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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법의 수행 편>
제 1 장
불법(佛法)을 공부함
우리는 한 철 살다 가는 나그네이다.
그러한 나그네는 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하느냐?
평등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매사를 내 탓으로 돌리며
넓은 아량과 지혜를 가진 인간으로 사느냐,
아니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 하겠다는 모진 마음으로 나가느냐,
각자 판단해 볼일이다.
다만 한 철 나기 위해 이 세상에 와서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간다면
언제 다시 와서 실현할 수 있을지
도저히 기약할 길이 아득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
지금 현실의 환난과 고통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공부할 사이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환난과 고통이 모두 나로부터 나온 것이니
나온 곳에다 되 맡겨야 녹아 내리지
그렇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변해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환난도 고통도 다 공부의 재료인 것이요,
생활이 그대로 이 공부라 하는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된 덕분에 현대인들은,
예전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시간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현대인들은 그 여분의 시간을 어디에, 무엇 하는데 쓰고 있는가.
물이 흐르고 흘러 결국 바다에 도달하듯 누구라도 결국은 성불하고 말 것이다.
물이 흐르다가 갖가지 용도로 쓰여져 흐르지 못하고
다시 거슬러가는 경우도 있지만 끝내는 바다에 이르듯이,
인간의 마음도 탐심, 진심, 치심, 망심 따위로
가던 길을 멈추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마음인 이상 결국은 성불의 바다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마음 씀씀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 구도의 과정인 셈이니
놀랍게도 삼독심까지 수행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은 불교밖에 없다.
누구나 열쇠를 가지고 있고
온 우주의 칠보가 가득 쌓여있는 곳간을 갖고 있다.
왜 못 여느냐?
활짝 열어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적멸보궁의 문을 열어라.
제 2 장
물러서지 않는 믿음
당장 급한데 어떻게 주인공을 믿고 전부 맡기라 하는가 하는 말을 하지 말라.
뿌리가 싱싱하면 가지와 잎이 절로 푸르르니 썩을 일도 없게 된다.
믿음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공덕의 탑을 쌓고,
믿음은 결코 시들지 않는 지혜의 나무를 자라게 한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였음을 믿는 것이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에 사실 수행이라는 것은 없다.
강한 믿음이면 그뿐이다.
내가 본래 부처라고 아는 믿음이 확고하면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중생의 근기는 매우 다양함으로 여러 가지 방편이 있게 된다.
수 없는 가르침이 있게 된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그 많은 방편문도 실은 한 생각 크게 돌려놓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계속해서 역경계가 닥쳐올 때에
그것을 어렵고 지겹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느끼지 않고
공부의 기회로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수행이 처음부터 꼭 대단한 결심으로 시작되는 것만은 아니다.
마음이란 한 생각에 천리 안팎이라도 드나들고
한 순간에 이 생각 저 생각을 오가는 것이니,
한 순간에 마음을 돌린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어깨 위의 백근 천근의 짐처럼 여기면 어렵겠지만
한 순간에 돌릴 수 있는 것임으로 우선 그 쉬운 마음먹기부터 시작하면 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자기를 믿으라 고 하면
중생심, 이기심, 자만심에 빠진 자기를 믿으라는 줄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나 즉 거짓의 나가 아니라
참된 나 즉 주인공을 믿어라.
거짓 나를 비켜나게 하고 주인공이 드러나게 하라.
주인공만이 자유자재권을 갖고 있으니
거짓의 나를 앞세워 부자유와 고통을 자초하지 말고 주인공을 앞세워라.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를 보지말고 네 자신 속의 너를 등불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이는 많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다.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이는 더더욱 귀하다.
부처님께서,
목숨 얻기가 어렵고
불법 만나기가 더욱 어려운 중에,
신심을 갖기란 더더욱 어렵다 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다.
믿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어야 부처님께서 함께 하신다.
강한 믿음, 물러서지 않는 강한 패기가 있어야
내 육신이 죽고 사는 것을 공의 소용돌이에다 그냥 내 던질 수 있다.
그런 멋있는 대장부가 되어라.
