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牙山 李忠武公 遺墟를 拜觀하다(2-2); 忠武公 李舜臣記念館
忠武公 李舜臣記念館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현충사(牙山 李忠武公 遺墟)에 충무공 이순신의 偉業을 기리기 위한
박물관으로 충무공 관련 역사자료와 遺物을 체계적으로 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충무공의
위업과 壬辰倭亂史 등을 널리 소개하는 역사교육 및 문화관광자원으로 국민들의 文化 享有權
伸張 및 民族正體性 涵養을 위하여 건립하였다.
1966년~1974년 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聖域化事業을 시행하면서 1969년 4월 현충사 경내에
韓屋樣式의 청기와 팔작지붕에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遺物館을 건립하여 3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였으며 2005년 현충사유적정비사업을 시행하면서 2008년~2011년까지 3년 동안
공사를 추진하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을 建立∙開館하였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은 記念館棟, 敎育館棟, 事務棟 등 3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遺物은
亂中日記(국보 제76호), 李忠武公遺物(보물 제326호), 李忠武公關聯古文書(보물1564호) 등
국보 9점, 보물 20점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비롯하여 991점의 각종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기념관동 지상1층에는 2개의 전시실이, 지하1층에는 관람객 쉼터가 있다.
제1전시실(海戰室)은 임진왜란 당시 朝鮮水軍의 무기, 軍船, 거북선과 일본군의 무기와
군선 등을 비교하는 17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忠武公室)은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과 一代記를 비롯하여 충무공의 가족관계,
일생과 死後의 追慕事業과 관련된 47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충무공의 대표 유물인
亂中日記와 長劍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교육관동은 충무공기념관에서 운영하는 각종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곳이며 입구에 있는
거북선(1969년 동아일보사 기증, 1/6 축소 모형)은 많은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는 배경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사무동에는 현충사관리소 사무실이 있으며 그 옆에 129㎡ 규모의 收藏庫가 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10여분만에 전시실도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서둘다 보니
사진촬영에도 빠진 유물이 많아 다른 자료들을 참고하였다.
忠武公 李舜臣記念館 사진
(01)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 관리사무소
(02)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 전시관
(03) 朝鮮의 火砲
火砲의 크기, 화약의 중량과 射程距離에 따라 天·地·玄·黃의 順으로 명칭을 붙였으며,
천자총통은 함께 개발된 地字·玄字·黃字銃筒보다 크다.
(04) 天字銃筒
천자총통은 길이 약 1.5m, 砲口 지름 약 13㎝, 사정거리 약 1.6㎞ 또는 약 2.16㎞이다.
世宗 7년(1425) 全羅監司가 天字鐵彈子 1140개 등을 새로 鑄造하여 바쳤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지만, 太宗 때 地字銃筒과 玄字銃筒이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아 세종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천자총통은 2점이 남아있으며 明宗 10년(1555))에 제작된
嘉靖乙卯銘天字銃筒(보물 제647호)은 國立晋州博物館에 소장되어 있고, 1점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보고 있다.
(05) 玄字銃筒과 黃字銃筒(왼쪽)
*玄字銃筒: 길이 79cm, 口徑 7.5cm, 射距離 약 1,6km의 靑銅製이며 1984년 경남 巨濟郡
新縣邑 古縣灣에서 수중준설작업 중에 발견된 玄字銃筒(보물 제885호)은 국
립진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黃字銃筒: 길이 50.4cm, 口徑 4cm, 사거리 약 1.1km이며 宣祖 20년(1587)에 주조된
黃字銃筒(보물 제886호)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06) 飛擊震天雷(複製)-勝字銃筒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軍器寺의 火砲匠 李長孫이 발명한 人馬殺傷用 爆彈으로 지름 21㎝,
둘레 68㎝로 임진왜란 때 慶州府尹 朴毅長이 사용하여 慶州城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國立故宮博物館이 소장하고 있는 飛擊震天雷(보물 제860호)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아 문헌과 비교연구할 수 있는 국방 과학기술 문화재로
평가되며, 화포 연구와 탄환 발전사에 대한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
*승자총통은 총통 중 소형으로 개인 휴대용 화기로 길이 56.8㎝, 口徑 4㎝, 무게 4.5㎏으로
宣祖 12년(1579) 全羅左水使 金遲가 만들었으며 1583년 尼湯介의 亂 때 큰 몫을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鳥銃 때문에 그 위력을 잃고 말았다.
승자총통은 여러 점이 남아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勝字銃筒은
보물 제648호로 지정되었다.
