충주호는 渴水期다. 호수 가장자리는 수량이 줄어 하얀 백태가 보기 흉한 몰골을 보는 기분이다. 충주호 너머 매봉-관봉 줄기가, 그리고 그 끝자리에 문수봉-하설산-월악산 영봉이 선명하다. 동남쪽으로는 금수산 아래로 사봉 일대와 도락산 일부가 잡힌다. 정방사 계곡과 학현리 계곡을 경계로 미인봉-신선봉 줄기가 석 三자 형태다. 자연은 일체의 제 속살을 쉽사리 내보이지 않나보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경지가 되려면 자연을 꿰뚫을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개명한 이름의 美人봉에서 생각한 美人에 대한 小考다.
민족별로 미인에 대한 기준들이 다양하다.
아프리카의 어느 소수민족이 추구하는 미인의 기준이나 동남아국가의 미인, 그리고 서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의 미인기준은 상상을 초월하라만치 그 시각과 기준이 판이하다. 또 지역에 따라서 이상적인 여성상도 다르다. 아프리카의 오지마을은 입술 크기로, 심지어는 몸에 있는 흉터로, 태평양의 섬나라 남자는 뚱뚱한 몸매로, 미얀먀의 한 부족은 긴 목이 여성미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생각한 전통적인 미적 기준은 쌍꺼풀이 없는 작고 가는 눈에, 복스럽고 약간은 퍼진듯하지만 둥글둥글한 코, 얼굴은 보름달 같이 둥글고 희며 뺨은 통통하고, 입술은 앵두처럼 붉고 탐스러워야 하며 버들가지와 같이 가는 허리에 도툼한 젖무덤, 푸짐한 엉덩이를 가져야 최고의 미인으로 보아왔다. 곧 건강하고 풍만한 여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우리 농업사회에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多産이 필요했고, 또한 가사노동을 위해 건강과 풍만함은 미인의 필수 조건이었다. 동시에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현모양처'를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했다.
동서양의 미적 기준에도 현격한 차이다.
서양의 미의 기준은 얼굴이 갸름하고 광대뼈의 윤곽이 선명하며, 적당한 크기의 코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눈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서양인들의 골격 구조와는 약간 다른 미인형이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광대뼈와 턱뼈가 튀어나온 여자는 팔자가 사납고 억세 보이는 인상이라 시집가기에도 과히 좋은 인상은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서양에서는 이런 여자를 미인으로 삼아 영화나 광고에 출연시키고 미인 대회에서도 이런 기준으로 미인을 선발한다.
문화와 관습으로도 미인의 기준은 달라지지만, 전통 사회에서의 미적 기준과 달리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변화했다. 최근엔 크고 쌍꺼풀진 서글서글한 눈에 오뚝한 코, 작은 턱과 작고 갸름한 얼굴형 등 서구적인 미를 지향한다.
요약하면 현대적인 미인의 기준은 날씬한 몸매와 작은 얼굴이다.
예로부터 동양3국(한-중-일)은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30가지 조건을 구비했을 때 美人으로 꼽았다.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상통하는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상충하겠지만, 미의 조건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내용을 바라보는 시선에 무상함이 따른다.
①三白(살결, 이빨, 손) : 세 가지가 흴 것
②三黑(눈동자, 속눈썹, 눈동자나 또는 머리카락) : 세 가지가 검을 것
③三紅(입술, 볼, 손톱) : 세 가지가 붉은 것
④三長(손, 머리, 팔다리) : 세 가지가 길 것
⑤三短(이빨 ,발길이, 귀) : 세 가지가 짧을 것
⑥三廣(가슴, 이마, 미간) : 세 가지가 넓을 것
⑦三狹(입, 허리, 발목) : 세 가지가 좁을 것
⑧三太(엉덩이, 허벅지, 젖) : 세 가지가 클 것
⑨三細(손가락, 목, 콧날) : 세 가지가 가늘 것
⑩三小(젖꼭지, 코, 머리팍) : 세 가지가 작을 것
또 보정에서 기피하는 여성상에 7殺9忌가 있는데 그 중 7殺만 열거해 본다.
1殺(얼굴이 크고 입이 작은 상).
2殺(콧잔등에 주름이 잡힌 상).
3殺(귀에 홈 줄기가 없는 상)
4殺(얼굴색이 은빛으로 고운 상).
