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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두산을 향하여
백두산은 말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듣고 그리던 민족의 영산이다. 가장 높고 숭고한 내 마음의 산이다.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것은 백두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체제의 냉전으로 죽의 장막이니 철의 장막이니 할 때인 한중수교이전인 십오 년 전만 해도 감히 내가 생전에 백두산에 오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누가 그랬던가.
금강산에 이어 백두산을 오를 수 있는 행운이 내게도 왔다. 그러나 내 땅을 밟고 가면 당일이면 도착할 곳을 중국 땅으로 우회하여 찾아가야했다. 백두산등정에 가장 좋다는 시기인 팔월 초 우리 일행은 인천공항을 떠나 심양공항에 내렸다. 심양공항에서 밤 열시에 대련에서 올라오는 4인실 침대차를 타고 이튿날 새벽 6시에 통화에 도착했다.
백두산 줄기인 928미터의 노령산맥의 산골도시인 통화시는 길림성에 속해있고 포도주공장 약제공장이 많단다. 지금은 ‘혼강’으로 불리며 통화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옛날 동명성왕 주몽이 건넜다는 ‘비류수’는 천년을 뛰어넘어 우리의 감회를 뭉클하게 하였다. 집안까지 113 킬로미터, 삼나무 잣나무 숲을 지나 버스로 두 시간 걸려 집안시 국내성 공원 앞 취원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원고지 3.7장)
2. 고구려 옛 땅 집안
국내성 공원은 능수버들 측백나무 소나무가 들어서 있는데 새 단장을 위해서 문이 굳게 닫혀있다. 주위 상가와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국내성터는 길이 2680미터, 높이 2-3미터 되는 곳도 있고 5미터 되는 곳도 있는데 당시의 성벽이 아파트 건설시 기초석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고 현재 새로 복원중인 것을 보았다.
집안시가지를 돌아보니 사오십년 전 우리의 골목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거리의 단층집 울안과 대문밖 화단에는 다알리아, 접시꽃, 봉숭아, 백일홍이 곱게 피어 고향집을 찾은 느낌을 갖게 했다.
압록강변에 있는 우리의 옛 땅 집안시는 인구 6만 명중 조선족이 일만 칠천 명이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부터 20대 장수왕까지의 고구려중심지였다. 2천여 개의 고분과 30개의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 전체가 역사유물이 널려 있는 곳이다. 광개토대왕릉과 비, 장수왕릉, 5회분 5호묘, 환도산성, 국내성터, 집안박물관 등 찬란한 우리역사를 돌아보며 쓰리고 아픈 가슴만 어루만지고 할말을 잃었다.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서 발견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장수왕릉을 장군총이라 격하하여 관광객에게 안내하는 실정이다. 훌륭한 우리역사를 조상과 우리들이 변변히 보존 못해서 왜곡된 설명문을 보고도 이미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을 통탄할 뿐이다. 힘센자 남의 역사도 가로채어 제 역사 만들고 관광수입 올리며 풍요를 구가하는데 북한은 쇄국으로 주민을 기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왜 좀더 적극적으로 민족의 번영을 염려치 않는가.
칠성산과 환도산성 아래로 일급수 넓은 강줄기인 ‘통구하(通泃河)’가 성벽을 낀 도로를 휘돌아 흘러 물살이 센 흙탕물 압록강과 합류한다. 며칠 전 북한 쪽에 큰비가 내렸다더니 민둥산에 홍수가 났나보다. 중국쪽은 수목이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가파른 산 정상까지 나무하나 보이지 않는 비탈 밭이다. 저 건너 멀리 만포 제철 공장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만포 고산진을 오고가는 흙길로 된 도로가 손짓한다.
압록강에 아카시아 숲과 옥수수 밭이 되어 있는 북한 땅 중화도란 섬이 하나 있는데 어림짐작으로 폭1킬로미터 길이 2킬로미터 쯤 되어 보인다. 나부끼는 옥수수 잎 사이로 대화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진다.
