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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수필>
아프리카를 그리며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를 온통 감싸고 있는 살과 뼈, 치솟는 피는 어디에서 와 나를 지탱하고 오늘을 볼 수 있게 하고 있을까? 이제는 좁게만 느껴지는 지구촌의 땅덩어리. 나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태곳적 뭇 생명들의 탄생시대에 이름 모를 그 어느 일각의 깊은 숲 속이나 이끼 낀 바위 틈새, 혹은 이글대는 광막한 사막의 신기루 저편 너머 모래언덕에서…. 고고(呱呱)의 몸짓으로 비칠대며 일어나 홀연히 오늘에 있게 된 것일까?
청년기부터 오늘날까지 아련히 내 의식을 지배해온 막연한 생각으로는, 굳이 종(種)의 기원 같은 골치 아픈 생물학적인 사유를 떠나서 나의 원류를 헤아려본다면(한반도 땅덩어리에 국한된) 이렇다.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조선시대-고려시대-백제-고조선…장백산 동굴 속에서 포효하는 웅녀의 신비한 몸짓-신단수 아래 단목향 풀풀 피어오르는 생명의 꿈틀거림- 그 인자(因子)중 하나가 민들레 홀씨처럼 둥둥 떠올라 이름 모를 촌락에 내려앉아 비로소 나의 시조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말 충남 공주 땅을 가로지르는 금강의 한 구비, 곰나루 언덕을 뛰어가던 내 유년시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막연한 의문을 한 꺼풀 벗겨내는 비밀의 열쇠를, 오늘 아침에 받아본 신문의 한 면에서 본 듯하여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영국 BBC방송에서 컴퓨터로 재구성한 한 원시인류의 모습을 신문에서 응시하면서, 몸속의 핏줄기가 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젖어들었다.
이분이란 말인가? 무성한 수염과 질긴 머리칼에 뒤덮인 채로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푸근한 고향같이 생긴 옛사람. 길고 긴 고락의 역사와 함께 유장한 시공을 건너 머언 피안의 종려수나무 밑에서, 황혼녘 비처럼 쏟아지던 유성의 갈기들을 그윽이 응시했을 원시의 인류 그 사람.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
아침 신문의 보도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2003년 6월 12일 영국의 BBC방송은 과학 전문잡지 네이쳐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생인류의 화석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역의 헤르토 마을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미국 UC버클리대 팀 화이트 교수와 공공연구팀은 지금으로부터 16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인류화석이라고 확인했다. 3백여 개의 뼈 조각을 조합한 결과, 어른 두 명과 어린이 한 명의 머리뼈로 확인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조상의 화석이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클라시스 화석(10만 년 전) 과 이스라엘의 카트제·스쿨 화석(9만∼13만 년 전)보다 7만∼3만년을 앞서는 것으로 현생인류의 기원이 그만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BBC는 또한 그동안 학계의 정설로 통하던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현대의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 진화가 덜된 네안데르탈인 등을 대체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진화가 덜된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나와 유럽·아시아 등 곳곳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다기원설이 수정보완 되어야한다면서, 이번 발견으로 네안데르탈인 보다 이전의 시기에 아프리카에 이미 현생인류의 골격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함으로서 아프리카 기원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번에 발견된 화석 주변에는 화산석으로 만든 6백40여 점의 구석기와 짐승들의 뼈도 발견돼 당시 호모 사피엔스가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 등을 했음을 보여줬다.
깊지 않은 동굴 밖으로 보이는 짙게 깔린 황혼의 바다에, 일단의 시조새(翅鳥) 모양의 새떼가 대오를 갖추어 날아가고 있다. 이달투는 동굴 밖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포악한 사자를 살펴보면서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에 풀잎을 비벼 대었다.
끄응 끙 하는 신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워버린 그의 아내 마오리는 더욱 심한 상처를 입어서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만 같다. 다행히 아들 이아투는 다치지 않았고, 마오리 옆에서 공포에 질린 채 우우우 소리만 지르고 있다.
