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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 8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요한1서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계묘년 첫 주일예배입니다. 이웃교회 식구들 모두 새해 소망 이루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질문을 던진 율법교사에게 하신 명령 혹은 당부입니다. “당신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시오.”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율법교사는 예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율법교사가 이런 질문을 던진 까닭이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라고 짚습니다. 그는 율법교사였으니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의미를 두고 예수와 나눈 대화가 율법의 더 깊은 의미를 향해 열려있는 게 아니라, 자기 지식을 드러내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유식과 예수의 무식을 대조하고 싶었겠죠. 그의 교만과 악의는 자신의 지식을 율법의 정신을 향해 닫아두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과 대화하시면서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그의 지식의 빗장을 풀어내는 것은 물론 그가 걸어 잠근 빗장 안에 보발 것 없는 것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율법에 대한 자신의 지식의 곤궁 혹은 하찮음과 무기력과 대면함으로써 교만이라는 질병을 치유받을 기회를 얻습니다. 이런 사정은 이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관해 여러번 말씀을 전하면서 소상히 밝힌 바 있습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율법교사가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의 비유는 그가 알고 있는 답의 허를 찔렀습니다. 그렇다고 율법교사가 반박할 수도 없는 것이 예수의 말씀은 율법 정신의 정수를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바꾼 공동체의 이름 ’이웃‘과 관계 있는 것이므로 올 한해 지속적으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되돌아와 또 생각하고 다시 짚어볼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도 ‘이웃’이라는 주제에 관한 것입니다.
요한1서는 사랑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들을 펼쳐 보여줍니다. 이 말씀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주파수가 맞춰질 때, 더욱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1서의 사랑의 말씀들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질문 이전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 사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이웃 사랑’은 또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참으로 이 두 문구가 율법의 정수를 드러내고 있다면, 역으로 우리는 율법 전체가 이 두 문구에 대한 주석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계명은 단순히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을 지시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 보편의 문제에 관해서도 무한히 넓고 깊은 말을 건네는 말씀일 것입니다.
또 이 두 계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역시 우리에게 끝없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문장은 전혀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두 대상인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사랑하라는 공통의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둘은 단순히 동일한 것일까요? 아니면 둘 사이에는 단순한 동일성으로 말할 수 없는 차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일까요? 마치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지요. 수많은 의문이 두 계명의 관계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어제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가장 통속적인 대답을 하는 나훈아의 1969년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들어보았습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노래 가사는 사랑에 관해 묻지만, 사랑의 실패에 관해 답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이 조바심과 불안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신에 대한 걱정을 토로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사랑이란 대상을 통해 확보하고자 하는 ‘자기애’라는 통속적 사랑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율법의 말씀을 두 계명으로 요약할 정도로 통달한 율법교사도 이 율법에 대한 지식을 율법이 명령하는 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열고 실천을 고무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옳게 보이는 수단”, 즉 자기애와 자기의의 과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여겼던 것처럼 말이죠.
요한1서는 필연적으로 실패에 이르는 사랑, 결국 자기애로 귀결됨으로써 자기 연민에 안주하게 만드는 사랑을 넘어서는 참된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능한 사랑, 사랑의 본령이 진입하는 사랑,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넘어 하나님의 실재에 이르는 사랑입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요한1, 2, 3서는 아마도 요한복음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발생한 신앙과 신학의 문제와 공동체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쓰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세 요한서신들은 저자나 시기 혹은 공간적 배경에 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문서들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요한복음과 요한서신들을 같은 저자의 작품으로 간주해왔지만, 이를 인정하는 학자들은 보수 진보를 망라해서 거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진위를 떠나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가 썼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만, 요한1서는 저자에 관한 정보가 없으며, 2, 3서는 글쓴이를 “장로 요한”이라고 밝힌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내용을 보면 요한복음에 깊이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따라서 요한복음 공동체와 같은 신학을 가진 공동체에서 발생한 문제, 다시 말하지만 요한복음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른 공동체적 실천의 차이에 대처하고 있다는 점은 크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습니다.
요한1서는 ‘반대자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귀고 있으며”(1:6), 죄가 없는 것은 물론 지은 적도 없으며(1:8), 하나님을 알고 있고(2:4), 하나님 안에 있으며(2:6), 빛 가운데 거하고(2:9), 하나님을 사랑하는(4:20)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만큼 율법을 지키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적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4:1~6을 보면 그들은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이 세계의 물질성과 육신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들도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신을 폄하하고 따라서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요한1서의 반대자들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면서 함께 깨달은 진리,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변변치 않은 인간을 위해 내어주셨다는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서문이라 할 수 있는 1:1~18에서 예수를 빛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리고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반대자들은 이런 구절에서 예수의 신성을 보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육신성 즉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기독교라는 특수한 종교의 주장을 넘어서는 인류 정신사의 도약입니다. 말씀, 즉 로고스는 육신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물질성이며 구체성이고 현실성입니다. 구체적 현실 안에 물질적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정신은 그저 하위의식일 뿐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은 말씀이 육신이 존재하는 이 세계에 관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이 세계의 절망을 극복하고 슬픔과 고통을 치유하며 나아가 좌절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일에 무기력하거나 무관심하다면 그런 정신, 그런 말씀, 그런 로고스는 단순히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악하다는 것, 악마의 정신이자 궤변이며 허위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독생자, 즉 하나님의 심장이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육신의 존재로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실천하신다는 것이 요한1서의 주장이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자신을 땅의 현실을 위한 존재, 즉 육신으로 재구성하는 노동, 나아가 자신의 전부를 땅에 거는 결정적인 행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1서의 저자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러고 말합니다. 사랑은 육적인 인간에게서 발생해서 하나님을 향해 영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먼저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발생해서 육신이 되는 노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기애의 한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실패로 귀결되는 좌절된 사랑을 넘어서는 가능성이 이 믿음 안에서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노동은 자신의 모든 것을 땅을 향해 비워내는 자기 부정, 하늘에서 땅으로의 타락이라는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가 실패하는 사랑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방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랑의 현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야만 우리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한 한탄과 냉소를 넘어 여기 우리의 장소에 있는 하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한1서는 이 땅이 한낱 땅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갱신하고 극복하여 땅이 하늘이 되는 원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이 임하는 원리가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즉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스스로 예수의 삶을 사는 사람들, 스스로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으로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수행해야 하는 삶의 핵심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 예수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사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그 행위, 그 사랑의 노동, 사랑의 수고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의 저자는 반대자들을 자기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가인과 같이 된 사람들(3:12)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이웃을,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상한 영적 삶을 살고자 했으나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핵심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의 실패의 길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자기애라는 인간의 한계는 이제 철폐되었습니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은 우리에게 새 희망의 길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웃교회 공동체는 이 사랑 안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계묘년 새 시간 새 영토를 이 땅에 존재하는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공간으로 일구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