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교정에 울려퍼지는 낭랑한 합창. 흥에 겨운 목소리로 목청높여 부르다가 갑자기 웃음바다. 외줄타듯 위태롭게 가락을 이어가다 누구 하나가 튀었나보다. 그 친구의 머쓱해 하는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다시 킥킥거리면서도 노랫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흥겨운 가락에 손이 절로 움직이고 어깨도 덩실덩실. 수업시간을 마치는 종소리에 선생님이 “그만, 이놈들아” 해도 한번 신명난 곡조는 제발이 달린 양 멈춰지지 않는다.
수원 태장고등학교. 영통 신도시의 빽빽한 아파트촌 한가운데, 개교한 지 4년밖에 안된 공립학교. 신도시·아파트촌·신설 학교…. 이쯤되면 일단 입시 공부에 찌들어 피곤하고 창백한 학생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태장고 교문을 들어서면 민요와 가야금, 장구, 시조 읊는 소리가 제일 먼저 들려온다. 여기에 생활한복 교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 우리 옷만큼 여유로운 미소와 밝은 표정이 교정을 환하게 빛내고 있다.
여느 학교처럼 공부에만 매달리며 숨죽이던 학교는 김일남 교장(56)이 부임한 1999년부터 달라졌다. ‘세계적인 리더가 돼라, 자신감을 가지라’는 첫마디로 변화의 물꼬는 터졌다. 김교장은 학생들이 늘 풀죽은 얼굴로 어깨를 굽히고 다니던 학교를 ‘즐거움을 주는 곳’으로 바꾸고 싶었다. 전통사랑이야말로 세계적인 리더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자 자신감과 흥겨움을 전해줄 수 있는 길로 ‘딱’이었다.
음악시간에는 민요와 가야금·장구가 등장했고, 미술시간에는 서예와 사군자·도예가 생겼다. 문학시간에는 시조창 장단이, 체육시간에는 흥겨운 탈춤장단이 담장을 넘나들었다. 도예실·민요실·대취타실을 갖춘 문화관에선 학기가 거듭되며 태장고 전체 학생들의 장기가 하나씩 영글어갔다.
전교생이 오돌또기·제비가·한강수타령·난봉가 같은 민요 한가락쯤은 멋들어지게 쭉쭉 뽑아내게 됐다. 얼마 전에는 우리 영화 ‘취화선’을 학교 강당에서 단체관람하기도 했다. 당시 태장고를 방문한 임권택 감독이 교정 구석구석에 스민 전통의 향기에 진한 감명을 받고 돌아갔다는 후문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 공부만 해야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물놀이 하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고 성격도 활발해진 것 같아요. 중학교때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신나요”(조정은·1년)
“처음엔 창피해서 소리를 작게 내고 동작도 잘 따라하지 않던 아이들도 나중엔 모두 신바람내고 자신감을 보여요. 힙합이나 가요보다 더 흠뻑 빠지는 것 같아요. 우리 문화가 이렇게 좋구나 하고 새삼 생각하게도 되고요”(장미송·2년)
이렇게 익힌 전통문화는 여름방학 직후와 졸업식 전날의 정기 축제, 1년엔 4번 열리는 수원지역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전통공연에서 맘껏 발휘된다. 지금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추석 공연(9월22일)을 앞두고 교정 곳곳이 막바지 연습으로 뜨겁다. ‘노는’ 일요일에 열리고, 희망자만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행사인데도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커트라인’을 정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방학기간중 자매결연 학교 학생들을 초청하는 ‘한·중·일 아시아 페스티벌’은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행사. 중국과 일본의 고등학생들을 직접 집으로 초청, 홈스테이 기회를 제공하며 학교에 함께 나가 전통문화 공연을 하는 등 서로의 생활과 생각을 나눈다. 외국인 근로자, 외국 학생들과 공연을 한 뒤 김치와 김밥을 만들고 송편과 만두를 빚으면서 아이들은 어느새 외국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문화전도사가 된다.