방금 전. 잠복해 있던 빠투 사자 녀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녀석도 엉덩이를 창에 찔려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날카로운 창날에서는 역겨운 사자 피 냄새가 풍겨왔다. 언제고 재차 공격해 오려는 빠투 녀석의 분에 받친 포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마오리는 동굴로 피신하기 직전, 사자의 정면에 있었기 때문에 가슴과 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기억도 아득한 날, 빠투 녀석의 애비 되는 왕사자가 공격을 해왔을 때에도 이달투의 허벅지에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었지만 이번은 더욱 상처가 커, 마오리의 뱃가죽이 찢어지고 상처사이로 물컹한 내장도 보였다.
이달투는 동굴 흙바닥에 홍건이 고인 피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마오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오리를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화산이 터지던 날, 그 날은 마오리 부족 최후의 날이었다. 사냥한 누우를 밤새워 춤을 추며 잘라먹고는 모두가 잠들었을 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산이 터지고 마을을 가로지르며 쩌억 갈라진 지진으로 그들은 모두 깊은 땅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던 것이었다.
먼 바닷가 아름다운 종려나무 숲 속에 있는 그의 부족을 떠나 방랑 중이던 이달투는 화산재를 피해 뛰어가다가 홀로 남겨진 마오리를 구했었다.
마오리와의 생활은 꿀같이 달콤하고 신이 나는 나날이었다. 아들 이아투를 낳고서는 더욱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달투의 방랑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달투가 자신의 부족을 버리고 떠나온 것은, 어느 날 황혼 무렵에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별똥별들의 장관을 보고 나서였다.
붉은 노을 속에서 장엄한 빛을 뿜어내던 신비로운 유성의 낙화(落華)에 이달투는 창을 움켜쥐고,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아득한 곳으로의 여행을 결심했다.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별이 떨어진 곳에 가면 그가 항상 궁금해 했던 밤하늘의 금강석 같은 은하수에 대한 비밀을 알 것만 같았다.
그에 의하면 푸르른 밤하늘의 하얀 별들은 빈집이었다. 붉은 유성이 빠져나온 텅 빈 얼음고치에 불과했다. 이달투는 붉게 타는 유성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 이아투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그는 유성의 나라로 떠나기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언젠가 그의 계략에 걸려 바윗돌에 압살된 왕사자가 낳은 새끼, 복수심에 불타는 빠투와 하필 마주친 것이었다.
마오리의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져 있었다. 이달투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들 이아투를 흔들었다. 잠시 후 새카만 두 얼굴에서 눈물이 솟구치면서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크허허어… 우와아"
피범벅 된 마오리의 배 위에 얼굴을 묻은 아들 이아투가 격렬히 발버둥쳤다. 그때, 이달투는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들었다. 굴 밖을 보니 지평선 너머까지 끝 간 데 없이 붉게 물든 하늘, 황혼의 바다에 찬란한 별똥별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엄청난 장관이었다. 하얀 빛, 노란 빛, 푸른 빛을 안개처럼 품어내며 장대한 우주가 춤을 추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달투가 고향을 떠나 올 때 보았던 아득한 날의 장관 그대로였다.
"어후르르… 어흐르르"
이달투는 벌떡 일어나 창을 움켜쥐었다. 어깨 죽지에 붙였던 약초를 집어던지며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감동과 전율이 그의 전신을 찌르르 울리면서 두 눈에선 환희의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가야해! 저 유성의 나라로…. 얼마 만에 보는 저 신비로운 나의 세계냐….
가야해. 또 다시 기다릴 수는 없어.
유성들의 찬란한 낙화와 굉음에 얼이 빠져있던 빠투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달투의 광기어린 출현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빠투가 피 묻은 앞발을 치켜들고 도약하려는 순간, 오른쪽 눈두덩에 별 덩어리에 맞은 듯 둔탁한 충격을 받고는 구슬픈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달투의 창날은 화산석(火山石)을 날카롭게 갈아 끼운 돌칼로서 왠만한 야자수 밑둥을 도려낼 정도였다.
