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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8년 가을호
【김현경의 회고담 6】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만용과 순자】
일시 : 2018년 6월 13일(수요일, 지방선거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저는 김수영 시인의 시작품들 중에서 「만용에게」에 관심이 많아요.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와 같이 자본주의에 맞서는 의식에 공감하기 때문이에요. 「거대한 뿌리」에서 보이는 당당한 어조도 볼 수 있어 마음에 들고요. 저는 「만용에게」라는 작품을 텍스트로 삼아 「김수영 시에 나타난 ‘여편네’ 인식 고찰」이라는 논문을 학술등재지인 『어문연구』(2005)에 발표한 적도 있어요. 그래서 ‘만용’에 대해 여쭤보려고 합니다. 만용이를 언제부터 데리고 있었는지요?
김현경 : 마포로 이사간 다음해 봄부터 닭을 키웠어요. 닭을 키우기 전에 돼지를 키웠는데, 먹이는 것에 비해 소득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을부터 키운 것을 새봄에 처분했어요. 그리고 마포 시장에 갔다가 병아리를 보고 10마리를 샀는데, 덤으로 얻은 1마리까지 더해서 11마리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그 병아리들이 알을 낳기 시작하자 신기하기도 하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어 100마리로 늘렸어요. 그리고 300마리로, 500마리로 늘렸고, 마침내 750마리까지 키웠어요. 병아리가 늘자 일손이 필요해 만용이를 구해온 것이지요.
맹문재 : 만용이를 어떻게 소개받은 것인지요?
김현경 : 우리 언니네 식모로 만용이의 누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닭을 키우는 데 일손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만용이를 소개해준 것이에요. 전남 담양 아이에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형네 집에 있다가 올라왔어요. 부모는 없었어요. 한 번도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았어요.
맹문재 : 만용이를 처음 보았을 때 인상이 어떠했나요?
김현경 : 얼굴이 뾰족하고, 못 생긴 얼굴은 아니었어요. 키도 컸구요.
맹문재 : 만용이가 닭보는 일을 잘했는지요?
김현경 : 닭을 아주 이뻐했어요. 닭하고 뽀뽀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웃음) 뭐든지 만들려고 했어요. 손재주가 있었어요. 인사성도 밝았구요. 닭 키우는 일은 손이 아주 많이 가요. 아침에 일어나 풀을 베어와야 해요. 가까운 데에 풀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나가 베어왔어요. 가끔은 부식토도 구해와야 했고, 굴 껍질도 어물점에 가서 얻어와야 했지요. 그것들을 빻아서 사료에 섞여 먹였어요. 그렇게 먹이니까 우리 닭들이 낳은 달걀은 크고 껍질이 단단했어요. 말하자면 우수한 상품이었지요. 그래서 한 번도 달걀을 팔지 못해 고민한 적이 없었어요. 되려 장사하는 사람들이 선금까지 주면서 달걀을 가져갔어요. 닭 모이를 주고 나면 알을 받아야 했는데, 닭을 많이 키울 때는 하루에 300개 이상의 달걀을 주워야 했으므로 쉬운 일만은 아니었어요. 달걀 줍는 일을 김 시인이 좋아했어요. 알을 줍고 나면 닭장 청소를 했어요. 부삽으로 닭똥을 치우고 했지요. 물도 갈아주어야 했구요. 이렇듯 일이 아주 많았어요. 나중에 750마리까지 키우게 되자 계사가 좁아 할 수 없이 알을 낳는 닭을 밧데리식 닭장에서 키웠어요. 물도 자동으로 흐르게 시설을 했구요. 그렇게 하니 일이 한결 수월해졌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만용이가 한 일들이 눈에 선하네요. 그런데 김수영 시인의 산문 「양계변명」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와요. “얼마 전에는 모이를 사러 조합에 갔다가 모이 두 가마니를 실어놓은 것을 오줌 누러 간 사이에 자전거째 도둑을 맞았다고 커다란 대학생놈이 꺼이꺼이 울고 들어왔습니다. (중략) 도둑이 어디 들었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만용이란 닭 시중을 하는 앞서 말한 대학생) 방쪽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중략) 만용이는 도둑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만용이의 행실이 아주 정직하지는 않았던가봐요.
