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과천(果川)의 산(山)
○ 1) 관악산
○ 2) 청계산
○ 3) 우면산
○ 4) 삼성산
○ 5) 응봉
○ 6) 망경대
○ 7) 옥녀봉
▣ 1) 관악산(冠岳山)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군(安城郡)의 칠장산(七長山)에서 달기봉[鷄峰山]·광교산(光敎山) 등을 거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 한강(漢江)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 힘을 다해 불꽃처럼 솟아오른 산이 관악산(冠岳山)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 관악구(冠岳區)와 안양시(安養市)·과천시(果川市)에 속해 있는 산으로, 높이 629.1m이다.
옛날부터 개성의 송악산(松岳山)·가평 화악산(華岳山)·파주 감악산(紺岳山)·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로, 빼어난 수 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울려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철을 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金剛山)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이라 하며 많은 암자들이 있다.
현재 서울 관악구로 들어간 북쪽 골짜기에는 서울 대학교(大學校)가 있고, 과천 쪽인 남서쪽 기슭에는 정부제2종합청사가 자리해 있다. 이 산과 그 남동쪽 청계산(淸溪山) 사이에 과천시(果川市)의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서울 경복궁의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內案山은 서울 南山),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해서 이 산이 바라보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어 그 불을 누른다는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파고 구리로 만든 용(龍)을 넣어서 불의 기운을 누르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옆 양쪽에 불을 먹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산꼭대기에 파 놓았다는 못의 흔적은 그 곳에 만들어 놓은 군사시설물로 인해 찾아 볼 수가 없다.
높이로 보아서는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강 유역 낮은 평지 위에 얹혀 있고, 또 주위에 큰 산들이 많지 않아 유달리 그 덩치가 커 보인다.
이 산은 옛부터 용마산(龍馬山: 서울과 구리시 사이)·삼각산(三角山)·덕양산(德陽山: 고양시 행주산성)과 함께 한양(漢陽: 서울) 외사산(外四山)의 하나로,【주】36) 서울로 보아서는 남쪽 바깥 울타리격의 산이었다.
이 산이 화산이란 점을 의식했던 조선 이태조(李太祖)도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無學)의 말을 따라 이 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서울의 남대문(南大門)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光化門)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게 해서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이나, 남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 달게 한 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항시 막는다는 풍수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관악산의 한 봉우리인 호압산(虎壓山)【주】37) 능선에는 통일신라 때 판 것으로 추측되는 산상(山上) 우물(한우물)도 있는데, 이것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근처 호압사(虎壓寺)라는 작은 암자 뒤 비탈에는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뛰어갈 듯한 모습의 범바위[虎岩]가 있는데, 이 호랑이(바위)가 날뛰지 못하게 억압하려 그 북쪽에 그를 위협하는 활에 해당하는 궁교(弓橋)와 사자에 해당하는 사자암(獅子庵)을 지어 두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호랑이)가 날뛰면 금천현(衿川縣)의 지세가 쇠퇴하고, 금천현이 쇠퇴하면 결국 한양까지 재앙을 불러온다는 풍수설에 따라 조선 태조가 그런 장치를 했다고 한다.
관악산은 또 고려의 강감찬(姜邯贊)과 관련한 전설도 많이 지니고 있다.【주】38)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 대신 이 산의 칡을 뿌리째 모두 뽑아 없앴다는 전설도 있고, 작은 체구인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면 그런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었다는 전설도 있다. 전설을 뒷받침해 주듯 관악산에선 칡넝쿨을 별로 볼 수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 발자국같은 타원형 자국들이 보인다.
관악산은 그 바위가 다른 산의 바위들에 비해 잘 미끄러지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고 옛부터 사람들이 믿어 왔다. 그래서 그런지 산 곳곳에 그렇게 험한 바윗길이 많은데도 눈 덮인 겨울에도 조난 사고나 추락사 같은 사고 등이 별로 없었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冠)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옛 지도에는 ‘관악(冠岳)’으로 많이 나온다. ‘악(岳)’ 자체가 ‘산(山)’을 뜻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그 뒤에 다시 ‘산(山)’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운악(雲岳)·북악(北岳)·치악(雉岳) 등이 모두 그와 같은 예들이다.
