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를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 우리들은 오랜만에 발을 쭉 뻗고 푹 쉬었다. 약 한 달간을 이국의 땅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며 뛰어다녔던가를 생각하며.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편하게 앉아 여유 있게 기내 서비스를 받기를 고대하던 때를 떠올리니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늦게 도착해, 금연석이 다 차버려 흡연석에 앉게 되었던 점이다. 비행기는 무조건 금연인 줄 알았던 우리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자리 배치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바로 옆 커플은 70대 할아버지와 40대 아줌마였는데 함부로 남의 이야기를 하면 안되겠지만, 사실.. 불륜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았다. 아줌마가 버젓이 다리를 들어 할아버지 무릎 위에 올려놓자 할아버지는 무슨 크림을 발라주었고 서로 맞담배를 피우다가 키스를 하는 등 시종일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만 했다. 내 바다 건너 옆 커플은 부부였는데 평범해 보이던 여자가 갑자기 부스럭거리며 꺼낸 짐이 말보로 담배 한 줄이었는데 무슨 담배 곽이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아.... 그 독한 양담배를 사방에서 피워대는데 장작 프랑크푸르트에서 발리까지는 15시간 가량이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우리 셋은 폐가 온통 썩어드는 것 같았고 질식해서 죽는 줄 알았다.
몇 날 며칠을 나는 것 같던 비행기도 결국 어느 땅에 도착하였고 그 곳이 우리가 마지막 여행을 즐길 발리 섬이었다.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는 발리.. 지상 최대 휴양지라는 그 곳에 도착하자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불어와 숨이 막혔고 순식간에 옷 속으로 땀 한 줄기가 흘렀다. 사실, 발리 여행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겁이 났다. 유럽은 상세한 정보 책자가 많아서 잘 찾아보고 즐길 수 있었지만 발리에 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서 대체 무얼 하고 지낼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발리 섬의 자연 경관이나 역사 같은 것은 많았지만 교통편, 비용 같은 중요한 자료는 없었다. 여행사 측에서도 현지에서 직원이 공항에 나올 것이라는 말만 했다. 그런데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는 인도네시아 현지 사람인 그 이름도 빛나는 '수말리'.. 한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안녀하시미까?"라고 인사를 하고 우리 이름을 커다랗게 써놓은 푯말을 들고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창피했다. 누가 내 이름을 크게 써서 우렁찬 목소리로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나라 여행사에서 인도네시아 지부를 두고 한국인 손님을 일정 내내 관광시키는 프로그램에 우리가 가입된 것이었다. 돈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르르 구경 다니는 가이드 여행이라는 것을 우리가 직접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항상 배낭을 메고 지친 표정으로 걸어다니던 우리들은 갑자기 봉고차를 타고 설명을 들으며 편하게 관광하게 되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도중에 만난 발리의 거리는 이제까지 알아온 도시와는 매우 달랐다. 까맣게 탄 피부의 눈이 큰 사람들은 차림은 남루했지만 왁자지껄하기도 하였고 대부분이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방이 논과 밭이었고 개, 닭, 소가 널려있었다. 키가 큰 야자수와 열대 정글의 나무들 그리고 작은 풀과 논의 곡식이 같이 있었고 집집마다 행운을 기원하는 상징을 세워놓았다. 우리 나라 절에서 볼 수 있는 나한 같은 무서운 표정을 한 돌 조각상을 만들어 그 앞에 갖가지 과일과 곡물을 쌓아 놓고 향을 피워 두었다. 그렇게 하면 집에 복이 들어 농사도 잘 되고 집이 번창하게 되므로 매일 아침 깨끗한 재물로 기원을 드리는 것이 발리 사람들의 관습이라 한다. 더운 지방의 특성 때문인지 사람들은 모두 비쩍 말랐는데 그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여서 소는 사슴 같았고 개는 여우 같았으며 닭은 조금 큰 비둘기 같았다.
