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카나 항공 MX 361편으로 2시간을 날아 칸쿤에 도착한 우리는 대기하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카리브해의 휴양지 칸쿤의 낭만이 차창 밖으로 흐느끼듯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애뜻한 상념을 일시에 날려 버리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가 TC 미스 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저, 쿠바로 가는 비행기 시각이 촉박해서 아무래도 내일 체첸이사 일정은 취소하고 칸쿤 해변에서 즐기다 바로 공항으로----”
애초에 칸쿤에서 쿠바로 가는 저녁 비행기 스케줄이 오후 2시로 갑자기 변경되었을 때부터 뭔가 냄새가 나긴 했었다. 칸쿤에서 왕복 5시간여가 걸리는 체첸이사까지의 거리를 고려했을 때, 오후 2시 국제선 탑승을 위해 12시까지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물리적 가능성은 거의가 ‘미션 임파시블’(mission impossible)의 수준이었다.
30명이 넘는 대인원의 성수기 항공권을 적시에 일괄 확보치 못한 여행사가 부득불 인원을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파나마 경유 쿠바행 탑승권으로 대치하다 보니 오후 2시발 일정으로 조정되었고(원래는 논스톱 편 오후8시발 일정) 이 사실을 은닉했다가 인천공항에서 대장정에 돌입하기 직전, 비로소 조정된 일정표를 통해 서면 통지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논리(성수기 쿠바행 좌석의 오버부킹으로 공항에 일찍 도착해야 하며 며칠 전 팀도 공항에 늦게 도착해 일부 일행이 비행기를 놓쳤다는 ---)로 여행객을 내몰아 구렁이 담 넘듯 체첸이사 유적지를 건너뛰려는 여행사의 치졸한 속셈을 일행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성이 송사리처럼 일어나 마이크를 나꿔 채더니 쿠바행 비행일정을 빌미로 여행객의 일정을 짤라먹는 여행사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원래의 일정대로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은 내일 한국으로 귀국하겠다며 초강수를 두는 것이었다.
내심, 내 대신 십자가를 져준 그 거룩한 여행객을 훑어보며 안도하는 사이, 차중의 일행이 술렁거리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여행사를 성토하는 소리가 거세지자 우리의 갸냘픈 TC 미스 최는 거의 울상이 되어가고 있다.
결국 우리 일행은 칸쿤 시가의 야경이 내려다 보이는 호텔 로비에서 심야의 비상총회를 갖게 되었는데-----
경남지역의 교육장을 역임하신 원로 교직자께서 임시의장이 되어 난상 토론을 벌이는 동안, 미스 최와 현지가이드는 거의 사색이 되어 한국 본사 및 현지랜드사와 긴급 통화를 해대고 있다.
마산 지역의 퇴직 교장단을 비롯한 12인의 어르신들, 수능을 치른 딸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을 한 서반어가 능통한 교양미 넘치는 엄마, 31살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에 이어 중남미를 단기간 섭렵하려 이번 여행에 동참한 용인의 모여고 여자 교장 선생님, 120개국을 여행했다는 울산 출신의 멋쟁이 사업가 J사장님, ‘쌀 70가마’를 팔아 이번 여행경비를 마련했다고 능청을 떠는 건설사 간부 출신의 L선생, 20년 전부터 아프리카,인도,알래스카 등지를 1~2달씩 자유여행해 오고 있는 베테랑 여교수 A여사, 간호사 출신으로 세계 70여 개국을 여행한 S선생, 부인과 함께 일년에 10여 차례 여행을 다니다 거의 마지막 코스로 중남미를 택한 R씨, 패키지로 지구를 한 바퀴 돈 후, 더 갈 데가 없음을 확인하러 온 60대 언니와 40대 동생의 L여사 자매, 왕십리에서 의류업을 하며 매년 해외여행을 다니는 K사장 부부, 지난 번 동유럽 여행을 같이 했던 넉넉한 인품의 S사장님 부부, 그리고 주로 중동,아프리카,라오스 등 오지탐험에 관심이 많은 P교수(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자후를 토한 문제의 그 사나이)와 방학 때마다 새로운 대지에 대한 탐구심으로 가정을 버리는 나의 룸메이트 J선생 등 우리 일행 33인은 새벽 1시까지 한국의 여행사 및 현지랜드사를 몰아부친 끝에 그네들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여행 초반의 시차부적응으로 잠이 모자라던 우리는 황금같은 저녁 단잠시간을 박탈 당해야 했고, 체첸이사 대신 칸쿤 해변에서 위락을 즐기며 그 부근의 마야 유적지 툴룸(Tulum) 관람으로 대체하려다 갑자기 원래의 일정대로 환원해 다급해진 여행사는 새벽 5시 모닝콜에 6시 호텔 출발의 스파르타식 새 일정표를 제시했다.
우리는 승리의 기쁨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4시간 남짓 수면 끝에 치뤄야 하는 초유의 유격훈련에 다시 한번 곡 소리나는 장탄식을 해대야 했다.
이튿날,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꼭두 새벽, 칸쿤의 호텔을 출발한 버스 속엔 샌드위치 1조각과 생수 1병으로 채워진 아침 도시락을 품에 안고 좌석에 널부러진 33인의 안타까운 실루엣이 가득하다.