5殺(머리가 검은데 눈썹이 성긴 상).
6殺(눈동자가 크고 눈썹이 조잡한상).
7殺(눈의 흰 창이 노란 상).
미인봉에서 사위를 바라보다 문득 미인에 대한 잡다한 생각을 흥미삼아 옮겨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한다면 현대적 미인상은 육체적 조건도 그러하지만 보다 심리적-내적조건에 치중하고 있다. 지론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는 미인과 같이 사는 사람이다. 미는 그 유효기간이 짧고, 한계를 쉽게 노출한다. 미인에겐 이내 싫증이 나고 멀리하게 되는 것이 남자들의 일반적인 심리다.
사려가 깊은 여자의 마음, 은근한 끈기와 흡인력이 강한 여인의 내면이 한 남자를 평생 옭아매고 머무르게 하는 최대무기다. 그런 여성적인 마음이 영원히 우리들은 인도한다는 세익스피어의 警句를 생각해 보는 미인봉 정상에서 나온 잡다한 橫說竪說이다. 행여 女性卑下나 성차별을 염두에 두고 지껄인 말이 아님을 蛇足처럼 남긴다.
이런 의미에서 神의 분배원칙은 대단히 공평무사하다
그런 여인을 만나지 못한 이 땅의 허다한 불행한 남성들을 위해 건배하자.
건배의 구호는 간베이(乾杯)가 아니라 悲夫(페이 푸=슬프도다)!
그리고 미인봉이여, 영원하라!
일행이 합류하자마자 모든 잡념을 뿌리고 이동하는 능선이다.
미인봉에서 동쪽 주능선에 내려서자마자 맞는 얕은 경사도의 너른 암반이다. 북쪽방향은 여전한 수직암벽이다. 일행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넣기에 아프지 않을 좋은 배경지점이다. 색다른 조망을 함께하는 훌륭한 장소다.
암반을 따라 동쪽으로 바로 내려서는 지점은 초심자에겐 다소 무리다. 암반 남쪽으로 우회로가 있다. 잡목이 하늘을 가린 포근한 숲 터널 오솔길이다. 그 동안 절여진 땀을 식히는 시원한 코스다.
10시 35분.
<미인봉 0.5Km>
미인봉을 떠난 500m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오늘은 절기상 芒種이다.
망종이란 보리나 밀처럼 까끄라기가 있는 작물이다. 까끄라기가 있는 보리를 수확하는 계절이다. 망종이 음력 4월에 들면 보리농사가 잘 되고 늦게 들면 나쁘다고 했다. 오늘은 음력 4월 29일인 말일이다. 망종까지는 보리를 베어야 논에 벼도 심고, 밭 갈아 콩도 심는다.
망종을 넘기면 모내기가 늦어지고, 바람에 보리가 넘어져 수확하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보리는 "씨 뿌릴 때는 백일, 거둘 때는 삼일"이라 할 정도로 시간이 촉박했다. 이즘의 우리네 農程은 때론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 별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온다."는 말까지 생길 정도로 숨 가쁜 시기다. 보리나 밀의 수확에 이어 모내기가 연이은 이맘때의 바쁨을 일러 "발등에 오줌 싼다"는 말도 생겼다. 그래서 망종 때는 농사일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져 일을 멈추는 것을 잊는다고 '망종(忘終)'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지금은 잊었지만 농경사회가 안았던 농번기의 최고 절정이며 시작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 20% 안팎이라는 수치를 보노라면 격세지감 이전에 식량부족국가로서 안아야 할 우리네의 흐린 미래는 만시지탄에 머물고 있다. 모든 공업선진국은 식량자급확보를 우선 한 후에 공업사회를 덧씌운다. 이것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기본적인 국가운영상의 질적인 차이다. 망종이란 절기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대비하며 생각해낸 長歎息이다.
곧바로 내일은 顯忠日이다.
1956년 4월 19일, 대통령령으로 현충일(6.6)을 공휴일로 정한 이래 반세기가 지났다. 나라를 위하여 희생한 순국선열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희생한 전몰호국용사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는 날이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작지만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의 날이다.
