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친구의 뺨을 연신 때리고, 자신의 하이힐을 남자 친구에게 신기고, 술에 취해 지하철에서 게워내다 말고 다시 씹고, 원조 교제 하는 아저씨를 혼내고...
영화 엽기적인 그녀로 소위 n세대의 상징처럼 떠올랐던 전지현.그녀가 1백80도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청순하고 화사하면서도 우리에게 고민이란 없다는 듯 깔깔거리고 천방지축 노니는 모습은 오간데 없고 병약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지난달 28일 오전.
영화 4인용 식탁의 촬영장으로 향하는 버스에는 빈 좌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전지현이 엽기적인 그녀 이후 어떤 영화를 선택했을까 궁금해하는 기자들로 만원을 이뤘던 것이다.
목적지는 설악산 K호텔.
불과 한달전만해도 단풍을 즐기려는 발길에 치이고 신음했을 도로는 이제 등쌀에서 놓여나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군데군데 물줄기가 꽁꽁얼어 콧물처럼 묻어 있는 설악산, K호텔은 그 넉넉한 품 한 켠에 아늑히 자리하고 있었다.
호텔이라면 서울에도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단 두 신을 찍기위해 왜 이 깊은 곳으로 들어왔을까.
"감독이 원하는 분위기를 가진 호텔들은 모두 촬영을 거부했기"때문이란다.
평소같으면 한적하기 그지 없었을, 무궁화 다섯개의 고급 호텔이었다.
그러나 이날 호텔 로비는 공연을 앞둔 무대 뒤처럼 소란과 고요가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얗게 타는 조명등이 너댓개나 서 있는 사이사이로 노란색 점퍼를 유니폼처럼 차려입은 스태프들 20여명이 부산하게 오갔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이미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었다.
이날 촬영분은 주인공 정원(박신양)이 연(전지현)을 부축한 채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정원의 약혼녀 희은(유선)이 발견하고는 뒤를 쫓는 장면이다.
처음엔 전지현을 못 알아 볼 뻔 했다.
다른 여배우인가 했다.
짙은 베이지색 외투 아래 회색 치마를 받쳐 입고, 수심어린 표정에 머리카락 몇 올 흘러내린 것까지….게다가 결혼한 여인 역이었다.
4인용 식탁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드라마이려니했다.
하지만 심리 스릴러란다.
식스 센스나 디 어더스처럼 4인용 식탁도 구체적인 스토리가 알려지면 안 된다며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전지현은 혼령을 보거나 사람의 운명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졌으나 남편조차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바람에 외롭게 지내다 정원을 만나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얼굴은 연기할 땐 물론이고 기자를 만나서도 좀체 웃음기가 없다.
"스태프들 불만이 많아요.
사귀기가 쉽지 않다는 거에요.
활달하고 웃음이 헤퍼 명랑한 타입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영화 속 인물에 몰두하다보니 잘 웃지 않게 돼요.
주인공이 너무 어두운 인물이라 그런 것 같아요." 지난 10월10일 촬영에 들어간 4인용 식탁은 현재 절반 정도 마친 상태.
개봉은 내년 4,5월로 잡고 있다.
전지현은 40일 가량 여주인공을 연기하면서 불안과 두려움 이외의 감정 상태로 좀 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사실 편하고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했다면 엽기적인 그녀의 연장에 있는 작품을 택했을 거에요.
그동안 들어온 시나리오도 죄다 그런 분위기였죠.
톡톡 튀고 명랑하고
하지만 배우가 하나의 이미지에만 매이는 건 좋지 않잖아요? 그러다 4인용 식탁의 시나리오를 받고는 도전하고픈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 스토리를 얘기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여러분도 한 번 읽으면 며칠 동안 잠을 못 잘 거에요." 옆에 있던 박신양이 끄덕였다."지현이랑은 1998년 화이트 발렌타이에서 같이 연기한 적이 있는데 그 땐 고등학생 때라 많은 얘기를 못 나눴죠.
그러나 이번에 다시 만나니 연기자로서 많이 컸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라며 추켜세웠다.
그러자 전지현이 "오빠는 결혼하고 나서 훨씬 더 부드러워졌어요"라며, 이날 처음으로 웃었다.
"이번 영화를 위해 발성 연습을 많이 하고 있어요.
여주인공은 복잡한 과거를 가졌고 험난한 사건을 겪어낸 만큼 목소리도 예사롭지 않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내 목소리는 아직 앳된데다 어려운 일을 겪은 경험도 거의 없거든요." 4인용 식탁은 단편영화 냉장고 이야기라 등으로 유명한 여성감독 이수연씨의 장편 데뷔작.
감독은 "여주인공 연은 섹시함 대신 연약하면서도 어떤 카리스마가 있어야 해요"라면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전지현씨가 시나리오를 읽고 몇몇 대목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고는 어, 내 코드를 읽는구나라며 가능성을 확인했어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이미지가 바뀌면 앞으로 CF 출연 요청이 크게 줄지 않겠느냐니까 전지현은 "걱정안해요.
주인공 연은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라 괜찮아요"라며 단호히 머리를 저었다.
화이트 발렌타인시월애 엽기적인 그녀에 이어 네번째 영화를 소화하고 있는 스물한살의 신데렐라.
그녀가 배우로서도 성인식을 훌륭히 치러낼 것 같은 예감이 얼핏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