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장 태국의 의료선교의 역사(Medical Missions in Siam)
Written by E.B. McDaniel
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828년에 도착한 독일인 의사인 C.F.A. 구즐라프였다. 그는 태국에서 3년 동안 밤낮으로 최선을 다해 사역(그의 사역에 관하여는 1장을 참조하기 바람)한 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건강마저 악화되어 마음에 품었던 선교지인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구즐라프의 뒤를 이어 태국에 온 의료 선교사는 단 비치 브레들리(Dan Beach Bradley)로 1835년에 태국에 도착하여 1873년까지 그의 남은 거의 40년(정확히는 38년)의 삶을 태국인들의 치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사람들은 모든 민간약품과 일반적인 고대 의약체계는 본질적으로는 같은 경향이라고 한다. 예컨데 주문과 마술같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효과를 모면하기 위해서 민간 전승요법과 정신치료 요법을 도입하였다. 브레들리는 무지와 전통에 의해 인정되고 있는 고대의 미신의 특권들이 그의 모든 의학기술과 반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최근에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시장터나 유흥지에 자주 가서 그곳에서 종종 기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1835년에 브레들리에 의해서 설립된 조그만 시약소로부터 방콕에 있는 5개의 정부의 병원에 이르기까지, 또 5개의 새로운 현대식 건물 – 산부인과 병동, 증기 세탁소, 전기 발전실, X레이 촬영실과 좀 더 효과적인 다른 기관들 -을 가지고 있는 치앙마이의 새로운 메코믹 병원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다. 우리는 전세계에 세개 밖에 없는 기관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항사독소 장액(뱀의 독을 주사하여 항체를 만듦)을 만들었던 연구소가 태국에 있었고 광견병 항체를 만들었던 파스퇴르 연구소가 태국에 있어서 매년 수백명의 환자들을 공포의 죽음으로부터 나음을 입었다. 거의 모든 의료인들이 이 괄목할만한 진전을 곁에서 지켜본 증인들이었고 그들의 사역또한 많은 진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들간에 실제적인 연결고리가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브레들리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그것도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섬김에 있어서 외과수술의 기술과 의약은 당시에 최상이었으며 그의 섬김은 그의 제자들에게 “환자를 치유하라”는 명령중의 하나로 위대한 의사의 이름으로 행해진 진정한 섬김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치유의 기술은 브레들리가 방콕에서 사역한 이후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는 또 다른 위대한 의료선교사였던 피터 파커가 오기 이전해에 온전히 사역에만 몰두하였으며 그의 위대한 사역이 시작되도록 중국인들의 토양에 토대를 마련하여 두었다. 오래지 않아 천연두 백신이 개발되어졌다. 또 마취약인 클로르포름이 오래지 않아 들여와서 사용되었다. 에테르가 아직 발견되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박테리아학의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파스테르의 놀라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전세계는 그에게 영원한 빚을 지게 되었는데 당시 파스테르는 프랑스의 시골 냇가에서 천진난만하게 고기를 잡는 단지 열두살의 소년에 불과했다. 불멸의 파스테르의 발견으로 인해 리스터경(Lord Lister)에 의해서 수술시에 샬균제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에게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커다란 은혜를 제공하였다. 의사 브레들리가 태국에 왔을 때 리스터경은 단지 일곱살에 불과하였다. 그의 과학에의 커다란 공헌은 아직 한 세대를 더 필요로 하였다. 올리버 원델 홀름즈(Dr.Oliver Wendell Holmes)는 의약 세계를 놀라게 하며 조산술에 있어서 신기원을 여는 분만패혈증에 관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논문을 아직 쓰지 않았었다. 단지 병상의 온도계에서만 사용되고 있었고 피하주사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브레들리와 하우스도 X-Ray나 라디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역에 있어서 치료의 기술을 실습하기 시작하는 행운의 시간이었다.