우리의 세시풍속의 하나인 음력 7월 보름의 百中[百種-中元, 또는 亡魂日]이 현충일과 유사하다. 百種은 이 무렵에 여러 가지 과실과 채소가 많이 나와 '백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 놓았다고 하여 유래된 말이요, 中元은 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서 이 날에 天上의 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 데서 연유하였다. 또한 亡魂日이란 亡親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술·음식·과일을 차려 놓고 薦新을 드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사가에서 망친을 위한 제사로도 이용했지만 조정의 입장에선 순국한 망혼들의 넋을 기리는 날이다.
*삼원(三元)
上元인 하늘, 中元인 땅, 下元인 물을 가리키거나, 세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한다. 三才, 三始, 三極이라고도 하는데, 관상에서 이마-코-턱을 이름
10시 58분.
545봉 돌올한 암봉에서 후미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119표시판, 금수산-07(043-119, 648-0119) 제천소방서장>
일행들이 권하는 냉동막걸리를 보자마자 귀신이라도 만난 듯 질겁했다.
저놈 때문에 물경 8일간 艱苦한 시간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아무튼 암봉에 올라 입맛에 맞는 술잔을 기우리는 여유는 분명 2品에 해당하는 酒席이렸다.
오늘의 분위기가 和氣靄靄라는 단어도 충분한 표현은 못 된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평화로운 천상의 시간이라는 의미다.
이정표가 걸린 쉼터를 지났다.
<미인봉 1.2Km, 신선봉 2.2Km,>
<금수산전국산악마라톤대회>
황색리본이 다른 산악회 시그널과 함께 달려있다.
우리들이 시작했던 들머리 부근부터 까리봉-저승봉-학봉-신선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구간 전체가 산악마라톤 코스로 잡혀있다. 산악마라톤 코스규정은 총 23km정도로 5시간 내에 완주해야 한다고 하며, 14.6km의 단축코스(4시간이내완주)도 있다. 칼날같은 암릉구간을 마라톤 코스로 잡은 것이 퍽 재미있다는 생각이다.
학현리 일대에서 들려오는 개들의 짖음이 퍽 가깝게 들린다.
나무사이로 후비고 지나가는 爽風이 최상의 컨디션을 이끌고, 그 동안 미진했던 컨디션이 되살아나고 있다.
11시 5분.
암릉의 시작이다.
기암괴석과 아기자기한 암릉은 변화가 많아서 좋았다. 그리고 까다로운 지점마다 걸린 로프를 잡고 이동할 때마다 경험하는 적당한 스릴은 지루함을 잊게 해주어 좋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방통행의 암릉 로프코스엔 對向하는 산꾼들이 기다려주는 예의가 더없이 미쁘고 곱상하다. 암릉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인고의 세월도 그렇거니와 그렇게 만든 조화의 자연미가 더 매력적이다. 천착(穿鑿)하는 암릉의 즐거움에 讚歌라도 지어보고 싶은 현재다.
11시 38분.
<119표시판, 금수산-08(043-119, 648-0119) 제천소방서장>
후미를 위한 약 27분간의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행동식과 객담이 오가는 풋풋한 자리다.
달포 전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진급했다는 정묵연 선생님의 부군 오정호씨의 얘기가 한참 이어졌다. 그리고 강영성 이사님의 內子 이근자씨의 운전실수는 양념처럼 낀 산행의 落穗였다. 들머리부터 지지부진한 정재근감사님의 컨디션은 엉망이다. 대동한 홍기오대장님과 이성재씨의 수고가 뒤따랐다. 전체적인 행보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가족의 변화가 준 스트레스일까도 싶다. 오늘로 끝나는 컨디션이길 바랬다.
12시 5분.
무명 암봉이다. 우측 산록 수산면 정방사계곡이 樹海에 묻혀있다.
다른 등산객들이 암봉의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사방 전망이 괜찮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잠시 내려서는가 싶더니 이내 얕은 오름이다.
또 다른 작은 암릉지대다.
로프를 타고 오른 후 되돌아 본 거대한 암반 일부가 항문을 사이에 둔 둔부를 연상케 한다.
비슷하지도 않다는 중론이지만 나의 일방적인 시각은 궁둥이바위를 빠트린 집착의 결과가 빚은 착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1999년 미인봉 당시 큰궁둥이-작은 궁둥이 바위를 지나며 희죽거리며 은밀한 미소를 주고받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게 생긴 바위이름과 그 모양 자체에 대한 연상은 제각각이었다.