김현경 : 두 가지 일 모두 사실이에요. 자전거를 잃어버린 것은 어느 해 봄에 일어났어요. 만용이가 먼저 그 상황을 얘기하더라구요. 일이 그렇게 되었다는데 어떻게 확인해볼 수 있겠어요. 야단도 치지 않았아요. 그리고 당장 자전거가 필요하니 중고로 사주었어요. 만용이에게는 그와 같은 면이 있었어요. 하루는 만용이가 외출하고 없을 때 그의 방에 들어가 봤어요. 만용이의 방은 계사 끝에 있었어요. 그런데 방바닥에 꽤 큰 사탕 통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 발로 밀어보니까 꽤 무거웠어요. 그래서 궁금해 열어보았는데, 글쎄 동전이 그득한 것이에요. 아마 계란을 몰래 팔아 돈을 모으고 있었나봐요. 또 한번은 김 시인과 함께 외출하고 돌아오니 집의 대문이 안으로 잠겨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한참 있으니 만용이가 외출했다가 돌아오더라구요. 계란을 팔러 갔다가 온 것으로 보였어요. 그런 날은 계란이 평균적으로 나오는 것보다 적은 것이 눈에 띄거든요. 그렇지만 그 아이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그 대신 만용이를 다그쳐달라고 김 시인에게 말했지요. 김 시인은 당장 내보내지 그러느냐고 태연하게 대답했어요. 닭 키우는 데 만용이만한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김 시인은 그러고 나서 “남의 집에 사는 놈이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하며 되려 나를 약올리는 것이었어요. 김 시인은 그러한 사람이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큰 성품을 볼 수 있네요. 그런데 만용이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보내주었고 대학 공부까지 시켰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인지요?
김현경 : 김 시인과 내가 만용이를 공부시키기로 했어요. 아이가 요구한 것이 아니었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그랬어요. 마포에 있는 동도중학교 야간부를 다녔어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요. 고등학교도 같은 곳에 있는 동도고등학교 야간부에 다녔어요. 그리고 국민대학교 법과를 입학했어요. 기초가 부족해서 그런지 학교 성적이 좋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주 성실했어요. 한 번도 결석을 하거나 지각을 하지 않았어요. 닭 키우는 일이 좀 남아 있어도 제쳐두고 학교를 갔어요. 나도 만용이의 저녁을 해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바빴어요. 만용이의 학비도 대주고 월급도 꼬박꼬박 주었어요. 신발도 사주고 차비도 주었어요. 고향의 형한테 용돈을 좀 보내기도 하는 것 같았어요. 교복은 사서 입혔지만 다른 옷들은 내가 지어서 입혔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들어보니 친자식처럼 데리고 있었네요. 정도 많이 들었겠네요. 만용이와 연락이 되고 있는지요? 한번 찾아올 만도 한데요.
김현경 : 그렇지요. 거의 10년 정도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는 연락이 안 되어요. 만용이가 국민대학교 2학년을 다니다가 도봉동 우리 시댁으로 갔어요. 우리가 양계를 접는 대신 시댁이 양계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곳에 일손이 필요해 간 것이지요.
맹문재 : 시댁도 양계를 했다는 사실이 새롭네요. 좀 더 말씀해주세요.
김현경 : 우리가 닭을 500마리 정도 키울 때 도봉동 시댁에서도 양계를 하겠다고 해서 시장에서 병아리를 사다가 키워 보내주었어요. 시댁에서는 그 전에 젖소를 키웠어요. 병아리를 500마리 키워 트럭에 실어 보냈는데, 가다가 병아리들이 몰려 압사당한 것들도 있었어요. 시댁에서는 밧데리식으로 닭장을 만들어 닭들을 키웠어요. 파이프쟁이라고 불린 수환 시동생이 기술이 있으니까 아주 멋지게 지었어요. 또 하얀 레공(레그혼)만 키웠기 때문에 닭들이 이뻤어요. 시어머니와 수환 시동생이 거들었는데 일손이 부족해 만용이를 시댁에 보낸 것이지요. 만용이는 그곳에서 국민대학교를 졸업했어요. 물론 시댁에서 학비를 대주었지요. 그런데 시댁에서도 수지가 안 맞자 양계를 좀 하다가 그만두었어요.
만용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도봉동 집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어 조용히 담양으로 내려간 것이에요. 그 얘기를 여기서 할 수 없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알게 되었어요.
맹문재 : 만용이와 관계된 다른 일화는 없는지요?
김현경 : 어느 날 만용이의 형수가 집으로 왔어요. 취직을 하러왔대요. 만용이가 고등학교 1학년 즈음일 거예요. 남편과 싸움을 하고 올라왔다는데, 그래서인지 만용이가 싫어하더라구요. 그때 한참 집수리를 하고 있었는데, 만용이의 형수가 이것저것 거들어줘 고맙더라구요. 그래서 취직할 때까지 일 좀 도와달라고 붙잡았어요. 그렇게 해놓고 안심을 하고 외출하고 돌아와보니, 글쎄 만용이 형수가 보이질 않는 거에요.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만용이도 잘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방에 들어가 다락을 열어보니 돈 보따리가 없어진 것이에요. 집 수리하는 데 쓸 돈을 던져 놓았는데...... 기가 막혔어요. 살다보니 그런 일도 있었어요.
맹문재 : 정말 기막힌 일도 있었네요. 또 다른 일화는 없는지요?
