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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민속 문화
강 경 호
물은 생명의 기원이며 원천이어서 모든 생명체는 물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런데 갈수록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각종 시민단체에서는 물자원의 오염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다. 지구의 3분의 2 이상을 물이 차지하고 있지만 더욱 물이 부족해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물자원이 오염되고 고갈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정을 염려하는 환경단체들은 물의 오염지표를 따지며 피켓을 들고 시위하며 물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본질적으로 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의 삶 속에서 그 대안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가동되는 사회구조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물이 오염되고 부족할 수밖에 없어 근본적으로 삶의 태도와 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한다. 우리 선조들의 삶의 모습이 배어있는 민속 문화적인 차원에서 물 문화를 생각하고 실천해 나간다면 물부족문제를 극복할 방도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민족은 우물과 샘을 늘 집 가까운데 두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물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높였다. 각 절기마다 세시풍속 속에서도 물을 생활화하고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농경민족이어서 생활 깊숙이에는 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생성되어있다. 특히 풍수사상에서 물은 묘와 집, 심지어는 왕궁과 마을을 택하는데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물에 관한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사상은 설화 속에도 투사되어 지금껏 전해온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의 민속적인 생활은 물의 가치를 인식하고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삶이었다. 물부족과 오염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 우물과 샘의 상상력
샘은 땅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자리를 이르는 말이다. 곳에 따라 새암, 시암, 샘터라 부른다. 중부 이북에서는 집안에 있거나 물이 깊어서 두레박으로 푸는 것을 ‘우물’, 사람이 앉아서 바가지 따위로 뜨는 것을 ‘샘’이라 따로 부른다. 그러나 남부 지방에서는 이를 가리지 않고 샘이라 이른다.
샘은 물을 뜨는 방법에 따라 쪽샘, 두레샘, 작두샘으로 나눈다. 쪽샘은 표주박이나 쪽박, 바가지로 푸는 얕은 샘이다. ‘박우물’이라는 이름은 이에서 왔다. 두레샘은 두레박이 달린 두렛대를 설치한 샘이다. 두렛대 한쪽에 적당한 크기 돌이 달려서 줄을 당겨 두레박을 물속에 넣고 손을 놓으면, 그 무게 때문에 두레박이 자연히 달려 올라오는 셈이다.
오늘날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펑펑 쏟아져 참으로 편리하다. 그런데 옛날에는 마을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나 샘이 있었다. 우물이나 샘이 없는 집 사람들은 매우 불편했다. 물은 여성들의 담당이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물 긷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집안에 있는 물 항아리가 가득 차야 마음이 놓였다. 날씨가 춥고 길이 미끄러운 날이나 비가 오는 날은 물을 길으러 우물에 가는 일이 고역이었다.
우리 마을에는 우물이 동편과 서편에 하나씩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또아리 위에 물동이를 이고 새벽마다 우물에 가셨다. 겨울 우물에서는 따스한 김이 무럭무럭 났다. 한여름에는 깊은데서 길러진 우물물이 서늘했다. 추운 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할 때는 손이 시려서 손에 동상이 걸리기 일쑤였다.
1960년대 초등학교에 다녔던 아이들은 일 년에 두어 번씩 우물 청소를 하였다. 물을 다 퍼내고 우물 속에 들어가 우물바닥에 놓인 자갈돌을 깨끗이 씻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샘솟은 맑은 물이 차오르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그리워진다. 이 그리움은 그저 회고적인 그리움이 아니다. 오늘날 수도가 너무 편리하기 때문이다. 수도 때문에 쉽게 물을 얻을 수 있어 물을 함부로 소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처럼 물을 얻는 일이 수고스럽다면 쉽게, 그리고 함부로 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수도가 집집마다 들어오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우물터와 샘터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만남의 장소여서 약속하지 않아도 우물가에 가면 마을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그날그날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누구네 돼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고 언젠날 품앗이를 약속할 수가 있었다. 유행가 노랫말처럼 우물가에서 동네처녀가 바람나기도 하였다. 이른바 우물은 소통과 사교의 공간이었다.
우물터는 동네의 목욕탕 역할도 톡톡히 하였다. 남자들이 등목을 하며 땀을 씻고 나면 밤중에 여자들이 몸을 씻었다.
우물은 천연 냉장고였다. 수박이나 과일을 차디찬 우물 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먹으면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식수로 사용할 물은 새벽에 길었다. 밤새 솟아오르는 우물물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머리에 또아리를 얹고 그 위에 물 항아리를 이었다. 물 항아리에 물을 담아 골목길을 가다보면 물항아리가 출렁거려 물이 떨어졌다. 그럴때면 어머니는 이마를 타고 콧등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푸우, 푸우’하고 입으로 내팅겼다.
간혹 남자들이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나르기도 하였다. 물지게 양쪽 끝 쇠고리에 나무나 함석으로 된 물동이를 걸고 집으로 물을 나르면 금세 물 항아리가 가득 찼다.
정월 14일을 누더듬날이라고 해서 남에게 식수를 나누어주지 않으며 우물의 수질이 나쁘거나 양이 적어 마을 사람들이 먹을 수가 없을 때에는 14일 밤에 같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좋은 우물에 가서 남몰래 물을 길어다가 자기네 우물에 붓는다. 그러면 물을 빼앗긴 우물은 물이 마르고 그 대신 물을 길어다 부은 우물은 물이 좋고 양도 많아진다고 한다. 부잣집 뜰의 흙을 밤에 몰래 파다가 자기네 뜰에 놓는 복토도(福土盜)와 같은 발상에서이다.
부엌에서 쓰는 식수나 설거지에 쓰는 물은 양이 적으므로 두레박 정도로 가능했으나 논에서 물을 댈 때에는 바가지로서는 제 구실을 못한다. 특히 가뭄이 계속되면 바가지 물로는 좀처럼 해갈(解渴)이 어렵다. 그래서 대량의 물을 힘을 덜 들이고 퍼 올리는 기구로 용두레를 발명해 낸 것이다.
세 발을 세우고 끈으로 용두레를 달아 메고 긴 자루를 잡고 물리적인 힘을 응용하면 1~2미터 높은 곳에 물을 퍼 올릴 수가 있다. 그런대로 힘이 덜 들고 많은 물을 퍼 올릴 수가 있어 농가에서 애용되어 왔다.
우리는 샘을 신성하게 여긴 나머지 용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정월의 첫 용날 새벽에 ‘용 알 뜨기’ 경쟁을 벌이는 민속은 여기에서 나왔다. 용이 샘에 들어와 낳은 알을 떠서 밥을 지으면,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다. 용은 비를 상징하는 영물이므로, 이를 제 것으로 삼으면 풍년이 들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샘에는 재앙을 물리치는 신통력도 있다고 여겼다. 전라북도 일대에서는 정월 대보름날 기름 종지에 묵화 심지를 박아 불을 밝힌 다음, “일 년 열두 달, 탈 없도록 도와주소서”하고 축원했다. 또 샘물이 깨끗하고 끊임없이 나오기를 바라는 샘굿도 친다. 경상도 지방의 지신밟기 때 풍물패는 우물가에 둘러서서 “물 주소, 물 주소, 용왕님네 물 주소. 뚫려라, 뚫려라, 물구멍만 펑펑‘하고 소리쳤다.