解剖學상 인체의 한 부분인 엉덩이와 궁둥이, 그리고 볼기로 구분한다.
많은 사람들은 동일어로 알고 있으나 사실 그 구분만은 명확하다. 엉덩이는 허리의 잘록한 곳에서 허벅지까지의 옆 부분과 허리 뒤 바로 아래 부분인 둔부(臀部)를, 궁둥이는 좌석에 앉을 때 바닥에 닿는 부분을 가리킨다. 영어로도 엉덩이는 Hip, 궁둥이는 the rump로 구분된다. 볼기(Buttocks)는 엉덩이와 궁둥이에 걸쳐 동그랗게 튀어나온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궁둥짝, 볼기짝이란 말은 있어도 엉덩짝이란 말은 없다. 굳이 수학적으로 그 크기를 비교한다면 '볼기〉궁둥이〉엉덩이'로 알면 쉬 이해가 된다. 인간은 영장류 193종 가운데 궁둥이가 튀어나온 유일한 동물이다. 선인들은 길짐승의 궁둥이를 '방둥이'라 불러 인간의 궁둥이와 구별했다. 인간의 궁둥이는 직립보행 때문에 발달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고 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 표시가 심장이나 가슴이 아니라 궁둥이 모양에서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작은 궁둥이 바위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호흡을 고쳤다.
다시 일어서 능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12시 10분.
미인봉-신선봉능선의 조망이 가장 확실하다는 학봉이다.
잠시 멈춰 그 동안 절인 땀을 씻었다. 이름 그대로의 학봉은 학현리(일명 학마을)에서 올라오는 지능선과 합류하는 삼거리다.
학은 예로부터 鶴․白鶴․胎禽․仙禽․野鶴으로 불리는 두루미과 두루미속에 속하며, 우리나라 일부지역에서만 겨울을 나는 귀한 철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두루미를 천년 만에 청학(靑鶴)이 되고, 다시 천년이 되면 현학(玄鶴)이 되는 불사조로 믿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청학은 지리산에 살고 있다고 전하며, 그 사는 곳을 청학동이라 하여 신성지역으로 꼽았다. 청학동은 모든 한국인의 이상향이다. 이렇듯 학은 이상향의 상징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담아있는데 이곳 학현리 일대는 그런 마을이다.
두루미는 또한 장수를 의미한다. 두루미처럼 오래 살려면 고상한 기상을 품고 탐욕이 절제되고 純眞無垢한 정직함과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을 가져야한다는 지적이다. 장수와 행복, 풍요의 상징인 학은 구름, 소나무, 불로초 등 모두 十長生과 관련해 인간의 소박한 열망을 표현하는 우리네의 민간속설의 주제로 膾炙한다
학현리에서 올라오는 지능선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내려다 본 그 지능상의 말바위-학바위-물개바위-못난이 바위를 만났던 1997년 뜨거웠던 여름 냄새가 물씬하게 풍겨온다.
낮은 능선과 암봉들이 좌우에 협시하고, 암릉과 능선의 산파고 아래 충주호가 아련하게 펼쳐있다. 북으로는 학현 계곡이 떠받히고 있는 작은 동산과, 병풍같은 성봉-중봉-동산능선이, 남으로는 금수산-망덕봉의 장쾌한 능선과 망덕봉에서 능강리를 거쳐 충주호로 빨려 드는 역동적인 곡선이 산상의 舞姬다. 학봉에서의 조망은 경탄만으로 끝난다.
이곳에서 비로소 신선봉능선의 다채로운 봉우리들이 일목요연한 骨體를 드러낸다.
잠깐의 조망을 마치곤 발 빠른 이동이다.
작은 손바닥 바위다.
능선은 험하고 가파른 암봉의 연속이다.
774봉,805봉,835봉을 넘어야 신선봉 정상에 닿게 된다.
그 중 가장 가파르고 힘든 774봉과805봉으로 잇는 능선이다.
갑자기 푹 꺼져 앉은 안부에 내리면 절벽이 가로 막는다.