집안에서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를 오고가는 기찻길에 조 중(朝 中) 철교, 압록강대교가 있다. 올해는 중국측이 내년에는 북한에서 1년씩 기차운행을 관리한다고 한다. 집안변방검사참근무중대(集安邊方檢査站勤務中隊)에 허가를 얻어 보도블럭 사이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겁내며 조심조심 걸어 압록강철교 가운데 조, 중 국경선에 섰다. 북쪽은 아무도 없고 중국군인 한사람만 지키고 있다. 북한의 산하를 배경으로 국경선에 서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60명을 태울 수 있는 50톤급 유람선 쌍안호를 타고 북한의 고산리 고산진 강안까지 내려가 보았다. 강가에서 그물을 추스르는 어부, 군복 입은 젊은이, 언덕위의 아이들에게 “야호, 아리랑!” 하고 소리쳐 보았으나 무응답이다. 구멍만 뚫린 창, 겨울에는 비닐을 막고 산단다.
이념이 무엇이 길래 저들을 저렇게 얼어붙게 만들었나. 급경사진 곳까지 일구어 농사는 짓는데… 우리일행 모두의 얼굴빛이 쓸쓸해졌다. 우리는 이웃에게 도둑맞은 역사의 현장을,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내 핏줄이 아직도 이밥에 고깃국을 제일로 열망하고 있는 동포들과 압록강변을 뒤로하고 백두산을 향하여 버스를 타고 통화로 나갔다. (원고지 8.2장)
3. 서파로 가 본 백두산 천지
통화에서 밤 열시 사십분 출발하여 침대차를 타고 한잠자고 나니 이도백하역에 이튿날 새벽 5시 50분에 도착했다. 이도백하는 길림성 안도현의 면단위로 해발 900미터 하늘아래 첫 동네이다. 임업청이 있는 인삼재배 주산지이고 미인송의 고향 목재산지이기도하다.
중국 쪽에서 백두산 등정은 북파와 서파가 있는데 우리는 서파를 택하여 아침식사 후 일곱 시에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자연보호 때문에 1일 200명 한정이므로 서파등정이 쉽지 않은데 우리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이 길은 벌목한 나무운송용 임도가 1998년 이후부터 관광도로로 이용된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인 것이다. 개인이 16년간 땅을 임대하여 반달곰사육이나 인삼밭 경작, 벌통을 놓아 꿀 채집으로 생활을 하는 곳, 2500여종의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원시림지대이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미인송 숲 지대를 지났다. 소나무도 저렇게 늘씬하고 잘생겨 이름마저 미인송이라니, 경복궁 지을 때 쓴 소나무가 바로 이런 나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삼나무 낙엽송 잣나무 숲도 지나치고 인삼밭을 일구기위해서 몸통이 하얀 자작나무를 벌목하는 현장을 지났다.
떠난 지 두 시간이 지나서 차단기가 가로막은 장백산 자연보호관리소에 닿았다. 오다가 돌에 부딪치더니 문이 안 닫힌다고 이곳에서 운전기사가 수리하느라 삼십분 이상을 허비하고 애를 썼다. 다행히 고치고 자연보호관리소 허가를 받아 서파산문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었다. 녹색의 원시림 속 좁다란 외길로 달려가는데 맑은 하늘 빛나는 햇빛, 좋은 날씨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열한시 이십분에 서파입구에 도착하였다. 지금까지 화장실시설이 제대로 안되어 많이 불편했는데 신축된 관광휴게소에 화장실이 많아 좋다. 여기부터는 아스팔트길로 삼십분을 달렸는데 가다보니 콘크리트도로로 변했다. 주위는 가지가 구불구불한 자작나무 수림대를 지나고 옥설봉의 모습과 노호배의 들꽃길이 아름답다. 편안히 누운 호랑이의 등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구릉은 온통 꽃다발로 짠 양탄자 같다. 해발 2000미터에서 2100미터쯤에 천연 골프장 같은 고산화원에 노란꽃 흰꽃 보라색꽃의 이름모를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하얀 산을 보니 비로소 백두산에 온 느낌이다. 그렇게 맑은 날씨더니 바위가 하얀 백산지역에 오니 정상 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뭉쳐 흐른다. 시시각각 검었다 희였다 비가 내린 듯도 하다. 가이드 말에는 어제도 아무도 천지를 못보고 내려 왔다고 한다. 백두산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아래쪽에서 아무리 날씨가 좋다 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차장주위에 잡상인들이 여기저기서 라면같은 간이 음식을 팔고 있고 이미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일행은 정오가 훨씬 지났지만 천지부터 먼저 올라가 보기로 했다.