우리는 우물에 신비하고 왕성한 생명의 힘이 깃들여 있다고 믿었다. 서기 3세기 무렵 중국 사서인 『후한서』 동옥저(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나라)전에 ‘바다 가운데의 여인국에는 남자가 하나도 없으나 여인이 신의 우물(神井)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곧 자식을 낳는다’는 내용이 있다. 또 『삼국유사』에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가 양산 기슭 나정(蘿井)가의 알에서 태어나 동쪽 샘(東泉)에서 몸을 씻었으며, 그 아내도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난 계룡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건국의 사적을 읊은 「용비어천가」 제2장에도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고,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간다”고 하여, 국가의 무궁한 발전에 견주었다.
같은 내용은 민담의 세계에도 들어 있다. 강원도 명주군 학산리의 한 처녀는 굴산사(堀山寺) 앞 돌우물에 비친 아침 해를 떠먹고 아들을 낳았다. 범일(梵日)국사가 된 그 아들은 죽어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었다. 보조(普照)국사도 새벽마다 샘에 가서 기도하던 처녀가 그곳에서 떠오른 오이를 먹고 낳은 인물이다.
우물도 용과 관련이 깊다. 본디 용녀(龍女)였던 고려 태조 왕건의 할머니는 개성의 한우물(大井)을 통해 용궁으로 드나들었다(『고려사』 세가).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권 제5 월랑신인). 신라에서 태어난 법사 월랑은 당나라로 건너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였다. 황금 천 냥을 보시로 받은 월량법사는 땅 밑을 지나 자기 집 우물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탑과 불상을 황금으로 꾸민 까닭에 금광사(金光寺)라 불렀다.
전라북도 지방에서는 용왕이 한밤중에 물을 뒤집어 물꽃을 피우는 조화를 부린다고 믿는다. 용왕신의 신통력이 들어 있는 이 물에 용왕신 자신도 알을 낳는다. 따라서 이 물로 조왕 종발의 물을 갈아 붓거나 치성을 올리면 바라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정화수 한 그릇은 산해진미를 가득 차린 상에 못지않다. 가난한 집에서는 이 물 한 그릇을 떠놓고 혼인식을 올린다. 경상북도 월성군 일대에서는 이월 초하룻날 정화수 한 그릇을 마련하고 풍년을 빌었다. 이 물을 ‘농사물’이라 따로 불렀다.
정화수에 잡귀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부정거리에서 재를 섞은 정화수를 굿터 주위에 뿌리면, 신을 모시는 자리가 깨끗해진다고 여긴다. 또 조왕신의 신체가 물인 점도 이와 연관이 깊다.
우물에 물을 상징하는 용왕이 사는 까닭에 항상 주위를 깨끗이 했다. 칠월 칠석에는 우물 청소를 하고 제사도 올린다. 우물을 칠 때에는 한 사람이 바닥에 들어가 물을 퍼서 중간 사람에게 올리고, 중간 사람은 다시 우물가의 사람에게 넘겨서 땅 바닥에 쏟아 붓는다. 출산을 앞둔 아내가 있는 남자는 자원해서 밑바닥으로 들어간다. 용왕신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것이다. 청소를 마치면 금줄을 둘러치고 제물을 갖추고 “물이 잘 나고, 마을이 태평하도록 도와주소서”하고 축원한다. 그리고 소독 작용을 하는 황(黃)을 넣는다.
큰 마을에서는 한 우물을 쓰는 십여 호의 사람끼리 계를 묻는다. 계원들은 우물 관리 비용을 내고 우물 청소도 맡는다. 우물계는 고사떡을 돌리거나 품앗이를 할 때 한 동아리를 이루는 단위가 된다.
우물은 억울한 누명을 쓴 이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장소로도 썼다. 특히 터무니없는 소문에 시달리는 수절 여인은 치마를 걷어 올려 머리에 뒤집어쓴 채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네의 죽음은 우물 곁에 나란히 벗어 놓은 신발을 통해 알려졌다. 사람들은 죽은 이의 혼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물귀신’이라 따로 불렀고, 우물도 곧 메워 버렸다.
이 때에는 무당을 불러와서 ‘넋 건지기’ 굿을 벌였다. 깨끗이 씻은 쌀을 밥그릇에 담고 흰 명주 수건으로 잘 싸서, 끈을 달아 우물 속으로 내려 보낸 뒤 경을 외우면서 휘젓는다. 밥그릇을 들어 올려서 잘 살핀 다음, 다시 내려 보내고 경을 읊조린다. 이 일은 그릇에 어떤 징후가 나타날 때까지 거듭되며, 결국 머리카락이 나타난다. 이것을 죽은 이의 것이라고 여겼다.
우물가에 놀던 어린이가 빠지는 불상사도 드물지 않았다. 자기 자식에 대해 마음이 놓이지 않은 상태를 ‘우물가에 애 내보낸 것 같다’고 한다. 충청남도 서산시 일대에서는 유월 유두에 우물에 밥 세 숟가락을 떠 넣으며, “물 좋고, 아이들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소서”하고 읊조린다.
우리 아낙네들은 물을 아끼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호남과 영남 산간 지대에서는 우물에서 세 번째 길어 올린 두레박은 반드시 일부러 기울여서 우물에 다시 쏟아 부었다. 샘터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것이 ‘질금질’이다. 아들을 잘 낳고 복을 누린다고 한다. 법도를 따지는 집에서는 며느릿감이 물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았다. 물을 헤프게 다루면 복이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이승에서 물을 낭비하면, 저승에 가서 똑같은 양의 물을 마셔야 하는 벌을 받는다는 훈계를 들으며 자랐다.
부뚜막의 조왕신에게는 조석으로 또는 삭망으로 정화수를 떠다 놓았고, 정성껏 빌 때도 정화수 한 그릇을 장독대에 떠다 놓고 합장을 했으며, 가난해서 가진 것이 없어 차리지 못할 때에는 냉수 한 그릇 떠놓고 혼례를 치르는 등, 물은 마셔 목을 축이는 이외에 신성함이 인식되어 있어서 성스러운 자리에는 물이 등장하였다.
새해를 맞아 정월 첫째 용날(辰日) 새벽에 여인들은 남보다 일찍 일어나 우물에 물을 뜨러 간다. 아직 아무도 떠가지 않은 물을 먼저 뜨면 용알을 얻게 되고 당년 농사가 잘되며 재수가 좋아 복된 일이 많이 있다고 전한다. 이것을 「용알뜨기」라 일렀다.