이달투는 빠투의 면상에 깊숙이 찔러 넣은 창을 그대로 세워둔 채, 흔들리는 대지에 벌렁 누웠다. 비릿한 빠투의 피가 얼굴을 적시고 입 속으로 흘러들었어도 두 눈은 황혼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유성에 박혀있었다.
"쿠르릉 쾅"
동굴 위 바윗돌들이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유성 하나가 산 위에 떨어진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동굴 쪽으로 기어간 이달투의 머리 위로 우수수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들 이아투가 기어오더니 그의 허리춤에 머리를 묻었다. 동굴 속까지 돌가루와 나무뿌리가 쏟아져 내리자, 이달투는 숨을 거둔 마오리의 부족들이 땅 속으로 꺼져 내려간 그 날을 떠올렸다.
화산이 또 터졌구나.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동굴 밖 황혼의 바다에는 유성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동굴마저 무너져 내리자 그토록 가고 싶었던 별똥별의 나라를 가슴에 담은 이달투의 육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만년 후, 별똥별이 없는 시대에…. 그의 먼 후예들인 일단의 고고학자들이 오기 전까지.
조간신문에서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의 기사를 읽고서, 나름대로 감개에 젖어 이달투의 일생을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아! 아프리카여 그립다.
삿갓을 쓰고 열대우림 숲 속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유성에의 꿈을 찾아 헤매고 싶다. 목불인견의 세태와 뻔뻔한 군상들이 넘실대는 파렴치한 오늘의 지구촌 세계. 카드 빚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유괴하는 물신주의에 멍든 21세기의 대한민국…. 이 답답한 철근 콘크리트 둥지를 떠나서 원시의 가시덤불 속 깊은 곳에 순백색으로 흐르는 무위(無爲)의 강물을 떠 마시고 싶다.
아!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16만 년 전 황혼의 바다에 떨어지던 별똥별의 꿈을 찾아서 방랑하며 인류의 등불을 지핀 이달투, 곧 나의 조상에게 넙죽 큰절을 올리고 싶다. 무너져 내린 이름 모를 동굴을 후벼 파내어, 그의 화석이 된 두개골 곁에 가지런히 같이 누워서 떨어진 유성의 빈자리를 하나 둘 세고 싶다. 그리하여 두런두런 나누는 정담 속에서 빛나는 원초의 사유를 보석처럼 동그랗게 말아, 그의 이끼 낀 치열에 끼워 넣어 주고 싶다.
(2003 . 6 . 13)
<筆者註>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idaltu) ∼ 금번 발굴연구팀이 붙인 학명. 이달투는 화석이 발견된 아파르 지역의 현지어로 '연장자' 또는 '형님'이란 뜻임
*본문 중 이달투의 일생을 다룬 내용은 픽션(허구)임
*신문보도 내용 ∼ 2003 . 6 . 13일자 중앙일보 기사 인용
*마오리, 이아투, 빠투 ∼ 필자가 상상으로 지어낸 이름
1 [애독자] 나는 어디에서 왔고 내가 갈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아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문의 기사를 보시고 이런 장황한 글을 쓰실 수 있음은 선생님만의 독창성이 아닐까 합니다. 글을 여러번 올리고 내려 읽으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선생님 건안하세요 <2003.06.19>
2 [애독자님들께] 수필로서는 다소 장황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요즘 수필계에서는 수필의 대중화와 문학적 역량을 넓히기 위하여 ...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수필이 신변잡사나 자기성찰식의 고루한 표현만을 고집한다면, 폭넓은 문학의 바다를 헤쳐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필자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미하여 독자에게 '수필을 뛰어넘는' 영역을 제시했을 때... 비로소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시작되지 않을까요?... 이 졸편은 나의 존재이유에 대한 원론적 물음보다는, 안타까운 오늘에 대한 소생의 질문입니다. 또뵙지요. <2003.06.19>