어제의 신출내기 가이드 대신 부랴부랴 급파된 팀장 미스 신은 쿠바행 비행편에 늦지 않기 위해 불가피하게 칸쿤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일정을 조정했던 것임을 이해해 달라며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급히 투입되었으니 아무 문제 없이 체첸이사 일정을 마치고 쿠바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를 달랬다. 우리가 체첸이사 관광을 하는 동안, 우리의 TC 미스 최는 우리의 여권과 항공권을 거둬 우리 대신 칸쿤 공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쿠바행 좌석을 확보키 위해 미리 보딩패스를 받아두려는 양동작전인 셈이다.
여행사의 엄살과는 달리, 밀림 속을 가로지르는 칸쿤~ 체첸이사 간 2차선 고속도로는 거의 우리 버스가 독채로 전세를 낸 듯 차량이 전무했고 최고속도도 알려준 것보다 20km/h나 높았다.
한참을 가다 차창 밖 표지판을 보니 메리다와 체첸이사의 갈림길이다. 그제사 LA에서 멕시코로 오는 비행기 옆 좌석에 앉았던 멕시칸 일가족이 생각난다. 자신을 멕시카나 항공의 파일럿으로 소개한 라울 신타(Raul Cinta)의 가족은 메리다에 살고 있었는데, 칸쿤과 메리다의 한가운데에 체첸이사가 위치하고 있으니 체첸이사 오는 길에 자기집(메리다)에도 놀러오라며 연락처를 적어주는 친절을 아끼지 않았었다.
카리브해 연안을 끼고 있는 유카탄반도의 유카탄주는 고대 마야문명의 발원지로 콰테말라와 더불어 가장 많은 마야 유적지와 인디오들이 있는 곳인데 그 중 최대의 유적지가 바로 마야어로 ‘우물가의 집’을 뜻하는 체첸이사(Chichen Itza)이다. 일찍이 체게베라도 마야문명에 심취되어 이곳 유카탄지역과 콰테말라를 주유(周遊)하기도 했었다.
사실, 유카탄반도의 메리다항은 1905년 1033명의 우리 선조들이 신대륙에의 원대한 꿈을 안고 오랜 항해 끝에 발을 디딘 곳으로 슬픈 역사가 어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향하던 한인들은 일본인의 농간에 의해 이곳 유카탄반도의 애니껭 농장에 노예로 팔려졌고 이때부터 피눈물로 얼룩진 고난의 이민사가 시작된 것이다. 악독한 농장주의 학대와 현지인의 차별 속에 인고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이들 한인들은 '은근과 끈기'의 경쟁력을 내세워 , 현재 유카탄주 대법원장과 이곳 체첸이사 유적관리사무소장 등 숱한 저명인사를 배출하며 이 사회의 주도층으로 조용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이민 100주년을 맞은 올해, 온갖 고난 속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들이 모여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는데, 당시의 1033인 중, 유일한 여성의 배 속에 들어있던 아이가 100세의 노인이 되어 그 식전에 참석했단다.
기원전 베링해협을 거쳐 이곳에 정착한 북방계 몽골인의 후손이었던 마야인들은 그들 만의 독특한 문명과 언어를 가지고 번창했다. 특히 영생과 풍년을 위해 神에게 사람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그들만의 제의를 엄격히 거행했는데 이는 후대의 테오티와칸, 아즈텍 등의 문명에도 그대로 답습되는 이 지역의 절대적 문화코드로 자리잡게 된다.
한적한 새벽길을 마음껏 밟은(?) 탓에 우리는 채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체첸이사 유적지 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시각에도 벌써 몇 대의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광경이 눈에 띄었다. 정문 매표소에서 표를 끊은 후, 5분여를 걸어 들어가니 그간 책이나 TV 등을 통해 익히 봐 왔던 91계단 피라밋이 시야에 들어찬다.
이 피라밋 역시 제물을 바치는 제단의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4면이 45도 각도의 91계단으로 되어 있는데다 중앙 꼭대기에 하나의 계단이 첨가돼 있어 1년을 나타내는 365일을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와 동지 때 피라밋에 비춰지는 태양의 그림자로 농사의 시작 시즌과 끝 시즌을 가늠했다는 마야인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오티와칸보다 높이는 낮지만 경사가 급해 오르내릴 때, 특히 내려갈 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었다. 91계단의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전사의 신전, 펠로타경기장(구기장) 등 체첸이사의 유적지 타운을 감싸고 있는 주변경관이 멀리 수림의 풍경과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일행과 카메라를 바꿔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잠시 망중한(忙中閑)의 정취를 느껴보았다. 귀족자제로 편성된 구기팀이 경기 후, 이긴 팀의 주장을 제물로 바쳤다는 펠로타 경기장을 아래로 굽어보며 마야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신념에 잠시 숙연해짐을 느낀다.
룸메이트 J선생은 겨우 요거 볼려고 투쟁,투쟁 끝에 새벽잠 설쳐가며 여기까지 왔냐며 허탈한 표정이다. 안 보려니 섭섭하고 봤댔자 별 수 없는(?) ‘체첸이사’ 유적지에 가까스로 흔적을 남긴 우리는 쿠바행 비행시각에 맞추기 위해 부리나케 칸쿤 공항으로 내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점심식사는 긴급공수된 일식 도시락으로 때우면서----.
허겁지겁 체첸이사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사이, 카리브해의 진주라는 칸쿤에서 자면서도 칸쿤 해변을 구경도 못한 아쉬움이 공항 야자수 그늘 아래로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