경사 70~80도에 이르는 20m 크라이밍 지대라 불리는 암벽이다. 1997년 당시엔 突出되거나 쪼아낸 바위틈을 이용해 올랐었다. 지금은 튼튼하고 굵은 로프가 매어있어 초심자라도 부담없이 오를 수 있다. 끈적거리다가 아예 말라버린 땀 냄새를 맡으며 먼저 올랐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암벽을 올르면 무명무덤이 나온다. 올라서는 사람마다 무더운 입김과 뜨거운 호흡을 토해낸다.
12시 25분.
그늘이 없는 묘지에서 동쪽으로 20m 이동하면 잡목이 하늘을 가린 쉼터다.
일행들이 모였다. 무명무덤에 굳이 술잔이라도 올려야한다는 강성윤씨의 호들갑은 모두를 즐겁게 하려는 짐짓 행동이리라. 후미이행을 마중(?)하기 위해 다시 수직 암벽쪽으로 내려갔다. 암벽콤플렉스가 있는 후미일행을 위해 목청을 돋으며 응원했다. 산행은 누가 대신할 수 없다.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주파해야한다. 심호흡을 토하기 바쁜 그들을 그늘이 가린 쉼터까지 유도했을 땐 일부 일행들은 신선봉을 향해 자리를 떠났다.
12시 48분.
그들 나름대로 편안한 휴식을 맞도록 맡긴 채 신선봉을 향해 일어섰다.
이제부턴 긴장을 놓아도 되는 육산코스다.
12시 54분. 개념도상의 835봉이다.
<신선봉 1.2Km>
김충성씨 농가 뒤편으로 올라 와폭을 지나 올라오는 능선과 마주치는 삼거리 갈림길이다. 어른 팔로 한 아름 반이나 되는 노거수 老松을 직접 확인하는 강성윤씨의 적극성이 있었다.
예서 20분 안팎의 평온한 육산능선을 지나면 신선봉 정상이다.
완만한 수목림이 하늘을 가린 터널지대 길섶에 고추나물과 꼬리수염 새잎이 산뜻하다.
얕은 오르막과 내리막 숲 터널이다.
개념도상의 거대한 킹콩바위와 맞은편엔 바둑이 바위 지점이다.
마치 바둑이가 엎드려 따뜻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황홀한 쾌감이 낭자한 능성에는 평화가 넘친다. 교만했던, 그리고 분노의 마음이 스러지는 잡목터널은 잡념을 씻어주는 마력의 숲인가 보다.
심심치 않게 다른 등산객들이 눈에 뜨인다.
오후 1시 16분.
신선봉 정상이다.
<신선봉 835m, 충북 제천시, 학생야영장 2.8Km, 금수산 2.5Km>
산뜻한 오석에 새긴 정상표지석과, 정상 공터 정 중앙에 쌓인 돌탑위에도 정상표지목이 얹어있다. 그리고 그 아래 삼각점이 깊히 박혀있다. 정상표지석 옆 지름 10Cm의 상수리나무 줄기(높이 160Cm)를 잘라 그 위에 태극기를 꽂은 사람의 심사를 생각해봤다.
미인봉 정상은 그래도 북쪽조망이 가능했지만, 신선봉은 사방이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에 가려 조망이 불가능하다. 선두일행이 다른 등산객들과 섞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신선봉에서 만난 神仙이다.
長生不死術을 체득하여 속세를 떠나 산속에 살며 공중을 날 수 있는 이상적인 선인(仙人)을 신선이라고 한다. 중국 전국시대 말(BC 3세기) 산뚱반도를 중심으로 제(齊)·연(燕)나라에서 생긴 신선설이 그 뒤 음양가(陰陽家)의 설을 받아들인 방사(方士;신선의 도를 닦은 사람)에 의해 발전하고, 도가사상(道家思想)과 결합하여 성립된 도교(道敎)에 의해 신선사상이 정립됐다.
生者必滅의 인간의 숙명을 벗어난 不老長生을 갈망함은 인지상정이다.
속세를 떠나서 선계에 살며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한다는 신선의 존재를 믿고 그에 이르기를 추구하는 계층은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다.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신선이 되는 길은 험난하고 멀었지만 인간의 욕망은 安心立命의 신선이 되기를 끝없이 갈구했다. 그런 신선의 이름을 빌린 전국적으로 산재한 신선봉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북설악의 신선봉-월악산신선봉-소백산신선봉-충북괴산 연풍의 신선봉 등 신선의 이름을 차용한 신선봉에서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신선을 만나보는 기회를 가져보자. 신선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수백 년 수령의 노송과 기암괴석들과 벗하며 신선봉의 정상에 오른 각자의 보람찬 얼굴이 곧 神仙이고, 이곳이 仙界라는 확신이다. 상대방의 얼굴이 신선이요, 착한 표정 모두가 부처가 아닌가.