대리석계단 1230개를 올라가야한다. 왕복 두 시간이라니 겁이 나지만 힘을 냈다. 천지를 보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오르고 또 올랐다. O여사부부는 가마를 타고 오른다. 우리 일행 모두가 나를 앞질렀는데 폐 수술한 남편과 J씨가 따라오지를 못한다. 안타까웠지만 남편을 뒤로하고 아픈 다리를 끌며 걸음을 재촉했다. 꼭 천지를 보아야지. 덕 많이 쌓은 사람에게만 천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데…
구름이 몰려올까 조바심을 하고 쉬지 않고 걸어서 정상에 겨우 닿았다. 우뚝 솟은 거무스레한 청석봉아래 가로막고서있는 1미터정도의 이끼 낀 돌에 붉은 글씨의 ‘천지유념 (天池 留念)’이란 표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개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가 했는데 천지를 덮고 있던 운해는 바람신에 밀리고 온몸을 드러낸 천지의 전경 아!
이백여 미터 낭떠러지 아래에 그 짙은 코발트물빛은 햇빛반사 때문인지 보석처럼 빛난다. 시시각각 빠르게 변하는 기상이 신비롭고 외경스럽기까지 하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그저 감격스럽다. 여기는 해발 2500미터인데 정상은 북한 쪽에 있는 장군봉으로 2744미터, 가 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저만치 우측에 얕은 목책이 눈에 띠는데 조 중 국경선(朝 中 國境線)이란다. 마음 떨며 도둑고양이처럼 월경하여 이십여 미터를 걸어갔다. 거무튀튀한 중국 쪽과는 달리 풀밭비탈에 매달린 질풍경초(疾風勁草) 연보랏빛 백두산천지화가 활짝 피어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어찌 이런 곳에 저 여린 꽃이 피어 날수 있을까. 북한 동포의 척박한 생활이 거기에 오버랩 되며 가슴속이 아려왔다. 나는 천지를 향하여 소리쳤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그리고 더듬더듬 떨리는 목소리로 소원을 빌었다. 민족의 위대한 아리랑을 위해서…
뒤늦게 올라온 남편도 80퍼센트는 천지를 보았다. 운무가 깔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장백산은 청조(淸朝), 누루하찌의 할아버지무덤이 있으며 누루하찌가 명조와 싸우다 활을 맞고 쓰러졌을 때 까마귀들이 몸을 덮어 보호해주어 살아났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은혜로운 까마귀가 많이 서식하는 성스러운 곳이라고 만주족의 성지로서 청나라 때에는 타민족의 등반을 금했다고 한다.
구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천지를 가려 물빛을 볼 수가 없어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행운의 날이라고 기뻐하였다. 한편 북한은 좋은 백두산 관광자원을 두고 왜 굶주리나, 중국의 발 빠른 행보에 배가 아프고 아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지유념 (天池 留念)”이라 쓰인 기념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민폐 1원씩을 받고 있는 중국인들, 백두산 천지에 대한 감동을 반감시켰다. (원고지 13장)
4. 서파에서 하산하는 길
백두산천지에서 검은 구름이 몰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일행 모두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어느 시인의 싯귀가 생각난다. 천지를 꼭 보아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에, 내려오는 길목에 천지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도랑이 있는 줄을 몰랐다. 손을 담가보니 전율이 일정도로 차갑다. 영산의 생명수가 영약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정 세 모금을 마셔본다. 내려오는 산자락 좌우에 야생화초원이 펼쳐져있다. 고산에 피는 꽃이라 유월중순부터 칠월중순이 한창이라 하여 벌써 지고 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부지런히 내려왔다.
