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나루는 여러 가지로 불린다. “고마나루”,“고만나루”, “구마나루”, “곰나루”, “고마ㄴㄹ(용비어천가)”, 그리고 한자로는 ‘熊津’으로 쓴다. 한편 국호는 ‘百濟’가 일반적이나 후한서(後漢書)에는 ‘伯濟’라고 썼다. 선행연구에 의하면 “공주의 古名에 나타난 熊, 公, 錦은 ‘고마’ ‘곰’을 음차(音借) 또는 훈차표기(訓借表記)로 보고 또 그 뜻은 대체로 ‘熊’‘山形’‘神’‘大’‘後’ 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견해의 공통점은 대부분 ‘熊津’의 한자 ‘熊’자와 관련된 우리말의 유사음 또는 훈차음(訓借音)을 찾고자 한 점이다. ko(ku)+ma+naru 혹은 ko+man+naru 와 같이 글자를 떼어서 접근하는 것이 순서인데도 등한했던 것은 아무래도 ‘곰’의 전설과 한자표기 ‘熊’의 이미지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동안 민간에서 불러온 이름은 ‘곰나루’ 가 아닌 ‘고마나루’ 또는 ‘고만나루’였다. 일제(日帝)때는 물론이고 해방 후 60년대까지도 ‘고마나루’로 부르던 것이 ‘곰’전설이 널리 퍼지면서 ‘곰나루’로 변해 버렸다. ‘고(구)마’ 즉 ko(ku)+ma 로 분리된 한자명을 사서(史書)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固麻城’(梁書), ‘固麻城=熊津城’(周書), ‘其都曰居拔城 亦曰固麻城’ (北史), ‘大豆城’(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근왕조), ‘久麻那利’(일본서기, 雄略天皇 21년條) ‘久麻怒利城’(일본서기, 齊明天皇 6년 9월 癸卯條)
이로 보면 <固麻城 = 居拔城 = 久麻怒(那)利城 = 大豆城 = 熊津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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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곰나루 모습 |
그런데 어떤 연구에 의하면 “고(구)는 ‘ko(ku)’→ ‘커’‘kho(大)’의 뜻. 마(만)는 ‘말’의 ‘mar(마을)’,‘나루’(津)를 나타낸다. ‘白馬江’ ‘白村江’의 백(pek)은 ‘伯’과 동음이고 ‘馬’ ‘村’은 다같이 말(mar)이기 때문에 백마강, 백촌강도 모두 그 훈(訓)은 ‘고마나루’를 나타내는 동의이자(同意異字)로 사료된다.”고 한다. 결국 ‘고마나루’→’큰말(마을)나루’라는 지적인데 이 것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가령 구마나리(久麻那利)의 경우 ‘구마’(久麻)는 일본어의 ‘곰’(熊)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웅’(熊)자를 피하고 ‘구마’로 읽은 것은 ‘구’ ‘마’ 는 각기 ‘큰 말(마을)’의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두성’(大豆城)의 경우 ‘콩’(大豆)은 ‘큰’(khn)또는 ‘커’(kho)의 음차이고 ‘큰성’을 뜻한다. 이렇게 보면, ko(ku)+ma는 그 음차나 훈차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한자어로 표기하였지만 원래의 ko(ku)+ma는 ‘큰말’ ‘큰성’ 등의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발성 (居拔城)인데, ‘거’(居)는 고대지명 ‘고’(古)로 통하고 ‘고→커(ko-kho)’의 동음계이고, ‘발’(拔)은 벌(伐), 부리(夫里), 불(火)로도 표기된 ‘촌(村)’ ‘읍(邑)’ 의 뜻이다. 이렇게 보면 固麻=居拔이고, 固=居, 麻=拔 즉 ‘ko-kho’ ‘ma-bal(buli-bul)’ ‘큰 마을’의 뜻이 된다. 그러면 ‘고마나루’를 건너 다녔던 ‘큰 마을’은 어디쯤이였을까. 이것이 해명되면 ‘고마나루’의 뜻은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그 마을은 바로 ‘소정이 펄’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고마나루’ 남쪽 강변일대를 ‘소정이 펄’ ‘원수대 터’ ‘소정평’ 등으로 부른다. ‘소정이’는 당장(唐將) 소정방에서 유래했음은 물론이다.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웅진성을 공격할 때 유진했던 곳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웅진 도독부가 있던 자리라고 전해오고 있다.(해방 전까지도 인가가 있었다.) 강변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 물에 씻기고 모래가 덮여 쌓여서 오직 이름만이 남아있었는데 1946년 큰 장마로 모래를 쓸어가는 바람에 그 자리가 한때 드러났었다. 목격자의 말로는 점토(粘土)로 가로 세로 쌓은 건물 기단이 완연하였다고 한다. 소정방이 유진했던 자리라면, 지금도 점령군이 그러하듯이 시가지 중앙의 요충지요 규모가 큰 관청의 건물이었을 것이다. 정벌군의 총수요 당 고종의 위엄을 등에 업은 그가 부여에서 대승을 거두고 웅진에 상륙했던 점에서 그러하고,현대의 군장처럼 아무데에 막사나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장비나 또 그것을 운반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었으리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떠나자 곧 백제의 고토(故土)를 나누어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부를 중심으로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데 676년(문무왕 16년) 본국으로 철수 할 때까지 16년 동안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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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사지 부근도 |
