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곁에서 멀어졌던 빛이 가까이 다가 오는 계절을 봄이라 한다. 빛이 적고 넘치는 겨울과 여름은 나름 혹독함이 있어 경계하고 준비해야 하지만 그 속에는 쉼과 정숙이 깃들어 있다. 반면 빛이 온유하고 어진 봄이 오면 그 빛 안에 숨어 있던 생명이 모습을 들어 낸다. 트고, 피며 천지사방을 아름다운 세상으로 탈바꿈 시키는 시기가 바로 봄이다. 봄은 새생명이 우리 마음에 사랑과 꿈을 심어주며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기대를 갖게 한다. 봄은 축복의 계절이다. 기쁨과 환희심으로 출발할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미래에 기대되는 결실이 있기에 그런 걸까? 아무튼 축복과 환희심으로 제 57차 성지순례와 걸음 여행을 위하여 서울을 벗어나가 시작한 시간은 7시10분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벨린다 자매님들을 픽업하고 커피를 마시고 행장을 수습한 후, 두 번째 길의 행선을 바꿔 문경으로 접근해 갔다.옅은 안개가 봄의 기지개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 사이 마원과 한실 성지와 관련된 사료들을 나눔하기 시작하였다.문경, 상주를 중심으로 여러곳의 교우촌과 성지가 존재한다.조선 천주의 역사는 피폐해진 국가 모든 경영과 궤를 같이 한다. 신분적으로 사대부, 인격적으로는 사군자라 불렀던 양반계층의 학자들, 그들은 뼈를 깍는 자성으로 국가의 틀이 변하기를 염원한다. 먹을 것은 단 하나! 먹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은 서 넛, 그래 분당하며 죽자 살 자 달려든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하다. 양반들도 생산적 경제의 한축을 담당하라! 반계 유형원을 출발로 성호이익, 안정복, 권철신형제, 이벽, 정약용형제, 이가환, 이승훈 등등 뼈대있는 자제들이 달려 든다. 뼈아픈 자성의 결과다. 명문가의 아들 이벽. 천주실의와 칠극에 매료되어 믿음의 선봉장이 된다. 나름 전교에 자신을 찾은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세례를 받게 하고 혼인을 맺은 (정약현의 처가 이벽의 누이다. 그 사이 정난주가 태어나고 정난주는 황사영에게 시집간다) 정씨 문중으로 시집간 누이 제삿날 마재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두미협 배 안에서 정약전, 약종, 약용에게 귀뜸하고 책을 주어 끌어 들인다. 이어서 중인계급에 속한 학식과 덕망이 있는 김범우, 최창헌, 김종교 등을 개종시킨다. 이런 사실을 알아버린 함께 공부하던 이가환이 찾아와 꾸짖자 양근 권철신형제를 찾아가 열흘 머물며 영혼불멸, 사후 심판론을 설파, 결국 이들도 참여 시켜 버린다. 대학자인 권철신 형제의 참여는 천주에 대한 당위성을 심어주기 위한 이벽의 전략이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 3월)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한 교우들을 위한 첫 강학회가 1785년 3월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열렸다. 이를 수상히 여긴 추조(형조)금리들에게 적발된다. 이벽, 이승훈,정약전, 약종, 약용, 권일신부자. 김범우, 체포 성화상, 서책 압수해 간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대부자제란 이유로 전부 석방한 후 김범우만 중인신분이란 이유로 모진 심문끝에 단양으로 유배시키지만 고문의 여독으로 1년 후 순교한다. 이 당시 여파로 이벽 부친 이부만에게 혹독한 질책과 함께 문중에서의 비난을 한 몸에 받게된 이벽은 집안에 감금당한 후, 기아와 병약함으로 죽게된다. 이 당시 권철신은 아들과 이윤화, 이총억, 정섭과 함께 형조를 찾아가 김범우 석방과 성화상및 서책을 돌려달라 하지만 거절 당한다.
신해박해(1791년)
1790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제사 금지령을 내린다. 1791년 진산에 사는 윤지충, 모친(해남윤씨 윤두섭의 손녀다)이 사망하자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 끝에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신위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사를 지낸다. 이 정보를 입수한 관아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려 하자 숨는다. 숙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 배교를 하라하지만 거부하자 진산관아에서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온 후 왕명에 의하여 현 전주 전동성당 터에서 순교의 길을 걷는다.
을묘박해 ( 1795년 6월 27일)
1791년 신해박해 후 윤유일, 지황, 최인길, 윤유일, 최창현 중인계급에서 선교사 영입운동을 전개하여 1794년 12월 주문모신부가 한양에 들어와 전교를 시작한다.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1795년 6월 27일 포장 조규진이 최인길 집 급습 하였으나 미리 피신한 주문모신부는 무사하였다. 최인길, 윤유일, 지황만 체포됨 심문중 장사(杖死) 됨 포청에서 사건을 은폐할 목적으로 시신을 강물에 버리려 하였으나 대사헌 권유상소로 포장의 죄를 묻고 뒤이어 부사직 박장설 상소로 이가환 충주목사, 정약용금정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된다.