브레들리가 태국에 제공했던 최초의 가장 위대한 특혜중의 하나는 1840년에 백신을 개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기억할만한 것이었다. 아마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에테르를 사용한 첫번째 외과수술이 시행된 것은 1847년에 태국에 온 의사 선교사인 하우스에 의해서였다. 그때 에테르는 2년 동안 단지 외과수술에만 사용되었다. 그가 도착한 후 2년만에 태국에서는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가 창궐하였는데 방콕에서만 3만 5천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닥터 하우스는 많은 사람들을 살렸으며 스스로 친구들의 생명을 지키는 파수군이 되기로 자처하였고 그가 대사가 되고자 하는 명분이 되었다.
질병과 싸우기 위해 오늘날(1920년대)의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효과적인 의료장비들이 많이 부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초창기의(1840년대) 의료선교사들은 신기원을 이룩할만한 써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고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사용하였으며 의료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다. 브레들리가 최초의 환자를 돌본 이후에 치유 사역을 위해 그를 이어 들어온 40여명의 의사 선교사들이 수천명의 환자들을 치유하였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었다. 그들은 자비의 사역을 돕기 위해서 과학이 인정한 가장 최근의 진전된 도움을 주고자 가장 적절하고도 자유롭게 베풀었다. 브레들리는 이미 언급했듯이 범선으로 9개월간의 긴 항해 끝에 미국에서 바이러스를 가지고 와서 백신을 소개하였다. 멕길버리도 방콕으로부터 12주의 보트여행으로 치앙마이로 옴을 가지고 와서 삶을 황폐케하는 천벌인 말라리아를 박멸시키는 백신인 키니네를 소개하였다. 브라독(Braddock)과 멬케인(Mckein)은 여러가지 어려움으로 낙담하기도 하였지만 방콕에서 그리고 북부의 먼 정글에서 성공적으로 천연두 백신을 개발하여 일반대중이 싼가격으로 구입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태국인들에게 오랜 천벌처럼 여겨지던 고대의 질병들이 정복되었다. 1904년에 멕케인은 백신을 생산하기 위하여 제약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해외로부터 백신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10년 정도 지나자 품질 좋은 백신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백신 주사를 놓는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그 당시에 적어도 210명 가량이 백신주사를 놓았다. 백신은 다른 선교병원들과 태국 정부에게도 공급되었다. 강제적인 백신에 관한 법이 공포되었고 왕실의 후원아래 파스퇴르 연구소가 설립되어 선교적인 재정으로는 불가능한 이 제약소를 지속하게 만들었다.
고립된 지역에서 거주하며 사역하는 의사들은 대부분 동료 의사들이 없었는데 그들은 종종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많은 의사들이 이 백성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그들의 사역을 마친 후에는 그들은 아름다운 도시로 들어갔다. 그들은 단지 부상자와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일뿐만 아니라 사랑의 섬김을 통하여 맥박이 뛰듯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사랑의 복음을 자비의 친절한 행위로 옮겼으며 하나님이 주실 면류관을 마음으로 사모하며 사역을 감당하였다. 제임스 톰슨(james B. Thompson M.D.)이 1898년에 창궐하던 콜레라를 박멸하기 위해 수고하다가 고귀한 그의 생명을 바쳤다.
효과적인 의료단체들이 생기기 전에 국왕 정부는 정기적으로 우리 선교부의 의사들을 불러서 많은 전염병이 억제되도록 체크하였다. 담롱 왕자가 내무부 장관으로 있는 동안에는 전 태국인들의 건강문제를 고려하여 최초로 의료 선교사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개최하였다. 그 해가 1903년이었고 몇 년동안 정기적으로 컨퍼런스가 개최되었고 보통은 하루 동안 개최되었다. 결과적으로 태국의 전 지역에 커다란 혜택을 주었던 많은 유용한 제안들이 이 컨퍼런스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국왕정부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상호협력을 위한 소망에 가장 최근의 공헌은 왕자 나고르 스왈가(Nagor Svagard)의 요청으로 우리 팀의 의사가 최근에 조직된 국가 의료회의의 대표로서 선교사를 임명한 것이었다.