3 [순두부] 가끔 사막으로 캠핑을 갔읍니다. 한밤중에 올려다보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하늘엔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밝고도 무수한 별들은 우주의,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 보게 하곤 했읍니다. 그 경외로운 신비에 숨막히는 상상을 하다가는 나의 존재마저 혼란스러워지는...... . 선생님의 상당한 상상력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그리고 퓨전수필이라는 장르가 퍽 인상적이었읍니다 <2003.06.30>
4 [한비] 순두부님! 방문 감사드립니다. 소생의 수필을 중동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읽으셨다니, 제 자신 새로운 감회에 젖습니다. 아마도 이 졸편은 선생님께서 계시는 사막의 장엄한 풍광에서 썻다면, 더욱 깊은 사색과 통찰로서 발표될 수 있지않을까 ... 하는 탄식과 부끄러움을 가져봅니다. 이역만리에서 보내주시는 훈훈한 격려...마음에 새기고 감사드립니다. <2003.07.06>
5 [구암] 단견입니다만, 귀소의식의 본능적 발현에서 각각 주어진 인자에 의하여 더욱 발전된 의욕적인 활동영역이 아닌가 여겨지며 그것은 여성적이기 보다는 남성적 기질의 활동의식이 전개된 결과 이리라고 보여 집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생물이 타고난 고향과 모태의 원초적 의식의 잠재 속에 귀소 본능의 구체적 구현의지의 표현이시라고 느낍니다. "이달투"에게 넙죽 절하시는 모습 인상적입니다. 참 멋지십니다. 건안하십시오. <2003.11.26>
6 [한비] 이달투의 푸른 이끼낀 치열에 저의 하잘것 없는 향수를 한방울이라도 바를 수 있다면... 요즘 수척해지는 소생의 사유에 꽃이라도 피어 오르련만... 선생님의 화답과 옥고에 감사드리며. <2003.11.27>
[수필평-에세이스트2호(2005년도 7.8월호)]
아름다움과 감동이 있는 수필
-한기홍의 ‘아프리카를 그리며’-
허창옥(수필가.평론가)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먼저 해둔다. 신문기사가 소재이다. 신문기사나 영화의 내용에서 글을 이끌어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이미 독자들이 숙지하고 있는 객관적 사실을 글로 써서 공감을 얻어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작가의 기량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작품 ‘아프리카를 그리며’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의문과 그리움의 심상에서 출발하여 현생인류의 화석에 대한 신문기사 그리고 액자소설(?)이라 할 수 있는 호모사피엔스 이달투의 가족 이야기 그리고 다시 현재로 이어진다. 작가(일인칭) -- 이달투(삼인칭) -- 작가(일인칭).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다. 생물학적 사유를 떠나서 지리적 역사적으로 자신의 기원을 유추해 보는 과정이 재미있다. 작가의 유추를 따라가다 보면 빠른 장면의 전환이 보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마침내 독자는 ‘곰나루 언덕을 뛰어’가는 새카만 악동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짓는다.
작품의 중간에 삽입된 원시인 가족 이야기는 판타지이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어른 두 명과 어린이 한 명의 화석에 살을 입히고 생명을 불어넣어 이야기 속 가족으로 등장시키는 데까지 상상은 뻗어나간다. 그리고 비교적 자세히 그들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이달투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자유에 대한 희구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크허허어... 우와아”
“어후르르... 어흐르르”(171쪽)
옛사람의 언어도 만들어냈다. 유성의 나라로 가고 싶은 이달투의 염원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소망을 투영한 것일 게다. 결말 부분에 가서 작가는 문명, 윤리실종, 물신주의의 현대를 혐오하면서 ‘무위의 강물을 떠 마시고 싶다’고 토로한다.
아! 아프리카로 가고 싶다.(173쪽)
이 문장에 주제가 요약되어 있다. 아프리카는 결코 지명이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하는 아득한 시원의 어느 시점이며 장소이다. 누구에게나 시원에 대한 그리움은 있다. 그래서 울림이 크고 깊다. 서사적 서술을 하고 있으며 작가가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것. 무엇보다도 아름다움과 감동을 담아냈다.