신유박해 (1801년)-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자 뒤를 이어 순조가 등극한다. 겨우 11살,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섭정한다. 김씨로서 노론벽파다. 천주교도들이 많은 남인시파 숙정하려 기다리다 국상 일년 후 박해를 시작한다. 정월 1월 공식박해령 선포한다. 오가작통업에 의거 교인고발, 비 배교자는 역적으로 다스리라 한다. 9일 후 명도회장 정약종 천주교 교리책과 성화 등등 고리짝에 담아 옮기려다 적발되자. 천주교 엄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잡아다 국문시작하고, 권철신, 이승훈은 의금부로 압송된다. 이어 다시 권철신, 정약종도 잡혀 의금부로 간다. 국문은 2월 10일부터 하여 26일 까지 지속된다.
정약종, 홍락민, 최장현, 홍교만, 최필공, 이승훈 참수, 이가환과 권철신은 심문중 옥사한다. 정약용과 약전은 배교 후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내포에서는 사도 이존창도 2월 9일 공주감옥에 갇힌다.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나 다시 고향부근인 공주감영으로 다시 간다. 그리고 황새바위에서 참수된다. 전국으로 박해는 퍼진다. 여주 3월 3일 원경도, 임희영, 최창주, 이중배, 정종호가 순교하고 양근에서도 유한숙, 윤유모, 4둴 2일에는 정약종 아들 철상, 최필공 사촌 필제, 중인신분 정인혁, 여교우로 윤운혜, 정복혜, 이합규도 순교대열에 든다. 그런데 2월말 남인계열 중요 인물들이 참수, 옥사, 유배로 박해가 종료될 것 같았으나 강완숙의 도움으로 피신하며 전교하던 주문모신부가 자수한다. 강완숙 일가와 그의 친척들이 자기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안 주신부님은 견딜 수 없어 3월 12일. 자수를 선택한다.
주 신부의 국문으로 드러난 이희영, 김이백, 김건순, 강이천, 체포되고 궁궐 안으로 피신했던 사실이 들어나고 왕족이 세례사실도 드러난다. 은언군의 처 송씩와 그이 자부 신씨가 사약을 받고 강화도 유배중이던 은언군도 사약을 받아 죽는다. 주 신부가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되고 김건순, 이희영이 서소문사거리에서 처형되고 주 신부를 6년간 모신 강완숙과 그의 아들 홍필주, 함께 잡힌 궁여 강경복, 궁녀줄신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그리고 고광성, 이국승, 윤점혜, 정순매는 각 고향으로가 지역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5월과 7월에 순교를 한다.
지방인 전주에서 박해가 3월 유항검, 유관검 일가족이 체포되어 심문중 유관검이 토설하여 200여명이 체포되나 대부분 배교로 석방된다. 다만 양벅청래 계획이 드러나 연관자 이우집, 윤지헌, 황심, 김유산, 이어서 옥천희가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언도 후 다시 전주감영으로 와 9월 17일 능지처잠된다.
9월 29일 들어 황사영이 잡히자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 선다 2월 11일 정약용의 고발로 체포령이 떨어지나 7개월간 행방이 묘연했다. 이후 유관검이 황심이 북경 왕래자란 고발로 9월25일 잡히자 황심은 자백한다. 9월 29일 제천 배론에서 김한빈과 황사영은 검거되면서 조선교회 실정, 교회재건, 종교자유를 망라한 그리고 양박을 청하는 백서가 드러난다. 황심,김한빈, 옥천희, 현계음도 문초를 받으며 10월 24일 선고를 받고 25일 참수된다 황사영만 백서 작업과정에 정약전, 정약용과 공모여부의 심문 때문에 선고가 늦어지지만 단독거사라는 황사영의 주장과 증거가 없자 11월 5일 대역부도죄를 적용, 당일 능지처참형이 집행되었다. 옥천희와 현계음도 함께 참수된다.
정부는 황사영 사건의 일단락으로 박해 전말과 옥사를 변호하는 반교문을 준비한다. 아직 척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을 새해전 집행하라 하고 12월 22일 척사윤음을 반포된다. 사형선고자는 속히 진행하고 미결 사학죄인 심문도 새해 전에 종료한 후 더 이상 수사는 하지마라하는 지시가 떨어졌다. 마지막 공식 사형 집행으로 서울에서 12월 26일 이경도, 변득중, 권상문 등 15명이 순교하고 전주에서는 12월 28일, 유항검 처, 일가친척들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신유박해 중 100명이 처형되고, 400명이 유배되었다.척사윤음 반포로 천주교는 국가의 적이란 법적근거가 마련되었고 교회급 지도자는 거의 사라졌다. 살아 남은 신자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산간벽지를 찾아 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았다.
정해박해 (1827년)
교우촌에서 교우들간 갈등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다. 전라도 곡성 덕실마을(현 오곡면 승법리) 교우촌은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1827년 2월 옹기에서 가마를 꺼내는 날, 작업중 주막에 가서 술을 먹던중 주벽이 심했던 한백겸( 순교한 한덕운 토마스의 아들이다)이 자신의 그릇이 작다고 투덜 가리며 시비를 부렸다. 주모에게 행패를 부리자 신입교우였던 주막 주인 전씨는 화풀이로 천주교 서적을 들고 관아로 가 한백겸과 동료들을 고발했다.
곡성 현감은 체포령을 내려 3월에 전라도 전체로 확대되어 240명이 체포된다. 4월에는 경상도 상주 잣골 신태보 앵무당 마을 안군심, 한양 이경언은 전주로 압송되고 충청도 단양 유성태는 충주로 압송되어 산간지방으로 숨어 들어 형성된 교우촌이 드러난다.