태국에서의 첫번째 선교병원은 1882년에 폐차부리에 세워졌다. 현대식 의료시설을 갖추고 수술이 시행된 최초의 국립병원은 단지 군인들만을 위해 60병상을 가진 병원으로 삼팽 시장문 근처의 방콕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병원 근처에는 많은 흥미있는 지역이 많이 있었는데 후에 파 싸우라신이라고(Pha Saurasin) 개명한 의사 티엔 히(Tien Hee)가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의학교육(뉴욕대학교 의대를 졸업)을 받았다. 근대 의학을 태국에 들여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헤이와드 헤이즈(T.Heyward Hays)가 1886년 선교부에 합류하였다. 이때까지 실제적으로 모든 의약품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었다. 닥터 헤이즈는 이 정책이 잘못된 것이며 백성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환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 비용을 지불하도록 격려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써비스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런 원리를 1888년에 문을 연 미국인들이 운영하는 시약소에서 실시하였다. 이 시약소는 일종의 선교 사업으로서 수년간 그에 의해 운영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이론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다른 선교단체의 시약소에서도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선교부가 책임졌던 재정적인 부담을 덜게되었으며 처음으로 자립하는 기관이 되었다.
유행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우리 의료 선교사들의 도움이 크면 클수록 평상시에 그들에 의해서 행해진 켐페인은 더욱 효과가 있었다. 거의 모든 선교병원에서는 종종 부적절한 음식과 물에 대해서 경고를 하기도 하였고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기 위한 가장 가치있는 측정의 매개체로서 백신의 투약과 예방접종의 유익에 대해 강력하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우리 의사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빈혈과 무기력증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원인은 십이지장충에 있었음을 알아냈다. 그들은 이러한 방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록펠러 재단에 이러한 사실을 보고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지난 수년 동안 빈혈 박멸과 무기력증에 관한 전세계적인 켐페인을 벌이도록 하여 엄청난 성공을 이루게 하였다.
유행병은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 자주 찾아오는 두려움의 댓가를 지불해야하는 통행료처럼 간주되었다. 빈혈과 무기력증을 일으키는 십이지장충의 경우는 예외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항상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왔다. 그 질병은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그 질병을 박멸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림잡은 보고에 의하면 질병에 걸렸을 경우 75%의 사람들이 아직도 현지인 의사들에게 의존한다고 한다. 질병을 치료하는 이런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는 대부분이 식물에 관한 지식과 점성술과 강신술을 혼합한 것을 소개하는 어떤 고대의 의학서적들이었다. 그런 의사들의 무지한 돌봄에 동의하는 환자들의 목에는 아직까지 낡은 전통의 무거운 중압감이 연자멧돌처럼 달려 있었다. 하지만 기쁜 소식이 드디어 도착하였다.
전에는 결코 보지 못했던 왕가의 격려와 서양에서 온 사람들과 재정의 지원에 의해서 국립의과대학이 준비되어 현대 의학에 잘 훈련된 젊은 사람들을 배출하여 환자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게 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젊은 의사들은 과학적 훈련이 부족한 현지인 의사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방콕에서 맑은 물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시골에서는 현대의 위생, 편의시설이 없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정신 건강과 정신위생에 대해 잘 몰랐으며 예방 의학을 위한 켐페인이라도 벌일라치면 심각한 편견(불균형)과 싸워야 했으며 심지어는 가장 의료기술이 발달한 의사들 사이에서도 그러했다.
우리 이전의 거의 100년간의 사역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료 사역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편이었다. 비록 우리가 최근에 잘 지어진 병원 건물과 의료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모든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현대의 기관들의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의 부족과 열악한 지방 환경에서도 기인한다.
