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홍성을 옛적엔 홍주라 하였다. 홍주목(洪州牧)이 설치되어 정 3품 목사가 충청도 서북부 5군 14현을 관할한 행정과 군사 요충지었다. 일명 내포라 불렸던 여사울에 이존창 루토비코가 살았다. 그 유명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다. 중인으로서 재산이 있었던 이존창은 이벽의 안목에 의하여 양근으로가 권철신, 권일신 문하생으로 들어가 특히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하여 교육울 받은 후 다시 내포로 돌아와 전교를 통하여 수많은 내포 사람들을 천주교에 입문토록 만든다. 또한 혼맥을 맺어 최양업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바로 이존창 가문의 여식이고 김대건 신부의 윗대 할아버지에게 시집간 여성도 이존창 가문의 여식이었다. 또한 조선의 첫사제 즉 한국의 첫 사제의 출신지도 전부 내포지방이었다. 솔뫼와 청양 다락골이 바로 그곳인데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 청양은 최양업과 신부와 최방제 소년의 본향이다. 이러한 영향에 힘 입어 그런지 수많은 순교자가 생긴 곳 역시 홍주를 중심으로한 내포였다.
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은 천주교 신자가 처음으로 끌려와 목사 앞에서 심문을 받던 곳이다. 배교를 강요 받으며 온갖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신앙을 증거한 장소다.
일시: 2016년 10월 15일 오전
모이는 장소: 반포대교 남단 현대증권 앞.
준비물: 미사참례준비, 걷기 편한 복장과 신발, 모자, 썬그라스, 행동식, 커피 또는 녹차나 기호차, 배식에 필요한 식기류와 수저, 컵, 묵주, 작은의자, 물티슈, 스틱. 기타 개인이 필요한 물품.
일정표
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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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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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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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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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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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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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대교 남단 반포현대증권
앞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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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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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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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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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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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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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휴식 및 벨린다 자매님 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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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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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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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연군 묘 (병인박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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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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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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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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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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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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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 아문, 동헌, 옥, 참수터- 매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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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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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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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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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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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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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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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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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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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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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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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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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크 구간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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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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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배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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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조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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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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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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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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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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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 옆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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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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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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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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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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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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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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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참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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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융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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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희 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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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임 그라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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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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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련 릿다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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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자 카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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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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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숙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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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식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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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페레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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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운문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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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아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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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숙 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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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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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순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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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경 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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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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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ve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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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옥 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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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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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재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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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분 프란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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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숙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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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옥 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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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우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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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희 요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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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엽 엘리사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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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정 마르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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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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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는 목사와 진영이 있던 관계로 관할 내의 죄인들이 이곳으로 붙들려 왔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제일
많은 천주교인들이 내포, 홍주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문헌상으로 발견된 순교자들의 숫자만 해도 212명이나 된다. 무명 순교자까지 합치면 1,000여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전국에서 2번째로 큰 순교터이다. 워낙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홍주성지는 6곳의 순교터(생매장터, 참수터, 저잣거리, 감옥터, 진영, 동헌)를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다. 2014. 8. 16.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 4위(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이 탄생되었다.
아문 (衙門)은 조선시대 상급 관청을 뜻하는 것으로 홍주에 목사가 주재하던 곳이므로 홍주 아문으로 불렀다.
내포 지방 첫 순교 터이다. 첫 순교자는 원시장 베드로로서 이곳에서
동사하였으며 113명의 순교자가 굶주림, 교수형, 장살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순교의 길을 걷는다. 특히 앵베르 주교님의 권고에 의하여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님이 자수한 곳이 바로 홍주관아다. 이곳
감옥에서 서울로 압송되기 전까지 갇혀 있던 곳이다. 또한 성 다블뤼, 성
모메트로, 성 위앵, 성 황석두 루가 등 6명의 성인도 체포된 후 갇혔던 곳이다.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신부
성 샤스탕 신부.
병인박해(寅迫迫害)
한국천주교 4대박해중
가장 오래 지속된 박해로서 1866년 (고종 3년 병인년)초에 시작되어 1873년
대원군 실각 때까지 일어난 박해를 말한다. 세분하면
1) 1866년, 봄의 박해
2) 병인양요 이후 1866년 가을에서 1867년까지
박해
2)덕산 굴 총(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사건으로
촉발된 1868년 박해
3) 신미 양요 로 1871년 이후 1873년 까지
박해시기
1868년 박해를 무진박해라 하기도 한다, 병인박해 이전의 박해와 달리 1873년 이 후에는 박해를 마감하는 윤음이나 명령 등이 반포되지 않아 1877년
– 1879년 사이에 다시 신자들이 체포 또는 순교 되는 일이 벌어졌다.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 수는 8천명에서 1만명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 무명 순교자들이고 24명만 성인품에 올랐다.