관악산은 청계산(淸溪山)·삼성산(三聖山)과 함께 금지산맥(衿之山脈)을 이루는데, 이 산맥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험준한 산세에 깊은 골짜기들을 간직한 관악산은 기암괴석이 갖가지 모습으로 곳곳에 박혀 있어 찾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골짜기와 등성이에 15개가 넘는 절·암자가 있음은 이 산이 잘 알려진 명산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 2) 청계산(淸溪山)
관악산(冠岳山)이 남성적이라면 청계산(淸溪山)은 여성적이다.【주】39)
과천시의 시가지를 사이에 두고 정답게 양쪽에 자리한 이 두 산은 가운데 양재천 물줄기를 품에 안고 과천 땅의 큰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과천시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5㎞, 안양에서 북동쪽으로 12㎞ 떨어진 지점에 있는 청계산(淸溪山)은 그 큰 덩치를 남북으로 길게 깔면서 북쪽으로는 서울특별시, 서쪽으로 과천시와 의왕시(儀旺市), 동쪽으로는 성남시(城南市)에 접해 있다.
주봉인 망경대(望京臺: 618.2m)에서 남으로 뻗은 능선은 이 산의 제2봉인 국사봉(國思峰, 또는 國恩峰, 538m)을 일으키고 의왕시 학현(鶴峴)을 넘어 마지막 여력을 모아 백운산(白雲山, 560m)·광교산(光敎山, 582m)을 일으켰다가 기세를 낮추어 수원시(水原市)에 이른다. 망경대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뻗은 작은 줄기는 절고개[寺峴]를 지나 응봉(鷹峰)을 일으켰다가 계속 그 줄기를 이어나가 남쪽에서 관악산의 지맥과 손을 잡아 갈고개[葛峴]를 이루어 양재천과 학의천(鶴儀川) 두 물줄기의 분수령을 만들었다.
옛부터 유명한 수원·안양·과천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한양길’을 서쪽에 두어 서울의 남쪽 숨통을 터 주었던 청계산은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원히 치닫는 경부고속도로를 산 동쪽에 끼고 있다.
관악산에서 남동쪽으로 빤히 보이는 이 산은 망경대와 국사봉이 형제처럼 다정히 서 있고, 망경대 북쪽으로 뻗은 줄기에는 또 하나의 봉우리인 옥녀봉(玉女峰: 373m)이 서서 그 여동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청계산에는 청계사(淸溪寺)라는 절이 둘 있다. 하나는 망경대 남서쪽 절고개 쪽에 있는 절이고, 다른 하나는 망경대 북동쪽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 있는 절이다.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전자의 것은 의왕시 청계동이고, 후자의 것은 서울 서초구 원지동이다.
의왕시 쪽의 청계사는 청계산 계곡 중 제일 골이 깊은 청계동 골짜기 최북단에 자리하고 있다.【주】40) 통일신라 때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이 절은 조선시대 연산군이 도성안의 절을 폐사(閉寺)시킬 때 흥천사(興天寺)와 흥복사(興福寺)의 부처를 옮겨와 현재까지 봉안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절은 근세의 고승인 경허(鏡虛)스님의 입산지이다. 처음에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奉恩寺)의 말사(末寺)로서 비구니만 거처하였으나, 지금은 수원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로서 참선도량이다.
최고봉 망경대(望京臺)는 이름 그대로 서울을 바라보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서울’은 지금의 서울이 아닌 고려시대의 서울 송도(松都: 개성)를 가리킨다.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의 충신인 조윤(趙胤)이 이성계를 피하여 이 곳에 막(幕)을 치고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이라고 한다.
‘청계산(淸溪山)’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쓰였고, 어떤 연유에서 이 이름이 나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우선 ‘청계(淸溪)’라는 이름이 붙고, 그러한 내를 지닌 산이어서 나온 이름이 아닌가 짐작될 뿐이다. 이 산의 주봉인 망경대에서 흐르는 물줄기 하나가 서쪽으로 막계동 골짜기 사이를 따라 흐르는데, 이 내의 이름이 ‘맑은내’ 또는 ‘맑내(막내)’이고, 이것의 한자식 표기가 ‘막계(莫溪)’·‘청계(淸溪)’인 점으로 미루어 내이름에 따라 붙여진 산이름일 것으로 보인다.
청계산은 ‘청계산(淸溪山)’ 외에 ‘淸鷄山’·‘靑溪山’ 등으로도 나오지만,【주】41) 기록한 이의 잘못이 아닌가 여겨진다.