기해박해(1839년 3월 - 10월)
대 박해로서 기해박해는 1839년 헌종 5년에 일어 난다. 3월 5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정식으로 박해는 시작된다. 천주교 배척을 위한 박해지만 내면에는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 사파인 안동 김씨 세도를 빼앗기 위한 벽파 풍양조씨들이 일으킨 것이다. 당시 정치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순조 왕비 순원왕후 김 대왕대비는 안동 김씨다. 아버지 김조순 1832년 4월 죽고 세도는 아들 김유근에게 돌아 간다. 1834년 11월, 순조가 죽고 손자 헌종이 11살 등극한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오빠가 김유근이다. 대비정사를 보필한 그는 1836년 부터 병이들어 말조차 못한다. 역관 교인 유진길 안내로 세례를 받는다. 1836년 이후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게 된 동기가 된다.
그러나 병이 차도가 없어 정계를 은퇴하면서 정권은 우의정 이지연에게 넘어간다. 천주교를 싫어했던 이지연은 이미 천주교도들을 잡아 들여 감옥은 만원이었지만 풍양 조씨들을 등에 업고 순원왕후를 천주교인을 처벌하라고 압박한다. 당시 형조판서 조병헌 배교를 집중적으로 권하지만 효과가 없자 이지연에게 보고한다. 이에 이지연은 김대왕대비에게 천주교 박멸책을 상소한다.
- 무부무군(無父無君)이고 역적임을 강조하며 좌우포장들에게 조사와 사찰을 강화토록 하고 형조판서는 배교하지 않는자는 처형토록 하고 지방에도 공문을 보내 오가작통법에 새워 단 한명도 빠쟈 나락 수 없도록 하였다. - 대비는 수결해 준다.
그러나 큰 성과가 없었다. 형판 조병헌이 사임 후 직책은 홍명주가 판서, 임성고가 참판이 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박해가 일시적으로 뜸하자 서울에 있던 앵베르 주교가 수원부근으로 일시 피신한다. 조정의 세도는 조병구에게 넘어간다. 헌종의 외삼촌 인 조병구는 금위대장을 맡으면서 대비를 움직여 교우색출 착념을 받아 반포한다. 이와 동시에 교인 김순성(김여상)의 배신으로 6월 7일 유진길이 잡히고 정하상, 조신철 조선교회 재건에 노력하던 중요 인물들이 체포된다. 김순성과 포졸들에게 쫓기던 앵베르 주교는 수언 양감에서 포졸들에게 자수한다.
주교는 교우들의 재난을 멈추기 위하여 모방, 샤스탕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수를 권하여 내포 지방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된다. 포청은 8월 5일부터 7일 사이 선교사을 심문 후 의금부로 넘겨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과 함께 추국을 받는다. 신부들은 첫 심문에서 의주에서 조신철 정하상 안내를 받았고 서울 정하상 집에서 기거했다는 사실만 자백 후 신자들에 대한 정보는 거절했다.
(계속)---
옅은 안개가 흩으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원에 도착하였다. 마원은 새재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지막 주막거리였다.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충청도 교우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숨어든 곳이다. 영남 북부지방인 문경, 상주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산악지대다 이곳에는 한실, 여우목, 건학, 부력이 등에 교우촌이 있어 화전을 일구며 살아 갔다. 이곳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갈레 강 신부님의 전교지역으로서 병인박해 당시 유일하게 조선을 탈출한 세 명의 신부중 한 분이시다. 탈출 후 병이 악화되어 프랑스로 귀국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백 수도원에 들어가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를 드리며 일생을 보내 신다. 또한 조선교회에서 체험담을 글로 쓰면서 박상근 마티아와의 우정담에 대하여 소회를 적어 남겼다.
백화산 아래 한실성지로 신부님을 모시고 떠났던 박상근 마티아는 갈레 강 신부님의 엄명으로 마원으로 되돌아 온다. 그러나 신부님의 염원대로 살아 남지 못하고 상주관아에서 순교로 생을 마감한다. 마원 일대가 조망되는 아늑한 동산에 자리 잡은 성지는 봄 볕과 함께 평화로웠다. 당시 깊은 마을처럼 지금도 깊은 마당 뒤에 숨겨진 마을처럼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성심의 마음을 모아 제물을 차려 놓고 정성껏 흠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배알하고 절을 드렸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누구하나 참례의 마음을 벗어 난 이는 없었다. 정성이란, 그 소중함을 알기에 마음을 모은 가짐이다. 존경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묶어 주는 정의로운 신뢰다. 생각과 행위에 있어 보편적 당의성에 근본을 두고 있다면 진리적 사고 와 행위가 된다. 그래서 지향할 이유가 반듯해 진다.
봄빛이 가득한 이곳 주변으로 사과 밭이 울타리를 쳐 주고 있었다. 박해는 결국 결실로 가는 초석의 역활로 그 뜻을 다하게 된다. 가을이면 주렁 주 렁 매달리는 붉은 빛 열매처럼 복자 박상근 마티아의 순교 덕분에 한국의 천주교는 고난을 이겨내고 지금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성지는 증명하고 있었다.