용알을 먼저 뜬 사람은 지푸라기를 하나 우물에 넣는다. 다음 물 길러 온 사람이 지푸라기를 보고 이미 용알을 떠간 것을 알고 딴 우물로 물 길러 가게 된다.
새해의 우물물에는 신앙적 의미가 있었다.
세시풍속으로 정착된 것으로 미루어 선인들이 새해의 용날 우물물을 신성시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물에는 수신(水神)인 용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용왕은 바다, 강, 호수 등 물이 있는 곳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우물에도 있어서 사람들이 먹는 우물물을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정초에는 우물의 물이 많이 나오고 늘 맑은 물이 나오도록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우물에서 고사를 지내고 용왕굿을 하였다. 지신밟기에서도 우물 굿 또는 샘굿이 있어 농악을 치면서 물이 퀄퀄 많이 나오고 물맛 좋기를 기원하였다. 우물은 맑고 풍부하며, 또한 오염되거나 사람에 의해서 더럽혀지면 안 된다.
2. 물맞이와 정화의식
1960년대 우리 마을은 여름이 오면 바다에 나가 물을 맞았다. 일종의 피서방법이기도 하였으나 심신을 씻는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우리 마을은 바닷가에 있었다. 바다 갯벌 가운데에 여름에도 소름이 돋는 샘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복류천이었던 것 같다. 즉 물이 산에 스며들었다가 수맥이 바다에서 솟구친 것인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이웃마을과 먼데 사람들까지 와서 물을 맞고 갔다. 무더운 여름을 지내기 위한 하나의 처방의식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물맞이는 여름날 폭포 아래에서 물을 맞는다거나 단옷날 머리를 감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졌다. 화순읍내의 만연폭포는 여름이 되면 만연폭포 아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에는 물줄기가 두 개가 있는데 남자와 여자가 산 위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폭포 물을 맞는다. 폭포수에 물을 맞은 날은 아무리 무더운 열대야라고 해도 그날밤은 서늘한 기분으로 잠을 잘 수 있다. 물을 맞은 사람들은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오들오들 떨었다. 그것은 차디찬 물의 기운이 피부뿐만 아니라 뼛속 깊숙이까지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화순읍 사람들은 여름이 오면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이 폭포 아래에서 물맞이를 하는 것이다.
오월 단옷날에는 물과 관련되는 여러 행사가 있다. 단옷날 아침 일찍 일어나 풀밭이나 채소밭에 가서 풀잎에 맺혀 있는 이슬을 손에 받아서 세수를 한다. 이슬물이라 세숫물처럼 많이 쓸 수는 없으나 얼굴에 바르기는 충분하다. 이렇게 하면 여름에 땀띠가 나지 않고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슬을 받아 얼굴에 바르고 여기에 분을 바르면 얼굴이 고와지고 마른 비듬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서 여인들이 아침에 이슬로 분단장을 했다.
농가에선 단옷날 비 내리기를 고대했는데 단오비가 오면 그 해에 채소가 잘 자라고 밭곡식이 잘 자라서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농가의 가장 큰 소원은 풍년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단오비로 농사일을 점쳤던 것이다.
단옷날 창포(菖蒲)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으면 숱이 많아져서 젊고 소담해 보였으며, 또 머리에 윤기가 있다고 해서 여인들이 즐겼다. 창포 뿌리를 잘라서 비녀로 삼고 비녀 양쪽에는 빨갛게 연지를 바르고 수(壽)․복(福)자를 새겨 멋 내고 벽사(辟邪)도 했다. 단옷날이 일년 중에서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기에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복을 맞이하려는 일종의 민간 신앙의식이었다.
단옷날에는 동쪽에 흐르는 개울에 가서 머리를 감는 풍속이 있었다. 동쪽은 청방(靑方)으로 태양이 솟고, 소생과 부흥을 상징하는 방향이란 뜻이 있었으며 민속적으로 의미 있는 방향이다. 그래서 질병이나 액을 쫓기 위해서는 동쪽이 채택되었다. 머리를 오래 감지 않으면 기름기가 생겨 냄새가 나고, 이가 생기며 불결해지기 때문에 자주 감아야 했으나, 겨울 동안 여의치 못하였으므로 단옷날이면 개울물로 머리를 감을 수 있는 계절이기에 동류(東流)에 가서 머리 감는 관습이 생겼던 것이다.
단옷날 머리뿐 아니라 개울에 가서 여인들이 목욕하는 것을 ‘물맞이’라고 했다. 옛날에는 목욕탕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늦가을에서 봄까지 목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단옷날까지 참았다가 단옷날이면 정기적으로 목욕을 했다. 한국의 여인들은 오랜 관습으로 알몸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벌거벗고 목욕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단옷날 물맞이는 여성들끼리만 모여 하는 것이니 자유롭게 물맞이를 할 수가 있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호수나 계곡에 모여 물맞이를 하면 심신이 상쾌하고 위생에도 좋았으며, 사기(邪氣)를 떨치고 건강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속담에 “물 맞고, 서방 맞고, 매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물맞이 하다가 못된 서방을 맞게 되고,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매 맞는다는 뜻이니 어쩌다 그러한 불상사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에 북에서 남으로 이동해 왔다. 단오 명절은 북방족의 큰 명절이었다. 북방의 유목 민족은 원래 물이 귀한 초원에서 살았기에 물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물을 함부로 쓰지 않았다. 물이 귀하니까 목욕할 생각은 엄두에도 두지 못하고 단오 명절을 맞이해서야 물로 목욕하고 머리 감는 의식을 정기적으로 가졌으며 채소에 내린 이슬을 받아 세수하고 벽사하는 풍속이 생겼을 것이다.
음력으로 6월 15일을 ‘유두’라고 한다. 유두란 동류두목욕(東流頭沐浴)이란 말에서 나온 말로 즉 ‘동쪽 개울에 가서 머리를 감는다’는 뜻이다. 동쪽은 우리 한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동쪽에서 해가 솟으므로 동은 소생이요, 부흥이요, 새로운 생산을 뜻하는 방위이다. 그래서 동쪽을 숭상했고, 동쪽을 향해서 빌었다.
동쪽은 좌(左)라 여겨 높은 곳으로 생각했으며, 생명력이 왕성한 곳으로 신앙해 왔다. 복숭아나무(가지)를 가지고 악귀를 쫓는 무의식(巫儀式)이 있는데 동도지(東桃枝)가 가장 효과 있는 것으로 채택되고, 점치는 기구는 동도지로 만들고 윷점에 쓰는 윷도 동도지로 만들었다.
5월 단옷날에 여인들이 동쪽 개울에서 머리를 감았고, 유두날에도 동류에 가서 머리를 감는 오랜 풍속이 전승되어 있다. 생명력이 왕성하고 양기(陽氣)가 강한 방향이란 생각에서 채택된 것이다.
