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저항시인 심훈(沈勳 1901-1936)이 흑석강 언덕 옛 옹막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 영화배우이다.효사정이 있는 산봉우리 북서쪽이다.
효사정에서 북서쪽으로 난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오다 오면 오른쪽 긴의자에 심훈이 책을 들고 앉아 있다.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효사정 언덕 맞은 편 흑석동천주교성당이다.성당 입구 왼쪽에 심훈이 태여난 곳임을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심훈이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출생하였음을 알려주는 <심훈 생가터(沈勳生家址)> 표석이다.
심훈은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항저우(杭州)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그의 대표적인 시 '그날이 오면' 시비(詩碑)이다.그 '그날이 오면' 시비는 효사정 언덕 계단 끝자락 왼쪽에 있다.
그날이 오면
-심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 '그날이 오면' 심훈의 육필(肉筆)원고다.
1932년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는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판하려 했다.
일제의 겸열에 걸려 좌절되고 말았다.일제가 그의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불허한다는 '삭제(削除)'라는 빨간 글씨가 원고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이 오면'은 시(詩)라기 보다는 민족의 피맺힌 절규였다.
'그날이 오면' 그 시는 표현이 너무 거칠고 과격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들쳐 메고는'
너무 끔짝해서 시의 표현으로는 거칠고 과격하다는 것이다.
영국 옥스포드대의 C.M. 바우라(Bowra) 교수는 그의 저서 ‘시와 정치(Poetry and Politics)’에서
심훈(沈熏)이 1930년 3월 1일에 쓴 시 ‘그 날이 오면’을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고 일갈하였다.
“일본의 한국 통치는 가혹하였으나, 그 민족의 시는 죽이지 못했다”고 평하였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 단 한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교수는 '그날이 오면'과 시인 심훈을 이렇게 평가하였다.
“사람들은 수백 수천의 시를 쓰고도 시인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심훈은 「그날이 오면」의 단 한 편의 시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심훈은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역저 『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와 당당히 어깨를 겨루고 있다.그 시의 1연 맨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 시구를 한 데
이어 보면 ‘그날이 오면, …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라는 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인경을 머리로 받아 죽는 옛 전설의 까마귀 비유이기 때문에 1연의 시를 한 형태로 축약하면
‘그날이 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가 된다.
바우러는 말한다. 일본 사람들의 어떤 압제도 한국 시인들을 죽일 수 없었다고. 그러나 한국 시인의 가슴에는
죽음보다 강한 한과 신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과연 알았을까. 그리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대립 개념으로만 생각해 온 그의 시학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사회나 민족 그리고 우주 전체를
넘나드는 한풀이와 신바람의 그 담벼락 없는 리듬을 포용할 만한 자리가 과연 있었을까.
그 시가 쓰여진 지 한 세기 가까이 지나고 ‘그날’을 맞이한 지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우리는 심훈의 언어에서
여전이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가죽으로 울리는 생생한 그 종소리와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기쁨과 아픔이 한데 어울려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가락들을 만약 바우러와 같은 서구의 비평가들이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그날이 오면 한국의 시는 세계의 지붕 위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다.”-이어령의 <다시 읽는 한국 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