왼쪽은 갈레 강 신부님 그리고 천주님, 박상근 마티아 복자시다. 그리고 우리들 곁으로 천주께서 오실 때 이 땅의 사도들은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며 피로서 역경을 이겨냈다. 고난의 상징을 상세하게 그려내고 증거하는 소나무 여러 그루가 성지를 윤택하게 하고 있었다. 형태는 모질지만 속은 향기롭다. 그 향기로움을 알기에 우리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살아 온 것 같다. 귀한 대접을 하는 소나무기에 송(松)이라 부르며 공경끈 과 뜻을 놓지 않은 것이다.
소나무 원목으로 집을 짓고 관솔로 밤을 밝히고 솔가지와 방울로 밥을 짓고 소나무로 수저를 만들고 식기를 만들어 소나무 상 위에 상을 차려 식구들이 몰려 앉아 밥을 먹었다. 어디 그뿐인가. 소나무 판재로 만든 지상으로 가는 길에 사용할 집에 든다. 그리고 양지바른 초가집 뒤 뜰 소나무 아래 양지바른 작은 언덕에 육신은 영면한다. 소나무가 바로 우리들 민족의 혼(魂)인지 모르겠다. 이런 사유 안에서 성지 소나무의 근사함에 빠져 있었다.
모든 참례 의식을 끝내고 순교 선조 뒤에 서서 순교와 사순의 의미를 접목한 후 부활의 시간 기다리는 마음을 정리하고 묘택을 내려섰다.
잠시 뜰 공간에 멈춰서서 시렁위에 올려 진 고상과 신부와 신자의 모습을 마음에 담는 시간을...... 그리고 봄 바람과 빛에 자신을 맡기고 자유로운 진리 안에서 가난과 겸손과 단순함의 영성적 일들, 언젠가 마음에 씨를 뿌려 놓았던 일을 반추해 보았다. 제대로 발아 되고 성장하고 있는 중인지....
가까이 있어 모시고 사진 몇장을 만들었다. 릿다 자매님 부부, 미국에 다녀 오신지 얼마 안되는데.. 여독은 풀리셨는지.. 참가가 고맙다. 삶의 도반처럼 좋고 유쾌한 일은 없다. 참례하고 걷고 창조적 질서에 의하여 구성된 자연의 모든 것들을 통해 삶의 풍향을 잡는 것도 유익한 일이다.
벌써 일년차가 되신 자매님과 첫 걸음하신 로사 자매님, 일맥 상통함이 느껴져 잡아 본 사진이다. 족근염 쾌유를 빈다. 시간과 마음이 허락 하실 때 나 아무때라도 오셔도 모든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항상 환영하려고 한다. 형제적 친교의 소중함을 같이 느끼며 자연쟁이 도반의 길을 함께 걸을 것을 약속 드린다.
성지와 관련 내용이 적혀 있는 비문을 살피며 각자 생각을 나눔하는 시간 갖은 후 병인박해를 피해 강 신부님과 마티아가 동행의 걸음을 옮긴 한실성지로 가기위하여 자리를 옮겼다.
한실성지 --
산으로 가는 길에도 봄이 완연하게 퍼져 있었다. 봄나물이 쉽게 손가락에 만져지고 버들강이지도 활짝 피었다. 어느새 낙동강 칠백리 강물을 타고 올라 온 봄은 1100m 높이 주능을 형성하고 있는 백화산 기슭까지 봄물을 들여 놓았다. 남쪽방향으로 之 형태로 난 길 모든 것이 평화롭다. 맑은 공기와 후련하고 자유로운 조망속에 담기는 깊은 산중의 의미 산, 산 산,모습이 반투명으로 보여 좋고 흙이 좋아 걷기도 참 편하다. 산 길인데 각이 유순하여 발목과 정갱이도 편안하다. 봄타령하며 걷다 옛적 함께 봉사했던 모니카 자매님이 지근에 계셔서 찔래가시 옆 버들강아지를 넣고 봄 사진을 만들어 보았다. 건강하시니 보기가 참 좋다 하면서 누룬 샸다 결과가 바로 이 사진이 되었다. 더욱 더 건강하시기를.....
걸음을 재촉하여 휘어진 모퉁이 두 개를 휘몰고 나서서 선두를 100m 뒤로 따돌린 후 등을 돌렸다. 선두 그릅을 잡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순례나 걸음여행의 기본은 걷기다. 걷지 않고는 다가 갈 수 없다. 걷지 않는 자는 죽어도 앞으로 나갈 수 없으니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걸으며 다가가야 하고 봐야 한다. 보면서 역사의 흔적을 일으키며 현실을 증거해야 한다. 그것이 순례인 반면 걸음여행은 사소한 것들을 씻어내는 마음 청소다. 재속에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물 속에 있는 돌에도 이끼가 끼듯 수많은 것들이 달라붙게 된다. 살펴보면 대부분 불필요한 것들인데 우린 소중하게 미련하게 움켜쥐고 놓을 줄 모른다. 자유로움을 얻으려면 우선 버려야 할 것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욕심, 이기심, 망상, 미움, 간섭, 등등은 버리고 단순함 하나만 취하여도 자유롭다.