머리를 감는 것은 우선 청결한 일이지만 액을 떨어낸다는 뜻이 잠재해 있었다. 사막지대에서 유목하는 민족들은 목욕하는 일이 적었다. 물이 없거나 적어서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그 대신 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깨끗한 물을 신비시하는 정화수(淨華水)란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은 첫째는 몸을 정결하게 하는 보건의식도 있지만, 민간신앙에서는 물의 신비성을 이용해서 몸에 묻어있는 모든 재액(災厄)을 씻어낸다는 신앙성도 있었다. 유두날의 목욕은 몸을 씻고 머리를 감아 재액을 떨어낸다는데 더 의의가 있었다. 그래서 여름이 시작되는 단옷날과 더위가 한창인 유두날은 정기적으로 물맞이해서 목욕하고 머리를 감는 명절로 정착되었다.
유두를 전후해서 소서(小暑) 초복(初伏)이 있어 본격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고 사람들은 더위에 시달리면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더위를 먹고 질병을 물리치자면 재액을 쫓을 필요가 있어 목욕하는 주술적 세시풍속이 정착된 것이다.
유두날 동쪽 개울에서 목욕하고 머리를 감은 부녀자들은 긴 머리채의 끝을 잘라 삼밭을 묻으면 머리털이 삼단같이 무성하고 소담해진다고 전한다.
민요에 젊은 여인의 머리숱이 소담하고 많은 것을 삼단에 비유하는 노래가 있다. 삼은 봄에 심어 유두 무렵에 베어 땅에 묻고 불을 때서 익힌 다음 그 껍질을 베껴서 실을 만들어 옷감을 짠다. 이때의 삼단은 크기가 한아름이나 되기 때문에 큰 단이란 뜻에서 삼단이란 말이 나오고, 사람은 나이가 들면 머리가 빠져서 볼품이 없지만 젊었을 때에는 머리숱이 많아서 마치 삼단 같다는 것이고, 또 젊었을 때에는 숱이 많아서 삼단 같아야 건강하고 젊은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 부녀자들은 머리숱이 많고 소담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삼밭에 묻었던 것이다. 유두날 물맞이는 질병 없고 몸이 탈나지 않고 건강해서 좋다고 해서 즐겨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깊은 산 속의 약수터나 개울에 가서 물맞이를 하였다. 유두날 비가 오면 농사가 잘 될 징조로 여기고 농가에서는 유두날 비 내리기를 고대한다.
유두날 오전에는 논밭에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유두날에는 용신(龍神)이 곡식을 여물게 하는 일을 하는데 사람이 드나들면 방해가 된다고 믿고 있다. 오후에는 나가도 되지만 함부로 농사의 수확량을 한정해서 빌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한정하면 그 수량밖에 수확할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유두날에 큰 비가 내리면 용이 하늘로 승천한다는데 검은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 사람이 많이 죽게 되고, 청룡이 하늘로 올라가면 머리 큰 사람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백룡이 하늘로 올라가면 농민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용신은 물과 관계가 있고 물은 농사를 짓는 데에 꼭 필요하다. 물이 넉넉하고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 물을 담당하는 용왕을 잘 위하고 제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유두날에 음식을 장만해서 비가 고루 내리고 풍년이 들기를 용신께 빌었다. 용신제를 지내면 해충이 예방되고 우순풍조(雨順風調)해서 농작물이 잘 자라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유두에 행해지는 민속은 동류에 목욕함으로써 몸을 정결하게 해서 재액을 물리치고 조상께 풋과일을 천신하며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심신정화와 더불어 민간신앙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3. 농경 사회에 깃든 물문화
농경생활에 정착한 우리 민족에게 물은 아주 중요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강, 낙동강, 대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등 물가에 촌락을 이루고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벽골제라는 저수지를 삼국시대부터 축조했던 것을 보면 물을 관리하는데도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은 옛 저수지의 흔적들이 별로 없지만 수천 년 전에도 농사를 짓기 위해 틀림없이 저수지를 비롯한 방죽을 축조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처럼 물은 농사짓는데 요긴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무더운 날 피서를 즐기는데도 이용됐다. 우리말에 ‘무덥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물이 없다’는 뜻이다. 즉 물이 없음으로 덥다는 것인데, 그만큼 물은 더위를 식히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옛사람들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을 이용하였는데, 본디 물은 찬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도 해수욕장에서 피서를 즐긴다. 옛날 사람들도 냇가에서 더위를 식혔다. 여름에는 조석으로 목욕을 해도 땀이 흐르게 되어 물이 절실했다. 냇가에 갈 수 없는 여인들은 우물물을 길어다가 어두운 밤에 뒤뜰에서 목욕을 해서 더위를 식혔다. 적은 양의 물로 시원하게 하는 방법은 탁족(濯足)이었다. 찬물을 대야나 큰 그릇에 담고 여기에 두 발을 넣고 청량하는 방법이다. 발만 담그는 것이니 물은 대야만큼으로도 충분했다.
‘성산계류탁열도(星山溪柳濯熱圖)’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는 1590년 한여름 복날에 서화당 김성원과 평소 가까이서 교류했던 유생들인 김복억, 김부륜, 최경회, 오운, 정암수, 정대휴, 김사로, 김영휘, 임회 등 11명의 선비들이 여름을 보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최근 성산(星山)이 있는 환벽당 계곡에서 발을 담그며 술과 음식으로 몸을 보양하는 옛사람들의 피서방법을 오늘날 재현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지질은 전국 어디를 가도 맑고 찬물이 나오는 약수터가 있다. 깊은 산속일수록 약수터에는 여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피서를 즐기는데, 산이 깊고 높으니 시원할 뿐만 아니라 약수가 차가우니 마시고 목욕하고 탁족하기가 이상적이다.
농경사회에서 음력칠월 보름날은 초미씻기를 하였다. 그 무렵이면 논매기나 밭매기가 끝나 호미 쓸 일이 없어지므로 맑은 물에 호미를 깨끗이 씻어 보관하였다. 이날은 모두가 음식을 장만하여 흥겹게 놀았는데 호미씻기에서 보듯이 호미를 농기구 이상의 존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물이 얼마만큼 소중한지를 알고 있는 우리 조상들은 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이 타면 바짝 긴장을 하였다. 물이 필요한 시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일 년 농사를 망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가 천하의 본이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조상들은 기우제를 통해 하늘에게 기원하곤 하였다. 기우제는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국가적 행사이기도 하고 민간에서도 행했다. 나라에 가뭄이 드는 것은 왕과 대신이 덕이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벌로 여겼다. 가뭄이 심하면 왕은 식음을 전폐하고 거처를 초가로 옮기며, 죄인을 심리하여 무고한 이를 방면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종묘사직과 구월산, 남북교(南北郊), 임해원(臨海院) 등에서 무당이 기우제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사직, 사대문, 동서남북 4교(郊)와 선농단(先農壇), 한강변 등에서 기우제가 행해졌으며, 장기간 가물 때는 12차례에 걸쳐 3품 이상의 관원을 제관으로 파견하였다.