가이드 수말리는 한국말을 꽤 하는 편이어서 큰 불편이 없었고 호텔도 아주 훌륭했다. 인도네시아가 아직 우리 나라보다 잘 살지 못해서 물가가 많이 싼 편이라 같은 가격에 유럽에서는 여행자용 호텔에 묵을 정도라면 발리에서는 최고급 호텔에 묵게 되는 것이라 한다. 열대의 야자수와 정글이 그대로 우거진 가운데 목조로 지어진 동양식 건물이 서있고 이국적 분위기를 뽐내는 돌 조각상과 시원한 수영장이 한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자 악사들이 마룻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동남아의 음악을 연주했고 수말리가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 식사를 할 곳으로 데리고 갔다. 한 식당.. 정말 얼마 만에 한국 음식을 먹게 되었는지. 라면의 차원을 넘어서서 김치찌개와 부침개, 감자조림, 하얀 쌀밥이 놓인 밥상~! 한국을 떠나있어야 애국자가 되고 한국 음식을 오랫동안 먹지 못해야 그 참 맛을 알게 된다고 그 누가 그랬던가. 정말 따-악~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식사를 하였다.
발리 사람들은 자연을 숭배하고 자연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신을 찬미하기 위해 갖가지 전통 무용을 가지고 있었는데 식사 후에 본 무용은 '깨작 댄스'라고 한다. 발리에서 우리들은 마치 무슨 부유층이나 귀족같이 지냈는데 깨작 댄스를 감상하는 곳에서도 우리를 위해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난생 처음 'star passion' 이라는 칵테일을 마시며 여유 있게 관람하였던 것이다, 하하~. 깨작 댄스는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내내 '깨작작작 깨작작작 깨작작작..."을 중얼중얼 대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보면서 입이 얼마나 아플지 걱정이 될 정도로 하루종일 '깨작작작'거렸다. 동남아 사람들의 춤이 금색, 녹색, 붉은 색으로 치장된 복장을 하고 손가락으로 말을 하는 것 같은 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발리 사람들도 그런 춤을 추고 있었다.
발리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래프팅을 해보았다. 그것도 열대 천연의 정글이 우거진 계곡에서 말이다. '아융 계곡'이라고 했는데 '아융'은 인도네시아말로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데 그만큼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는데서 비롯된 말이라 한다. 그곳에 아침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많은 관광객이 몰려있었다. 대부분이 일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래프팅 가이드들도 우리에게 일본 사람이냐고 대뜸 물었다. "No" 라고 대답하면 이제 알아서 한국 사람이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웬걸, 중국 사람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다시 "No"라고 대답했는데 이젠 한국이 나오겠지 하며 기다렸더니 웬걸.. 타이완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의 국력이 어서 성장해야 함을 느낄 수 있던 기회였다.
5명이 한 조가 되어야 해서 어떤 인도의 신혼 부부와 같이 탔는데 아.. 그 아저씨(신랑)이 너무 멋있었다. 우리 3이서 모두 멋있다고 점수를 만점으로 매겨 줄 정도였기 때문에 보트에 탈 때 서로 그 아저씨 뒤에 앉으려고 싸움이 날 뻔했다. 하하~. 헬멧을 쓰고 꽉 끼는 구명 조끼를 입은 후 개별 노를 하나씩 들고 밀림 속 돌계단을 따라 계곡을 내려갔다. 그리고는 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에 도착해 안전지침을 듣고는 바로 보트에 탔다. 아~ 정말 짜릿한 경험이었다. 열대 우림 천연의 수목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용돌이가 이는 급류가 여기저기 있어 앞뒤로 넘어지고 부딪히기도 하며 신나게 급류를 탔다. 굵은 줄기와 큰 키의 나무 가운데 선명한 파란 색을 가진 새, 날개만 주홍빛인 검은 새 등등 신비롭기까지 한 새들이 날아다녀 한 층 묘미를 더했다. 균형을 잘못 잡자 그대로 물 속으로 빠져 수영도 했고 중간 중간 나타나던 폭포에 들어가 보트가 뒤집히기도 했다. 인도 아저씨 뒷자리는 인기가 너무 많아 내가 밀려서 맨 뒤에 앉게 되었는데 내 키가 가장 작아 물에 던지기 적당했는지 잔잔한 수면이 나타날 때는 가이드가 일부러 물 속에 나만 집어 던졌다. 정말 무슨 밀가루 포대자루를 버리듯 한 손으로 사람을 들어 물 속에 던지는데 기분이 장난이 아니었다. 더욱이 건기의 열대 지방의 강은 뿌옇고 탁해 물 속이 보이지 않아 어디선가 악어가 나타나 내 다리를 물어갈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우기가 되면 급류의 세기가 다섯 배는 강해진다고 했는데 건기에 갔을 때도 그렇게 급류가 세었던 점을 생각하면 우기에 래프팅을 한다면 정말 스릴이 넘치고 신났을 것 같다. 래프팅이 끝나고 계곡 옆에 차려진 점심 식사를 했는데 발리 전통 음식들이었다. 한 숟가락 들면 부스스 떨어지는 동남아의 쌀, 볶음 라면 같던 국수, 그리고 이름 모를 여러 튀김들이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그릇에 담겨 있었고 개인 접시도 그런 그릇이었다. 나뭇잎이 매우 두꺼웠는데 그것을 접어 그릇으로 만든 것으로 매우 자연친화적이었고 느낌도 깔끔하게 좋았다.