이 땅의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의 의료 사역에 부과된 가치는 무엇인가 ? 이것은 정당한 질문이다. 선교병원에서 사역하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의료 사역에 대한 모든 계층 사람들의 마음깊은 감사에 대한 강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폐차부리에 있는 병원은 당시의 국왕인 쭐라롱껀 대왕이 의료사역을 위하여 기꺼이 2,000$ 가치의 금을 하사하였다. 왕비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곳에 있는 여성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보아왔기 때문에 하사금을 지급하여 그곳에 산부인과 병동을 지었고 왕이 하사금으로 병원을 확장하였을 때에 여러 병동을 갖춘 진정한 병원이 되었다. 치앙마이에 있는 옛날 병원 건물의 일부는 한때 멕케인의 환자였었던 북부지역의 마지막 왕이었던 그의 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두 명의 왕자에 의해 지어진 것이었다. 뜨랑 병원은 그가 심각한 만성적인 질병에 걸려 있을 때 그를 치료해준 고인이 된 의사인 던롭(Rev.E.P. Dunlop,D.D.)에게 감사하여 고인이 된 파 라사사다에 의해서 지어졌다. 람빵에 있는 산부인과 병동중의 하나는 병원에 있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치료해준 의사에게 감사로 가득찬 사람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시리타마랏 병원은 선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태국인들의 후원에 의해 주로 지어졌다. 쭐라롱껀 대왕은 이러한 프로젝트를 위해 그 자신이 2,000$ 상당의 금을 하사하였고 이것은 차별없이 나누어져 병원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 선교부 산하에 있는 모든 병원들을 포함하여 병원의 건물들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의료교육은 상당한 영향력을 미쳐왔다. 우리 선교부는 초기 개척선교사의 자녀중의 한 사람이 의료분야의 사역을 감당하며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있어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 면허를 따고 난후 태국에 들어온 때부터 1926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Dr. Geo. B. McFarland)는 정부의 설립한 의과대학에서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에 그레이의 해부학의 부분들과 다른 기초적인 의학서적들을 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성실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오늘날의 의술이 더욱 발전하도록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더 위대한 미래에 대한 높은 기대를 갖게 하였다.
초기 의료 선교사들이 기쁘게 그들의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었지만 아직까지 상황이 변화된 것은 아니었고 환자들이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도록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든지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비록 허리에 천을 걸친 거지라고 할지라도 왕가의 왕자나 부자 중국인들이나 인도의 상인들처럼 우리의 선교병원의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여기서(당시 태국)는 의사가 아니라 단지 똑똑한 간호사의 필요를 더 느끼고 있었다. 종종 환자의 가족들은 매우 놀랄만한 지침들을 가지고 와서 일반적으로 이곳에 오래 머무른 의사들의 신실함을 종종 시험하기도 하여서 그들은 그것에 대한 반대 논리에 대하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어떤 것은 종종 코믹하고 전혀 해가 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상당히 비극적인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의료효과를 위한 노력에 상당한 장애물이 되었다. 첫번째 지역에서 그는 종종 환자의 간호를 위해 단지 한 사람의 친척을 허락하기도 하였으나 종종 모든 부엌 용품을 가지고 온 많은 가족들이 오기도 하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에는 친척들이 남은 방들을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이런 것들이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우리 병원중의 하나는 22년 동안 환자들의 가족을 위해 모든 식사를 준비하여 주었지만 간호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간호사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병원중의 가장 효과적인 한 곳은 실제적인 간호사 훈련과 질서정연함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여 그 병원은 청결하고 질서정연한 모델아 되었다. 우리 선교부는 간호사 훈련을 위하여 오랜 기간 동안 준비를 해왔었다. 그러나 마침내 1920년에 간호사 훈련학교가 치앙마이에 있는 새로운 멬코믹 병원과 연계하여 설립되었는데 태국 전체에서는 세번째였고, 방콕 이외의 지역에서는 첫번째였다. 경험있고 잘 훈련되고 유능한 감독자의 지도아래 간호학교는 이미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었고 두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국가에서 실시하는 적십자의 시험을 이미 통과하였다. 이런 자질있는 간호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입학시험 자격요건은 고3을 졸업할 정도면 가능하였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이런 간호사 훈련학교는 널리 필요했고 얼마 있으면 잘 구비되어 우리의 모든 선교병원들의 간호사들을 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의료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가치있는 치료행위를 인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일련의 과정으로서 처음부터 복음의 메시지와 함께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갔다. 어떤 전도자는 강력한 복음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다. 주님은 “병자야 낫으라”고 특별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배운 것보다는 더 강력하게 그들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생각하고 필요성을 느껴 그것을 취하여 떠나갔다. 우리 선교부에는 전에 없이 풍성한 의료선교사들, 멕길버리, 멕파랜드, 던롭, 엑켈과 다른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 현장의 필요에 따라 개인적으로 의술을 배워 뛰어난 의료 써비스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거의 모든 비의료인들이 있었고 일부의 사람들은 백신접종에 대한 집중훈련을 받은 후에 가치있는 써비스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일년에 몇차례씩 수년 동안 엑켈 목사는 의사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법이 없는 매우 열악한 지역에 살고 있었고 그곳에는 의사도 없었다. 그는 그곳의 필요에 의해서 능숙하게 수술 바늘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나콘 빠톰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형제들에 의해서 25년 동안 행해진 의료사역과 산부인과 사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멤버들중의 일부는 그들이 아는 의사들로부터 상당한 의료 훈련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그들은 가장 필요한 지역에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항상 그들은 고통당하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경감해주기 위해서, 환자들의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돌보았다.