두런두런 나누는 말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공간이 넓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만한 공간과 그 안에 기든 자연의 모습으은 절대로 만들 수 없다. 이 영역은 분명하게 창조적 질서의 공간이다. 생명의 순리가 깃든 공간이기도 하다. 삶의 근본을 자연에 둔다면 정의롭고 자유로운 삶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 동경만 할 뿐 삶의 지표는 도시에 두고 산다. 선두에게 성지로 가는 아랫 길로 안내 한 후 길목에 서서 형제들을 성지방향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후미를 만났다. 병인박해ㅡ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박해지만 교회입장에서 보면 교난(敎難)이다. 포졸과 금리들에게 쫓긴 천주쟁이들은 문명을 버리고, 들과 촌락을 떠나 산간(山間)으로 들었다. 화전이라야 아침갈이면 다끝나는 땅 덩어리다. 소출이라야 형편 없었다. 그래도 믿음이 있었기에 교우들과 의지하며 자연의 순리안에 깃든 지혜를 터득하며 살아갔다. 조선백성들의 신앙력에 탄복한 이들은 바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다. 당시 이지역 전교담당 갈렐 강 신부님은 평신자와 인간적 우정을 남겼고 천주에게 할 도리와 인간의 삶 안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하여 사랑의 훈계서를 남겨 주었다.
칼레(Calais) 강 신부의 훈계
1). 바오로 종도가 전교하실 때에 항상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자나 깨나 쉬거나, 일을 하거나 먹거나 마시거나, 다 천주를 위하여 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의 것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 사람이나 다 자기가 세상에 나고 싶은 마음으로 난 것이 아니다.
2). 백 년이나, 오 십년, 또는 몇 해 전에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아무 공부 없이 영혼과 육신을 얻어 세상에 태어난 것이며, 부모의 뜻대로 낳았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람의 육신을 부모의 마음대로 낳을 수 있다면, 모두 절묘하고 얌전한 모양이어야 하련만, 세상에는 도리어 눈멀고 귀먹고, 그 밖의 병신과 못난이가 많은 것으로 보더라도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3). 또 영혼을 부모의 마음대로 낳는다면 모두 다 재주 있고 영리한 사람 이건만, 도리어 미련하고 후진 사람이 많은 사실로 미루어 보더라도 영혼도 또한 온전히 부모의 임의로 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미 너희들이 세상에 나고 싶은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요, 또 부모의 임의도 아닌 즉, 너희들의 영혼과 육신이 온전히 천주께서 내신 것이 아니면 무엇이며, 너희들의 영혼 육신이 온전히 천주의 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4).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제 힘으로는 아무 좋은 생각이나 말을 한 가지도 못한다.” 하시고, 또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 중 천주께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고 하셨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아라. 혹 영혼의 심사나 육신의 오관이나 지위가 좋은 듯한 것이 있거든, 그것은 다 천주 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 아야 할 것이다, 만일 천주님에게서 남보다 더 많이 받은 것이 있거든 천 주님께 더 많이 돌려 드릴 것을 생각하여라. 네 영혼과 육신은 다 천주님의 것이니, 본 임자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 하더냐?
5). 마치, 농부가 기음(김)매기를 자기의 양식을 위해 하는 것과 같이, 천 주님께서 나를 내신 것도 다 당신을 위하여 하신 일이니, 생각이나 소원이나 말이나 행실을 마땅히 천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공을 할 때에는 마음에는 없이 입술만으로 주를 공경하지 말라. 대개, 영혼은 주인 같고, 육신은 종 같으니, 만일 입으로만 공경하고 마음으로 공경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종을 보내어 임금을 공경하게 하고 주인은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천만 옳지 않은 일이다.
6). 그러므로 조 만과 매 괴 경, 참례 할 때에는 다 마땅히 대월(천주를 관상함)하고, 입에 외는 말을 따라 그 마음을 내는 것이 제일 좋으나, 그것이 조금 어려우니 입으로 정성껏 염하고 마음으로는 주를 사랑하고 주를 공경하는 마음이나, 그 밖의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좋으니, 이렇게 힘써 공경해야 할 것이다. 온갖 신공을 다 천주께 돌려드리지
아니하면, 주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 되느니라.
7). 신자 들이여, 조심하라. 대개, 영혼이나 육신이 다 천주의 것이니만큼 어떤 일이라도 천주를 위하지 아니하고 남의 눈을 위하면, 그것은 천주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조 만과는 남 보는 데서는 조심하여 단정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잘하고, 혼자 있을 때에는 혹 편히 앉아서 하거나, 손을 들어 잡손질을 하며, 혹은 눈을 들어 보며, 그렇지 않으면 혹 졸며 아무 정성 없이 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8). 혹 애 궁이 나 대 소재 같은 신공을 할 때에 남의 기림(칭찬)만을 위하여 한다면 공을 세울 길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이런 공부는 다 헛공부 이니라, 이미 남의 상 받았다 하였으니, 만일 이렇게 신공을 하였다면 천주 앞에 이르러 심판을 들을 때에 마땅히 천주께 바칠 것을 남에게 주었으므로 꾸중하시는 말씀을 면치 못할 일이 놀랍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좋게 지내고, 착한 사람같이 살았어도 바른 뜻으로 하지 아니하였으면, 주 앞에 빈 손뿐이요, 원 통함이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을 들었으니 명심하고 마음을 고칠 지어다.
9)사람이 세상에서 공을 세워 영혼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면, 불가불 부지런히 천당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길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즉, 별일로 영혼을 구원 함이니, 별일은 광야에서 은 수하며, 혹은 굴속에서 살며, 원의에서 동정을 지키며, 또 혹은 몸을 괴롭히고 채찍질하는 것이다.