그 날밤은 발리에서 이틀째로 우리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큰 의미를 담아 자축하기 위해 나이트에 가거나 큰 호프집에 가서 밤새 놀려고 호텔 측에 부탁해 발리의 번화가로 갔는데 사실 그 곳은 4층 짜리 작은 쇼핑몰이 전부였다. 마치 우리 나라의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 아파트 상가' 같은 느낌이었다. 할 수 없이 그 곳에서 약간의 쇼핑만 하고 호텔에 돌아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party를 하기로 했다. 그 곳의 한 레스토랑에 가서 만찬을 했는데 발리의 물가는 정말 쌌다. 게, 스파게티, 피자를 먹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제대로 된 게를 먹으려면 몇 만원은 할텐데 우리 나라 돈으로 3000원 정도의 돈으로 먹었던 것이다. 랍스터도 있었는데 이것도 우리 나라에서는 꽤 비싸서 함부로 먹지 못할텐데 발리에서는 4, 5000원이면 먹을 수 있었다. 여행의 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만찬을 즐길 수 있던 그 기분~ 그것은 겪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그 쇼핑몰 지하는 오락실이었는데 옆을 지나가다 어디서 많이 듣던 노래가 나와 귀를 기울였더니 구피의 '쇼크'였다. 우리 나라의 pump 기계가 수출되어 발리 번화가에서 버젓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은 pump를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pump 한다는 말도 못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우리가 어설프게 스텝을 밟자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 대단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갑자기 pump 짱이 되어 버렸다! 하하하~.
망고나 그 외 열대 과일과 맥주, 감자 칩, 빵.. 이런 것들을 사와 촛불을 켜놓고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26박 27일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1초도 빼지 않고 함께 한 소중한 친구들. 오랫동안 고생을 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실망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우리들을 떠올리며 건배를 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을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공통적인 의견이 나왔다. 어른들이 결혼을 하고 부부 싸움 같은 것을 많이 하거나 '결혼이 행복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사람을 쉽게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태도 없이는 친구든, 연인이든 같이 살 수 없음을 알 수 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중국식 점심을 먹고 원숭이 숲과 울루와뚜 절벽 사원을 찾아갔다. 원숭이 숲에는 원숭이들이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미리 바나나를 준비하지 못했던 우리는 프링글스와 아침에 먹었던 빵을 가지고 갔다. 손바닥에 먹을 것을 올려놓으면 원숭이들이 가져가서 먹는데 작은 사람의 손 같은 원숭이 손이 직접 손바닥에 닿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숭이를 그렇게 가까이서 직접 만지며 보는 것은 처음이라 매우 신기했다. 원숭이가 영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냄새를 맡고 맛있는 것인지를 구분해서 좋아하면 가져가고 싫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먹이가 마음에 들면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다른 손으로 먹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하면 옷을 잡거나 가방을 잡고 놓지 않았다. 가방에서 먹이를 꺼내려고 하면 대번에 먹이를 꺼내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가와 가방을 잡고 애절하게 쳐다보거나 협박적으로 바라보다 더 달라고 다리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바나나를 잘 준비해 가지 않은 것이, 원숭이들이 하도 바나나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관광객이 애써 준비해간 바나나는 먹지도 않았다. 내밀어봐도 관심 없게 쳐다보고 그냥 땅에 버려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한 빵이나 프링글스는 먹어보지 않은 게 맛이 있어서 그런지 꺼내기만 하면 없어졌다. 쳇, 아무리 봐도 배부른 소리하는 건방진 부르주아 원숭이가 아닌가..