한편 지금의 공주시가지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527년(백제 성왕5년)에 대통사(大通寺)가 건립되는데, 일제(日帝)시대 공주시의 하수도 공사 때 실시한 지표(地表)조사 보고에 의하면, 가람의 배치는 현재 유림회관 별관 부근에서부터 남향하여 중문(中門), 탑, 금당(金堂), 강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되어 현재의 경찰서 부근까지 이르고 좌우로는 회랑을 둘렀다고 한다. 배(舟)모양의 좁은 분지인 시가지에 이 정도의 큰 사찰이 들어섰다면 현재의 봉황동(鳳凰洞)과 반죽동(斑竹洞) 일대는 주거지로 여유를 찾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제민천(濟民川)의 동쪽편 즉 현재의 중동과 산성동 일대의 형편도 그보다 나을게 없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8년조에 “10월에 왕은 궁성 남쪽에서 열병(閱兵)하였다”(大閱於宮南)는 기록이 있는데 웅진성을 공산성(公山城)으로 비정하고 남쪽은 시가지에 해당한다. <대통사지 부근도> 따라서 현시가지는 군병의 훈련을 위한 시설 그리고 제한된 주민만을 수용했던 것이 아닐까. 이에 비한다면, ‘소정평’ 일대는 장소도 넓고, 가까이 있는 고마나루는 금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중국이나 일본과 교역했던 무역항이었을 뿐 아니라 내륙을 연결하던 요충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나루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481년(동성왕 3년)에 “6월에 웅천(熊川)에 물이 넘쳐서 서울의 200여 호가 표몰되었다” 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은 강변에 큰 마을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듯 백제의 서울이었던 공주는 강변에 시가지가 위치했기 때문에 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 강에 모래가 흘러들고 강바닥이 높아지면서 장마가 지면 범람하여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렸던 것이다. 고마나루에 전해오는 ‘곰’의 전설은 단군의 웅녀탄생과 맥락이 연결되는 곰 토템사상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곰 토템과 지명 ‘곰’나루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가. ‘곰’ 신앙족이 한반도를 남하하면서 ‘곰’계 지명을 남겨 ‘熊津’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곰 신앙족이 남하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는 공감하는 바가 있지만 ‘고(구)마 나루’의ko(ku)+ma는 곧 곰=熊으로 단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구)마’를 固麻, 久麻, 大豆등 여러 가지 한자로 표기하였는데 ‘熊’ 자도 그 중의 하나로 보아야한다. 다양한 표기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토속어인 ‘고마나루’는 ‘큰말(마을)나루’ ‘큰성’ 등의 의미로 쓰였음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오늘날 ‘곰나루’로 부르게 된 까닭은 한자표기 ‘熊’의 훈독 ‘곰’에서 비롯되고, 거기에다 곰 전설이 겹쳤기 때문이다. 한편 곰 사당은 ‘곰’의 넋을 제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고마나루에 있는 사당’이라는 뜻이고 이곳에서 금강의 강신[용왕신]에 제사지냈던 말하자면 토속신앙의 전승임도 밝혔다. 이렇게 보면 고마나루 또는 ‘熊津’은 나루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공주의 옛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백제의 왕성을 뜻하기도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 건국신화의 발원지이며, 산천을 경배했던 우리민족 토속신앙의 근원지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그 유구한 역사성으로 보나 토속신앙의 메카인 점에서나 가장 거룩한 곳, 신성한 곳이며, 고마나루는 백제인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참고문헌 이석린,1994,『조헌연구』 / 조동길,1996,「공산일기연구」,『웅진문화』9집 / 『삼국사기』 / 『동국여지승람』 / 『공주승람』 (일명 공산지), 1971 / 김성호, 1996,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朴炳植, 1987, 『日本原記』 / 강헌규,1992,「公州地名에 나타난 고마,熊,懷,公,錦의 起源』,『웅진문화』5집 / 輕部慈恩, 1949,『百濟美術』/ 東夷傳百濟關係資料
윤 여 헌 (공주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