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71살의 우리 아버지...
의사로부터 길어야 3개월밖에 못산다는 얘기를 듣고
부터 아버지께서 하시는 행동이 하도 기가차서...
우리 아버지 이야기 한번 해 볼랍니다.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고는 가슴이 미어 터질것 같아서...
좀 길지만 읽어 주시길...
아버지께서는1935년도에 고령군 덕곡면 백동(가야산 백운동 바로 밑 동네)
에서 태어나 덕곡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고령중학교를 졸업하셨지요
고령중학교를 졸업하시고 1953년도 19살에나이가 같은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고...
당시 우리집은 논 열댓마지기에 뽕나무밭, 무우 배추밭, 고구마밭, 감자밭, 정구지밭, 뽕밭...
등 등이 있었고 집터가 넓어서 울타리 내에도 상추밭, 고추밭과옥수수, 감나무,
가죽나무, 우물 등이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큰 황소도 1마리 있었고...
개울 건너 제일 큰 산 전체가 우리 산이었지요
(지금도 선산이지만...)부농은 아니었지만 밥은 굶지 않았답니다.
그후 아버지께서는 군대갔다 오시고 면사무소 근무,
마을 리장 등을 하시면서 농사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저는 1961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조회할때 마다 혁명공약을 들었지요.
제가 국민학교를 졸업할때 졸업생이 약 120여명이었는데
대구로 중학교에 진학한 사람은 나 혼자 였답니다.
나머지는 고령중학교와 고령여중, 그리고 수륜중학교에 갔고...
모두 합쳐야 10명도 채 안되지만...
할머니께서 제가 진학하는 걸 그렇게 반대하셨다나요?
(진학하면 아버지처럼 농사일을 하지 않을거라면서...)
그러나 아버지께서 기어코 할머니를 설득시켜 저를 중학교에 보내셨다고...
그후 아버지께서 어려운 시기를 겪게 되는데...
무슨 사업을 하신다고 계속 바깥으로 다니셨고...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으며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모두 대구로 이사를 나왔는데 내당동 때때만대이에 방두칸짜리 전세집을
얻었더군요
저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우리가 살던 시골집은 뜯겨서 성주군 수륜면 모동의 제실 짓는데 팔려갔다고
하고...
제 기억으로는그때 제가 좀 방황한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소중하고 아련한 추억거리로 남아있지만...
하여튼 그때가 우리 집안 전체가 어려울 때였던 것 같네요
그후 아버지께서는지금의 크리스탈 호텔(당시는 서부정류
장이었음) 앞에서채소 도매상 상회에 나가셨고...
그러다가 제가 제대를 하여 한전에 입사하고아버지께서는 현대공
원(할머니 친정집 재단)의 시립공원묘지 관리소장을 하셨고
그 연유로 해서 동산병원 영안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셨지요
그곳에서 정년을 마치고 퇴직하셨는데
1년후에 병원장이 다시 불러서 몇년을 더 근무하셨지요.
제가 아버지
성격을 좀 닮았지만빈틈없고 칼같은 성격은 반도 못따라 갑니다.
자기관리에 너무 철저한 분이시라...
지금 생각하니 당시에는 예전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상당히 폼나게 사신것 같습니다.
평소에 폼 잡으며 멋있게 사실려고 노력했으니까요
그래서 어디가나 호쾌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살리면서 좌중을 주도하셨지요.
자식 자랑도 많이 하시고...
(별로 자랑할 것도 없는데도 말입니다)그 무렵 제가 과장이 되고
야간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는데 아버지께서 등록금을 가끔 내셨지요
당신께서 가산을 버려서 저를 대학에 못보냈다고 생각하시고...
제가 석사학위를 받던날 석사모를 쓰시고 얼마나 좋아 하셨는지...
당신께서 졸업하시는 것처럼....
1993년도 2월...
이뿌고 인자하신 우리 어머니께서 향년59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 가셨습니다.
시골에 사실때 동네 잔치나 큰일이 있으면 단골로
초빙되어 일을 돌봐 주었다고 했습니다.
못하시는게 없었다고...
그리고 얼마나 이뻤는지...
그래서 혼자되신 아버지를 모시는 문제가 대두되었지요
장남인 내가 모시는게 당연했지만 여러가지로 사유로 내가 모시기
어려움이 있어 상의 끝에 바로 밑에 동생과 같이 살기로 했지요
그 대신 당시에 사업에 실패하여 집도 없이 어렵게 살던 동생이 아파트를 살때
아버지께서 갖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해서 전부 동생에게 주었지요.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으셨고 인근에 두루두루 동생들이 살고...
나는 발령나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 나니고...
그래서 나는 늘 형제들에게
소외된 기분을 느끼곤 했답니다.