수년 동안 태국 정부는 방콕에 있는 시리랏 병원과 연계하여 산부인과 사역을 계속하여 왔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써비스를 제공하였지만 이것은 단지 적은 부분의 필요를 감당 할 수 밖에 없었다. 1922년에는 선교부에서 방콕에 조산원을 설립하도록 하락하였다. 처음에는 번잡한 지역에서 조촐하게 시작되었으나 모든 종류의, 모든 계급의,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견실하게 발전하여 갔다. 많은 태국 여인들의 반응으로 말미암아 산전 교육이 진일보하였다. 방콕 성경훈련학교의 졸업생들은 그들이 하고자만 한다면 조산원에서 일련의 훈련 과정들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건강적인 이유로는 태국에서는 질 좋은 조산원보다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없었다. 진정으로 그들은 어머니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었다.
의사의 아내들에 의해서 베풀어진 도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간호사 훈련을 받은 의사의 아내들은 오랜 기간 동안 능숙하고도 용감한 써비스를 제공하였으며 이것은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간호사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점진적으로 그 필요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들 선교부의 의료사역에 있어서 유용한 조력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태국의 나환자들을 위해서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서 행해진 사역은 나환자 사역을 다룬 장에서도 다루어지겠지만 가장 의미있고 특징있는 것들 중의 하나로 가장 확실한 의료 과업의 일부분이었다.
육체적 질병을 다루는 것이 의사들의 독특한 사역이라고 해도 의사 선교사들은 주님이 본보기로 가르쳐준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필요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육체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영적인 치유와도 어떤 모든 것이라도 간련되어 있다는 것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종종 목회자들은 그들 사역의 영적 측면에서 의사 선교사들을 도왔다. 그러나 각자의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치유해주는 위대한 의사에게 종종 길을 안내해 주기도 하였다. 의료사역의 부산물은 이토록 엄청나고 중요해서 그것을 함부로 정의할 수 없지만 육체와 영혼의 치료가 진정한 의사의 합치된 목표임을 반드시 느껴야만 한다.
우리는 신실하고 헌신적인 병원 보조자들과 도우미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중의 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섬김의 마음을 가졌고 치유의 사역에 그들의 삶을 헌신하였다. 자신을 위해서는 섬기는 것이 거의 없었지만 환자들의 필요에 위해서만 측정되어지는 모든 에너지와 노력들을 지속적으로 주었다. 높은 수준의 기술을 습득하면서 의사들이 휴가를 떠나고 없는 기간에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도록 행정적인 능력을 구비하였다. 사실 우리 의료사역의 성공에 대한 신뢰의 문제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 그들은 어떤 종족에게서든지 신뢰를 얻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선교부를 만들 당시부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휴식을 위한 장소와 아픈 후에 회복을 위한 장소가 상당히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50년 이상 우리 선교사들이 휴식을 위해 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앙 힌(Ang Hin)이나 타친(Tachin)이었다. 정부의 휴양소가 아직 다 차지 않았을 때에는 여행하는 사람들이나 어려움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기쁘게 제공되었으며 여행을 위하여 특별한 론치(소형증기선)나 돛단배가 제공되었다. 그것들은 바람과 조류의 영향을 받거나 다른 상황들은 대개는 거의 인간의 조절 능력을 벗어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필요한 장소는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기에 점점 증가하였다.