입으로만
주인공,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시오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주인공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는데 무엇을 해 달라고 할 것인가.
입으로 주인공을 외지 말고 굳게 믿으라 하는 것이다.
사량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마음을 깨닫게 된다.
믿음은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잇다.
어떠한 어려움에 봉착하더라도 완전한 믿음은
그 어려움의 실타래를 깨끗이 풀어 버린다.
허공을 믿고,
이름을 믿을 것인가?
남의 그림을 믿을 것인가?
자성을 믿고,
제 아비를 믿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믿어라.
그 어떠한 구세주도 내 안에 있는 마음의 구세주만 못하고,
그 어떤 성스러운 스승도 내 마음 안에 있는 스승만 못하다.
제 3 장
놓고 가는 삶
우리들의 살림살이는 흐르는 물과 같다.
도도하게 흘러가니 담아둘 곳이 없다.
그대로 여여할 뿐이다.
먹으면 배설해야 하고,
일이 닥쳐서 겪었으면 그로써 흘러가버려 아무것도 없게 된다.
발자국 떼어놓고 걸으면서
내가 얼마를 걸어왔노라고 하지 않듯이
그렇게 흐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놓고 온 발걸음을 못내 아쉬워하고 집착한다면
그대로 마음의 짐이 되고, 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 억겁의 집착이 낳은 업을 몽땅 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몰락 놓는다면 무이다.
공이다.
믿고 맡긴다는 것은 참고 기다리는 게 아니다.
믿음은 참는 마음이 아니다.
참는 마음으로 맡기고 놓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맡김이 아니요 놓음이 아니다.
놓을 때는 아무런 찌꺼기가 남지 않아야 한다.
여한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참아낸 것이라면
그 참음이 쌓였다가 뒷날 어느 때에 용수철처럼 튀어 나오고 말 것이다.
놓는다는 것은 다만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불로써 허물을 태우는 것과 같으니
놓는다 함은 마음의 용광로에 일체를 넣는 작업인 것이다.
에이, 될 대로 되라.
어떻게 되겠지.
하고 놓는 게 아니다.
믿음으로써 놓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인공의 뜻이고,
모든 것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써 놓는 것이다.
잘 되게 해 주시오 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벌써 둘이 된다.
오로지 거기서 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일심으로 놓는 것이다.
싫은 경계는 놓아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경계는 눌러 붙는 경향이 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을 쉬지 않으면 부처님 세계에 들 수 없다.
지금 처한 당장의 경계부터 푹 쉬어보라.
붙들고 씨름하는 것은 집착이다.
선과 악,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벗어나 푹 쉬어보라.
지난 날의 모든 업도 지금 이 순간의 내 속에 실려 있으니
지금 한 생각 크게 놓는다면 그 모든 것을 다 비우는 셈이 된다.
그러다가 놓는다 맡긴다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때 그것까지도 포함해서 놓아버려라.
당신의 잠재 컴퓨터는 점점 짐이 가벼워져
결국은 텅 빈 듯 홀가분하게 될 것이다.
일체를 주인공에 믿고 놓으면 스스로 무전 통신이 된다.
전화통을 내려 놓아야 벨이 울려서 오는 전화를 받을 수 있듯이
일체를 놓아야 전체와 통신이 된다.
다 놓고 돌릴 때 그 공덕은 무한량이다.
첫째로, 일체의 오무간지옥이 무너진다.
둘째로, 인연 따라 억겁 전생부터 내려온 모든 습이 녹고 만다.
셋째로, 번뇌망상으로 꽉 찼던 그릇이 비게 되면서
마침내 빈 것도 없고 담긴 것도 없는 그러한 위치가 되어 바로 참 나가 발견된다.
나가 발견된다는 것은
그 때부터 기초가 튼튼해졌다는 뜻이니
바야흐로 집을 짓는 기둥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제 4 장
관념의 타파
오온이란 이름에 걸리고
육바라밀이란 이름에 걸리고
팔정도라는 이름에 걸리지 말라.
모두가 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데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여놓은 까닭에
이럴 때는 이렇게 행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행해야 하니
도대체 걸리는 데가 한 두 건이 아니다.
