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 강북강변도로 옆 현석동에 자리한 밤섬공원이다. 여기에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소동루를 짓고 살았다.
이 동네의 이름은 현석동이다.동명은 박세채(朴世采)의 호 현석(玄石)에서 연유한다.
밤섬공원 바로 옆 현대아파트단지 입구 왼쪽에는 '박세채 정승이 살던 곳'이라는 표석이 있다.
현석 박세체(1631-1695)는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다. 박동량의 차남 홍문관교리 박의(朴猗)의 아들이다.
모친은 영의정 신흠(申欽)의 딸이다. 벼슬이 높은 사람보다도 학문이 출중한 사람이 더욱 가문을 빛낸 것으로 인정한다.
이는 학문을 중시한 조선의 풍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계적으로도 학문을 제일로 친다.
박세채는 특히 파주에 율곡 이이를 모시는 파산서원에 사계 김장생과 함께 배향된다.
동방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가문을 빛내는 최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문묘배향인물 1명은 영의정 9명을 배출하는 것보다 더 중시했다.
정권의 끄나풀보다는 대쪽 같은 학문을 더 존경했던 것이다.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예학의 거두라야 가능하다.
현석 박세채는 예학에 관한 많은 저술을 통하여 ‘예학의 대가’로서 학문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의 탕평론과 예학론은 17세기 성리학을 근거로 예학을 구현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세채가 소동루를 짓고 살던 현석동 집터는 밤섬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마포강변의 절승지이다.
박세채는 조선 중기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말의 명문세족 충신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당쟁이 가장 치열하고 호란을 겪었던 격동기였으므로 그러한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는 사승(師繩)관계를 맺게 되었다.
1675년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 동안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 기간은 박세채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이 기간 중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輔編)』『심학지결(心學支結)』 등을 지었다.
그의 학문세계는 대외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는 중화적 천하인 명나라가 무너지고 오랑캐의 국가인 청나라가 호령하는 시기와 국내적으로 격화된 당쟁으로 탕평책을 요구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탕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하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