기우제는 산의 상봉에 단을 만들고 봉화를 올리며 희생과 많은 제물을 바치고 무당이 기도하도록 하였다. 1960년대 3년 대가뭄때 전라남도 함평군의 우리 마을에서도 돼지를 잡고 제물을 준비하여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인 두루봉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땔감에 불을 지펴 하늘에 연기가 오르도록 했다. 기도와 연기가 하늘에 닿아 비가 온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도 탈이 되어 입추 때까지 장마가 계속되면 흉년이 되므로 나라에서는 비가 멈추라고 기청제(祈請祭)를 지내기도 하였다.
풍요와 다산, 그리고 생명력을 상징하는 비는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에도 나타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인간세계로 하강할 때 풍백(風伯)과 더불어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온 것은 농사와 함께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나 구름과 함께 비를 다스리는 일 또한 중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의 도읍을 표몰시켜 항복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비는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하는 매개체로 표상된다. 비는 적절할 때에는 풍요와 생명력을 가져다주지만, 넘칠 때에는 파괴의 이면에서 새로운 시작을 부여한다.
우리 민족에게 비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용을 빼놓을 수 없다. 용은 바다와 지상에서 존재하지만 하늘에 오를 수 있고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우제의 다른 형태로서 민간에는 용왕제가 있었다. 수신(水神)의 관념에서 출발된 것으로, 비구름을 자유로이 부른다는 용의 영력이 발휘되기를 촉진하고 간청하는 행위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비를 부르기 위해 부녀자들에게 삿갓을 씌우고 물을 퍼부었다. 여자와 땅, 정액과 비, 남자와 하늘이 서로 대응되는 상징 관계로 해석한 것이다. 즉 땅인 여자는 하늘인 남자가 정액인 비를 뿌리게 하는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의 발로이다.
서양에서 용은 퇴치해야 할 괴물로 등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용은 뭇 동물이 가진 최상의 무기를 갖추고 있으며, 구름과 비를 만들고 바다, 땅, 강과 하늘에서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인식하였다. 작아질 수도 있고 커질 수도 있고, 오르고자하면 구름 위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용은 짙은 안개와 비를 동반하면서 구름에 싸여 움직인다. 바다 또는 연못 등에서 하늘에 오를 때에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안개와 구름의 공간이 형성된다. 용이 승천할 수 있고 조화를 부리기 위해서는 여의주가 있어야 한다.
용은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다.
정초에 지신밟기를 할 때에 우물이나 물독 앞에서 용왕굿을 한다. 용왕을 잘 위해야 우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해서 언제나 물이 가득히 고인다고 여기고 있다. 날씨가 가물어 한발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는데, 용왕제를 지내는 것으로 되어있다. 산 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도 용왕께 비 내리기를 간청하며, 강가에서 지낼 때도 용왕굿을 하는 것이 기우제의 격식이다. 용왕은 바다 뿐 아니라 넓게 물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경민족들에게 있어 용왕은 농사의 풍흉을 좌우하기 때문에 소중한 신으로 숭앙되었다.
해신에는 용왕 외에도 신이 있다. 용왕처럼 선하지 않고 때로는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어 파도를 일게 하여 고기잡이배를 난파케 해서 큰 피해를 주는 성질이 매우 거친 해신도 있다.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공포감을 주는 신도 있다. 일설에는 용왕이 화가 나면 난폭해진다는 주장도 있으나, 용궁에서 바다를 다스리는 용왕과는 어딘가 품격이 다른 신이다. 막연히 해신이라고 하지만 바다귀신이라고 할 때에는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 보다는 재화의 원인이 되어 친근성보다는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신은 물귀신이라는 부류에 속한다.
심청전에서 중국을 왕래하는 사공들이 처녀 심청을 사간 것은 황해의 해신에게 공희(供犧)하기 위해서였다. 즉 해신의 노여움을 사면 파도가 일어 항해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처녀를 바다에 던져 해신에게 제공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무사히 항해 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심청전에서 물은 죽음과 생명성의 의미로 나타난다. 즉 심청이 아버지를 위해 바다에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인간 세계의 생명이 끝나지만 용궁의 왕비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물을 통해 신분상승을 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효성 지극한 효녀가 된다. 이는 충효(忠孝)를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긴 조선시대의 이념을 구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황해의 해신은 남신(男神)이었다. 남신이기에 남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남성이 필요로 하는 처녀를 공희를 했던 것이다.
「처녀공희담(處女供犧譚)」에 개성 덕물산, 나무 금성산의 산신이 남성이어서 산신제때에 마을에서 처녀를 간택해서 산신당에 하룻밤을 재운 일이 있고, 또 대관령 서낭신은 남성신이여서 강릉 여서낭당에 재웠다는 강릉단오제의 유래담이 전하고 있다. 황해의 해신이 여신이었다면 심청이 아니라 어느 집 총각이 팔려갔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심청전이란 고대소설은 한국인의 신관(神觀)을 전제로 해서 그 위에 구축되었음을 알 수 가 있다.
그와 반대로 동해를 담당하는 신은 남신이 아닌 여신으로 되어 있다. 강릉에서 부산에 이르는 동해안에 있는 마을의 신당(神堂)은 거의가 해랑당(海娘堂), 여랑당(女娘堂), 각씨당이라 불리고 있으며 당 안에 걸려 있는 신상(神像)은 한결같이 젊은 처녀로 묘사되어 있다. 중앙에 여신이 위치하고 양쪽에서 시녀 또는 수부(水夫)가 시중들고 호위하고 있는 그림이 많다.
여신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이 있다. 미역을 따러 바다에 나간 처녀가 죽어 해신이 되어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당을 만들고 제사하게 되었다던가, 남자가 고기잡이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바닷가에서 기다리다 죽은 처녀가 저 세상에 가서 혼배하였으므로 신으로 모시고 원혼을 달래게 되었다는 등 여러 주장이 있다.
동해안에는 여신을 위한 다음 바다에 나가면 풍랑을 만나지 않고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할 수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신앙이 있기에 동해안의 어촌에서는 해신으로 여성신을 등장시켰을 것이다.
동해안에서는 여신을 섬기기 때문에 당제의 양식이 색다르게 진행된다. 어부들이 남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서 당에 바친다. 때로는 여러 개를 만들어 고기를 엮듯이 새끼로 엮어 걸어 둔다. 여신이 필요로 하는 것, 즐기는 것을 공물로 바치는 것은 비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또는 바다에 나갈 때에는 여신당에 가거나 멀리서 여신당을 향해서 소변을 보는데 남근을 노출시켜 보이고 출항하는 일도 있으니 그렇게 하면 그 날은 고기를 많이 잡는다고 한다.