이름이 붙으니까 내가 잘해야겠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게 붙는다.
그냥 무심으로 넘어 갈 일도 잘해야지 하는 바람에 걸려서 넘지를 못한다.
고정되게 붙들고 있는 관념을 부숴버려라.
내가 죄를 졌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하는 따위의 관념을 다 버려라.
그것을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벽인 것이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통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
통을 굴릴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에서 훌쩍 벗어나 보면
그 동안 애지중지 해오던 나의 생각, 나의 법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도 알게 된다.
마음이란 체가 없기에 우주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이니
넓고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통에서도 벗어나고,
굴레에서도 벗어나고,
창살 없는 감옥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굴릴 수 있겠는가?
생각 한번에 엄청난 문제가 따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스로 지어서 창살 없는 관념의 감옥을 만들어놓고
자기가 그 안에서 발버둥 치고,
스스로 구덩이를 파놓고 그 속에 들어가 허우적대고,
방황하고, 고통 받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각 한번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감방에 갇힌 꼴이 되니
육신과 마음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감옥보다도 더 무서운 감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각의 감옥이다.
세상에서 가장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면 그것은 곧 관념의 벽이다.
수행이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바로 그러한 생각의 벽, 관념의 차이를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나야 중생이니까 하고 생각한다면
생각한 그대로 중생 노릇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니
한 생각의 차이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깊이 느껴야 한다.
누구나 부처자리에 한 자리 한 것이요,
그대로 부처님 법을 활용하는 것이요,
그대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그대로가 견성성불이지 어찌 따로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마음으로 가로 긋고, 세로 그어놓고 끄달리고 있으니
가로 그으면 가로 그은 대로 자기가 걸리고
세로 그으면 또 그대로 자기가 걸려서
빠져 나오지도 못하고, 여여하게 나아가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이란 본래로 여여하고 당당한 것이니
곧 마음으로 지은 감옥을 마음으로 허물어 가는 것이 불법공부이다.
제 5 장
의심함이 없는 의심, 무위법의 의증
이렇게 하는 게 옳은가,
저렇게 하는 게 옳은가 하고 자꾸 생각을 하는 것은
허공에 돈을 뿌리는 것과 같다.
에너지를 헛되이 소모하지 말고 한 군데로 몰고 들어가라.
그러면 어느 때,
그래, 나한테 다 일임하고, 너는 쏙 빠지는데…
그래, 나왔다. 어쩌겠느냐?
하고선 참 나가 나온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놓아 버려라.
화두란 방편에 불과한 것인데,
아는 것을 다시 들고서, 이 뭐꼬? 한다면 머리만 복잡해 질 뿐이다.
놓고 가다 보면 정말로 모르는 것, 무위법의 의증이 나온다.
씨가 이미 싹을 틔어 나무로 자라고 있는데
어디 가서 예전 씨를 찾으려는가?
어디 가서 예전 씨의 능력을 달라고 하는가?
주인공 하나만 쥐고 가다 보면 의증이 저절로 나온다.
이것이 진짜 의증이요, 대 의증 이다.
새롭게 샘 솟는 의증이다.
일부러 지은 의증은 빈 맷돌을 돌리는 격으로
아무런 맛도 없이 스스로 곤고할 뿐이다.
일부러 지은 의증과 절로 일어나는 것은 천지 차이로 다르다.
자연적으로 의증이 나오는데,
그 해답을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고 가라.
언젠가는 해답이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놓음으로써 안으로 편안하게 돌아가는 것이지
내가 놓았으니까, 망상을 끊었으니까 편안하다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공한 나를 기준으로 해서 돌아가니까
거기에다 놓으면 절로 돌아가고,
돌아가다 보면 풀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라는 존재가 그대로 화두요,
뿌리 없는 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한마음에서 천 칠백 공안이 다 나가고,
마음을 알면 천 칠백 공안이 다 풀린다.
문이 없어 문 찾기 어렵고
문이 많아 문 찾기 어려우니
혜가는 어디 있고,
달마는 어디 있느냐?