그 가운데 우두머리가 있으면 먹이를 주어도 함부로 먹지 못하고 대장의 눈치를 보는데 대장은 그럴 때면 어김없이 먼저 먹던 먹이를 입에 쑤셔 넣고 당장 다가와 새로운 먹이를 가로 채가 버렸다. 원숭이 숲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은 먹이를 한번에 꺼내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숭이가 갑자기 단체로 달려들어 이것, 저것 가져가 버려 물건을 읽어버리거나 몸을 다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 곳의 원숭이들은 대단한 욕심쟁이였다. 대부분의 동물은 어미가 새끼에게 먹이를 양보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곳의 원숭이 어미들은 새끼를 배에 매달리게 하고 가다가 먹이를 보면 그 갓난 새끼와 서로 먹으려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잘 걷지도 못해 어미 배에 찰싹 달라 붙어있던 새끼도 먹이를 보면 뛰어왔고 그러면 어미도 갑자기 뛰어와 서로 밀치고 소리를 질러대던 모습을 보고 참 기가 막혔다.
울루와뚜 절벽 사원은 승려들이 기도하는 곳으로 여자가 다리를 내놓을 수 없어서 관광객 여자들에게 보라색 천을 하나씩 주어 허리에 두르게 했다. 그렇게 하고 가니 마치 내가 그 곳에서 기도하는 수도승같이 느껴졌다. 천해의 절벽 위에 지어진 사원은 바로 앞에 펼쳐진 끝없는 바다가 있어 그런지 기도를 하고 자기를 수양하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의 바다는 참 신비로웠다. 바다 색이 푸르거나 녹색인 것은 많이 보았지만 옥색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멀리서 파도가 밀려와 절벽에 닿은 곳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 날 때는 옥빛에서 하얀빛으로 깨어지는 옥과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발리를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 동안 수고해 준 수말리와 인사를 나누고 저녁 8시 30분 출발 비행기를 탔다. 모든 여행의 일정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들은 그 때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행기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고 우리의 다른 여행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역시 우리들은 끝까지 고생스런 여행을 할 운명이었나 보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원래는 서울행 직항이었는데 실컷 자다 일어나 보니 엉뚱한 곳에 도착해있었다. 자카르타였는데 비행기에 고장이 생겨 수리를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사고가 날 뻔한 비행기를 타고 있었던 셈이 아닌가? 대체 이번 여행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던가? 순탄치 않았던 여행을 떠올리며 불안해졌다. 더구나 그 때 타고 있던 자리는 사고가 나면 가장 먼저 죽을 꼬리 바로 앞 자리였다. 몽고 어느 사막에서 갑자기 모래에 파묻힐 뻔했다는 상상에 웃음이 났다. 여행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우리 비행기는 '가루다 인도네시아'였는데 한국에 돌아와 안 사실인데 세계 비행기 회사에서 사고율 2위라고 한다. 쓴웃음이 난다~..
자카르타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한국의 생활을 생각했다. '이제 다시 부대끼며 살아가겠지..' 란 생각에 왠지 부담스러워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반겨줄까? 그 동안 나를 보고 싶어했을까? 선물 안 사왔다고 갈구지는 않을까? 요즘은 무슨 노래가 유행할까?
한 달밖에 나가있지 않았으면서도 무슨 몇 년을 살다 온 것 같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생각을 정리하며 어두워진 인도네시아의 밤하늘을 떠나 서울의 아침을 향해 날아갔다.
유럽과 인도네시아를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배운 것들, 순간 순간의 소중함.. 그런 것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26박 27일이라는 긴 꿈에서 서서히 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