1시 38분.
일행들을 먼저 하산토록 종용하고 후미와 합류하여 정상 좌측 상학현리 방향인 내리막으로 접었다. 상학현리로 내려가는 길은 다소 가파르다. 내리막 좌우는 야생화와 산채밭이다. 가끔 산 더덕 향이 은근하게 풍긴다.
둥굴레, 자주 알록 제비꽃․철쭉․우산나물과 삿갓나물, 어수리, 개병풍, 각종 제비꽃, 개옻나무, 말나리, 개다래, 꿩의다리가 보인다. 시기가 다소 지난 취나물이 지천이다. 죄인이라도 됐는지, 아니면 수줍은 산 색시처럼 땅을 향해 만개한 숱한 흰 꽃의 쪽동백나무 총상화서가 환하다. 잎이 커서 넙죽이나무, 머릿기름이 나온다하여 山아주까리나무라 불리는 쪽동백 기름을 바르면 머리이가 완전박멸할 정도로 효과가 크다.
쪽종백 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다. 수피에서 나오는 액은 안식향 성분이 있어 방부제나 향료의 재료로 이용하고, 나이테가 안 보일 정도로 결이 곱고 속이 깨끗해 그림이나 글씨를 써넣는 화방도구로 사용한다. 쪽동백은 거꾸로 달린 鐘形의 열매가 때죽나무와 유사하다. 구분한다면 쪽동백은 잎 모양이 손바닥처럼 넓고 원형에 가깝고 뒷면에 털이 촘촘하고 총상꽃차례(원뿔모양)를 보인다. 반면 때죽나무는 잎이 타원형이고 뒷면 큰 잎맥에만 털이 있고 꽃은 2~5개씩 달린다. 쪽동백 흰 꽃이 동백꽃처럼 봉우리채로 장렬하게 낙화해 싸락눈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 쪽동백, 동백이란 이름을 말미에 붙인 이유가 나변에 있는 게 아니다.
2시 11분.
동금대 바로아래 사거리 갈림길 우측으로 터진 코스에 시그널이 숱하게 달려있다.
선두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 바닥은 질경이 밭이다. 질경이란 놈은 해발 1800m의 설악산 대청봉 일대에도 군락을 이루는 이름그대로 질기디 질긴 생존력을 과시하는 초본이다.
사태골 계곡에 내려섰다.
쥐오줌풀, 미나리아재비, 꿀풀, 흰 꽃이 만개한 산딸기가 지천이다.
끝머리 가까운 지점의 계류에서 땀을 씻었다.
신선봉에서 신선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속인으로 還俗하는 순간이다.
2시 55분.
학현농산물직판장 아래 상학현리 버스종점인 주차장에 닿았다.
상적벽해의 이곳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소 낯설고 얼떨떨하다.
갑오고개를 넘어 매포방향으로 뻗은 포장도로가 어디까지인지 확인을 못했다. 하학현 금수산가든을 출발해 미인봉 입구 안내판-수리봉골지능선-미인봉-545봉-680고지 삼거리(학봉)-774봉-묘지-835봉-신선봉-야생화군락지대-사태골계곡을 거쳐 상학현 농산물직판장 아래 주차장에 이르는 9Km 거리에 4시간 30분을 소요했다. 정상대로라면 3시간30분~4시간 코스라는 생각이다.
이글거리던 오후의 태양열을 가린 버스종점의 원두막휴게소 그늘에서 나른한 피로를 식히던 김기사께서 반긴다. 각자 오늘 산행내용들을 復碁하는 붉으라한 표정들 안에는 대견한 미소가 담겨 있다. 주차장 동북쪽 둔덕에 자리잡은 신아식당(043-645-9233, 조병찬)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약했던 식당의 주인내외가 반기며 후한 큰손의 덤을 마다하지 않았다. 푸짐했던 음식 앞에 만족한 식사시간이 오후의 태양볕 만큼 뜨거웠다. 오늘 개인적인 용무로 缺參한 오영삼이사님께서 평시 승차하던 이수교 승차지점까지 나와 아내를 배웅하고 손수 실려 주었던 커다란 수박덩이가 식후 디저트였다. 김기사께서 그동안 찬 물에 담아두었더라면 더 맛있는 수박파티가 되었을 것이란 아쉬움이다. 그렇더라도 훌륭한 후식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오후 3시 45분.