제 6 장
머무름 없이 지켜보는 관법의 도리
지켜보라.
자기 발걸음을 지켜보라.
말하는 건 누가 하고,
듣는 건 누가 듣고,
보는 건 누가 보는지 지켜보라.
자기 하나 있어,
이 날까지 모든 것을 해오고 있는 것을 지켜보라.
생활을 떠나서 진리를 찾으면 끝내 찾지 못한다.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기뻐하는 자기 모습,
그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라.
거기에 울고 웃을 것이 진정으로 있는가.
울고 웃는 자신이 실체로서 있는가.
자세하고 자세히 관해보라.
관한다 함은,
없는 중심을 그냥 지켜보는 것이지
무엇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내 주인공에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비는 것이지 관하는 게 아니다.
주인공을 믿고 맡겨놓기만 하라.
그리고 오직 지켜보기만 하라.
마음의 컴퓨터에 모든 것을 입력해 놓고 밖으로 나오는 것을 지켜보라.
자아부처의 자리에 코드를 꽂아놓고 자동적으로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라.
상대를 두고 구하는 데는 공덕이 하나도 없다.
설사,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해도 주인공 자리에 놓고 지켜보라.
관한다 함은,
믿음으로 지켜보는 것이요 결코 둘로 보지 않고 지켜봄 이다.
주인공만이 주인공을 증명할 수 있다.
그것을 굳게 믿고 들어가는 것이 참선이자 관이다.
주인공에다 믿고 맡겨놓고,
무엇이 나오는지를 지켜볼 뿐 해결해 달라고 하지 말라.
수 억겁을 거치며 입력된 것이 솔솔 풀려 나오지만
닥치는 대로 놓으면 입력된 것이 지워지니,
그것을 지켜보라는 것이다.
안으로 관한다 해서,
관해지는 주인공과 관하는 내가 나뉘어지는 것은 아니다.
본래 하나이다.
맡긴다고 해도 맡는 것도 나이기에 맡기고 맡는 구별이 없으며,
지켜본다 해도 보고 보이는 구별이 없다.
만일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관이 아니다.
둘로 보면 기도를 하게 되지만,
둘로 보지 않는다면 관할 뿐이다.
지켜볼 때에 자꾸 망상이 든다 해도,
망상조차 주인공 자리다 하고 놓아라.
믿음이 약한 탓에 망상이 끼어드는 것이지만,
놓고 관하라.
그것을 따로 구분해서 보면 안 된다.
행하는 그대로를 누가 하는가 지켜보라.
놓는다는 것은 용광로에 무쇠, 잡쇠 등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 것이요,
관하는 것은 넣는 대로 용광로에서 재생되어 나옴을 지켜보는 것이다.
관에도
놓는 관,
둘 아닌 관,
내 일심으로의 관,
일심도 없는 무심관이 있다.
관한다 함에도 고정됨이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심관이 되기는 어렵다.
먼저, 일체 만법을 주인공 자리와 둘 아니게 보는
일심관이 성숙된 이후에 무심관이 되는 것이다.
아직 주인공 자리를 알지 못하고
믿음도 약한 사람들에게 한마디 이르노니,
아주 급한 경우에,
그대가 한 일이니 그대가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고 관하라.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을,
영혼과 불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한마음 주인공밖에 없다고 믿어,
그대만이 해결할 수 있다,
거기서 만이 이끌어 줄 수 있다,
되게 하는 것도 거기,
안 되게 하는 것도 거기 라고 믿고 관하라.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놓고 관하다 보면
그때,
인과도 무너지며,
습도 녹아지며,
나를 발견하게도 되고,
일체를 항복 받을 수 있다.
주인공은 우체통이라
넣고 지켜보면 배달되고 답장이 온다.
제 7 장
안에서 찾자
부처님께서,
나를 섬기지 말고 자성불에 귀의하라고 가르쳤음에도
중생들은 거룩하신 부처님 앞에 엎드려 빌기를 계속한다.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겨서 자성본래불을 믿지 못한 체,
신묘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자면
억겁 년을 수행해도 될 듯 말 듯 하다는 생각에
그냥 복이나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만다.