(07) 朝鮮과 日本의 軍船 모습
(08) 各船圖本 戰船 -서울대학교 奎章閣 所藏 原本 複製-
各船圖本은 조선 후기 戰船·兵船·漕運船의 채색화 6장을 모아 만든 圖本으로 필자와
저작시기는 알 수 없으며 上粧이 있는 戰船 1매, 상장을 철거한 전선 2매, 병선 1매,
남부와 북부지방의 조운선 각각 1매가 수록되어 있다.
그림의 戰船인 板屋船은 거북선과 함께 朝鮮水軍의 主力船으로 갑판 위에 있는 ‘板屋’이라는
구조물로 인해 ‘판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明宗 10년(1555) 平船인 猛船을 대신하여 지붕을 덮어 2층 구조로 노를 젓는 병사들은
아래층에, 공격하는 병사들은 윗층에 배치했으며 승선인원은 약 125~130명 이었고
배가 높은 2층 구조로 倭寇들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판옥선’은 ‘戰船’으로 배 이름을 바꾸었었다.
(09) 忠武 李公 戰陣圖帖. -시대 미상, 이종학 기증-
명령을 받을 때의 陣形인 廳發放부터 左右札, 二路行, 圓陣, 曲陣, 直陣, 銳陣과
두 가지 모양의 鶴翼陣 등 10가지 모양의 陣形이 그려져 있다.
*원래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마지막 統制營이 있던 전남 莞島郡 古今島의 忠武祠에
소장되어 있는 右水營戰陣圖帖(전남문화재자료 113호)을 누군가 筆寫하여
‘충무 이공 전진도첩’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10) 全羅左水營 거북선
正祖 19년(1795) 간행된 <李忠武公全書>에 실려있는 그림 중 全羅左水營 거북선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책 제1권에 그림을 그려 설명한 곳에 統制營과 全羅左水營의 두 가지 거북선
그림이 694字의 설명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거북선에 대한 가장 충실한 기록이다.
(11) 거북선의 역사
(12) 忠武公 李舜臣 寧靜
충무공 이순신의 標準影幀으로 月田 張遇聖(1912~2005) 畵伯이
1953년 제작한 것으로 여러 영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3년 10월 30일 이충무공 영정심의위원회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으며, 이순신의 초상화는 본래 없었기 때문에 옛 문헌을
考證하여 그린 것이다.
(13) 亂中日記 草稿本 -국보 제76호/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13년 등재)-(복제)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국보 제76호) 중 亂中日記 草稿本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중에 親筆로 쓴 7년간의 陣中日記로 宣祖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선조 31년(1598) 10월 7일까지의 기록으로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正祖 19년(1495)< 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亂中日記’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亂中日記 草稿本은 7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 <壬辰日記> 27매(1592.5.1∼1593.3.22),
제2권 <癸巳日記> 30매(1593.5.1∼1593.9.15),
제3권 <甲午日記> 52매(1594.1.28∼1594.11.18),
제4권 <丙申日記> 41매(1596.1.1∼1596.10.11),
제5권 <丁酉日記> 27매(1597.4.1∼1597.10.28),
제6권 <丁酉戊戌日記> 20매(1597.8.4∼ 1598.1.4),
제7권 <戊戌日記> 8매(1598.9.15∼1598.10.7)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 狀啓·謄本, 別冊 附錄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7년간의 전쟁 동안 倭敵과 싸우면서 계속하여 쓴 것으로, 後孫들이 代代로 보존하여
390여년을 간직해 왔으며, 내용 중에는 水軍統制에 관한 軍事 秘策과 戰況을 보고한
狀啓의 草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史料와 당시 戰況은 물론 軍事制度에 대해서도
연구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4) 續 丁酉日記 -국보76호/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13년 등재)- (복제)
宣祖 30년(1597)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의 일기로 丁酉日記와 66일치가
重複되나 記述이 일치하지 않아 서로 補完되고 각각 史料로의 가치가 있으며 1597년 9월
鳴梁海戰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5) 李忠武公全書 亂中日記
正祖 19년(1795) 忠武公과 관련된 자료를 총망라하여 8책 14권으로 刊行하였으며 綸音,
狀啓, 亂中日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本書에 수록된 일기를 草稿本과 구별하여
‘全書本’이라고 부르며 編名이었던 ‘난중일기’로 오늘날까지 通稱되고 있다.
*綸音: 임금이 신하나 백성에게 내리는 말로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위력을 지닌다.
(*綸: 벼리 륜/윤)
*狀啓: 王命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자기 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문서. (*啓: 열 계)
(16) 書簡帖 -국보 76호- (복제)
李舜臣이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 6편을 모아 엮은 私私로운 편지 글로 이순신의 따뜻한
人間味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편지마다 戰亂을 걱정하는 애타는 心情이 잘 드러나 있다.