[2012.07.03 본문 중 일부 내용 삽입]
<퓨전수필>
아프리카를 그리며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를 온통 감싸고 있는 살과 뼈, 치솟는 피는 어디에서 와 나를 지탱하고 오늘을 볼 수 있게 하고 있을까? 이제는 좁게만 느껴지는 지구촌의 땅덩어리. 나는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태곳적 뭇 생명들의 탄생시대에 이름 모를 그 어느 일각의 깊은 숲 속이나 이끼 낀 바위 틈새, 혹은 이글대는 광막한 사막의 신기루 저편 너머 모래언덕에서…. 고고(呱呱)의 몸짓으로 비칠대며 일어나 홀연히 오늘에 있게 된 것일까?
청년기부터 오늘날까지 아련히 내 의식을 지배해온 막연한 생각으로는, 굳이 종(種)의 기원 같은 골치 아픈 생물학적인 사유를 떠나서 나의 원류를 헤아려본다면(한반도 땅덩어리에 국한된) 이렇다.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조선시대-고려시대-백제-고조선…장백산 동굴 속에서 포효하는 웅녀의 신비한 몸짓-신단수 아래 단목향 풀풀 피어오르는 생명의 꿈틀거림- 그 인자(因子)중 하나가 민들레 홀씨처럼 둥둥 떠올라 이름 모를 촌락에 내려앉아 비로소 나의 시조가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말 충남 공주 땅을 가로지르는 금강의 한 구비, 곰나루 언덕을 뛰어가던 내 유년시절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막연한 의문을 한 꺼풀 벗겨내는 비밀의 열쇠를, 오늘 아침에 받아본 신문의 한 면에서 본 듯하여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영국 BBC방송에서 컴퓨터로 재구성한 한 원시인류의 모습을 신문에서 응시하면서, 몸속의 핏줄기가 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착각에 젖어들었다.
이분이란 말인가? 무성한 수염과 질긴 머리칼에 뒤덮인 채로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있는 푸근한 고향같이 생긴 옛사람. 길고 긴 고락의 역사와 함께 유장한 시공을 건너 머언 피안의 종려수나무 밑에서, 황혼녘 비처럼 쏟아지던 유성의 갈기들을 그윽이 응시했을 원시의 인류 그 사람.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
아침 신문의 보도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2003년 6월 12일 영국의 BBC방송은 과학 전문잡지 네이쳐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현생인류의 화석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아파르 지역의 헤르토 마을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미국 UC버클리대 팀 화이트 교수와 공공연구팀은 지금으로부터 16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인류화석이라고 확인했다. 3백여 개의 뼈 조각을 조합한 결과, 어른 두 명과 어린이 한 명의 머리뼈로 확인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인류조상의 화석이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클라시스 화석(10만 년 전) 과 이스라엘의 카트제·스쿨 화석(9만∼13만 년 전)보다 7만∼3만년을 앞서는 것으로 현생인류의 기원이 그만큼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BBC는 또한 그동안 학계의 정설로 통하던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현대의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지역으로 퍼져가, 진화가 덜된 네안데르탈인 등을 대체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진화가 덜된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나와 유럽·아시아 등 곳곳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다기원설이 수정보완 되어야한다면서, 이번 발견으로 네안데르탈인 보다 이전의 시기에 아프리카에 이미 현생인류의 골격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함으로서 아프리카 기원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번에 발견된 화석 주변에는 화산석으로 만든 6백40여 점의 구석기와 짐승들의 뼈도 발견돼 당시 호모 사피엔스가 도구를 사용하여 사냥 등을 했음을 보여줬다.
문득 아득한 조상님의 시원에 대한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번지는 몽상의 가닥들. 급기야 데자뷰 되어 나의 뇌리에 커다란 스크린이 펼쳐졌다. 원시의 굉음들이 웅웅거리는 태초의 아프리카로 나는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깊지 않은 동굴 밖으로 보이는 짙게 깔린 황혼의 바다에, 일단의 시조새(翅鳥) 모양의 새떼가 대오를 갖추어 날아가고 있다. 이달투는 동굴 밖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포악한 사자를 살펴보면서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어깨에 풀잎을 비벼 대었다.