그러한 신앙은 대장부의 신앙이 아니다.
부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나 또한 근본은 부처임을 믿어 당당한 주체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허공을 쳐다보며,
나를 구원해 주소서 한들 백 년 천 년이 가도 소용이 없다.
이름을 부르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려보아도 그것은 헛일에 불과하다.
신은 제 안에 있으니 밖으로 청해보았자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안으로 불을 켜지 않고 밖으로 찾는다면 깜깜해서 천방지축이 될 뿐이다.
밖으로,
하느님 아버지시여,
부처님이시여,
관세음보살이시여 하고 아무리 찾아도 대답이 없다.
신을 설정해놓고 그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도록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나와 신이라는 대립,
상대되는 두 인격체가 나온다.
둘로 나뉘어져서는 안 된다.
또 밖으로 그렇게 추구하거나 형상에 들이대다가는
정작 자신의 집을 비워두는 격이 되니
빈 집은 침입을 받게 마련이다.
형상이 형상한테 절을 하니 꼭 허수아비 놀음이구나.
마음을 증득하지 못하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밝혀져 나오는 빛이 없기에
항상 남의 지식, 남의 생각들만을 자기 머리에 넣어놓고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대장부, 대자유인으로서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부자유한 남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래서 속고 사는 인생이요 예속된 삶일 뿐이다.
이래서야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일임을 알아야 한다.
이 공부는
자기가 가르치고 자기가 배우는 것이다.
자기가 놓고 자기가 받는다.
자기가 항복하고 자기가 항복을 받는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일인 것이다.
밖을 이야기하고 밖으로 끄달리지 말라.
몸 자체가 화두다.
태어난 자체가 화두다.
일 자체가 화두다.
이 공적한 우주 모습이 화두다.
여기에 다시 화두를 덧붙인다면,
어느 때 저 무한으로 깊은 세계를 다 보겠는가.
제 8 장
걸림 없이 가는 정진, 무애의 발걸음
수행은 쉼이다.
어서 성불해야지, 빨리 중생고에서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이 뭉게뭉게 일어나면
여유로와야 할 마음이 도리어 반대로 흐르게 된다.
잡으려고 하면 갈수록 멀어지고
푹 쉬면 제 발로 찾아오는 게 수행의 묘법이다.
인간답게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다움의 삶,
모든 것을 오직 주처에서 하는구나 하고 믿고 가는 삶,
그것이 자유인의 삶이다.
가볍고 힘 찬 걸음걸이로 나아가라.
세상은 화택이요 고해라 하지만,
부처님이 가르치신 세계는 환희와 충만의 세계이다.
오늘을 밝고 아름답게 살아가라.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어가라.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마다하지 않고 긍정하는 대장부가 되라.
무엇을 구한다, 버린다, 안 버린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는 인연 막지 않고 가는 인연 붙잡지 않는,
대 수용의 대장부가 되라.
일체의 것에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 대장부가 되라.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비범한 대장부가 되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버려라 고 하셨다.
그러나 내 앞에 닥친 의문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일까?
버리라는 말씀은,
버리지 않으면서 버려야 하고,
버리되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나, 나의 것이라는 애착은 버리되,
인연은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애착을 버리면 곧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인연을 거둘 때,
그것이 버리되 버리지 않는 보살행인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본다면,
잘 못되고 잘 되고 가 분명한 것 같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종합해 볼 때는 잘 못되고 잘 되고 가 없다.
분별을 끊어야 한다, 망상을 버려야 한다 하면서
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해 애를 쓰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끊자고 해서 끊어지고, 버리자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끊겠다, 버리겠다 하면 더 일어나고 더 달라붙는다.
분별이다, 망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본래로 공해서 따로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이 자기가 마음으로 지은 환인 줄 안다면 녹아버리고 말 것이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애를 쓰니,
그것이 오히려 다시 분별심이 되고 망상이 되는 것이다.
번뇌를 끊어라 하면 둘로 보는 경향이 있기에 녹여라 라고 하는 것이다.
