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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대한 경이로운 해석!
(4) 25절의 감사가 삽입구라는 결정적인 증거!
지금까지 해드린 설명이 완벽합니다. 왜냐하면 완벽하게 최대 난점인 현재시제가 설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껄끄러운 것이 있는데, 25절의 감사를 삽입구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추론입니다. 그대로 놔두면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한 추론입니다. 그런데 이 추론이 맞다는 100% 확실한 증거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본문을 연구할 때, 현재시제와 함께 가장 당혹스럽고 혼란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렵기가 막상막하입니다. 어떤 때는 이 두 가지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난해해도 여간 난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 해석이 무너지던 날(2024년 6월3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현재시제 때문에 과거의 견해를 신뢰할 수 없었고, 둘째는 25절에 나오는 감사 때문에 과거의 견해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자 존 스토트가 25절에 대해서 한 말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가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이며, 깊은 곤고함과 절망 속에서 구원을 요청하며 부르짖으며, 그러고 나서 즉시 이 첫 번째 부르짖음과 반대되고 그것을 무효로 만들어버리는 두 번째 부르짖음에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알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5절 하반절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급전직하의 진술임을 알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운 진술이다. 죄의 법에 계속적으로 종노릇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제 과거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질타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본문의 뜻을 왜곡하여(아무런 사본상의 증거가 없는데도) 구절들의 순서를 바꾸어 25절 하반절을 24절의 부르짖음 앞에 놓는 것이다. 그래서 다드는 제임스 모패트의 재배열에 찬성하여, 25절 하반절을 원래의 위치, 논리적으로도 맞는 위치로 보이는 24절으 절정 이전으로 돌려놓는 데 찬성한다. 필립스도 그를 따른다. 케제만도 마찬가지다. 그는 25절이 후에 주석으로 삽입되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25절 하반절은 모든 사본에서 확고하게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지우거나 옮길 수 없다."
전에, 저는 찰스 피니, 로이드 존즈, 더글라스 무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이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기억이 나시나요?
먼저, 찰스 피니는 25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말은 분명히 괄호이며 사고의 흐름을 깨뜨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모든 문제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나 불행히도 개역한글성경, 영어성경, 원어성경까지 다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괄호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사고의 흐름을 깨뜨리고 들어온 것"이라는 피니의 지적은 정확한 것입니다.
또, 로이드 존즈는 25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일종의 갑작스런 절규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 사도는 찰스 핫지가 '강하고 갑작스런 감사의 정'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사도가 문체에 너무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관찰할 기회가 있었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자유로웠고 성령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그는 단순히 편지를 쓰는 자가 아니라 또한 단순한 문학가나 어떤 문학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최고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말하는 방식보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더욱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도는 결코 '기교를 위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요, 웅변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위 이러한 파격적인 구문에서 흔히 찬양과 감사가 터져나오는 것을 내뱉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탄사를 발하지 않고는 우리 주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깊고 강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그가 말하고 있는 바를 삽입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고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진술이요, 파격구문이지 그가 말해나가고 있는 논증의 주요 진수가 아닙니다."
탁월한 설명이지요! 이 설명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더글라스 무는 25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라는 견해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울이 여기에 이르러 자기의 감사하는 마음을 탄성으로 발했다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주위의 문맥에서 단수의 '나'로 말하다가 복수의 '우리'가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 주의", "우리"를 가리킴-옮긴이) 그런 탄성이 있음을 가리킨다는 논증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이 설명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중의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뭔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날도 이런 의문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우리는 감사가 삽입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된 대로 믿어야 하지 않을까? 삽입구라고 하며 순서를 바꿔서 이해하는 것이 과연 바른 것일까? 또, 이것은 추론일 뿐이다. 그런데 추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결국, 이 구절이 심히 난해하고 설명이 불가능하니 그런 추론을 한 것 아닌가?'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견해까지 다 엎고 백지상태가 되어 새벽 2시 40분까지 연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날 새벽 본문 해석의 최대 걸림돌인 현재시제뿐 아니라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전의 설명을 다시 읽어보니 의외로 탁월한 설명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것들과 함께 설명하고 마지막에 그날 새벽에 깨달은 결정적인 증거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 감사를 삽입구로 보지 않으면 6장과 모순이 된다!