끄응 끙 하는 신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사지를 늘어뜨리고 누워버린 그의 아내 마오리는 더욱 심한 상처를 입어서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만 같다. 다행히 아들 이아투는 다치지 않았고, 마오리 옆에서 공포에 질린 채 우우우 소리만 지르고 있다.
방금 전. 잠복해 있던 사자 빠투 녀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녀석도 엉덩이를 창에 찔려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날카로운 창날에서는 역겨운 사자 피 냄새가 풍겨왔다. 언제고 재차 공격해 오려는 빠투 녀석의 분에 받친 포효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마오리는 동굴로 피신하기 직전, 사자의 정면에 있었기 때문에 가슴과 배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기억도 아득한 날, 빠투 녀석의 애비 되는 왕사자가 공격을 해왔을 때에도 이달투의 허벅지에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었지만 이번은 더욱 상처가 커, 마오리의 뱃가죽이 찢어지고 상처사이로 물컹한 내장도 보였다.
이달투는 동굴 흙바닥에 홍건이 고인 피를 바라보면서 가만히 마오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마오리를 만난 것이 언제였던가….
화산이 터지던 날, 그 날은 마오리 부족 최후의 날이었다. 사냥한 누우를 밤새워 춤을 추며 잘라먹고는 모두가 잠들었을 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산이 터지고 마을을 가로지르며 쩌억 갈라진 지진으로 그들은 모두 깊은 땅 속으로 떨어져 내려갔던 것이었다.
먼 바닷가 아름다운 종려나무 숲 속에 있는 그의 부족을 떠나 방랑 중이던 이달투는 화산재를 피해 뛰어가다가 홀로 남겨진 마오리를 구했었다.
마오리와의 생활은 꿀같이 달콤하고 신이 나는 나날이었다. 아들 이아투를 낳고서는 더욱 행복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달투의 방랑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달투가 자신의 부족을 버리고 떠나온 것은, 어느 날 황혼 무렵에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별똥별들의 장관을 보고 나서였다.
붉은 노을 속에서 장엄한 빛을 뿜어내던 신비로운 유성의 낙화(落華)에 이달투는 창을 움켜쥐고, 유성이 떨어져 내리는 아득한 곳으로의 여행을 결심했다.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별이 떨어진 곳에 가면 그가 항상 궁금해 했던 밤하늘의 금강석 같은 은하수에 대한 비밀을 알 것만 같았다.
그에 의하면 푸르른 밤하늘의 하얀 별들은 빈집이었다. 붉은 유성이 빠져나온 텅 빈 얼음고치에 불과했다. 이달투는 붉게 타는 유성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 이아투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그는 유성의 나라로 떠나기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자 하였으나, 언젠가 그의 계략에 걸려 바윗돌에 압살된 왕사자가 낳은 새끼, 복수심에 불타는 빠투와 하필 마주친 것이었다.
마오리의 눈알이 하얗게 뒤집어져 있었다. 이달투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아들 이아투를 흔들었다. 잠시 후 새카만 두 얼굴에서 눈물이 솟구치면서 동시에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크허허어… 우와아"
피범벅 된 마오리의 배 위에 얼굴을 묻은 아들 이아투가 격렬히 발버둥쳤다. 그때, 이달투는 순간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들었다. 굴 밖을 보니 지평선 너머까지 끝 간 데 없이 붉게 물든 하늘, 황혼의 바다에 찬란한 별똥별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엄청난 장관이었다. 하얀 빛, 노란 빛, 푸른빛을 안개처럼 품어내며 장대한 우주가 춤을 추며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달투가 고향을 떠나 올 때 보았던 아득한 날의 장관 그대로였다.