“다른 학교에 간 친구들은 이런 것들을 배우고 이런 행사가 있다고 하면 처음엔 막 웃어요. 그러다 점점 궁금해 하고 나중엔 부러워하지요. 시간을 뺏긴다는 생각보다 경험을 쌓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빡빡한 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 때문에 답답하다가도 축제때가 되면 학교생활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풀리는 것 같아요”(엄주연·2년)
땡볕 속에서 배운 탈춤, 손가락에 물집이 몇번씩 터지면서도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한 가야금 수업. 이런 ‘배움과 축제’ ‘축제와 배움’을 통해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변한다. 가슴과 머리에 자신감과 자긍심이 가득 찬다. 태장고 졸업생들은 대학교에 가서도 주목받기 일쑤다. ‘어딘가 다른’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모양이다.
매년 입학식 무렵이면 학교 홈페이지에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애들 대학 못간다”며 걱정하고 항의하는 학부모들의 목소리가 새롭게 등장하긴 하지만 몇 달만 지나고 나면 “동생도 보내고 싶다”는 신뢰로 바뀌고 마는 것도 태장고만의 ‘연례행사’다.
“처음엔 모두들 인문계 공립학교에선 불가능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교장선생님의 의욕에 ‘경악’했었죠. 그런데 차츰 이루어지더라고요”(체육담당 권미례 교사)
태장고도 아침 8시에 등교해서 학년별로 오후 9~11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입시부담은 다른 학교들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를 흥으로 풀어낼 수 있는 분출구가 아이들에게 ‘3년간 유예될 뻔 했던’ 웃음을 안겨준듯 했다. 한쪽엔 기와교문, 한쪽은 현대식으로 나란히 선 교문. 이곳을 드나드는 학생들의 표정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세계, 그 소중한 진리를 깨우쳐가는 그들만의 멋과 여유로움이 물씬 배어나고 있었다.
-[취재수첩]학교의 모든 규칙, 학생들이 정합니다-
김일남 교장이 이끄는 태장고의 ‘실험’은 전통문화교육만이 아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꼽기가 버거울 정도다. 탈춤이나 가야금 외에도 체육시간에는 골프·댄스스포츠·유도를 가르치고 전교생이 동아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도록 격려한다. 이 또한 학생들에게 ‘학교 오는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학교의 모든 규칙은 학생들이 정한다. 해마다 1월 6~7일에는 학생회 간부와 부모들이 학교에서 합숙하며 그 해의 교칙을 정하고 반 대표의 각서와 사인을 받아 확정한다. 교복·두발·복장 규제 기준과 축제 내용, 참가자를 정하는 것도 모두 학생들의 몫. 선생님은 도움만 줄 뿐이다. 선생님이 추천하면 언제든 상장을 받을 수 있지만 대신 상장에 선생님 이름을 쓰고 책임까지 져야 하는 ‘상장 실명제’나 학생이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말들을 학생과 선생님 부모가 상의해 만드는 자기만의 졸업장 만들기도 이색적이다.
공통의 목표를 가진 ‘팀제’로 편성된 교무실은 10군데나 되고 교사도 철저히 성과로 평가한다. 학생들은 입학하면서부터 진로상담을 하는 바람에 3학년이 돼서 원서쓰기 직전에 전공을 결정하는 일은 태장고에선 보기 드물다. 실제로 인터뷰했던 모든 1·2학년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로 목표가 뚜렷했고 자신감에 넘쳤다.
상장을 받는 몇몇 학생만 참석하는, 가기 싫은 졸업식은 축제로 바뀌었다. 1회는 댄스스포츠, 2회는 효(孝) 행사, 3회는 강강술래 등으로 학생들이 주제를 정하고 진행해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가 진심으로 원해서 참가하는 뜻깊은 행사로 변했다.
“왜 학생들이 즐거워 보이지 않을까”가 교사들의 가장 큰 고민인 학교. 즐겁게 놀아본 학생들은 공부도 역시 즐겁게 했다. 덕분에 태장고의 실험은 선생님들은 정작 큰 신경을 안쓰는 입시라는 잣대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