버스를 타고 십 여분 내려오다 계단식 천연 냉장고라는 ‘제자하(梯子河)’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화산폭발 당시 생긴 금강대협곡을 돌아보았다. 마치 그랜드캐년의 축소판을 보는듯하다. 붉기도 하고 검기도한 바위들, 칼날같이 뾰족한 쌍 바위를 비롯하여 기기묘묘한 짐승의 형상을 한 깊은 계곡과 폭포 등의 비경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왕지(王池)를 찾느라 천연골프장을 연상하게 하는 드넓은 야생화벌판 가운데로 난 오솔길을 가슴에 스치는 잡풀을 헤치며 한없이 달려갔다. 가이드도 못 찾는 원시림 속에 숨겨진 못이다. 우리일행은 반시간이나 더 걸려 꼬불꼬불 언덕을 넘어 삼나무와 자작나무숲 아래 가늘고 싱싱한 수초가 많이 있는 못을 발견했다. 큰 짐승발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슴이나 노루, 멧돼지 같은 동물들이 찾아와서 먹는 물인가 보다. 이런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못이 있다니, 이름을 보면 무슨 동화라도 전해내려 올법하다.
돌아오는 길은 늦은 출발이라 걱정이 되었다. 밀림 속에 어둠이 내리고 협소하고 울퉁불퉁한 외길을 덜덜거리며 달리니 조마조마한 마음이 버스 안 모두에게 이심전심 전이되어 침묵만 흐른다. 숲 속의 비닐삼포 옆 움막에서 흘러나오는 외로운 호롱불을 발견하면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 외길에 상대편에서 차가 온다면 오도가도 못 할 판이다. 또 짐승이라도 나타난다면 우발적 사고에 대처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왕지를 찾느라 한 시간이상 늦어진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다.
이도백하의 큰 거리 밝은 형광불빛에 먼저 눈에 띄는 것이 한글 간판이다. 조선족자치주에서는 한글이 우선이라고 한다. 간판을 쓸 때도 먼저 한글을 쓰고 다음에 한문글자가 따른다. 밤길이라 돌아오는 길은 여섯 시간 반 이나 걸렸다. 열시 반에 저녁식사를 하고 장백산산문을 통과하여 자정가까이 되어서야 운동원촌호텔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청정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북두칠성이 내려오다 허공에 걸쳐 더욱 크게 빛난다. 내 눈 탓인가, 하늘 탓인가. 이 신령하고 청정한 지역에서도 은하천은 희미하고 아득하다. (원고지 8장)
5. 북파로 오른 백두산 천지
새벽에 일어나 아침식사 후 백두산을 북파로 가는 코스 전담 차량인 일제 도요다 8인승 지프에 올라탔다. 가장 일찍 열린 길이요, 가장 널리 알려진 길이다. 이제까지 백두산 관광 기념사진의 90퍼센트 이상이 여기서 촬영되었다. 높고 맑은 하늘과 빛나는 햇빛이 백두산 천지를 제대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험준한 산세임에도 운전기사는 다음손님을 받기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속리산의 말티 고개처럼 가파른 비탈길을 지그재그로 오른다. 십오 분 정도 걸려서 해발 2670미터의 천문봉 턱밑까지 지프는 올라갔다.
주차장에 내리니 말 그대로 흑풍구 바람인가. 겨울바람 저리가랄 정도로 검은 모래바람이 후려친다. 이때다 싶은지 누런 인민군 겨울오버를 임대하는 한족들이 줄지어 있다. 나는 지난해 우루무치의 천산 천지에서 똑같은 상황을 경험했기에 얼른 우리화폐 오천 원을 주고 빌려 입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추워서 새파란 얼굴이다.