(17) 壬辰狀草 -국보 제76호(복제)-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국보 제76호) 중 임진장초는 충무공이
宣祖 25년(1592) 4월 1일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재임할 때부터 선조 27년(1594) 정월 10일
三道水軍統制使를 兼職할 당시까지 軍務에 관한 사항을 보고한 狀啓 草案으로 모두
184장 1권으로 당시의 戰況과 군사지원체제에 관한 사항이 소상하게 표현∙기록되어 있어
史料로서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18) 李忠武公 全書
正祖 19년(1795) 왕명으로 柳得恭이 감독·편집하여 校書館에 局을 설치하여
活字本 14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책 머리에 정조의 綸音을 비롯하여 敎諭·賜祭文·圖說·世譜·年表를 싣고, 권1에 詩·雜著,
권2∼4에 狀啓, 권5∼8에 亂中日記, 권9∼14에 附錄을 수록하였다.
卷首圖說에는 거북선 그림이 統制營龜船圖와 全羅左水營龜船圖가 漢字 694字의 설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가장 오래된 거북선 그림으로 거북선의 실체를 밝히는
가장 권위 있는 史料로 평가된다.
이 책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標本 典籍과 李舜臣 傳記 자료 및 壬辰倭亂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 忠武公 遺事
이순신이 宣祖 24년(1591) 全羅左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을 때부터 선조 31년(1598)
露梁海戰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사적을 수록한 책으로 宗家에서 亂中日記 草稿本과 함께
소장하고 있었으며 後孫이 筆寫한 것으로 보고 있다.
<再造藩邦志>의 抄錄과 <日記抄>등이 필사되어 있으며 특히 <일기초>에는 난중일기
草稿本과 全書本에서는 볼 수 없었던 ‘乙未日記’ 30일치와 丙申∙戊戌日記 각각 1일치
일부가 있어 주목된다. (*藩: 울타리 번)
(20) 忠武公 長劍 -보물 326호- (*문화재청 문화재정보 사진)
李舜臣 遺物 一括(보물 제326호)은 임진왜란 중에 충무공이
사용하던 것으로, 그의 숭고한 정신이 서려있는 유물이며 長劍 2점,
玉鷺 1점, 腰帶, 桃盃俱臺(복숭아 모양 술잔) 1쌍이다.
(*鷺: 백로 로 *桃: 복숭아 도)
長劍 2점은 길이 각각 197.5cm로 宣祖 27년(1594) 4월 閑山島
陣中에서 ‘甲午年 四月 太貴連과 李茂生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칼날에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과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즉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고 새겨져 있다.
*장검은 길이 197.5cm, 무게 4㎏으로 볼 때 實戰用보다는 儀仗用으로
보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裝飾, 入絲文樣 등 조선의 뛰어난 工藝文化와
製鐵技術, 그리고 刀劍 문화가 발달한 日本刀 樣式까지 받아들인
조선 최고의 名品 刀劍으로 꼽고 있다.
(21) 玉鷺 –보물 제326호-
이순신의 遺品으로 옥로는 높은 벼슬아치나 외국에 가는 使臣이 갓머리에 단 장식품으로
白玉으로 만들었으며 둥근 金銅 받침 위에 연꽃 잎에 싸여있는 해오라기[鷺] 3마리를
透刻 하였다.
(22) 腰帶 -보물 제326호
난중일기에 적은 明나라 장수 王元周가 선물한 金帶로 보고 있으며 무소 뿔로 만든
허리띠 장식 띳돈은 구름 위에 사자를 조각한 위에 금칠을 했다.
*띳돈: 朝服의 띠에 붙이던 납작한 장식. 품계에 따라 犀角, 금, 은을 썼다.
(*犀角: 코뿔소의 뿔 *犀: 물소 서)
(23) 복숭아모양 술잔[桃盃俱臺] 1쌍 -보물 제326호-
난중일기에 明나라 장수 진파총에게서 받은 ‘花酒盃一對(한쌍)’로 보고 있으며 桃盃는
그 형태가 복숭아와 같아서 생긴 이름이며 얇은 구리판에 금을 입힌 것으로 꼭지 쪽에
둥근 손잡이가 달렸고 표면에는 복숭아 잎 3개가 붙어 있다.
(24) 武科及第 敎旨 -보물 1564-7호(복제)-
宣祖 9년(1597) 李舜臣이 式年武科에 丙科 제4인으로 급제하고 받은 敎旨로 文∙武科의
최종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서인 이 교지는 붉은 바탕의 종이에 썼다고 ‘紅牌’라고도 한다.
*式年武科(武科式年): 式年 즉 子∙午∙卯∙酉年에 거행하는 初試∙覆試∙殿試 등의 武科 試驗.
*敎旨: 조선시대 국왕이 官員에게 내리는 각종 문서.
