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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신의터재를 재연한 3533 강연숙
2002년 12월 19일은 대통령 선거일.
크리스머스 이브까지 마치려는 나의 낙동정맥 종주 대미를 향한
마지막 1주간중 첫 날이기도 했다.
선착순으로 투표하고 탄(07:55)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에서 내린
밀양역의 시계가 11시 55분을 가리켰다.
거상거가 꽤 되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특단의 지혜가 요구되었다.
황금 같은 2시간을 터미널에서 허비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석남터널을 경유하는 24번 국도상의 hitch-hike가 용이한 지점에
서있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분기점들이 대부분 정리된 밀양시 산외면 금곡리에서 갤로퍼에
어렵잖게 편승했으나 인근 사찰로 가는 승려의 차였다.
다시 길 위에서 행운 잡기 게임에 들어갔다.
아무리 급해도 티코같은 미니 승용차의 경우 배낭 싣기가 어렵기
때문에 손을 들지 않는 것이 나의 hitch-hike 불문률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통과한 것으로 기억되는 티코 한 대가 길 건너
편에서 U턴하여 내 앞에 와 멎었다.
"어데 가십니꺼?"
차에서 내린 젊은 여인이 물었다.
"석남터널"
앞뒤 좌석과 바닥까지 너즈러진 짐들을 부리나케 대강 정리한
그녀는 내게 승차할 것을 권했다.
강연숙.
32세의 그녀는 큰 선거가 있는 임시 휴일, 투표를 한 후 밀양에서
포항의 부모를 뵈러 가는 길이라 했다.
대형 배낭을 짊어지고 차를 기다리는 듯한 노인을 외면한 채
차마 그냥 갈 수 없어 되돌아 왔다는 것.
신의터재(백두대간과 아홉정맥 11회 참조)의 완전한 재연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불우한 분들께 봉사하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삼삼하게 하겠노라고 다짐두는 뜻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3533으로
했다는 강연숙.
여러 이야기를 나누느라 하마터면 지나칠 뻔 했다.
얼음골사과까지 내게 주며 축수하는 그녀와 헤어진 뒤의 내 발
걸음은 터널 위의 된비알도 힘들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그녀의 그 고운 마음씨가 변치 않기를 나도 축원했다.
(아내와 친구 정경수, 우리 셋이 배내골 여인양의 집에 가는 길에
밀양에서 재회했다.)
'작은 모임 더불어'의 산파 여인양
당초의 염려와 달리 기분 좋은 접근과 겨울답지 않게 따스하고
청명한 날씨 그리고 완만한 능선, 삼박자가 잘 갖춰진 낙동정맥
석남고개 ~ 능동산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좋은 일만 있을 것 같은 필(Feeling)의 오후였다.
시작이 반이며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잖은가.
이번 1주간에 걸친 마지막 장기 레이스는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것임이 틀림 없다는 느낌 속에서 능동산에 올랐다.
983m 정상에서는 곧 만나게 될 간월산 ~ 신불산 ~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본체가 시원스럽게 조망되었다.
내가 오늘 밤 묵을 예정인 바로 아래 배내골도 평화로워 보였다.
능동산 정상
배내고개 마루 천막주점에서 막걸리로 갈증을 달래며 민박집을
확인하고 있을 때 한 장골(壯骨) 남이 들어왔다.
부산에서 예까지 출퇴근하며 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붙임성 있어
보이는 여인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이 남자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인양.
배내골의 식당 겸 민박집 주인이란다.
그는 자기 트럭에 나를 태우고 한참 내려가다가 길가의 한 외딴
집 영감에게 나를 인계(?)했다.
내가 상품성이 약해 보인 것일까.
당장엔 적잖이 언짢았지만 곧 심지 깊은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경북 상주가 본향인 그는 이곳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배내골로 이주하여 제법 큰 규모의 식당 겸 민박집'상주산장'을
일궈낸 근면 성실한 자수성가형이다.
