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엔 양곡도서관에서 예지랑 지선이랑 성경을 읽기로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 양곡도서관까지 걸었더니 한 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한 시간을 걸으며 신도시를 지나가니 도시의 속살이 보였습니다. 시끄런 공사현장도 조용히 들여다보고, 가지런하게 빗질하듯 텃밭 일군 부지런한 손에 감탄하고, 가르마 같은 지름길 찾아내며 뿌듯해하며 한 시간씩 두 번 걸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무엇보다 예배당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리로 벽을 두르고 멋스럽게 기와지붕을 올린 곳도 있고, 예배당 뒤에 넓고 판판한 주차장 딸린 곳도 있고, 삼천 명도 족히 수용할 큰 예배당도 있었습니다. 멀쩡한 예배당들을 보면서, 문득 궁금했습니다. 고등학생 예지와 지선이는 왜 나같은 목사를 만나줄까? 멀쩡한 예배당 가까이에 두고, 왜 공구상가에 터 잡은 민들레교회에 오는 걸까? 답을 못 찾겠습니다. 그냥 고마웠습니다. 예지야, 지선아, 고맙다.
생각해보니, 변변한 프로그램도 없고, 예배도 주일 한 번뿐이고, 학생모임도 따로 없고, 맘껏 기도할 공간도 없는데, 주일이면 모여 예배드리고, 밥 먹고 삶을 나누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지날수록, 우리는 더 좋아질 것입니다. 더 사랑할 것입니다. 학생도, 청년도, 집사도, 권사도, 목사도 성장할 것입니다. 저는 긍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우리 교회 성도 한 명 한 명과 무엇보다 하나님을 보건대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아질 것이고, 더 사랑할 것이고, 더 성장할 것이고, 더 성숙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해 둘 게 있습니다. 우리가 더 사랑하고, 더 정들더라도 제가 만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을 하면 여러분은 제 멱살을 잡아야 합니다. 제 멱살을 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려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죄를 짓는다면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의 멱살을 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릴 것입니다. 완력이 아니라, 영력으로 그리할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지어, 그 죄가 명백하여 천하가 다 알고 있는데도, 여러분이 제 멱살을 잡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저를 하나님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여도 혹 기적을 행한다 하여도, 목사는 사람일 뿐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행10:26). 목사가 하나님 노릇할 때, 그는 우상입니다.
야곱 가족이 우상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창35:4).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창35:1). 벧엘로 가라 하시는 것은, 야곱이 형 에서에게 도망칠 때, 지팡이 하나 외에는 가진 것이 없던, 그 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창32:10). 지팡이만 남겨두고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모두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 ‘신상들과 귀고리들’이 한 묶음이라는 것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신상들’이란 단순히 나무나 돌을 쪼아 만든 형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귀금속으로 만든 ‘신상들’입니다. 야곱 가족이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는 것은 바리새적인 통회가 아니라 삭개오 차원의 회개였음을 뜻합니다(눅19:8). 삭개오 차원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참회가 아니라, 일상을 변화시키는 회개를 뜻합니다. 장승을 뽑는 것이 아니라, 탐심을 뽑는 것입니다(골3:5).
더 고통스러운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우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상이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도 원수가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야곱 가족이 벧엘에 가기 전에 ‘상수리나무 아래에’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묻었다는 본 기사 하단에,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했다는 단신 기사가 첨부됩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창35:8)”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葬事)했다는 것은 의도적인 편집입니다. ‘신상들과 귀고리들’ 자리에 ‘유모(乳母)’를 댓구로 놓았습니다. 나를 먹인 젖줄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원수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해서는 안 될 몹쓸 불효를 저질렀습니다. 슬퍼도 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유모의 죽음은 대단히 슬픈 것이어서 무덤 자리를 ‘알론바굿; 곡함의 상수리’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마리아에게 심장을 드러내는 고통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유모를 땅에 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공하는 저 목사는 유모입니다. 저를 땅에 묻고 날 것 그대로 성경을 먹어야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탯줄을 잘라야 아이가 호흡할 수 있는 것처럼, 젖줄을 잘라야 우리는 하나님의 생기를 호흡할 수 있습니다(창2:7).
지선이와 예지가, 김목사를 통하지 않고도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젖줄인 목사가 우상 되지 않고, 하나님만이 우리 하나님 되소서.
첫댓글 지선이, 예지, 하영이, 주영이, 은주... 우리 민들레 청소년들이 각각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더 섬겨주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 그래도 성령님이 계시니 교육 프로그램은 부족해도 '배움'이 부족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