"어후르르… 어흐르르"
이달투는 벌떡 일어나 창을 움켜쥐었다. 어깨 죽지에 붙였던 약초를 집어던지며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감동과 전율이 그의 전신을 찌르르 울리면서 두 눈에선 환희의 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가야해! 저 유성의 나라로…. 얼마 만에 보는 저 신비로운 나의 세계냐….
가야해. 또 다시 기다릴 수는 없어.
유성들의 찬란한 낙화와 굉음에 얼이 빠져있던 빠투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달투의 광기어린 출현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빠투가 피 묻은 앞발을 치켜들고 도약하려는 순간, 오른쪽 눈두덩에 별 덩어리에 맞은 듯 둔탁한 충격을 받고는 구슬픈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달투의 창날은 화산석(火山石)을 날카롭게 갈아 끼운 돌칼로서 왠만한 야자수 밑둥을 도려낼 정도였다.
이달투는 빠투의 면상에 깊숙이 찔러 넣은 창을 그대로 세워둔 채, 흔들리는 대지에 벌렁 누웠다. 비릿한 빠투의 피가 얼굴을 적시고 입 속으로 흘러들었어도 두 눈은 황혼의 바다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유성에 박혀있었다.
"쿠르릉 쾅"
동굴 위 바윗돌들이 굴러 내리기 시작했다. 유성 하나가 산 위에 떨어진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동굴 쪽으로 기어간 이달투의 머리 위로 우수수 뿌리 채 뽑힌 나무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들 이아투가 기어오더니 그의 허리춤에 머리를 묻었다. 동굴 속까지 돌가루와 나무뿌리가 쏟아져 내리자, 이달투는 숨을 거둔 마오리의 부족들이 땅 속으로 꺼져 내려간 그 날을 떠올렸다.
화산이 또 터졌구나. 흙먼지 사이로 보이는 동굴 밖 황혼의 바다에는 유성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동굴마저 무너져 내리자 그토록 가고 싶었던 별똥별의 나라를 가슴에 담은 이달투의 육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만년 후, 별똥별이 없는 시대에…. 그의 먼 후예들인 일단의 고고학자들이 오기 전까지.
조간신문에서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의 기사를 읽고서, 나름대로 감개에 젖어 이달투의 일생을 상상으로 그려보았다.
아! 아프리카여 그립다.
삿갓을 쓰고 열대우림 숲 속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유성에의 꿈을 찾아 헤매고 싶다. 목불인견의 세태와 뻔뻔한 군상들이 넘실대는 파렴치한 오늘의 지구촌 세계. 카드 빚 때문에 부모를 죽이고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유괴하는 물신주의에 멍든 21세기의 대한민국…. 이 답답한 철근 콘크리트 둥지를 떠나서 원시의 가시덤불 속 깊은 곳에 순백색으로 흐르는 무위(無爲)의 강물을 떠 마시고 싶다.
아!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16만 년 전 황혼의 바다에 떨어지던 별똥별의 꿈을 찾아서 방랑하며 인류의 등불을 지핀 이달투, 곧 나의 조상에게 넙죽 큰절을 올리고 싶다. 무너져 내린 이름 모를 동굴을 후벼 파내어, 그의 화석이 된 두개골 곁에 가지런히 같이 누워서 떨어진 유성의 빈자리를 하나 둘 세고 싶다. 그리하여 두런두런 나누는 정담 속에서 빛나는 원초의 사유를 보석처럼 동그랗게 말아, 그의 이끼 낀 치열에 끼워 넣어 주고 싶다.
(2003 . 6 . 13)
<筆者註>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idaltu) ∼ 금번 발굴연구팀이 붙인 학명. 이달투는 화석이 발견된 아파르 지역의 현지어로 '연장자' 또는 '형님'이란 뜻임
*본문 중 이달투의 일생을 다룬 내용은 픽션(허구)임
*신문보도 내용 ∼ 2003 . 6 . 13일자 중앙일보 기사 인용
*마오리, 이아투, 빠투 ∼ 필자가 상상으로 지어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