북부에 있는 우리 동역자들은 30년 전에 치앙마이 근처의 산에 몇몇 방갈로를 지었을 때 그런 장소를 마련하였다. 연중 가장 더운 시기에 몸이 매우 지치고 마음이 심히 우울할 때나, 지칠 때 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기도 하였다. 25년 전에는 조그만 더블 방가로가 폐차부리 가까운 바닷가에 지어졌다. 뒤이어 록섬(koh Lok)의 바닷가에 다른 곳이 구입되어져서 이 두 곳은 매우 가치있는 곳이 되었다. 이 지역들은 정부가 사용하기를 원하여서 록섬과 농캐의 아름다운 지역과 교환하게 되었다. 첫번째 집은 1915년에 지어졌으며 그 당시로부터 우리 선교부는 더 많은휴양소를 짓기 시작하였다. 다른 건물들은 계속 더해져서 현재까지는 5채가 지어졌다. 이곳 바닷가의 맑은 공기와 해수욕은 몸과 마음이 지쳐 회복하기 위해서 들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내년의 설계를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심신의 피로를 회복시켜주었다. 이것은 1922년에 람빵 근처의 쿤탄 지역에 지어진 최근의 방갈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지역은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외딴 지역으로 꼭 필요한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제공하여 주었다. 평지도 거의 자연 그대로였고 나머지 지역들도 건강을 위협할만하게 아직 개발되지 않아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주변나라나 미국으로 여행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선교병원을 계속하여 오픈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종종 지프라기 없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의사가 입는 옷은 종종 낡아빠진 시트를 사용한 것이거나 시장에서 구입한 추잡한 천이었다. 연고는 바닷가의 조개에 의존해야 했으며 자신들이 손수 수집한 말 머리털을 이용하여 피부를 꿰메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런 날들도 머지 않아 행복하게 지나갔다.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제의 손길을 보내왔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커다란 도움의 손길중의 하나는 최근에 우리의 고향 교회들로부터 선한 마음을 가진 여인들이 우리 병원에 보내온 진심어린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다. 전쟁의 대량학살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의 왕자를 위해 동일한 사랑의 섬김을 보내주었다. 정성스런 능란한 손길은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붕대와 의류를을 공급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필요들은 끝없이 계속되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그런 수고를 넉넉히 감당하게 하였으며 민족들을 치유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동역자로서 함께 수고를 감당하였다.
100년년의 선교 역사속에 태국의 한 도시안의 수상가옥 안에 있는 몇 명의 시약소의 환자들, 열 개의 병원들, 조산원, 두 동의 나환자의 집과 한 개의 간호사 훈련학교가 있었다. 1926년에는 2만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이 환자들은 적어도 한번은 복음의 내용을 들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더 자주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듣자마자 거부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여 거주자들이 “나는 아프다.”고 결코 말하지 않은 축복받은 땅에 영원히 거하는 확실한 소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살았다. 우리의 사역을 확장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고향의 신실한 친구들 덕분에 이 사역은 가능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병원을 건축했고, 어떤 이들은 병원 장비를 갖춰주었고, 어떤 이들은 수술실을, 어떤 이들은 분만실을,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필요한 자금과 겨울에 의료 사역에 필요한 재정들을 후원하여 주었다. 그들은 사역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재정적인 뒷받침을 하였으며 열정적인 기도의 후원자들이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그들의 재산을 드린 사람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풍성하게 드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그들과 다른 사람들이 현대 의학과 수술의 필요를 뒤지지 않고 따라가기 위하여 새로운 장비를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의료기관의 필요들을 알렸습니다.
의사 선교사로서 우리의 임무가 언제나 끝날 것인가?
불구자와 절름발이와 맹인이 다 치료를 받을 때까지, 어머니의 불필요한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갓난 아기와 어린이들의 위험이 수없이 감소할 때까지, 정글 오두막집 안에 있는 동물처럼 정신착란자들이 더 이상 메이지 않고 온전하게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직도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19,000명의 나환자들이 집이나 병원에서 안전하게 치료받고 현대 과학의 최고의 선물들을 장자권처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불행하지만 때묻지 않은 어린이들이 나환자 생활의 위험으로부터 영원히 제거될 때까지, 대역병(결핵)의 많은 희생자들이 햇빛과 신선한 공기와 영양가 있는 풍성한 음식이 있는 위생실에서 그들의 필요에 맞는 약을 가지고 치료를 받으며 그들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 놓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