10). 또 하나도 실행하기 어려운 길이니, 예사로운 일을 잘함이다. 예사로운 일이란 자고 깨고, 마시고 먹고, 일하고, 쉬는 따위의 집 안과 집 밖에서 누구나 일상 하는 일들이다. 이런 일이 비록 예사로운 일이지만,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도 세상에 계실 때에 겸비와 인내로써 행실을 잘 닦아, 은 수와 변태 일을 하신 일이 없으시고, 오직 평상시의 일로 하셨으니, 어찌 귀히 여기지 않을 것이냐?
11). 비유컨대, 장사하는
사람이 일 푼 일리의 적음을 버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능히 큰 부자가 되고, 농사하는 사람이 한줌 흙의
적음을 탓하지 아니하므로 능히 큰 밭을 얻는 것이다. 영혼의 사정도 이와 같아서 평상시 작은 일이라도
부지런히 잘 하였으면, 천주 앞에 큰 부자나 같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별일을 하기를 일삼지는 못할 것인즉, 예삿일이나 잘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별일도 못하고 예삿일도 아니하면, 영혼 구원하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날마다의 예삿일을 잘
하여야 할 것이다.
12) .아침에 깨었을 때에는 누워서라도 먼저 네 가지 일을 할지니, 하나는 성호를 그어
몸과 행실을 축성하고, 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불러 입과 말을 축성하고, 셋은 영혼 육신과 오늘 할 일을
다 천주께 드리나이다 하면, 낮에 생각하지 못하더라도 공로가 될 것이요, 넷은 무슨 모병을 오늘 전개하기를 정지하되 어떤 모병 일 런 지 주장되는 제일 모병을 생각하여야 하니라.
13). 이 네 가지 법이 조그마한 듯하나 과하다고 여기지 말라. 대개, 아침은 제일 중요한 때이니만큼 아침에 잘 시작하면 낮에 유감도 물리치기 쉽고 잘 지내기가 쉬우니, 정지 할지어다. 옷 입을 때는 “ 주여, 내 육신을 이 같이 호위하고 보존하여 주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호위 보존 하소서.” 하고, 또 세수할 때에는, “ 주여, 내 얼굴을 깨끗하게 하시니, 내 영혼도 이같이 깨끗하게 하소서.”하고 기도 하여라. 조과 나 만과나 다 통경하는 것이 좋으니, 이는 성교회의 본디부터 하는 법이요, 또, 예수 말씀이 “ 몇 사람이 모여 한결 같이 빌면,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겠다. ”고 하였으니, 힘써 할지니라.
14. 조과 할 때는 세 가지 법을 실행하는 것이니, 하나는 육신을 단정히 하고 공손히 합장하여 대월 함이니, 대개 육신이 먼저 대월 하면, 영혼이 대월 하기가 쉬 우리라. 그러므로 성교회의 처음에는 신덕이 많아 두 팔을 들어 마치 천주께서 높은 탁 좌에 앉아 계심을 보는 것같이 향하여 대월 하더니, 이제는 신덕이 적으며, 이렇게 하는 이가 적을 것이니라. 또, 아이가 안으면, 눈과 마음을 아이에게 주고 다만 입으로만 공경하게 될 거이다. 묵주나 고상이나 상 본이 있거든 벽에 모셔 놓고 하면 더욱 좋은 법이니라.
15). 둘은 천주가 곳곳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 함이니, 나 대 죄인이 천주의 앞이라 하여 임금 앞에 있는 것보다도 더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만일 돌거나 마음속에 잡념이 생기거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하기를, “ 내가 만일 임금 앞에 있다면, 감히 졸거나 방심하지 못할 것 이 어 늘 하물며 주 앞이라 하여 다시 대월 하면 자연히 방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16). 셋은 위 자를 생각 함이니, 혹 예수의 고난을 위하거나 성모를 위하거나 혹은 부모의 영혼을
위하거나 죄인들과 외교 인이 회 두 하기를 위하거나 주교, 신부로 뜻을 정하여 하면 또 한 가지 열심을
내기 쉬 우 리라. 조 만과는 본디 제일 귀중한 공부이니, 우리말과
같이 입으로만 하지 말고 좋은 마음을 힘써 내어야 한다.
17). 삼종은 내가 아무리 늦을 지라도 하는 것이 좋으니, 늦다고 아니하면 버릇되기가 쉽다. 궐 하는 것이 비록 죄는 아니지만 영혼의 이익을 바람이요, 또 삼종은
천하 만국이 다 삼시로 하는 것이니, 매우 좋은 신공이라 힘써 하는 것이 좋다.
18). 여 교우는 밥을 장만할 때마다 내가 천주께서 잡수실 진지를 장만한다고 생각하면 밥도 잘 될 것이요, 남편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며, 또 심판할 때에 주의 말씀이 “네가 세상에서 나를 위하여 밥을 많이 해 주었으니, 이제 너는 나의
상생의 음식을 와 먹어라.” 하실 것이니, 기쁘고 다행 하도다. 이 말씀이여!