상주산장 여인양 부부와/ 2004년 11월 배용근과 영남알프스 종주중.
견물생심이며 다다익선이라 잖은가.
영업욕이 강한 그가 나를 자기 집 아닌 외딴 집에 내려 놓다니?
경남 산청에서 이곳으로 이주했으나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생활이
곤고한 영감 내외를 음양으로 돕고 있는 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바라는 갸륵한 뜻에서 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우리의 '작은 모임 더불어'가 태어나게 한 셈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보낸 하룻밤 사이에 알게 된 이 집 영감의 딱한
사연을 푸는데 우리 작은 모임(김인재, 이민홍, 장문균과 나)은
도움을 주었고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우리의 '작은 모임 더불어'가
태어났으니까.
'작은 모임 더불어' 태어나다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 밤새워 계속되었다.
저녁과 아침 식사를 영감 내외와 함께 하는 동안 이 집 부인의
걱정이 태산같았다.
"노무현이 되믄 으짜노"를 연발하다가 당락이 확정된 아침에는
장탄식이 끊기지 않았다.
곁에서 이를 들을 때마다 영감은 다른 탄식을 하고 있었다.
누가 된들 그가 내 눈 고쳐줄 리 없는데 왜 이리 호들갑이냐며
아내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안태준.
그는 우리 '작은 모임 더불어'를 탄생케 한 주인공이다.
다음 글은 더불어人들께 드린 우리 모임의 발족 선언문의 성격을 띈
나의 메시지다.
소위 IMF 충격의 어느 날 저희 작은 모임은 시작되었습니다.
매월 첫 째 월요일 밤 소주잔을 통해 무사와 건강을 확인했습니다.
넷 혹은 다섯이 모이는 이 모임은 표현처럼 그냥 작은 모임이었을
뿐입니다.
이 '작은 모임'에 '더불어'가 추가되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곧 이어 정맥 종주에 들어간 저는
2002년 12월 19일, 낙동정맥 종주중 영남알프스 간월산 못미쳐 배내고개
에서 백내장으로 실명 위기에 처했지만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빈한한
60대 부부를 만났습니다.
외눈으로는 품팔이도 할 수 없다는 딱한 사정을 가슴에 안은 채 낙동정맥
종주를 마치고 돌아 온 저는 2003년 1월 6일, 새 해 첫 작은 모임에서 이
분을 도와주자고 제의했습니다.
모두 흔쾌히 동의, 100,000원씩 醵出해 400,000원을 울산 언양의 한사랑
안과에 송금했습니다. <작은 모임 더불어>라는 이름으로.
急造했지만 평소 염두에 뒀던 단어로 부사를 同意의 고유명사화 해서,
다 함께(together), 더불어 사는 세상을 바라는 작은 모임이란 뜻을 담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1월 14일 수술받고 시력을 되찾았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주)하동상사 허정강 사장은 2,000,000원을 快擲!
2월 2일 모임에서 <작은 모임 더불어>가 정식 발족되도록 點火했습니다.
굶주린 이에게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한 끼는 배부르겠지만 그에게
고기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다시는 주리지 않게 되리라 믿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작은 뜻을 펴려는 사람들의 모임인
<작은 모임 더불어>는 큰 일, 많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큰 조직으로 발전하는 걸 원하지도 않습니다.다만,
우리 더불어人이 두 자리 수의 끝, 99명 까지만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 되는 날엔 우리 작은 모임도 새 이름이 필요할 지 모릅니다.
가령 白人(百에서 1모자란 99를 의미) 모임 이라던가...
99라는 수자와 이를 白으로 표현하는데는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99와 白의 공통된 대표적 의미는 모자라다는 것, 이는 곧 겸손을 뜻하기도
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한다는 뜻의 다른 표현입니다.
다음은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조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모임의 성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 생각됩니다만...
이 숙제는 더불어人 여러 분의 관심과 사랑이 풀어주리라 믿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