동해의 여신은 젊은 여신이고, 여신의 가호가 있으면 해난을 당하지 않고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여신의 환심을 사는 방법이 채택된 것이다. 바다의 신이 여신으로 표현되는 것은 희랍의 신화에도 나오고 또 인도양의 여러 도서민족과 중국의 마조신, 일본의 와다쓰가미도 있어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여신은 거친 바다를 담당하고 있으며 변덕이 심한 바다에 나타나는데 집념이 강하고 때로 잔인해서 무서운 재난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바다와 관계되는 여신으로 배서낭이 있다. 원양선이나 큰 배에는 서낭이 모셔져 있는데 배서낭이라 부른다. 배서낭의 상징으로 여인복, 치마저고리와 활장도구, 장신구 등을 놓아두는데, 여성기구란 점에서 배서낭은 여성임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이 바다와 여성과는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해신에는 많은 경우에 여신으로 나타남을 알 수가 있다.
4. 풍수에 깃든 물 사상
풍수(風水)는 산세와 물 흐르는 모양을 보아 하늘과 땅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 집이나 묘자리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짓거나 묘자리를 정할 때 풍수쟁이를 불러다가 터를 잡았던 것이다. 이는 터에 인간의 길흉이나 화복이 걸려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천지의 기운이 토지에 응결되어 있는데 이것을 잘 이용해야 부귀와 복록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집이나 묘를 잘못 쓸 경우 후손들이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간혹 이장을 하기 위해 파묘를 하다보면 유골이 습기에 젖어 까맣게 썩거나 아예 무덤 속이 물로 가득차서 유골이 물속에 잠겨있는 경우가 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본 후손들은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이럴 경우 후손들의 사업이나 학업이 잘 되지 않은 것은 조상을 잘 모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예부터 동양사람들은 자연을 사람의 생김새에 비유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기운이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기록한 것이 『주역』인데, 주역의 64괘 중에 바람과 물이 어우러진 괘가 대과(大過)이다. 이를 보고 바람과 물이 인간의 문제에 깊이 결부된다고 생각했다.
중국 후한 때의 사람 곽박은 “죽는 것은 생기(生氣, 영혼같이 보이지 않는 생명)를 탄 것이다. 생기가 바람에 타면 흩어지고 생기가 물로 경계를 하면 머문다. 엣사람은 바람을 모아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하고 물을 가게하여 생기를 머물게 하였다”고 했다. 여기에서 풍수가 나온 것이다. 그는 또 “풍수의 법은 산 속에서 돌아나오는 물을 얻는 것(得水)이 가장 좋고 바람을 흩어지지 않게 잘 간직하는 것(藏風)이 다음이다”라고 했다. 풍수의 기본이 ‘장풍득수(藏風得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풍수에서 물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깨우치고 있다.
바람은 영혼을 흩어지게 하므로 바람을 막아야 하는데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물이라는 뜻이다.
풍수설에서 모든 토지를 24방위로 나누어 그 위치를 정했는데 이 24방위는 중앙의 토(土)를 뺀 나머지에 여섯무더기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그 방위에 따라 금국(金局), 수국(水局), 화국(火局)으로 나누어진다는 오행설이 결부되었다. 그리하여 산을 24방위 또는 네 덩어리로 나누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기(山氣)와 수기(水氣)를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음양이 맞고 오행이 어울려야 원기가 융화되고 변화가 생겨 길과 복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때 집터나 묘자리가 등을 진 바우이에서 앞으로 향한 위치를 좌향(坐向)이라 하고, 왼쪽의 줄기를 좌청룡, 오른쪽의 줄기를 우백호라 하였다. 이른바 좌청룡 우백호가 명당의 대명사인 것처럼 부르게 된 것이다. 용과 호랑이를 귀물로 여긴 까닭에 ‘용’과 ‘호랑이’를 내세워 최고의 터를 상징하였다.
이러한 풍수는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유행되었다. 도선국사가 중국에서 풍수를 배워와 우리나라에 전파했는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불교 국가인 고려를 영원히 떠받기 위해 지덕(地德)을 이용하려 들었는데 왕건의 아버지와 도선국사가 전국의 명당에 절 지을 곳을 지정하였다. 이른바 비보사찰이다. 고려의 보호를 빌기 위해, 때로는 왕기(王氣)가 있는 땅을 위해 절을 짓기도 하였다.
전남 화순의 운주사는 풍수설을 적용해 지은 대표적인 사찰이다. 이 사찰이 국가에서 지은 비보사찰이 아닌 까닭에 당시 고려사회에서 민간에까지 풍수설을 잘 응용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운주사를 지은 사람들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들은 우리나라를 하나의 배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물 위에 떠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사방이 바다, 다시말해 물의 세계라는 것이 전제된다. 물 위에 떠있는 배의 왼쪽에 산지가 많아 동쪽으로 기울어진 형국이어서 균형을 이루기 위해 서쪽인 전라도 화순땅에 천불천탑을 세운 것이다.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한 까닭에 미신과 같은 괴이한 신앙을 부정했다. 그러므로 마땅히 풍수설을 배척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풍수설을 믿었다. 이는 자연을 하나의 물질로 파악한 서양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에서는 자연을 물질로 인식했지만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한 우리 민족의 자연관에 따랐기 때문이다. 산의 생김새를 인체에 비유하고 강과 내를 생명의 끈으로 인식하였는데, 가령, 마을 뒤에 담장처럼 둘러쳐진 산의 지세를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듯한 것(포란형)으로 생각하여 그런 곳에 마으터를 잡으며 마을이 오래 평안할 수 있고 후손들이 번성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마을 앞으로 강이나 내가 흘러가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마을터가 되었다.
전남 화순 동복에 가수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앞에는 솟대 두 개가 높이 세워져 있다. 이 솟대 끝에 기러기 한쌍이 날고 있다. 그런데 오리들이 잘게 오린 댓가지를 입에 물고 있다. 이 마을에 솟대가 등장한 연유가 있다. 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앞산의 능선이 날카롭게 칼날져서 불꽃모양을 보이고 있다. 그 기운 때문인지 마을에 자주 불이 났다고 한다. 한때는 마을이 모두 타다시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2월 초하루가 되면 솟대를 세워서 마을의 안전과 안녕을 빌었다.
이러한 예는 참으로 많다.
함평군 손불면 수문리는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불맥이 행사를 치른다. 마을 앞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데 이날 항아리에 마을의 우물에서 맑고 깨끗한 물을 떠다가 채우고 한바탕 농악놀이를 한다. 그리고 장만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이 의식은 지금도 열리고 있다. 전남 화순의 오리 솟대처럼 마을의 화재 예방과 가뭄이 없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의식이다.
솟대 위에 앉은 오리는 물새이므로 농사에 필요한 물을 가져다주고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는 것은 물로 화마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솟대 끝에 매달린 오리들은 언제나 머리가 마을 밖을 향해 날아가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수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동복호의 물을 길으러 날아가는 소방수 역할을 하기 위해서이다.