박해의 원인과 발달과정
1. 천주교 세력이 서양세력의 위협에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조정에서 파악하게 됨
2.1860년 10월 영, 불 연합군에게
북경 함락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양세력 침입에 위기 의식을 느끼는 사이
3. 북경 함락 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고 남하정책을 펴 오던 러시아가 1864년
2월 두만강 근처에 출몰해 통상요구, 1865년 11월에도 경흥에 나타나 통상요구로 경흥 부사를 조정에서 문책함
4. 정권 권력자인 대원군은 1864년 8월
제4대 베르뇌(Berneux. 장경일) 주교에게 사람을 내세 워” 프랑스가 러시아 남하를 막아 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 제의를 함. 베르뇌 주교는 함대를 동원할
처지가 안됨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5. 홍봉주(토마스)는 남종삼(요한)을 찾아가 프랑스와 조약 체결과 러시아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해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남종삼 거절함
6. 1865년 1월말, 경흥에 러시아인들
재 출현으로 대원군 베르뇌 주교와 재 접촉 시도함
7. 대원군 부인 여흥 민씨와 왕의 유모 박 마르타, 홍봉주, 김면호 토마스, 이유일 안토니오 등은 대원군과 베르뇌 주교 만남을
주선 하였고 남종삼도 청원서를 작성하여 대원군과 독대를 한다.
8. 이와 같은 사실을 김면호는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은 다블뤼(Daveluy, 안돈이) 주교에게 전하여 충청도에서 사목 중이던 다블뤼
주교는 1월 25일 상경하고, 황해도에서 사목 중이던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 상경한다.
9. 대원군을 다시 만난 남종삼은 홍봉주 집에 있던 베르뇌 주교를 만나 “ 러시아
남진을 막기위해 북경 프랑스 영사관에 연락을 요청한” 후 부친이 있던 제천 묘재로 낙향 한다. 낙향 이유는 대원군의 권유 때문이었다. 이때 대원군 마음은 변해
있었다.
10. 변심 이유는. 선교사들과 조속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아 초조해지고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만 생겼고, 러시아가 조용히 물러갔으며, 천주교
반대파인 조두순, 정원용, 김병학 등의 정치적 공세가 강력해
지고 시정에 대원군이 천주교인들과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대신들이
올린 상소인 박해령에 서명함으로서 병인박해가 시작된다.
박해시작
1. 대원군의 주선을 기다리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연락이 없자 다시 한양 인근 교우촌을 들러 보고
상경하여 홍봉주 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1866년 2월23일 포졸들에게 홍봉주, 이선이와 함께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2월 25일부터 3월 1일 사이 브르티니에르(Bretenires, 백)신부, 볼리외(Beaulieu 서몰례)신부, 도리(Dorie,김) 신부와 정의배 마르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가 체포되었고 이선이의 밀고로 경기도 고양에서 남종삼이 체포되고 국청이 열렸다.
2. 의금부에서 심문과 형벌이 가혹하게 이어지다.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신부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또한 같은날 남종삼과 홍봉주는 새소문 밖에서 순교하고 가족들에겐 노륙지전을 시행토록 하였다. 3월 11일에는 정의배 우세영과 함께 배론 신학교에서 압송되어 온
푸르티에(Pourthie, 신) ,프티니콜라(Petitnicolas, 박) 신부를 새남터에서 처형 한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지방 예산 고더리 3월 11일 손 니콜라오
회장 집에서 체포, 위앵(Huin, 민) 오매트로, 오) 신부, 체포, 황석두 루가, 배론
성 요셉신학교 장주기 요셉 회장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군 오천면 수영백사장 갈매못에서 순교하고, 손자선 토마스는 체포
공주로 이송되어 자신의 살점을 물어 뜯으며 신앙고백 후 3월 30일
교수형 받음.
3. 한편 공주 진밭에 거처를 마련하고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리델(Ridel, 이복명)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 3월 6
일 진밭 버시니에서 은신하다. 5월 8일 폐롱(F ron, 권) 신부를 만나 장상인 폐롱신부 지시에 따라 7월 1일 장치선, 최선일
요한 안내로 아산, 선장면 계산리에서 배를 타고 중극으로 탈출한다. 칼레(Calais , 강)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 순방을 중단하고 문경 한실, 진천 삼박골, 목천 소학골로 피신해 있다. 폐롱,
리텔신부와 상봉한다. 10월 11일경에는 폐롱 신부와
함께 칼래 신부도 중국으로 탈출 한다.
박해의 확대 원인
1. 서양 선박의 내침이 일어 남
- 1866년 4월
8월 독일상인 오페르트(Ernst, J.Oppert) 영국
상선을 타고 아산만 상륙 시도가 좌절된 후 강화도 상륙하여 통상요구
하였으나 이 마저 거절당함
미국상선 서프라이스호(Surprise) 평안도 해안 접근
순례 일정을 모두 끝낸 후 해변길로 이동하여 신두리 사구를 넘고 넘어 가을 정취가 가득한 구름포 해안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그리고 천리포와 만리포 가지 해변을 걸으며 일몰을 본 후 부근에서 저녁과 마무리 회합을 갖은 후 서울로 귀경할 계획이다.
첫댓글 아녜스 성지 걸음여행 떠납니다요~
서희정 마르티나.박옥희 요한나
신청합니다
총무님~~ 수고하셨습니다. 이젠 마감해야 겠습니다. 꾸벅~~^*^
대기...
한운문 루시아..
임영순 소피아
임명옥 루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