제사때나 명절때는 친척분들께 면목이 서지 않았고 종손이면서
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있으니 말이요
이 때문에 제가 술이 만취했을때 와이프에게 못할 말을 많이 했지요
"니가 한게 뭐있냐" 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부터
아버지의 그 괄괄하던 목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더군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이 스치고...
그때부터 향교에 나가시면서 유교에 심취하셨고...
劉씀쓰기 시작했고...
그래서 관혼상제에는 누구보다 밝으시지요...
붓글씨는 제가 보기에도 상당한 경지 도달한 것 같고...
그리고 문자 메시지, 이메일을 보내는데...
우리 가족과 친척들(와이프, 아들, 동생, 삼촌, 숙
모...등등)의 생일을 미리 알려주곤 했지요
예를 들면 "내일은 민호 에미 제 50회 생일이다.
잘 챙기게...
" 이런 식이지요
최근 곽병원 노인대학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고 부터는
그곳에서 이메일을 배웠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사연을 보내는데
동영상과 함께 글씨가 밑에서 위로 스~윽 올라오는데기가 막힙디다.
저보다도 수준이 높지요.
2005년 1월30
일(일요일) 동산병원 5205호실...
아버지께서는 평생을 기관지 천식으로 앓고 있었답니다.
1년에 한두번은 1주일씩
입원치료를 해왔고...
그런데 최근 급속도로 호흡이 곤란하고 기침이 많이 나와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가 아주좋지 않았답니다.
검사결과를 아버지에게는 숨겨왔는데 아버지 께서 눈치를 채시고
의사에게 직접 물어서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갑자기 아들 3형제와 3며느리가 소집되었지요
아버지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모두 잘들어라.
조금전에 주치의한테 들었는데...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는 얘기)
내일 1월31일(월요일)에 퇴원 오더를 떼달라고 했다.
" 우리들: ".....
"아버지"너희들이 서울에 더 큰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을
비롯해서 온갖 궁리를 다 하는것도 알고 있는데...
나는 절대로 병원침대에서 링겔꼽고, 고무호스 코에, 입에 끼고
그렇게 가지는 않을란다...
수도 없이 그런걸 봐왔기 때문에 내가 죽을때는 절대로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겠다고 다짐해왔다...
"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왜관 5촌 아제도 병원에서 길어야 6개월 하셨는데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건강하게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무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마시이소...
"아버지: "바로 그거다.
병원에서는 절대로 그런 기적이 안 일어 나가서 좋은 공기 쐐고, 운동하고...
편안하게 지내다 보면 또 기적이 일어날수도 안 있겠나...
그래서 퇴원해서 고향에 있는 친구들도 만나고...
운동도 하면서 다닐려고 한다
"우리들"그래도...
" 아버지(우리들 말을 가로채며...)
"내가 의사와 충분히 얘기했고 또 너희들도 알다시피
내가 병원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나...
그것도 사람 죽어나가는 영안실 근무만을 했잖은가...
그리고 지금은 내가 이래도...
막판에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어쩔수 없이 병원에 오게 될거다...
그때 다시 오면 된다...
하튼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렇게 알고...
"우리들 "...
"아버지 "그라고...
말 나온김에 한마디할까?
이 세상에 동물, 식물, 사람 할것없이 모든 생물은 生과 滅,
즉 새로 태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이
당사자의 의지로 되는게 아니고 우주의 섭리라...
태어나면 반드시 泳竄測게 만물의 이치이네...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말..
우리들: ".....
"(갑자기 코끝이 찡했지요)
아버지"나는 정말 너희들 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우리집도 여러번 어려운 일을 겪었는데도 잘 견뎌냈고...
내가 알기로는 형제들끼리 다투는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 "그러면 저번에 말씀하셨듯이 백운동에 가시렵니까?
"아버지"그건 날씨를 봐 가면서...
내가 알아서 할꺼고...
"와이프(이때 갑자기 마누라가 끼어들었음)
"아버님...
그러면 우리집으로 일단가입시더...
지금까지 음식도 못드시고 했으니 집에 가셔서 원기 회복도 좀 하시고...
"아버지(가만히 듣고 한참 계시더니...)
"그래 맞다!
그래...
그래...
그래야 우리 맏종부가 맘 편하겠구나...
그러자...
그렇게 하자...
이렇게 해서 1월31일부터 우리집에서 묵고 계시는데
집에 있으면서 이메일도 보내고 인터넷으로 바둑, 장기도 두시고...
붓글씨도 쓰시고 합니다.
요즘은 우리들의 요청에 따라 병풍을 만들 글씨를 쓰시고 있는데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는 듯 합니다.
8장을 써야 하는데 7장을 완성하고 1장이 남았지요
그런데 힘이 부쳐서 그런지 글씨가 평소보다 훨씬 못하더군요
그리고최근에는 목에서 피가 올라오고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 같다
"고 하시면서 완전히 인생 마감정리를 하고 계신답니다.