가파른 언덕, 날카로운 검은 바위 사이사이를 엉금엉금 기어 정상에 오르니 7분이 걸렸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눈을 제대로 뜰 수없을 만큼 세찬 바람이 부는데도 관광객은 끊임없이 몰려든다. 웅자한 자태의 천지에 안개이불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아래서는 그토록 청명하던 하늘이 어찌 이리 쉽게 구름이 몰려드는가. 다행히 우리가 서있는 낭떠러지 아래쪽에는 그 푸른 물빛을 일부 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점점 수면이 가려진다. 뾰족뾰족한 바위들을 잡고 몸을 의지하면서 좀더 확실히 보려고 애를 썼다. 어제 서파에서 본 것에 비하면 별무소득이다. 백두산의 기상은 이렇게 변화무쌍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렇게 척박한 지점에도 상인은 있었다. 화산재의 일부인가 놓치면 그대로 바스라질 것 같고 유리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암회색 화산석을 기념으로 하나 샀다. 올라올 때 탔던 지프를 타기위해 10분도 머무르지 못하고 하산해야 했다. 너무나 싱거운 북파 관광이었다. 20퍼센트 정도의 천지를 보고 감격들을 하고 내려오는 다른 팀들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제 청석봉 아래에서 본 아름답던 천지 전경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원고지 6장)
6. 장백폭포와 온천탕
숙소인 운동원촌 호텔에서 장백폭포로 올라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주차장과 상가를 지나 계곡을 따라 가는 길에 군데군데 달걀이 삶아지는 온천수를 볼 수 있다. 천지에서 흘러나온 물이 좌우의 산봉우리 사이에서 수직으로 거대하게 쏟아지는 것이다. 꼭대기에서 40미터정도 아래까지는 곧게 쏟아져 내리고, 그 아래에서는 비탈진 벼랑의 암벽을 때리며 떨어지다가 하얗게 물보라를 일으킨다. 이 하얀 물보라는 300미터 아래 계곡에서도 볼 수 있었다. 장백폭포 가까이 가서보고 싶었지만, 우측의 계단위로 벼랑에서 돌이라도 굴러 떨어질까 봐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폭포 좌우는 화산석과 화산재의 흔적이라 검은 산이고 장백폭포는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흘러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 장백폭포의 물줄기는 500미터 전방에서도 하얗게 흘러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물줄기라 해서 이도백하(二道白河)니 오도백하(五道白河)니 하는 지명과 강 이름이 생겨 났나보다. 장백폭포의 흘러가는 모습과 이 지방 지도를 살펴보고 두만강과 압록강, 그리고 송화강의 원류가 백두산 천지라는 것을 실감했다.
장백폭포의 장관을 구경하고 내려오다 온천욕을 하러 “장백산 천상온천”에 들어갔다. 온천장이 두 군데 있는데 여기는 우리한국인이 투자해서 경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실내는 국내 대형목욕탕과 유사했지만 노천탕이 명품이었다. 따뜻한 탕 안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장엄한 장백폭포를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장백산 천상온천”이라 했나보다. ( 원고지 5장)
7. 연길과 용정시
백두산천지에서 흘러내린 희게 보이는 물길이 두 갈래로 찢어져 흐르는 곳 이도백하라는 지역을 벗어나 연길을 향하여 버스는 만주벌판을 달렸다. 가도 가도 우리네 산하 같은 너른 들판에는 벼가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인구 200만 명중 80만 명이 조선족이란다.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가장출세한분이 조남기 후금부부장이고 연변자치구주장은 김진길씨이며 그의 스승이 후진타오라한다.
1986년 아시안게임때 우리선수와 응원단들이 처음으로 백두산관광을 하고 그이후로 일반백두산관광이 시작되었다. 관광객들이 이곳에 얼마나 많은 여행비를 뿌렸는지 조선족에게는 많은 도움과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고 한다
“야! 조선족도 저렇게 잘사는 데가 있는가.” 하고 놀랐단다.
화룡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밥이 아주 찰지고 맛이 좋았다. 관광버스가 몰려들어 큰 식당이 혼잡하였다. 주변에 논밭이 있다는 것은 근방에 조선족이 살고 있다는 증거이고 벼농사와 참깨농사를 한다. 이 지역은 참깨농사로 유명하다. 한족들은 대부분 개구리참외 농사를 한단다.