둘로 보는 한은 끝내 끊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싸 안아 녹여버리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사실, 끊어라 해서 말 끊고 생각 끊는다면
무엇이 남아서 부처를 이루겠는가.
망상이 없다면 목석과 무엇이 다르고,
번뇌가 없다면 어떻게 부처를 이룰 것인가.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보물을 얻을 수 없다.
제 9 장
참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 도전하는 것은 세간법일 뿐,
마음공부와는 다른 바가 있다.
참된 수행은 수행 그 자체가 목표요 목적이다.
마음을 쉰다는 것은,
깨닫기 위한 것도 백 점짜리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러하고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할 뿐인 것이다.
그렇게 알아 푹 쉬고 나면,
오히려 바라지도 않았건만
완성이,
목표가,
깨달음이 다가오게 된다.
어떤 위대한 것을 보아도
비천한 것을 볼 때와 다름없이
무겁고 평온한 마음, 흔들리지 않는 채
더러운 것과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이 확고하여야 한다.
그래야 크게 이룬다.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다.
오직,
지금 여기가 있을 뿐이다.
내일은 좋아지겠지,
모레면 잘 되겠지 하고 미루어서는 안 된다.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직시하면서
묵연한 코끼리 걸음으로 걸어가야 한다.
지금 여기가
바로 삼천 대천세계의 근본자리이며,
바로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자
영겁의 시간을 머금고 있는 자리이다.
고로
수행자가 맞이하는 하루하루 순간순간은
그대로 영원이요 무한이다.
오늘 이 세상에 났으면,
오늘 알아야 한다.
지금 여기가 그대로 도량이다.
자성이 그대로 사찰이다.
세속을 떨치고 입산해야만 입산이 아니고,
몸을 움직여 집을 나가야만 출가가 아니다.
자기 마음의 산, 마음의 도량으로 입산하고 출가하여야 한다.
밖으로 끄달리며 집착하는 마음을 거두어
내면으로 향하는 것이 그대로 귀의이다.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
믿음이 끊어지지 않는 숙연한 수행이 곧 참선이다.
이런 참선이 진짜 참선이라,
내가 한다, 내가 앉았다는 생각조차 없고
어묵동정에 구애됨이 없는 활선인 것이다.
일하는 것도 참선,
먹는 것도 참선,
사랑하는 것도 참선,
모두 참선 아닌 게 없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게 바로 참선이요 종교이다.
흔히들 무릎 꺾고 앉아야 참선이고,
절에 간다 하면 목욕해야 하고,
백 팔 배 해야 하고,
비린 것 먹지 말아야 하고,
부부간에 잠 자리도 달리 해야 한다는 등
일상생활 아닌 그 무엇이어야 하는 줄 안다.
이래서야 어찌 생활 속의 불교라 하겠는가.
수행방법이야 천차만별로 많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마음으로 하는 방법이 아니라면 몸 떨어지면서 다 떨어지는데
무엇이 있어 끝간 데 없이 남겠는가.
이 도리를 체득한 뒤라야
요가는 요가대로,
명상은 명상대로,
좌선은 좌선대로,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이름 있고 방법 있어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달마의 면벽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인 것이다.
제 10 장
깨달음
수행자는,
오신통도 도가 아니라는 점을 철저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모른다면 더 나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자유는커녕 오히려 부자유에 빠져버리게 된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신비하고 위대하고 찬란한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 속에 나의 이기심이 숨어있고,
그것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이 덜어지지 않는다.
세 번 죽어야 도를 이룬다.
첫 번째로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를 버려서 나를 얻는 소식이다.
두 번째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를 얻는 소식이다.
이 소식은 너무 광대무변하기에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또 내가 죽어야 한다는 뜻은,
나와 더불어 일체를 버려서 일체로 나투는 소식이다.
역시 말로 할 수 없으니,
옛날 선지식들이 다만 법상을 침으로써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나를 발견했다 해서 깨달은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망상을 짓지 말라.
나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이제 겨우 싹이 터서
한들한들 고개를 쳐들고 나오는 격이다.