귀로에 올랐다.
오전 하행코스(중부-영동고속도로-여주휴게소-중부내륙감곡IC-38번국도-제천-82번 도로)의 되새김질이다. 중부고속도로 여주휴게소를 지날 즈음 반대편도로는 아예 긴 주차장이었다. 끝없이 긴 꼬리를 이은 주말연휴 차량행렬로 영동고속도로는 물론 전국고속도로가 몸살을 치르는 지금이다. 연휴를 피한 산행이었음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 덕에 상행도로는 막힘없이 시원하게 뚫려있다. 중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난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 들려 버스의 육중한 크기의 에어크리너 교환이 있었다.
아내의 안부가 걱정됐는지 吳이사님의 전화가 있었다.
그것도 본인얘기를 마이크로 전달하는 시간이었으니 양반이(?) 아직 못된 모양이다.
7시 15분.
서녘의 해가 아직 두어 뼘은 걸쳐있는 시각에 발산역에 내렸다.
동작대교-당산역-하이웨이주유소-88체육관 앞(이완원씨)-발산역을 지난 버스는 김포회원을 싣고 질주할 것이다. 2주 만에 들린 M주점에서 생맥주 두 잔으로 바짝 타버린 목 젓을 식혔다. 내일일정을 생각하며 주점의 문을 밀치고 나서는 발길에 오늘의 모든 무게가 실려 있었다.
*교 통 :
-버스[①동서울터미널~원주경유 제천간 10분 간격 운행
②서울 고속터미널 ; 제천행 고속버스, 40분 간격]
-열차[중앙선, 청량리역에서 1일 8회 운행. 제천에서 청풍행 시내버스로 학현리입구
-승용차[서울-영동고속도로-南원주-중앙고속도로 이용해 西제천IC-청풍문화재단지 방면 82번 도로-청풍면 교리마을-학현입구 좌회전-영아치고개(학현리)
중부고속도로-음성IC나 이천I.C-충주에 닿은 후 수안보 삼거리-36번국도-수산면 -597번 지방도로-청풍문화재단지-청풍대교-영아치고개(학현리)
*주변식당 : 청풍 관광농원(043-647-7201) 청풍 느티나무 횟집(043-647-0089)
팔영루 횟집(043-647-8632) 학현 관광농원(043-648-0470)
*숙 박 : 학현리 청소년수련장 앞 김충성씨 민박 및 식사(043-643-9941)
제천시[제천 관광호텔 043-643-4111, 설악장 여관 043-643-8861, 외 다수]
능강 콘도(043-648-0480) 淸風면 소재 각종 숙박시설과 민박으로는 낚시가든 043-648-0919) 잠박골가든(043-648-8118),
학현계곡 금수산 슈퍼민박(043-648-0470)
금수산민박식당(청풍면 학현리 043-646-7992), 금수산민박(능강리 043-651-2264), 능강리민박(수산면 능강리 043-653-7997)
*맛 집 :
-淸風 느티나무횟집(043-647-0089), 청운횟집(043-647-7748)
-금성면구룡리 손두부 전문식당[‘양화식당’(043-652-0177)‘청풍골순두부’(652-4748) ]
-상학현리 버스종점 : 신아식당(043-645-9233, 조병찬)
-
*기 타 : 관광(淸風 문화재 단지 043-642-7003)
*주변관광 : 청풍 문화재 단지(관리 사무소 043-642-7003)
이․에스 리조트 클럽(043-648-0480)
*살거리 : 청풍 생고추장, 제천사과, 금성 토종 흑염소중탕, 고본주, 박달재 한우고기, 수석.
*주변볼거리(제천시 제공)
<정방사>
연금수산(1,016m) 산자락 신선봉(845m)에서 청풍 방면 도화리로 가지를 뻗어내린 능선 상에 있는 정방사는 신라 문무왕 2년(662년)에 의상대사가 견성성불하기 위하여 창건한 전통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속리산 법주사의 말사다.