인구30만 명이라는 용정시는 조선족이 65퍼센트, 우리민족시인 윤동주와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과 해란강으로 우리가슴에 새겨진 고장이다. 용정시에 큰 내라할까, 강폭이 그리 넓지 않은 물줄기가 흘러간다. 해란강이다. 개구쟁이들이 물장난하기 좋은 모래사장안쪽으로 강물이 흘러간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시비에 새겨져 있는 “서시”를 읽어보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대성중학교가 이제는 용정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져 있다. 이층 건물로 된 기념관 아래층은 쇼핑센타로 운영이 되어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기념관 이층은 용정시의 일제말기의 변천사를 학교별로 소개하여 놓았고 방명록이 있어 서명을 하고 약간의 성금을 내었다. 이곳에서 출판된 윤동주 시집“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가 있어 몇 권 샀다.
연길을 향하여 달리는 버스의 차창으로 바라본 산마루의 정자각하나, 일송정이 멀리 바라보인다. 일제말기에 대성, 동흥, 광명, 용정, 광명여자, 명신여자등 6개 중학교 학생들이 저곳에 있던 소나무 아래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삐라를 뿌렸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소나무에 고춧가루 후추가루 소금을 뿌려 말려 죽였다고 한다. 몇 년 전 한국교회가 소나무자리에 정자를 지어 일송정(一松亭)이 되었다. 우리민족의 아픈 현장인 것이다.
용정에서 연길은 20킬로미터로 이웃해 연결된 도시였다. 흑룡강성의 조선족자치구의 중심도시인 연길은 인구 32만 명으로 연변대학과 최근에 우리나라기업이 세운 과학기술대학이 있으며 대형빌딩과 화려한 도시풍경이 서울의 한 거리를 보는듯하였다. 공항은 우리나라와 교역이 활발해서인지 수많은 인파에 시끌벅적하다. 연길공항근처의 대형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심양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한 시간 만에 심양공항에 도착해서 공항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7시 출발비행기에 오르니 인천공항에 9시 20분에 도착 되었다 (원고지 9매)
8. 여행후기
현재 중국정부에서 동북공정을 내세워 기존역사를 왜곡하려는 시기에 시의적절하게 관심을 갖고 시공을 뛰어넘어 옛 역사를 탐방하고 우리를 되돌아보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초등학교와 여학교 시절에 국사를 배웠던 동명성왕 고주몽의 발자국을 따라 비류수를 건너 집안 국내성의 지명이 바로 우리 땅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 고구려의 산재한 역사유물과 자연환경과 풍습등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역사를 모르고 어찌 대응할 것이며 발전할 수 있는 민족이 되겠는가. 국사교육에 중점을 두어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한다. 그리하여 국가시책으로라도 유능한 역사 학자를 많이 배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활기가 넘치도록 발전해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들은 속수무책으로 우리역사가 뒤바뀌는 현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중국과 달리 가난에 쪼들리고 사상에 억압당하는 북한주민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모습은 우리의 슬픈 아리랑일 수밖에 없었다. 대명천지에 안 해도 될 고생을 지도자 잘못만나 북한 전주민이 한다고 생각하니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집안과 용정과 연길, 우리와 같은 핏줄이 사는 내 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약자는 언제나 말할 수 없다. 저 만주대륙에서 살아남은 우리조선족, 한반도에 매달려 지탱해온 우리들, 경제를 부흥시켜 언젠가 다시 고구려만큼 큰 나라가 되도록 응집력을 모아야 할 것이다.
백두산 천지를 감상했다는 것은 나를 무척 행복하게 하였다. 엄숙하고 거룩한 뜻을 소명 받아 백두산 등정을 한 기분이다. 백두산천지의 코발트색 물빛은 언제까지나 보석으로 나를 위안할 것이다. (원고지 4장)
(2004. 8. 원고지 6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