만일 감사가 갑작스럽게 뛰어든 파격구문이 아니라 논리의 주요 부분이라면, 단순히 부조화인 것이 아니라 로마서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그런 바울이 25절에서 정반대의 이유로 감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면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삽입구임이 틀림없습니다.
♣ 감사는 논리의 흐름과 상관없이 아무 때나 가능하다!
감사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설교하다가 감사한 마음이 올라오면 언제나 "할렐루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꼭 설교 원고의 문맥에 맞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문맥과 무관한 삽입구로 보아도 그것은 문맥 파괴가 아닙니다.
또, 이런 감사가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글보다 빠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훨씬 나가서 로마서 8장까지 날아갔습니다. 써야 할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과거에 율법하에서는 절망 속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불쑥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후 다시 설명하던 것으로 돌아가 "그런즉 내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7장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었고 논문을 작성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설교하고 있을 때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설교 중 자유롭게 말하고 어느 때나 감사할 수 있듯이 갑툭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삽입구로 보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 감사 내용이 전후의 내용과 다르고 조화가 안 된다!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절망 속에서 절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절인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감사했습니다.
24절은 본문 같은 상태에서 건져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25절 전반절은 그 상태에서 건져주신 것을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죄의 종 된 상태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탄식하고 절규하다가 그 이유로 감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실제로, 개역개정성경은 생략했으나 25절 전반절의 감사는 반의 접속사 "그러나"('데', de)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전의 상태가 아니라 그 상태에서 건짐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뒤 25절 후반절에서 그 구원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는 말로 본문 전체를 요약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감사는 전후의 내용과 모순이고 서로 조화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사를 논리의 흐름과 상관없이 갑자기 터져 나온 삽입구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은 추론이 아니라 부동의 사실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 해석의 마지막 장애물은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이 추론이라는 것입니다. 추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을 확증해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드디어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캐치했습니다. 그것은 8장 1절의 "그러므로"입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삽입구가 아닐 경우, 25절 하반절과 8장 1절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시, 감사가 삽입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본문을 읽어보십시오. 25절 하반절에는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신의 상태로 보고 8장 1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와 연결해서 읽어보십시오. 도무지 말이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왜 말이 안 되느냐? 어거스틴 계승자들처럼 7장 본문을 신자의 상태로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이 말이 가능하려면 8장 1절이 "그러므로" 아니라 "그러나"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25절 하반절처럼 죄 가운데 사는 상태지만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처럼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25절 하반절은 본문의 요약입니다. 죄를 이길 수 없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다니 말이 됩니까? 더구나, 2절까지 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또, 3-4절까지 보면 그들이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따름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자들이고, 그래서 결코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25절 하반절의 냉용과 상반이 되고 완전히 모순이지요! 그러므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그러므로"가 받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25절 후반절이 아니라 전반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데 이 감사에 감사의 이유가 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므로"가 이것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이 있어야 그것을 받아서 말한다고 할 수 있는데, 덩그러니 감사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감사의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탄식 직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지배에서 건져준 것을 감사한 것이 됩니다.
25절의 감사는 죄의 지배에서 건져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때문에 8장 1절에서 그 감사를 받고, 1-4절을 통해 죄의 지배에서 건져주신 것을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면 비로소 자연스럽습니다. 이처럼 "그러므로"가 25절의 감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논리적으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럿이 아니라면, 여기서 "그러므로"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가 진실로 25절의 감사를 받고 있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뜻할까요? 25절의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를 삽입구로 보지 않으면 두 장이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고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감사가 삽입구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그런즉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은 추론이 아닙니다. 그것을 실제로 삽입구입니다! 그러므로 놀랍게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하나가 어거스틴 계승자들의 잘못된 해석의 목을 쳐버리고, 동싱에 제 해석이 옳다는 것을 확증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그날 새벽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에 대해 깨달은 내용입니다. 그 후 저는 주석들을 읽으며 과연 이 깨달음이 맞는지 확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주석이 과거의 저처럼 "그러므로"에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주의한 것입니다.
