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정벌하고 호령하던 천하의 몽골군이다. 세계 최강의 사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제대로 광주성을 공략하지 못한다.
광주성에서 남쪽으로 진군하던 몽골군은 경기도 용인에서 뜻밖에 민병대를 만나 접전을 벌였으나 만만치 않은 혈투였다.
1232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은 서경과 개경을 거쳐서 경기도 광주를 지나 처인성에 이르렀다.
여기서 몽고군은 아주 대단한 고려의 장수 승장 김윤후(金允侯)를 만나서 더 이상 진격을 멈춘다.
끝내는 후퇴해야만 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들로서는 치욕의 참패였다.
몽고의 최고지휘관인 살리타이가 전투중에 사살당하고 만 것이다.
몽고의 최고사령관 살리타이는 처인성을 향해서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성위 망루에 있던 고려민병대의 지도자 승장 김윤후(金允侯)가 곧바로 화살을 쏴서 적장 살리타이의 머리를 관통시켜 사살했다.
몽고군의 최고사령관이 처참하게 죽어버리자 기세등등했던 몽고군은 크게 사기가 꺾이게 되었고, 결국 몽고군은 처인성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고 한다. 몽고군의 처철한 대참패였다.
처인성 전투(處仁城 戰鬪)는 1232년 12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성에서 처인부곡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이다.
1231년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고려 정부는 몽고군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 6~7월 강화도로 천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몽고군은 기존의 화약 파기에 대한 책임으로 10월 2차 침입을 감행하였다.
몽고군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즉각적으로 남진하여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광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이세화(李世華)장군이 지휘 하에 광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광주성 함락에 실패하게 된다.
몽고군은 광주성 공략을 포기하고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규모가 작았던 처인성을 상대로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몽골군이 노도와 같은 맹렬한 기세로 처인성을 기어오르면서, 처인성에 대한 공격을 펼쳤다.
처인성안의 민병대는 악착같이 성을 사수하면서, 아슬아슬한 공방전이 연일 이어졌다.
민병대는 승장 김윤후(金允侯)가 이끌었다.
1232년 몽고의 장군 살리타이(撤禮塔)가 앞장서 기세 좋게 처인성으로 달렸다. 그 살리타이가 활에 맞아 전사한다.
김윤후 장군이 쏜 화살에 살리타이가 사살된 것이다. 승장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살리타이의 죽음으로 지휘체계의 혼란과 개별 부대의 약탈이 자행되면서 몽고군은 철군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몽고의 2차 침입이 실패로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윤후는 이 싸움의 승리를 자신의 공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장군의 벼슬을 사양하고 섭랑장을 제수받은 그는 이후 몽고의 5차 침략 때(1953년) 충주성의 노비들과
합세하여 몽고군을 막는 전공을 세우기도 한다.
고려시대 처인성은 처인부곡에 속한 성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은 '고려시대의 군창지'로 성의 위치가 화성, 평택으로 이어지는 경기평야의 가장자리에 있어서
군량미나 식량의 저장과 보급기지로 기능을 담당했던 곳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향(鄕)·소(所)·부곡(部曲)을 천민집단이 거주하는 곳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의 학설은 그것이 군·현과 같은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대세로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향과 부곡민들이 추가로 역을 부담하기는 했지만 천민 집단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처인성 전투의 주역은 처인부곡의 주민들이었다.
그 지역의 주민들이 일반 평민이었든, 천민이었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신분적인 구분을 떠나서 누가 고려의 자존심이었는가는 고려의 대몽항쟁에서 확실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처인성(處仁城)은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 산 43번지에 있다.경기도 기념물 제44호이다.
이 성은 총면적 5,820평의 장방형으로 된 토성으로 본래 고려 때 군창(軍倉)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백제 때 축성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성곽 둘레는 425m 이며 높이 4.8m~6.3m 가량의 작은 토성이다.
북벽 좌측에 출입구가 있고, 남쪽 중간 지점에 후문 자리가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입구 주변의 4백 평쯤 되는 부분에는 낮은 둔석이 있다.
내부는 지형에 따라 2~3단계의 층급이 있다.
첫댓글 남한산성과처인성전투는 떼놓을수없는 전투입니다. 남한산성과 처인성에 관한자세한자료를 기재해주시니 고맙고 감사합니다. 백제의도성은 오직 풍납토성과몽촌토성이다에 또하나의 관점인백제의성산인남한산성의 가치를재조명하는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