경내에는 법당과 요사, 현혜문 등이 있는데, 법당은 12간의 목조기와집으로 을유년(1825년)에 세워졌고, 요사는 5간 목조기와집으로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 또한 현혜문은 절의 정문으로 일주문이라고도 하고, 목조스레트집으로 1간 크기다.
관음보살상은 법당 안의 주존불로 높이 60cm, 어깨너비 30cm로 연대와 작자는 알 수 없다. 불상 뒤에 후불탱화와 법당 안에 신중탱화ㆍ산신탱화ㆍ독성탱화 등이 있는데, 모두 최근에 그려진 그림이다.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의상대 사가 세운 절로, 저승봉의 남서쪽 산중턱에 자리한 천년고찰 정방사는 신라 문무왕2년(662년)에 의상대사가 도통 후 절을 짓기 위하여 지팡이를 던지자 지팡이가 하늘을 횔 훨 날아 이곳에 꽃혀 절을 세우고 그후 증수한 기록은 없으나 1825년 지금의 불당을 보수했다고 사전(寺傳)에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산방사로 소개되었다.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특히 법당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청풍호는 삼라만상을 모두 잊게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또한 법당 지붕의 3분의 1을 뒤덮은 '의상대'라는 암벽이 있는데, 그 웅장함과 기묘한 모습은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청풍문화재단지>
청풍명월의 본고장인 이곳은 선사시대로부터 남한강을 이용한 수운이 발달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문물이 번성했던 곳으로 고려 충숙왕 4년에는 군으로 승격되고 조선 현종 원년에는 명성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어 많은 문화유산이 간직된 유서깊은 고장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4대 강 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 3일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 17일 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6천 평의 부지 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다.
청소년들의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매년 20만 명 이상 관광객이 몰리며, 지금은 85천 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보물 2점, 지방유형문화재 9점 및 생활 유물 2천여 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 잡고 있다.
<태조 왕건 촬영장>
제천시에 설치된 촬영장은 후삼국시대의 국제무역항이었던 당시의 개성 예성강(벽란도) 포구를 7인의 전문가로 구성된 고증위원회의 검증을 거쳐 복식, 건축양식, 언어 등을 재현하였다. 2000년 뉴밀레니엄 기획물로써 유일하게 자주적 민족통일을 이룩한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 궁예 등 당시 영웅들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기 위한 것으로 수변에 인접한 1만2천여 평의 부지에 초가집 28동, 수군관아 4동(기와집), 망루 2동 등의 일반시설물과 왕건군선, 상선, 일반한선 등 4척의 선박이 고증을 거쳐 건조되어 2000년 3월부터 촬영하여 매주 토·일요일 160 ~ 200회 방영할 계획으로 촬영을 하고 있으며 계속 시설을 확장하여 향후 10년간 KBS의 사극 촬영장소로 사용할 예정이다.
*의림지
지방기념물 제11호로써 삼한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저수지로 본래 "임지"라 하였다. 고려 성종 11년(992)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제천의 옛 이름인 '의'자를 붙여 "의림지" 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축조된 명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구전에는 신라 진흥왕 (540∼575)때 악성 우륵이 용두산(871m)에서 흘러 내리는 개울물을 막아 둑을 만든 것이 이 못의 시초라고도 하며, 그 후 700년이지나 현감 "박의림"이 4개 군민을 동원하여 연못 주위를 3층으로 석축을 해서 물이 새는 것을 막는 한편 배수구 밑바닥 수문은 수백관이 넘을 정도의 큰 돌을 네모로 다듬어 여러 층으로 쌓아 올려 수문기둥을 삼았고 돌바닥에는 "박의림"현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호반둘레 약 2㎞, 호수면 158,677㎡, 저수량 6,611,891㎥, 수심 8∼13m의 대수원지로 몽리면적은 289.4 정보이며, 보수 당시 수구를 옹기로 축조한 흔적이 발견되어 삼한시대 농업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는 수리시설 보다는 유원지로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데 경승지로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그리고 수백 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풍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겨울철 및 해빙기에 잡히는 공어(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어로 각광받고 있는 명물이다.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분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于勒)"선생이 노후에 여생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일명 제비바위, 연암, 용바위)와 마시던 물인 "우륵정"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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