얼마전에는 당신께서 입고 가실 수의를 직접 사가지고 왔는데 하시는 말씀이
"나중에 느그가 살려면 250만원 정도 줘야 하는
최상품을 상주 함창에 가서 60만원 주고 사왔다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지요
또 제가 유럽 다녀올떼 가져온 발렌타인 21년산 한병을 드리면서 친구분들
대접하시라고 하였더니 무척이나 좋아 하면서 낮에 누굴 만나고 오셨다
길래 누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또 기가찬 말을 하더군요
"나중에 내 뒷처리를 할 사람 만나서 상세하게 부탁하고 왔다....
"제가 화를 내자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래야 오래 산단다...
" 최근 저는 거의 끊었던 술을 다시 먹기 시작했는데 술에 만취되어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꺼억꺽 울고있으면 마누라도 울먹이면서 날
위로 한다고 하는 말이"민호 아빠...
어머님곁에 간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응?
"아!그렇지....
역시 우리 마누라...
참 똑똑하지요?
그리고 최근에는 당신께서 묻힐 선산에 대하여
상세하게 몇가지 당부 말씀을 하셨지요
막힌 도랑을 많이 파고.....
어머니 산소에 있는 좌판은 땅에 묻고 아버지와 같이 다시 만들어야 하고...
산소앞에 있는 나무들이 너무 많이 자라서
그나무 그늘때문에 잔디가 죽으니까 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잔디도 새로 좀입혔으면 한다...
는 등또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어떻게 되면 이 안에 연락할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내 옷 입힐 사람,장의사,영안실,계모임,동창들, 친척들 전화번호...
등 적혀있는 대로 차례대로 전화하면 아무 차질이 없을게다
"또 얼마전에는 지난번에 사다 놓은 명주를 일부 잘라서
붉게 염색을 해오라고 하여갖다 드렸더니
당신의 관에 덮을 명정(銘旌)을 직접 쓰셨답니다.
'學生 慶州崔公 之 柩'(학생 경주최공 지 구)우리 아버지가 이렇습니다.
마치 생을 마감하는 것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자식들에게 조금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죽어가면서 까지 폼잡고 가시려고 하는...
그래서 더욱 안스럽고...
서럽고...
기가 막힙니다
요즘은 식사도 잘 못하시고...
외출도 힘이 들어 잘 안하려 하시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흠~쓰다보니...
너무 길었지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얘기....
시시콜콜한 집안 얘기까지 늘어놔서...
미안합니다
누군가에게 얘기하지 않고는 못배겨서 그랬습니다.
끝까지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이세상에서 가장 불효자 씀
첫댓글음...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생각나는군요. 제다가 "경주최"가 눈에 들어오니 더 하네요. 죽음을 준비하는 게 삶이라더니... 죽음을 맞대할 용기를 가지신 분이시군요. 그것이 폼이든 아니든... 자식으로서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고통일수도 있겠지만, 지나고 나면 정말 멋진 아버지로 남겠네요.
스스로를 다 잡을 수 있는 삶을 살다 갈수 있다는 것..그렇게 늙어 갈수 있다는 것..결코 고집이라 보이지 않을 떳떳한 삶...당당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은...우리민족이 죽는다고 부르는 것은 육체가 땅에 묻혀 사라진다는 뜻이고..정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간다고 표현합니다.
부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인식하고 모든 사람이 현실 속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을 깨닫는 시기가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진정 강한 민족임을 글쓴이의 부모님이 보여주시는듯 싶습니다.조금만 욕심을 덜어낼수 있다면 침착해질수 있고 그러면..윗분처럼 살수 있다는 생각 해 봅니다.차분해지네요.감사합니다
첫댓글 음... 돌아가신 제 아버님이 생각나는군요. 제다가 "경주최"가 눈에 들어오니 더 하네요. 죽음을 준비하는 게 삶이라더니... 죽음을 맞대할 용기를 가지신 분이시군요. 그것이 폼이든 아니든... 자식으로서는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고통일수도 있겠지만, 지나고 나면 정말 멋진 아버지로 남겠네요.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게 무언지 횡설수설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스스로를 다 잡을 수 있는 삶을 살다 갈수 있다는 것..그렇게 늙어 갈수 있다는 것..결코 고집이라 보이지 않을 떳떳한 삶...당당하게 자신의 마지막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은...우리민족이 죽는다고 부르는 것은 육체가 땅에 묻혀 사라진다는 뜻이고..정신은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간다고 표현합니다.
부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를 인식하고 모든 사람이 현실 속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을 깨닫는 시기가 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진정 강한 민족임을 글쓴이의 부모님이 보여주시는듯 싶습니다.조금만 욕심을 덜어낼수 있다면 침착해질수 있고 그러면..윗분처럼 살수 있다는 생각 해 봅니다.차분해지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