청계산에는 그 줄기나 골짜기 등에 과천 서울대공원, 과천경마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을 두고 있다.
▣ 3) 우면산(牛眠山)
과천시 최북단에 있는 산. 높이 290m의 최고봉은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牛眠洞)과 방배동(方背洞) 사이에 있다.
산 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모양이라 해서 ‘우면(牛眠)’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과천 쪽에서 이 산 밑의 여러 마을들을 일컬어 ‘우마니’라고 하는데, ‘우면이’란 말이 변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면’보다 대개 ‘우만’·‘우마니’라고 토박이들이 많이 불러 온 것으로 보아 원래 ‘움안’에서 나온 땅이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주】42)
이 우면산과 관악산 사이에 난 고개가 남태령(南泰嶺)이다.
▣ 4) 삼성산(三聖山)
관악산 서쪽에 있는 산으로, 크게 보아서는 관악산의 한 봉우리라고도 할 수 있다.【주】43)
최고봉은 높이 480m인데, 서울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 사이에 있다. 신림동의 서울대학교에서 남으로 4㎞, 안양에서 북서쪽으로 5㎞ 지점에 있다.
고려말에 지공·나옹·무학 등 세 고승이 이 산에서 수도했다 하여 산이름이 삼성산(三聖山)이 되었다고 한다. 또 세 개의 막을 지었던 산이라 하여 삼막산(三幕山)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세 막(암자) 중에 일막(一幕)과 이막(二幕)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고 지금 삼막사(三幕寺)만 남았다고 한다.
관악산과 형제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산에는 반월암(半月庵)·염불암(念佛庵)·상불암(上佛庵)·만월암(滿月庵)·천인암(千人庵)·성주암(聖住庵)·약수암(藥水庵)·호압사(虎壓寺)·삼막사(三幕寺) 등의 많은 절과 암자가 있다.
▣ 5) 응봉(鷹峰)
과천시 막계동과 의왕시 청계동의 상청계(上淸溪)에 걸쳐 있는 산이다. 청계산의 한 줄기이고 높이는 365m이다.
‘매봉’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의 ‘매’가 한자로 의역되어 ‘응봉(鷹峰)’이 되었다. ‘매’나 ‘응(鷹)’이 들어갔다고 해서 새이름의 ‘매(鷹)’와 관련지음은 잘못이다. 전국에는 ‘매봉’이나 ‘응봉’ 또는 ‘응봉산’이 무척 많은데, 원래 ‘매봉’이 그 원 이름이며, 여기서의 ‘매’는 ‘뫼(山)’가 옮겨간 경우가 많다. 그 경우, ‘매봉’이나 ‘응봉’은 ‘산봉우리’의 뜻이 될 수 있다.
청계산 줄기의 응봉 북쪽 골짜기로는 사기막골·배랭이·십리골·샛말·맑은내(막계)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과천 서울대공원이 들어섬에 따라 많은 마을들이 없어졌다.【주】44)
이 응봉의 서쪽 줄기가 갈현동의 갈고개까지 이어졌다.
▣ 6) 망경대(望京臺)
청계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일명 ‘망경봉(望京峰)’이라고도 한다. 서쪽에 있는 응봉(鷹峰)과 활 모양으로 휜 곡선 등성이로 연결되면서 그 아래에 과천 서울대공원이 있는 큰 골짜기를 이루어 놓았다.
봉우리의 서쪽은 과천 막계동(莫溪洞)이고, 동쪽은 성남시 상적동(上笛洞)이다.
북쪽으로 산줄기를 이으면서 옥녀봉(玉女峰)을 또 솟구어 놓았다. 봉우리에 서면 동쪽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시원히 내려다보인다.
▣ 7) 옥녀봉(玉女峰)
봉우리가 예쁜 여성처럼 보여 이 이름이 붙었다.
남쪽의 망경대와 이어진 이 봉우리는 그 북쪽으로도 더 줄기를 뻗쳐 돌무께 뒷산(193. 4m)을 이루어 놓고 서울 양재동 만남의 광장 뒤에 이르러서야 그 기세를 죽인다.
이 봉우의 서쪽은 과천 주암동, 동쪽은 서울 원지동이다.
이 밖에도 갈치산(갈현동)·삿갓봉(문원동)·검단이산(주암동)·양갓산(주암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