19). 또 불을 보거든 지옥의 불을 생각하되, “이 불에도 내 손가락도 태울 수 없거든, 이보다 만 배나 더한 지옥 불에 어찌 온몸을 태울 수 있으랴” 하며 놀라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밥 먹을 때에는 식전 식후에 염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이가 나에게 이렇게 음식과 반찬을 주어 기르시 거 늘, ‘나는 자식 된 본분을 어떻게 다하여야 할꼬?’ 할 것이요, 욕심으로 정신을 잃고 허겁지겁 바삐 먹지 말라. 그렇게 하면 탐도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20). 천주께서 분부하시기를, “ 일을 하여 먹고 입고 살라” 하셨으니, 아무 일이든지 다 주의 일로 알아야 한다. 일을 할 때에는 내가 천주의 품꾼이라 생각하고, 만일 힘이 들고 땀이 나거든 천주께 삯돈을 후히 받으리라 생각하고, 만일 게으른 마음이 나거든 주께서 내려다보신다고 생각하기를, 마치 주인이 품꾼을 밭에 보내고 와서 보살피는 것같이 여기면, 자연히 게으른 마음이 없어져 일도 잘되고, 공도 많을 것이다.
21). 길을 떠날 때나 일하러 나갈 때나 들어올 때에는 성호를 긋고 천주 경이나 성모 경이나 아무 경이나 마음에 좋은 대로 외면, 마치 길 다니는 사람이 길에 떨어진 돈을 자주 얻는 것처럼 영혼이 천당의 보배를 자주 얻고, 도 혹 잠시라도 대월 하면, 그 신공이 마치 화살 같아서 천주의 성심에 통할 것이니, 누가 이런 신공을 버릴 이가 있겠는가?
22). 자식과 며느리 되는 사람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며, 나를 낳아 젖 먹이고 수고로이 길러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온갖 명을 천주의 명령으로 알아 고분고분히 하고, 또 부모 된 이는 자식을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천주께서 나에게 잘 기르고 가르치라고 부탁한 아이로 보아, 잘 가르쳐 기르면, 주께서 상을 주실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벌을 받을 줄로 생각하라. 아내는 남편을 주인같이 보아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자기의 벗같이 보아 사랑하고 화목 하여라. 화목은 천당 길이요, 불화는 지옥 길이니라.
23). 저녁에 만과 할 때에는 아침에 조과 하는 법과 같이 하고, 또 많은 일을 다 마친 뒤에 할
것이 아니라, 일찍 하는 것이 좋으니, 만일 늦게 하면 졸기
쉬 우니 라. 조만 과는 마땅히 아침저녁으로 행할 것이니, 천주의
명령과 성교회의 명령이요, 저 다른 신공과 같지 아니하니, 결코
궐 하여서는 안된다.
24). 또 아침에 무슨 죄든지 한 가지라도 얻지 말라 하여 잘 반성하여, 범하지 않았거든 감사하고, 범하였거든 뉘우치고 고치어라. 만일, 저녁에도 반성하지 아니하면 모든 병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잘 때에는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고 성호를 긋고, 호수 천신 송 - 천주의 사신, 나를 거느리고 지키시는 자여...“을 외고, 예수의 품에서 자라. 이 평상시의 일들을 힘써 행하면 쉬울 것이요, 천주 앞에 부유한 사람이 될 것이니 힘써 해 보아라. 강 신부가 모든 교우들을 훈계하신 말씀이다.
산이 깊다. 물이 있는 계곡 사이 사 이, 그곳이 바로 교우촌이 있던 곳이다. 사람이 있는 주변에 저절로 식용나물이 잘 퍼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교우촌이 있던 집 터부근에 여름이 오면 각종 나물이 무척 많다. 박해에 쫓긴 두 사람은 길고 긴 산 길을 오르며 나눈 대화를 칼렌 강 신부님은 글로 남겨 놓아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다.
강 신부님 - 한실 윗 마을까지 가려면 20리 정도 남은 것 같소, 나 혼자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으니 마티아는 지쳤으니 이 부근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얻도록 하세요.
마티아 - 신부님 어덯게 길도 모르는 산 속에서 신부님만 혼자 가시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한실에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면 신부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신부님 가시는 곳이면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산속에서 돌아 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
강 신부님 - 마티아 나는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가져 온 과일의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반은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마티아는 통곡하면서 칼레 신부를 쳐다 보았다. 칼레 신부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칼레 신부는 산 속으로 걸어 갔지만 마티아는 그 자리에 서서 사라지는 칼레 신부를 울며 바라 보고 있었다.
제물을 차린 후 격식에 맞춰 예를 올렸다. 메아리도 수십차례 퍼져 나가는 깊은 산중 골짜기 교우들의 피난처였던 이곳, 여름을 제외하곤 버티기 힘든 곳이었지만 안심하고 천주님께 예를 올릴 수 있는 곳이라 행복했던 곳이다. 오래 머물며 성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려 순교자와 선교사들에게 드리는 공경심을 쌓았다.
마지막으로 성가를 드릴 때 묘를 감싸 우리들의 마음을 전했다.
모든 예를 갖춘 전부 모여 단체사진을 만들어 순례의 증거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오르던 길을 버리고 교우들이 다녔던 험한 계곡길을 잡아 내려섰다. 잡풀과 다래넝쿨이 가득하여 여름에 내려가기 아주 어려운 길이다. 길을 열어 방향을 잡아 준 후 다시 중간 대열에 서서 함께 내려왔다.
잡목이 순례자의 얼굴을 가릴 만큼 얽혀 있어 보행을 어렵게 한다 후미까지 안전권에 들었다고 판단이 되어 건너 기슭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화인더를 통해 바라보자 잡목이 장난이 아니었다. 순교자들의 고행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안전에 유의하며 내려선 끝에....
