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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일연 단독 아닌 여러사람 저작” | |
하정용 송광사 성보박물관 전문위원 ‘삼국유사 사료비판’ 펴내 | |
임종업 기자 | |
하정용 송광사 성보박물관 전문위원은 최근 펴낸 <삼국유사 사료비판>(민족사)에서 이처럼 주장했다. 지은이의 추론을 따르면, <삼국유사>는 일연이 생전에 1차로 권제5 등을 짓고 일연의 문도 및 제3자에 의해 추가됐다. 추가된 부분은 무극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 전기이며 자장정률조(慈藏定律條) 안의 분주(分註)와 왕력(王曆) 등은 그 뒤에 다시 추가됐다. 그동안 <삼국유사>는 일반적으로 일연이 지은 것을 알려져 왔으나 학계 일각에서는 의혹을 받아왔다. 찬자 이름이 권제5에만 나오는 점, 일연의 문도가 세운 일연의 비문에 삼국유사에 관한 언급이 없는 점 외에 삼국유사가 △서발문 및 목차조차 없는 점 △서술상의 일관성이 결여된 점 △조목간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한 점 등 역시 지적돼 왔다. 지은이는 색인작업과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을 통해 이런 의혹에 아퀴를 지었다. 유사 소재 48수의 찬(讚, 저자의 생각을 밝힌다는 의미)을 조사한 결과, 통상적인 ‘찬왈(讚曰)’ 외에 ‘내유(內有)찬왈’이 있으며 말미에 ‘석해운(石海云)’이 붙은 것을 발견하고 이는 일연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또 23번째 찬 역시 말미의 ‘회고지(廻顧至)’는 ‘회고운(云)’의 잘못으로 추정되며, 이에 따라 ‘돌이켜 생각하건대’라는 뜻의 ‘회고운’으로 바꿔놓고 보면 그것 역시 일연의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또 △왕력 앞에 목차가 없다 △‘왕력’ 뒤에 찬자 이름이 누락돼 있다 △‘기이권제1(紀異券第1)’이라는 편목의 기재방식이 다른 것과 다르다 △‘삼국유사 권제2’ 다음에 편목명이 빠져 있다 △권제3의 경우 ‘흥법제3’ 다음에 나오는 ‘탑상(塔像)’은 ‘탑상제4’가 되어야 함에도 그냥 ‘탑상’으로만 나온다 △편목당 조목의 수가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등 편제가 심한 불균형을 보이는 점을 들어 여러 사람이 저작에 관련되었음을 뒷받침했다. 지은이는 또 사리조 무극기의 분주, 자장정율조의 사리조를 인용한 부분, 고조선조의 백악궁이라는 분주, 무왕조의 차전(此傳)이라는 분주, ‘전기’의 대산오만진신전(臺山五萬眞身傳) 등 5개는 확실하게 후대에 가필된 후주(後注)임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원성대왕조의 본문의 ‘주(注)’,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조(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條) 본문의 ‘차전(此傳)’도 후주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삼국유사>가 일연 외에 여러 사람의 가필이 있었음을 감안하여 사료로 이용할 때 비판적으로 접근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학산필사본에서 발견되는 ‘지(旨)’의 이체자 ‘지’(二 아래 日)가 1399년에 간행된 덕기사본(德奇寺本)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의 ‘선요발(禪要拔)’에서 발견되고 후대에는 복각본 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유사> 고판본이 고려 때가 아닌 조선 건국 직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기사등록 : 2005-09-06 오후 05:47:06 기사수정 : 2005-09-06 오후 05:47: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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