遇春의 婦人인 흥려박씨께서 큰아들 겸수, 겸록, 겸광, 겸복 다음 20살이나 적은 겸익의 아들을 두었다.
겸익이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 문씨 집안과 내년에 결혼하기로 하고 사성이 오고 갔으므로 이듬해 결혼을 하기로 하였지만 기근으로 가을에 하기로 하였으나, 왜놈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큰아들인 겸수는 조선의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참전하라 하시고, 어린 작은 아들 겸익은 토굴에서 숨어지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겸익은 토굴에 갔는데 남장을 한 여인이 먼저 와서 있기에 자초지정을 물어보니 기장에서 왔다 한다. 그 연유는 지난해 주남에 거주하는 이씨 집안의 막내아들과 혼인 이야기 오고 가고 했으며 사성도 오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 장본인이 바로 나(我)라고 하여, 여인 앞에서 부채에 혈서를 쓰고 물 한 그릇 놓고 서로 맞절하고 언약(言約)을 하였다.
임진왜란후 화평시대가 되어서 보니 겸익은 사내대장부가 사모관대를 못쓰고 결혼을 하였으니, 부인(강성문씨)께 사모관대를 쓰고 싶다고 애원을 하니 그리하라 하여 결혼한 부인이 일직손씨이다.
문씨부인은 아들 3형제를 두었으며, 손씨부인은 6형제를 두었으며, 큰 조카인 준발의 첫째 부인에서 아들 1명(의지)을 출산하고 20~30일 만에 돌아가셨고, 둘째 부인에서 아들 2명(희성,희현)을 두었으나, 세월이 흘러 준발의 둘째 아들을 장자로 전처의 아들을 서자하였으며, 또한 창발, 융발을 서자로 하고 5형제(헌.의.례.지.신) 동생이 형으로 족보를 주관하여 무신보(戊申譜)를 간행하여 일문에 혼란을 일으켰다. 그 내용은 형을 아우로 아우를 형으로 인륜으로서 할 수 없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즉 문씨부인 아들을 서자로 하여 동생으로 하고 말았으며, 조카인 희성 또한 동생이지만 형과 서차를 바꿔었다.
시대적으로 4대 주손이 과거를 보던 시대였으니, 영리한 손자를 과거에 등용시키려 하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작은 아들을 큰 아들로 하였다 하더라도 가보(家譜)는 바로 했어야 되는데 그러하지 못했으니 그 할아버지야 말로 인륜으로서 못할 일을 한 것이다 라고 본다. 그 시절에는 첫 번째의 부인의 지혜로 두 번째를 맞이했는데 그 후 후손들이 큰 할머님에 대한 감사는 못 할망정 집안의 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례(禮)를 근본으로 삼지 못한 사항이다.
어찌하여 후실 부인 자식들이 어떻게 큰아들이 되는 것 인지 하늘과 땅도 알 것이다.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따지는 것은 일문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22. 10월경 주남 明杰 口述
무신보의 족보 내용으로 보아 강성문씨는 창발,융발 2남이고, 삼척심씨는 번발, 의발, 흥발 3남이고, 일직손씨는 6남이었다.
창발의 아들은 3형제인데 필발(必發)과 필원(必原)은 무후이며, 셋째 필성(必荿)만 남아 있으며, 융발(隆發)도 아들 필영(必英), 필장(必萇), 필동(必東)의 3형제가 있으나 이후는 기록이 없는 상태이고, 번발(蕃發)은 무후이고 의발(萓發)은 필선(必선), 필환(必煥), 필돈(必焞), 필휘(必輝)의 4남이고, 흥발(興發)은 무후이다.
무신보에는 종실 선조가 형님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 중리가 서출로 되어 있는 점이 인부적 세부적으로 세도를 잡기 위해 바꾼 것으로 보인다
우리 중리 문중 중시조이신 매헌공의 아들에 대한 계보는 1939년 작성된 서면파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