또, 존 스토트나 제임스 던처럼 저와 견해가 다른 자들의 "그러므로"에 대한 설명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러므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장의 첫 부분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요약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중간 결론을 내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 그가 내리는 결론은, 7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가 진술해온 전체 논증, 특히 3-5장에서 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인다."
또, 제임스 던은 "그러므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7:25에서 8:1로 전환하는 것이 어색함("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의 전환)은 상당한 당황스러움을 야기하고 몇몇 주석가들로 하여금 그 구절이 (7:25b와 더불어) 대신 들어왔다거나 어구주석이라고 가정하도록 촉발시켰다(7:25b를 보라). 그러나 그러한 가정은 대단히 불필요하다. 바울은 7:25와 8:1간에 잠시 휴식하는 것을 대체로 의도했을 것이고 이는 서술 가운데 또 로마의 회중들에게 서신을 읽는 가운데 쉽게 드러나는 사상의 흐름을 나타낸다."
둘 다 추론에 가깝고 불확실해서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무시해도 되는 내용들입니다.
또한, 저는 상당수 주석가들이나 저나 던처럼 "그러므로"가 가진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이드 존즈는 "그러므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므로 ...... ' 이미 사도가 말한 것을 비추어 볼 때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습니까?
여기에 하나의 흥미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묘사가 7장 끝에서 말한 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가장 훌륭한 주석가들 거의가 그 점에 일치(一致)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사도 바울이 8장 초두에 말하고 있는 것과 또 8장에서 말해나가는 모든 것은 7장에서부터 추론된 것이 아니라고 아주 분명히 주장합니다. 적어도 7장 14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으로 추론한 것을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이 이제까지 말해왔던 것으로부터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을 추론할 수 없습니다. 전혀 자연스런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또, 토마스 슈라이너도 "그러므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로마서 7장 25b절에서 긴장이 가득하면서 모호한 결론 다음에 오는 '그러므로'(아라)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주장은 놀랄 만하다. '그러므로'가 이전 문맥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그것은 '내'가 죄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7장 14-25절의 논리적인 결론이 아니다. 이 논증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없다. 즉, 나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
나아가서, 저는 여러 학자들이 제가 "그러므로"에 대해 깨달은 것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어, 존 위트머는 "그러므로"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먼저 바울은 독자들에게 그러므로-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오기 때문에(7:25)-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카타크리마, '심판')이 없나니, 이는 곧 그들의 믿음의 결과요 그리스도와 연합됨의 결과임을 상기시켰다(참조 6:13; 요5:24)."
또한, 로버트 W. 야브루는 이렇게 썼습니다.
"8:1 이 구절은 앞 절('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7:25b)에서 직접 추론한 것이 아니다. 앞 절은 '정죄함이 없다'는 말과 정반대로 들린다. 그러나 바울은 그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5a)라고 외치게 한 그 렌즈를 통해 보고 있다."
물론 학자들이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큰 그림과 새로운 해석을 통해 본문이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므로"가 본문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불신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25절의 감사는 삽입구이고, 8장 1절은 "그러므로"를 통해 그 감사를 받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저의 견해가 옳은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 해석은 항상 그 단락의 전체 구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이 그 견해가 옳다는 가장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제가 저의 해석이 무너진 후, 과거의 해석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시제에 대한 깔끔한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 해석에 의하면 현재시제가 깔끔하게 이해됩니다. 또, 25절의 감사가 삽입구라는 것이 추론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 해석에서는 추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이 100% 증명이 됩니다. 또한, 새 해석은 본문의 어느 구절과도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해석에 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해석이 옳은 것일 때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저는 제 해석이 참으로 옳은 해석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