물과 관련한 풍수설에 의해 지어진 누정도 많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 모평마을에 있는 청계정(聽溪亭)은 마루가 있는 누정이다. 그런데 누정의 마루 아래에 물이 흐른다. 인근의 내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여름철 물의 찬기운을 통해 무더위를 식히기도 하겠지만, 물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 좋은 생각을 지닐 수 있게 한 것이다. 풍수가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인성까지도 변화시킨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묘를 쓸 때 찾는 명당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는 물이 너무 가까이 흐르면 안 되었다. 물의 기운과 습한 지기가 시신에 전해지면 후손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명당은 좋은 지기를 받아 자손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풍수를 아는 사람들은 지남철을 들고 좋은 묘자리를 찾아다녔다. 아무리 산이 높아도 좋은 곳이라고 여겨지면 가리지 않고 그곳에 묘를 마련하였다. 그러다보니 남의 땅에 몰래 묘를 쓰기도 하고, 남의 무덤 뒷자리에 봉분없이 시신을 매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남의 무덤을 파내고 조상의 묘를 강제로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사람이 전국을 뒤져 명당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밤중에 몰래 남의 산에 묘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명당을 찾아 그곳에 쇠말뚝을 박기도 하였다. 임진왜란때 중국의 이여송은 우리나라 산맥을 곳곳에서 끊어 인재를 못 나게 했다고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산마루나 좋은 터에 쇠말뚝을 박았다. 그래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수백개의 쇠말뚝을 뽑기도 하였다.
풍수설은 자연을 이용하고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터를 잡을 때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골라 바람을 막고 햇볕드는 양지를 골랐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남향집을 최적으로 삼고 산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마을 앞의 개울물을 이용하여 식수와 농업용으로 이용하고 그곳에서 멱도 감았던 것이다.
5. 설화 속에 깃든 물의 양상
설화는 민족적 집단의 공동체 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문자기술 이전의 구전문학이다. 설화에는 민족의 공동의식이 깃들어있다. 그러므로 민족의 역사, 신앙, 관습, 세계관, 해학 등을 통해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와 용기, 교훈이 형상화되어 있다. 설화에는 사실을 가장한 이야기가 많지만 그러나 사실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이다.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신화가 건국신화나 영웅신화가 주류인 것처럼 민족적인 범위에서 전승된다. 이에 반해 전설은 지역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 많고 특정 장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에반해 민담은 민간에 전승되는 이야기로, 특정의 장소, 시대, 인물이 지적되지 않고 흥미 본위의 꾸며낸 이야기이다.
설화는 어떤 형태로든 민족의 세계관과 삶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민속이 배어있다. 특히 설화에는 물과 관련된 상상력이 엿보이는 작품이 많다. 이는 우리 민족이 농경민족인 까닭이며,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인간세계로 하강할 때 풍백(風伯), 운사(雲師)와 함께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왔다. 우리나라 설화에서 가장 먼저 물(비)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비를 다스리는 직책을 맡은 자를 데리고 온 것은 농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바람이나 구름과 함께 비를 다스리는 또한 중요하다는 인식이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부여와 고구려 신화에서는 땅 밑의 길(동굴), 물속의 길 등을 추출할 수 있다. 모두 피안이나 신의 세계와의 내왕이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다. 고려의 건국신화에서는 바다의 용궁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우물을 상징화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신화에서는 하늘로 오르는 길인 구름(물)과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비를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고 소통한다는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천신(天神)의 자손임을 내세운다. 더불어 우물을 더 큰물인 바다로 통하는 길로 의미화한 것으로 보아 하늘과 지상, 그리고 바다로 소통하는 길을 잇는 것이 물임을 알 수가 있다.
민족범위에서 전승되는 신화는 당연히 그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나 영웅의 출현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전설은 민간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기에 지역에 알맞은 이야기가 많이 전승된다.
전설과 민담의 차이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시간, 장소가 드러나는 것이 전설이며, 시간과 장소와 상관없이 흥미 본위로 꾸며진 이야기가 민담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전설과 민담의 내용이 서로 유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구전되던 이야기들이 특정한 지역의 자연물에 이야기의 옷을 입히면 전설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민담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물과 관련된 설화는 우물, 강과 내, 연못, 바다 등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승된다.
그 중에서 바다와 연못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다. 「심청전」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져 죽은 심청이라는 효녀의 이야기로 일종의 인신공희(人身供犧) 모티브를 한 설화이다. 여기에서 인당수는 파도가 거친 바다의 상징으로 나타나는데 뱃사람들이 바다를 지나가기 힘들어 제물을 바쳐야 해신(海神)이 바다를 잠재워준다고 믿었다.
심청전 설화에서 바다는 죽음과 환생의 의미를 지닌다. 즉 심청이 인당수에 제물로 바쳐져 죽지만 용궁의 왕후가 되어 다시 인간세계로 살아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에서 세례의식이 갖는 의미와 유사하다. 즉 죄를 용서받기 위해 죄인된 자의 몸을 물 속에 넣어 죽이지만, 죄를 사하고 다시 정화된 몸과 마음으로 태어나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세례는 죽음을 통한 새로운 탄생과 정화라는 과정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물인 셈이다.
바다는 해신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해신은 용왕인데 용왕과 관련된 설화는 꼭 바다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이 있는 곳이면 바다와 강과 연못, 그리고 우물에도 용왕이 거처한다고 믿어왔다.
강원도 속초에 있는 비룡 폭포에 전해오는 설화는 비룡폭포 못에 사는 용의 조화로 인근지역에 3년간 가뭄이 계속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아랫마을 사람들이 처녀를 제물로 바치고 기우제를 지냈다. 용이 처녀제물을 받아 가지고 폭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내렸다. 그 폭포는 용이 올라간 폭포라 하여 비룡폭포라고 한다.
비룡폭포 설화에서도 처녀가 용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데, 이 전설에서 폭포(물)는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길로 나타난다. 폭포는 높은 절벽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길이다. 지상과 천상에 걸쳐있는 것이 폭포라는 인식 때문에 폭포가 승천의 통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용이 승천할 때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내려옴으로써 용은 승천할 수 있고 지상엔 비가 내려 가뭄을 해소시킬 수 있었으니 이는 모두가 제물로 바쳐진 처녀의 인신공희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녀의 희생이 용에게 하늘에 오를 기운을 주고 폭포를 길 삼아 승천할 수 있는 것이다.
처녀가 제물로 바쳐져 인간세계의 갈등이나 문제가 해소되는 설화는 우리나라 각처에서 전승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김제의 벽골제 저수지에서도 인신공희 테마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원성왕 때 태수 유풍이 왕명으로 기술자인 원덕랑과 함께 벽골제 보수공사를 하는데 자꾸 무너졌다. 마을사람들은 용추(龍湫)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둑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덕랑의 약혼녀 월래를 제물로 삼으려하자 원덕랑을 좋아하는 단야는 월래 대신 자기가 죽기로 결심하고 월래의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용추에 제물로 바쳐진다.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이지만 탐욕스러운 부정(父情)은 불행을 초래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희생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물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원이어서 그것을 지키고 얻으려는 옛 사람들의 염원이 깃들어있다.
