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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육정보 스크랩 스크랩 통일신라시대에서 남북국시대로
머찌 추천 0 조회 82 09.01.04 07: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통일신라시대에서 남북국시대로


송기호


남북국시대가 국사교과서에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어떤 시대가 존재했을까? ‘통일신라시대’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북국시대’로 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고 다시 물으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라는 응답이 제일 많을 것이다. 그 다음은 좀더 주관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되겠다.

 

통일신라시대라고 답한 사람은 발해가 우리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라거나, 이 시기의 역사 주체는 통일신라였고 발해는 부수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세울 것이다. 반면에 남북국시대라고 답한 사람은 발해도 엄연히 우리 역사이니 통일신라와 발해를 아우르는 용어가 마땅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할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전반까지 국사 교과서는 발해를 한국사라고 하면서도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로 설명해왔다. 시대구분 용어는 그 당시의 역사 범주를 나타낸다. 삼국시대는 삼국이, 고려시대는 고려가 우리 역사의 범위가 되듯이, 통일신라시대라 하면 통일신라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발해는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당시만 해도 통일신라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발해는 간단히 부록처럼 처리되고 말았다. 우리 역사라고 하면서 애정을 쏟지 않았고 연구도 거의 없었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사 교과서에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새롭게 실렸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이 무렵에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북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가 북방정책을 표방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으면서 냉전의 벽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교과서에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이때 필자가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교과서 편찬에 관여하던 변태섭 교수님께 건의를 했다. 현대사뿐 아니라 이참에 발해에 대한 잘못된 기록도 바꾸어야 한다고 제의했다. “발해와 신라가 200여 년간 대립적이었다”라고 하는데 오히려 두 나라 사이에 교류의 증거들이 많으니 이를 삭제하고 교류의 자료로 대체해야 한다고 했고, 발해가 우리 역사라면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써야 한다고 했다. 마침 이 제안은 대립보다는 교류를 지향하는 역사 서술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으므로, 오늘날까지 교과서에 이어지게 되었다.



발해는 한국사인가


남북국시대라는 용어가 타당성을 가지려면 발해가 한국사인지 확인되어야 한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을 수행하면서 발해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만들고 있고, 고구려 유적에 이어 2008년에는 중국의 발해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려 준비하고 있다. 또 이때를 대비하여 중요한 발해 유적들을 발굴하고 있다. 2004년과 2005년에 각각 왕비의 묘지명이 하나씩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등록 신청 때 공개하려는지 지금까지 아무런 발표도 없다. 이렇게 중국의 수중에 들어 있는 발해를 우리 곁으로 끌어올 수 있는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발해는 건국자와 주민 구성에서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즉, 고구려인의 국가라는 측면과 말갈인의 국가라는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조영(大祚榮)은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 출신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장수를 역임한 인물이다. 발해 사회도 고구려인과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니 중국과 러시아에서 말갈 국가로 보고 있는 것도 일면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발해국은 건국된 뒤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다. 발해 무왕(武王)은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대무예(大武藝, 무왕의 이름)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고, 강왕(康王)은 798년 역시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천황의 풍모를 향한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고, 부지런히 교화를 사모하는 태도는 고구려의 발자취를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발해가 멸망한 뒤에 세워진 유민국가인 정안국(定安國)이 981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정안국왕 신 오현명(烏玄明)이 아룁니다. (중략) 신은 본래 고구려 옛 땅에서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라고 했다.

 

이를 보면 발해인들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말갈을 계승하겠다는 생각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배경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 씨들이 있다. 성명이 알려진 380명의 발해인 가운데 대 씨가 117명이고, 고 씨가 63명, 장 씨가 20명, 양 씨가 8명, 하 씨가 4명, 오 씨가 13명, 이 씨가 21명을 차지한다. 대조영 집안이 말갈인인지 고구려인인지 논란이 있는 것을 감안해서 제외한다 해도, 16.6%를 차지하는 고 씨가 그 다음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고 씨는 대 씨를 제외한 상층 귀족 성씨 가운데 거의 절반이다.