김현경 : 마포에서 양계를 할 때 만용이 말고 또 다른 아이도 데리고 있었어요. 일이 많으니까 만용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새로 구했어요. 경북 영천에서 온 아이인데 이름을 잊어버렸네요. 키가 작은 아이였는데 1년쯤 있다가 고향으로 갔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서 그 아이도 동도중학교 야간부에 입학시켰지요. 만용이가 구박을 하면 그 쪼그만 아이도 대들더라구요. 어느 날 고향 집에서 아이를 데리려 왔더라구요. 그래서 보냈어요.
맹문재 : 그런 일도 있었네요. 닭 키우는 일을 그만두신 이유는 아무래도 수지가 맞지 않아서일 텐데, 그 상황을 좀 더 들려주세요. 도봉동 시댁도 수지가 맞지 않아 양계를 그만두셨다고 하셨잖아요.
김현경 : 11마리를 키울 때부터 한 500마리를 키울 때만 해도 수지가 괜찮았어요. 닭들이 알을 낳기 시작하니까 수입이 좋았지요. 그래서 집도 양옥으로 고치곤 했어요. 집은 김 시인을 중심으로 고쳤어요. 두 방을 터서 한 방으로 만들어 서재를 늘렸고, 방문도 후레쉬 도어로 바꾸었어요. 유리창도 달았고, 목욕탕도 만들었지요.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만들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양옥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닭을 750마리 정도 키울 때 물가 파동이 일어났어요. 쌀값을 비롯해 곡물값이 치솟는 바람에 사료값도 폭등했어요. 사료값이 10배나 뛰었으니 달걀 값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었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닭 키우는 일을 포기하고 만 것이에요.
맹문재 :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1960년대의 경제 상황이 그랬네요. 5·16군사구데타에 의한 정치적 혼란과 선거 후유증이 심한데다가 1962년에 단행한 화폐개혁의 실패로 말미암아 경제가 바닥이었어요. 또한 미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잉여농산물의 도입이 늦어지는 바람에 쌀, 밀가루, 면사 값이 크게 올라 민심이 흉흉했어요. 그래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출범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도 1964년에는 목표 성장률을 7.1%에서 5%로 낮추었어요. 거기에 농사조차 흉년이 들어 나라 전체가 힘들었지요. 그와 같은 경제 상황으로 인해 양계업도 타격을 받았지요. 그래서인지 「만용에게」가 더욱 와닿네요. 제가 시작품을 인용해볼게요.
수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다
모이 한 가마니에 430원이니
한 달에 12, 3만 환이 소리 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60개밖에 안 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값이
일주일에 6일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7할을 낳아도
만용이(닭 시중하는 놈)의 학비를 빼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나는 점등(點燈)을 하고 새벽모이를 주자고 주장하지만
여편네는 지금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아니 430원짜리 한 가마니면 이틀은 먹을 터인데
어떻게 된 셈이냐고 오늘 아침에도 뇌까렸다
이렇게 주기적인 수입 소동이 날 때만은
네가 부리는 독살에도 나는 지지 않는다
무능한 내가 지지 않는 것은 이때만이다
너의 독기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
너와 내가 반반-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
-「만용에게」 전문
맹문재 : 우문이지만 위의 작품에서 “여편네”는 김현경 여사님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위의 내용이 사실이겠지요?
김현경 : 그럼요. 김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사실이에요. 하나도 왜곡된 것이 없어요. 내가 양계 수지가 안 맞는다고 짜증을 좀 낸 것을 작품으로 쓴 것이에요. (웃음)
맹문재 : 키우던 닭을 언제 그만두었는지요? 어떻게 처분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하고 의논도 안 하고 내가 처분했어요. 닭을 사는 사람을 불렀어요. 그전에도 폐계를 사러오는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한꺼번에 닭들을 다 싣고 갔어요. 그때가 1966년 정도였으니 10년 가까이 닭을 키운 것이지요.
병아리 11마리를 처음 장에서 사온 날이 떠오르네요. 우리집 한쪽이 언덕이어서 거기에다가 목재상에 사온 파목(破木)을 대고 김 시인과 함께 닭장을 지었어요.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닭을 키우느라고 참으로 애쓰셨어요. 닭을 처분하고 나서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요?
김현경 : 본격적으로 옷을 만들었어요. 닭을 키우면서도 만들었는데, 일감이 자꾸 들어왔어요. 그래서 나중에 식모를 하나 두었어요. 그 아이 이름이 순자였어요.
맹문재 : 김수영의 시 「꽃잎」에 나오는 그 “순자”인 것이지요. 이전에는 「꽃잎」을 세 편의 연작시로 보고 구분해서 수록했는데, 이번에 이영준 교수는 『김수영 전집』을 간행하면서 한 편으로 묶었어요. 『현대문학』 1967년 7월호에 「꽃잎 1, 2, 3」이 한 편으로 발표되었다고 하네요. “순자”가 나오는 「꽃잎 3」을 한 번 읽어볼게요.