연못의 공간성을 지닌 설화 중 널리 잘 알려진 것으로는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있다.
어떤 총각이 나무하러 가서 나무를 하다가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다. 한 노인이 연못 속에서 금도끼, 은도끼를 가지고 나와서, “이것이 네 것이냐?”하고 물었다. 총각은 모두 아니라고 하였다. 노인은 다시 연못 속으로 들어가 쇠도끼를 가지고 나와서, “이거 네 것이냐?”하고 물었다. 총각은 그렇다고 하였다. 이렇듯 정직한 총각은 후에 복을 받아 잘 살았다. 그러나 욕심을 부렸던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았다.
이 설화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복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탐욕스러운 사람들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는 교훈성을 지니고 있는 이 설화 속의 연못은 신이하고 초월적인 공간으로 나타난다. 연못 속에서 신통력을 지닌 존재인 노인이 등장하는 것과 금도끼, 은도끼가 감춰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못은 정직한 사람과 탐욕스러운 사람을 판별하거나 신판하는 장소성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연못을 설화의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먼저 떠오르는 것은 효도를 권장하는 유교적 이념이 투사된 이야기가 많다.
어떤 사람이 부모님이 병으로 눕게 되었는데 백방으로 돌아다니며 처방을 해도 병이 낫지 않자 마지막 처방인 잉어를 푹 고아주는 것으로 부모님의 병을 고치려 한다. 그러나 때가 겨울인지라 연못이 얼어 잉어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효자가 연못에 가 도끼로 얼음을 내려치자 꽁꽁 언 얼음 속에서 잉어가 튀어올라 부모님의 병을 낫게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연못이라는 공간은 생명성을 부여하고 효(孝)를 실현하게 하는 장소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내용의 설화는 설화 뿐만 아니라 『부모은중경』이라는 책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유교를 실천덕목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문자로 기록되어 교육적 목적으로 읽히기도 하였다.
강(江)과 내[川]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설화도 많이 전승되고 있다. 주로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지역마다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다.
옛날 어떤 여자가 팥밭을 매는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잡아먹으려 하였다. 여자는 팥농사를 지어서 동짓날 팥죽을 쑤어놓을 터이니, 그날 와서 잡아먹으라고 하여 위기를 넘겼다.
동짓날이 되자, 여자는 팥죽을 쑤어놓고 울고 있었다. 그 때 멍석, 자라, 달걀, 개똥, 송곳, 지게가 와서 왜 우느냐고 물어 사정을 알고는, 도와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 여자를 잡아먹으러 온 호랑이를 잡아 강물에 던졌다.
위의 이야기에서 강은 여자를 잡아먹으려 하는 호랑이를 처치하는 해결의 공간이다. 강은 정화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악(惡)을 제거하는 하나의 기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 이야기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
천석이는 집을 나와 길을 가다가 큰 바위를 공 굴리듯 하는 ‘돌선이’를 만나 의형제를 맺었다. 두 사람이 또 길을 가다가 숨쉴 때마다 고목나무를 이쪽 저쪽으로 쏠리게 하는 ‘고목선이’, 맨손으로 큰 나무를 베어 장작 만들기를 잘하는 ‘장작선이’, 쟁기질을 잘하는 ‘쟁기선이’, 똑딱하는 사이에 똑딱선(작은 배)을 만들어내는 ‘똑딱선이’와 의형제를 맺었다.
6형제가 산골짜기에서 하루 쉬어가려고 한 오두막집에 가니, 호랑이 여섯 마리가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다. 호랑이는 이들을 잡아먹으려고 장작쌓기 내기를 하자고 했다. 6형제가 힘을 합하여 호랑이가 던져주는 장작을 높이 쌓아놓으니, 호랑이들은 장작더미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치솟아 위험하게 되었을 때, ‘똑딱선이’가 똑딱 하는 사이에 배를 만들고, 주머니에 담아 온 물을 뿌리자 사방이 모두 강이 되었다. 그래서 호랑이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들은 그 배를 타고 나와서 힘을 합하여 잘 살았다.
사람 여섯과 호랑이 여섯을 등장시킨 이 이야기는 구성이 매우 탄탄하다. 사람과 호랑이가 싸우면 당연히 사람이 호랑이를 이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이 호랑이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천석이가 ‘돌선이’, ‘고목선이’, ‘장작선이’, ‘쟁기선이’, ‘똑딱선이’가 의형제를 맺어 하나가 되어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혜가 호랑이라는 짐승의 힘을 퇴치할 수 있다는 예를 보여주고 악을 제거한다는 무용담을 보여준다.
이 설화에서도 악을 퇴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강을 선택하고 있다. 강은 사람도 그렇지만 짐승들이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샘’이나 ‘우물’을 소재로 한 설화도 흔하다. 효를 권장하거나 권선징악과 비극적인 정서를 담아낸 경우가 많다.
옛날에 어느 용한 지관이 죽으면서 자기의 시신을 동네 사람들 몰래 대동샘에 넣으라고 하였다. 아들들이 유언대로 하고, 무덤에는 빈 관을 묻었다. 어머니는 죽은 남편과 아들들이 자기에게 숨기려 한 것을 고깝게 생각하여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마을 사람들이 우물물을 품어내고 보니, 즉은 지관은 큰 암소가 되어 막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그 후로 집안은 망하고 말았다.
이 설화는 죽어서라도 집안을 일으키려는 지관의 유언을 듣지 않고 유언을 거스른 지관의 아내를 꾸짖는 내용이다. 주지하다시피 암소는 생명과 생산성의 은유이다. 그런데 지관 아내의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 집안이 망하고 만다. 여기에서 우물은 생명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간으로도 나타난다.
옛날 어느 집에 5대가 함께 살았는데, 나이 많은 노인들이 모두 번데기가 되어 물만 먹고 살았다. 6대 손부(孫婦)가 들어와 그 내력을 알아보니, 집 안에 있는 몇 십 년 묵은 구기자 나무 밑의 샘물을 먹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손부는 번데기로 있는 조상에게 그 샘물이 아닌 다른 물을 먹여 차례로 돌아가시게 하고, 그 샘은 메워버렸다.
사람은 4대가 함께 살 수 있어도 6대가 같은 시대에 살 수가 없다. 그런데 6대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나이가 많은 윗대 어른들이 번데기로 살아가는 일은 집안의 흉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6대 손부가 들어와 어른들을 번데기로 만든 구기자 밑 샘물 대신 다른 샘물을 먹여 모두 세상을 떠나게 하고 그 샘을 메워버린 것은 잘한 일이다.
이 설화에서 샘물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흥미롭다. 이 설화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지만, 젊어지는 샘물 설화는 샘물의 특이성을 보여준다. 즉 어떤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는 것을 안 노인 한 사람이 젊어지고 싶어서 젊어지는 샘물을 욕심껏 먹어 아예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는 내용이다. 탐욕스러움을 경계하기 위해 꾸며진 이 이야기에서 샘물은 생명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탐욕을 징벌하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