 

이처럼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가라 한다면 분명 한국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전적으로 한국사에 속하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말갈족 또는 피지배층의 역사로부터 발해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국시대의 근거


남북국시대란 남쪽의 통일신라와 북쪽의 발해를 염두에 둔 말이다. 혹자는 한국사의 구성에서 두 나라의 비중이 다르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서서히 떨어져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멸망 후에 일부만 한반도로 들어왔을 뿐 대부분은 요()나라 사람이나 변방의 여진족으로 변해버렸다. 반면에 통일신라는 고려의 핵심을 이루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범주의 문제’이다. 7∼10세기의 한국사가 어디까지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남북국시대는 중국의 남북조시대(420∼589)를 연상시킨다. 이는 남방의 한족(漢族) 국가들과 북방의 이민족 국가들이 병립하던 시대였다. 중국에서는 이처럼 선비족 등 이민족이 세운 국가들마저 자기네 역사로 끌어안았다. 남조와 북조가 50 대 50의 역사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발해는 당연히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할 나라이다.

 

그러면 두 나라가 존재했던 시기이니 ‘통일’이란 말을 쓸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 있다. 그러기에 북한에서는 민족 최초의 통일은 삼국통일이 아니라 후삼국통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려의 통일도 후삼국의 통합에 불과했을 뿐 발해까지 아울렀던 것은 아니다. 고려 통일도 신라 통일처럼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발해는 삼국통일이 일단락된 뒤에 북방에서 새로 일어난 왕조이다. 이는 삼국통일이 대동강 이남의 부분적인 통일에 그친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를 통일신라로 부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면 다시 질문할 것이다. 하필 ‘남북국시대’란 말인가? 사실 과거에는 남북조시대로 부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국이란 말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최치원이 일찍이 발해를 북국이라 불렀고, 『삼국사기』에도 이 단어가 나타난다. 따라서 신라인은 발해를 북국이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발해인이 신라를 남국이라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이를 근거로 삼아 남북국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김정호(金正浩)도 ‘남북국 200여 년’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 의식이 근대에도 계승되어 일부 한국사 책에 남북국시대 또는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채택되었다. 1975년에는 한국학 연구가 이우성 선생이 남북국시대론을 재차 제기하여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렸고, 1980년대에 들어서 『한국문학통사 1』(조동일, 1982), 『한국사통론』(변태섭, 1986) 등의 개설서에서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교과서에까지 실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남북국’이란 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연표에 남북국시대를 넣다 보니 정확한 연대를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먼저 다른 시대를 보자. 고려시대는 918년에서 1392년까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데, 그러면 삼국시대는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 연대(신라: 서기전 57, 고구려: 서기전 37, 백제: 서기전 18)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라고 애매하게 설명되어 있다.

 

삼국의 시작을 첫 국가가 등장하는 B.C. 57년으로 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삼국의 마지막 국가가 등장하는 B.C. 18년으로 잡아야 하는지 합의된 것이 없다. 물론 문제가 있는 이 연대를 일단 인정한다고 가정할 때이다. 또 삼국의 종말을 백제가 멸망한 660년이나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으로 잡아야 하는지, 아니면 삼국통일이 완수된 676년으로 잡아야 하는지도 애매하다. 이는 아직 우리 학계에서 시대구분의 연대 설정에 대한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북국시대의 시간적 범위에 대해서도 당연히 합의가 되지 않은 상태이다. 발해를 기준으로 한다면 건국한 해인 698년부터 멸망한 해인 926년 사이가 된다. 그러나 한국사 전체에서 보면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시대구분의 연표에 빈 시기나 겹치는 시기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676년부터 고려시대의 시작인 918년까지로 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이 생각을 버리면 그 종말 시기로 918년뿐 아니라 발해의 멸망인 926년, 신라의 멸망으로 통일이 마무리된 935년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도 있다. 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현재 삼국시대의 범위를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676년까지, 남북국시대의 범위를 676년부터 935년까지로 잡아놓았다.

 

시대구분은 역사의 흐름을 큰 단위로 나누어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몇 년 정도의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종말과 남북국시대의 시작을 일치시키고, 남북국시대의 종말과 고려시대의 시작을 일치시켜도 무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676년에서 918년까지로 잡아도 문제가 없을 듯하다. 삼국통일의 완수를 676년으로 잡는다면 그 원칙에 따라 935년으로 하한을 잡을 수도 있다. 앞으로 학계에서 시대구분의 기준과 연대 설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 교육이란 측면에서도 편의상 통일된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도 남북조시대(1336∼1392)가 있었다. 아울러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아마 후세에는 남북분단시대, 남북한시대 등으로 불릴 것이다. 비록 1천여 년 전의 남북국시대와 지금 우리 시대를 직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남북국시대의 역사를 통해 통일을 향한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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