순자야 너는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잠시 찾아오기를 그친 벌과 나비의
소식을 완성하고
우주의 완성을 건 한 자(字)의 생명의
귀추를 지연시키고
소녀가 무엇인지를
소녀는 나이를 초월한 것임을
너는 어린애가 아님을
너는 어른도 아님을
꽃도 장미도 어제 떨어진 꽃잎도
아니고
떨어져 물 위에서 썩은 꽃잎이라도 좋고
썩는 빛이 황금빛에 닮은 것이 순자야
너 때문이고
너는 내 웃음을 받지 않고
어린 너는 나의 전모를 알고 있는 듯
야아 순자야 깜찍하고나
너 혼자서 깜찍하고나
네가 물리친 썩은 문명의 두께
멀고도 가까운 그 어마어마한 낭비
그 낭비에 대항한다고 소모한
그 몇 갑절의 공허한 투자
대한민국의 전재산인 나의 온 정신을
너는 비웃는다
너는 열네 살 우리집에 고용을 살러 온 지
삼 일이 되는지 오 일이 되는지 그러나 너와 내가
접한 시간은 단 몇 분이 안 되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느냐 나의 방대한 낭비와 난센스와
허위를
나의 못 보는 눈을 나의 둔갑한 영혼을
나의 애인 없는 더러운 고독을
나의 대대로 물려받은 음탕한 전통을
꽃과 더워져 가는 화원의
꽃과 더러워져 가는 화원의
초록빛과 초록빛의 너무나 빠른 변화에
놀라 오늘도 찾아오지 않는 벌과 나비의
소식을 더 완성하기까지
캄캄한 소식의 실낱 같은 완성
실낱 같은 여름날이여
너무 간단해서 어처구니없이 웃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에 웃는
너무 진리가 어처구니없이 간단해서 웃는
실낱 같은 여름 바람의 아우성이여
실낱 같은 여름 풀의 아우성이여
너무 쉬운 하얀 풀의 아우성이여
―「꽃잎」 3단락 전문
김현경 : 순자의 나이가 17살이었어요. 키는 자그마했어요. 친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계모 밑에 있었는데, 하도 구타를 당해 몰래 집을 나온 것이에요. 계모가 인두로 지져 몸에 상처가 많이 나 있었어요.
그때는 빨래를 한강 나루터에 가서 했는데, 순자는 아주 깨끗하게 해왔어요. 살림도 아주 잘했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집에 있다가 시집을 가라고 했어요. 통장도 만들어주었어요. 그런데 2년 즈음 지나서 순자의 아버지가 왔어요. 예의를 갖추느라고 까만 두루마기를 입고 왔대요. 전라도에서 올라왔어요. 순자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혼자 살기 어려우니 시중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어요. 순자가 싫다고 하니까 애 방에 자면서 설득을 하더라구요. 계모가 세상을 떠서 혼자 살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순자를 설득해 아버지를 따라 보냈어요. 아버지 혼자 살아가기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해요. 그 뒤로 연락이 없어요.
순자는 바느질 시다(した : 下, 보조) 노릇을 했는데 그 일도 참으로 잘했어요. 그때는 옷감이 귀해 옷을 만들 때 우라까이(うらがえし : 裏返, 뒤집기)해서 만들었어요. 옷감의 겉은 닳았지만 속은 괜찮았기 때문에 뒤집어서 새로 옷을 만든 것이지요. 그래서 옷감을 뜯은 뒤 털어 다림질을 해놓아야 했는데, 순자가 그 일을 아주 잘했어요. 옷감을 뜯을 때는 먼지가 많이 났어요. 한두 벌 만드는 일이 들어올 때는 내가 혼자서 할 수 있었지만, 일거리가 늘면서 순자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바느질하는 일이 닭을 키우는 일보다 돈벌이가 되었어요. (웃음) 양계에 손해본 것을 바느질해서 보충한 셈이에요. 김 시인은 만용이며 순자를 아주 이뻐했어요. 먼 발치에서 바라볼 뿐인데도 그랬어요. 그래서 「꽃잎」 같은 시를 쓸 수 있었지요. 김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상황은 모두 사실이에요. 하나도 거짓이 없어요.
김 시인은 생활을 아주 진지하게 했어요. 그래서 돈을 못 벌어온다고 말할 수 없었어요. 그도 열심히 일해서 가정 살림을 보태려고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김 시인은 주로 번역하는 일을 했는데, 아주 완벽하게 했어요. 출판사에서도 다 알아주었어요. 더디긴 해도 매사가 틀림없었어요. 그러니 돈을 못 번다고 말할 수 없었지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 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김수영의 연인』『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가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시집으로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