무사히 전부 길로 내려 설 수 있었다. 선원에서 쳐 놓은 울타리가 진로를 방해하여 애를 먹었다. 우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자비로움이 아쉬웠다. 그래도 높고 깊은 산중에 있는 교우촌 터와 성지를 작은자의 몫 단원들이 방문한 것은 처음이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희열이 차 올랐을 것이다. 모든 형제들에게 감사해 하며 다시 앞서서 내려 왔다. 원점회귀 완성, 총무님과 협의 후 식사자리를 정해 찰밥 나눔시간을 갖았다.
걸음여행 - 산유동 하단 길( 이강년 기념관에서 무당소까지)
가은을 지나 선유동 나들길 출발점에 도착하였다. 백두대간 줄기를 끼고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많은 곳이 괴산 문경 지방이다. 선유동 계곡은 참 길다. 초입에서 월영대까지 오르려면 약 8.5km 걸어야 한다. 괴암괴석 보다는 반석이 많은 것이 특징이고 물은 옥수처럼 맑다. 반석이 많으므로 옥수가 흐를 수 밖에 없다. 상단으로 갈수록 계곡 폭은 좁아지고 계곡 주변으로 열린 산길, 세죽이 많고 단풍이 많아 가을 풍경이 빼어난 곳이고 음기가 서린 곳이라 얼음이 늦은 봄까지 존치되는 곳이다. 대야산 지세가 험하고 암이 많은 산이다. 새재와 이화령을 지나 이어지는 백두대간, 성곽처럼 연풍과 문경 사이를 가로 막고 서있는 곳이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마음으로로 행장을 각자 꾸려 나들길 표지석에 모였다. 걷지 않는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음여행의 진리를 마음에 새긴 후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금새 물고기 형상을 한 안내 돌이 마중한다. 상류를 오르는 연어처럼 그렇게 우리들도 물 길따라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봄기운이 바람따라 다가 왔다. 마을 들녁으로 퍼져 나간다. 빛 과 바람 과 기온이 안성 맞춤이다.
연어 닮은 녀석 앞에 형제들 끼리 올망졸망 섰다. 총무님이 가만 샷다를 두 번 눌러주었다. 그중 하나 사진이다. 자매님 사진도 있지만 빼고 대신
완심대 사진으로 갈음하였다. 더 멋진 곳은 자매님들에게 양보~~
그리고 도착한 세심대 마음을 씻어내는 곳이란다. 아직 이르지만 완연한 봄기운 탓에 발을 담궜다. 부르르 치를 떨면서도 겨울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명승은 대부분 절경이다. 산수화의 매력은 여백에 있다. 그래서 절경 안에서 절경을 제대로 담으려면 사람을 주인공에서 빼어낸 후 첨경으로 몰아야 한다. 주제와 부제의 역활이 구분되어야 사진이 된다. 절경지에서 주제는 단연 산수다. 부제는 소나무와 바위의 적정한 배치, 그 안에 사람은 하나의 첨경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빛을 살피고 구도를 다시 본 후 자신의 감성을 넣어주면 자신이 원하는 사진으로 보답받게 된다.
봄을 느끼며 적당한 시간을 머물다 간혹 하모니카 연주를 듣고 각자 자연인이 되었다.
그 후 무당소에 도착한 후 작년 11월 걸은 형제들은 빠지고 가고 싶은 형제들만 모아 용추에 올랐다. 물의 속성은 온유함과 유연함과 평상심도 있는 반면 괴력도 함께 지니고 있다. 바위면을 다스리고 구멍을 뚫고 석수쟁이 보다 더 고운 명품을 만든다. 하트모양의 용추 앞에서 노닐다 반대방향으로 사진을 만든 후 오늘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합류 후 문경 초등학교 부근으로 가 마무리 저녁을 챙긴 후 서울로 귀경하였다.
총무님이 찍어 보내 주신 리더의 사진이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생각으로 첨부한다. 사순 마지막 일정 잘 보내시고 4월, 우곡성지와 외씨버선 나들이 길을 함께 걷겠습니다. 항상 평화와 자비 안에서 평화, 자비의 삶을 공유하겠습니다. 샬롬.
|
첫댓글 봄을 부르며 살며시 스치는 봄바람이 ..
3 월에 성지 발걸음을 한결 가볍고 설레이게 만드는 새벽....
따끈한 찰밥을 받아놓고...
만남과 기다림순간은 모두가 행복,,,
순교의 길을 걸어가신 선조들을 기억하며
갈레강 신부님과 박 마티아 복자의 우정 마원성지와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도착한
한실성지,,. 교우촌을 이루고 순교의 길을 걸으신곳 ,,,순례의 여정으로 이끌어 주지 안으셨다면...
모르고 묻쳐버렸을곳.....
순례후에 대야산 계곡,, 흐르는물이 유리알 같다고 표현하고픈 마음 ,,,,
흐르는 맑은 물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멤돕니다,,,,,,,,감사합니다
동행~~ 순교의 현장을 찾아서, 동행~~ 자연의 세계로, 동행 ~~ 형제적 친교에 대한 실천적 의지속으로
평화의 기쁨 안에서 있었던 추억, 좋은 하루였습니다. 늘 그렇지만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