그 싹이 다 자라서 세상 만물과 둘 아니게
이심전심 조화를 이루며 돌아가게 되었다 해도
깨달았다는 말은 못한다.
열매 맺어 온 누리를 두루 먹이면서
씨가 세세생생에 끝간 데 없이 먹일 수 있게 되어야
구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열매 익어 온 누리가 주고 받으면서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야
삼세를 통달한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나를 발견하여 참 나와 계합되었다 해도
그렇게 참 나를 안 입장에서 다시 닦아 나가야 한다.
이 때가 상당히 어려운 시기이다.
참 나를 알고 경계에 걸림이 없으니
고를 넘어서 아주 편안한 상태에 이르지만,
그래서 이뿐인가 보다 하고 거기에 머물기가 쉽다.
무엇보다도 그 상태가 아주 기쁘고 반가우니까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달디 단 생명의 샘물을 마시며 사는 격이라
스스로 대견할 뿐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게 된다.
더 높은 차원은
아직 보지도 듣지도 못했으므로 생각도 해볼 수 없지만,
아래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보이니
거기서 자기가 제일인 줄로 알고 우쭐하기가 쉽다.
위 쪽은 어둡고, 아래 쪽만 환하여 이때 수행을 그르칠 가능성이 많다.
모든 것이 결국 내 마음인 줄 알아
신통력까지도 자심으로 돌려놓으면 무심이 된다.
마음이 없는 무심이 아니라,
있기는 있으되 스스로 고요하니 무심인 것이다.
이 무심의 경지가 깊어지면
이미 내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문제가 붙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나임으로 차라리 없고,
그러면서도 생활하고 있으니 있는, 그런 상태가 된다.
말하자면 무심하다는 그것마저도 없는 텅 빈 상태,
아무것도 없어서 텅 빈 게 아니라
스스로 자재로워 텅 빈 상태인 것이다.
그야말로
무심까지 녹은 공이라
그대로 누진통인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로 몰아 세웠고
부처님은 그 아버지 하나마저도 놓아버렸다.
그 점이 다르다.
예수는 하나로 돌렸기에,
예를 들어 죽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다면,
부처님은 열반에 임해서,
산 사이가 없으니 죽을 것도 없다 한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라는 의식까지 놓아버렸으므로,
예수님은 한 것이 있지만 부처님은 한 것이 없다.
일체가 두루 자기이기 때문에
했다 안 했다 하는 말이 붙질 않기 때문이다.
배꼽까지 둘러 빠져야 만(卍)자가 된다.
법 안에는 따로 뜻이 없다.
보살도 이름해서 보살이다.
내가 건졌다,
내가 건질 수 있다,
내가 건지겠다 고 하는 사람은
보살 될 자격이 없다.
일심으로 주인공을 찾는다.
그러나,
찾고 보면
주인공도 없고
찾는 그 일심도 없다.
그 공한 곳에서 오히려 묘용이 나오게 된다.
제 11 장
선시와 게송
오경대주 온 누리 푸르르고
정든 님 내 집 불빛
항상 밝아 비추는데
가을 흉년 거둘 것 없다 하지마오
사월 남풍 솔바람에 오곡 무르익었다오
무라 하여 백지인 줄 알지 마오
사월 남풍 봄 바람에 누르 무르익은 보리
맛이 좋아 배 두드려 맛이 좋고 좋았다네
둘 아니다
둘 아닌 것 알지마는
둘 아닌데 빠지리다
비호같이 말을 달려
천둥번개 번쩍번쩍
채찍
채찍
채찍
이 산 저 산
눈 덮인 산
언제나 봄이 와서
푸른 잎들 소생하나
백설이 휘날려 지붕이 되고
그 지붕 밑에 누각이 되니
누각 속에 새들 지저귀고
꽃은 피고 바람 불어
그 향 내음 아주 향기로우니
어찌 즐겁다 하지 않으랴
만강에 달이 비쳐 밝은 것을
어부가 다 몰고 들어와
모든 꽃 향 내음 피우듯
너와 나와 둘이 아닌
그 마음 전달하며
이렇게 펼쳐지누나
<한마음법의 수행 편>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