(25) 守柵拒敵圖 –복제품, 원본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宣祖 20년(1587) 이순신이 咸鏡道 造山堡 萬戶 겸 鹿屯島 屯田官으로 있을 때 기습 침입한
女眞族을 쫓아 포로로 붙잡힌 농민과 병사들을 구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함경도에서 武功을 세운 8명의 행적을 담은 <北關遺蹟圖帖>의 한 장면이다.
(26) 壯襄公 征討時錢部胡圖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04호(복제),
진품: 육군박물관(육군사관학교) 소장-
조선 중기 함경북 兵馬節度使 壯襄公 李鎰(1538~1601)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女眞族
時錢部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壯襄公征討時錢部胡’라고 쓴 篆書體의 제목과
그림, 座目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契軸形式이다. 맨 아랫단 좌목의 말미에는 8세손 1849년
閏夏 일자의 李在寬 글이 있어 여진족 시전부락을 토벌하게 된 경위와 그림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 戰爭記錄畵가 매우 드문데 제작 내력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작품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契軸: 조선시대 특별한 일을 기념하여 계를 만들거나 同榜∙동갑 또는 같은 관사의 관원 등이
계를 만들고, 모임을 가진 후 이를 기념하여 그 사실과 詩文을 적고 이를 卷軸으로
만들어 나누어 가지는 것.
(27) 壬辰倭亂 主要海戰
(28) 白衣從軍과 鳴梁大捷
(29) 李舜臣 死後 贈職∙贈諡와 祠堂建立
(30) 宣武功臣 敎書 -보물 1564-1호(복제)-
충무공 사후 6년 후인 宣祖 37년(1604) 임진왜란에 빛나는 戰功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선무공신교서로 정식 명칭은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다.
宣武功臣은 임진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 18명에게 내린 功臣稱號로 이순신은 1등공신
3명 중에서도 으뜸인 元勳이다.
(31) 선무공신 교서 -보물 1564-1호(복제)-
宣武功臣 1등은 ‘孝忠仗義迪毅協力 宣武功臣’이라는 호가 부여되고 李舜臣∙權慄∙元均 등 3명,
2등은 ‘效忠仗義協力 宣武功臣’으로 申點∙權應銖∙金時敏∙李廷馣∙李億祺 등 5명,
3등 ‘效忠仗 宣武功臣’은 鄭期遠∙權悏∙柳思瑗∙高彦伯∙李光岳∙趙儆∙權俊∙李純信∙奇孝謹∙李雲龍 등
10명으로 모두 18명이다. (*馣: 향내 암)
*1등은 官爵과 品階가 3단계 오르고 賞으로 兵卒 10명, 奴婢 13명, 馬夫 7명, 田地 1백 50結,
銀子 10냥, 말 1필을 받았으며 2등은 관작과 품계가 2단계 오르고 상으로 병졸 6명, 노비 9명,
마부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말 1필을 받았으며 3등은 관작과 품계가 1단계 오르고
상으로 병졸 4명, 노비 7명, 마부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말 1필을 받았다.
(32) 起復授職敎書 -보물 1564-3호(복제)-
宣祖 30년(1597) 7월 16일 元均의 水軍이 巨濟島 漆川梁海戰에서 大敗하여 危機에 처하자
그로부터 7일만에 선조는 母親喪을 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白衣從軍하고 있던
李舜臣을 다시 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이다.
* ‘起復’이란 어버이의 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慣例를 깨고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多急했던 宣祖는 李舜臣에게 교서를 내리면서 “지난 번에 그대의 地位를 바꿔 오늘 같은
敗戰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33) 賜符諭書 -보물 1564-4호(복제)-
선조 24년(1591) 이순신이 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임명되면서 받은 諭書이다.
全羅 左水營은 지금의 麗水에 本營을 두고 그 소속으로 防畓, 呂島, 沙島, 鹿島, 鉢浦 등
5개 水軍鎭營과 順天, 樂安, 寶城, 光陽, 興陽 등 5개 고을을 거느리고 있었다. (*諭: 비 유)
*諭書: 觀察使, 節度使, 防禦使 들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던 명령서.
(34) 賜符諭書 -보물 1564-5호(복제)-
선조 27년(1594) 李舜臣이 全羅左水使 兼 三道水軍統制使로 있을 때 받은 유서로 諭書를
내릴 때는 發兵符를 함께 내려 주었다.
*發兵符: 朝鮮時代 軍隊를 動員하는 標識로 쓰이던 동글납작한 나무 패.
한 면에 ‘發兵’이란 두 글자를 쓰고 다른 면에 길이로 觀察使∙節度使들의 이름을 記錄한 다음
가운데를 쪼개 오른쪽은 그 責任者에게 주고, 왼쪽은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군대를 動員할
필요가 있을 때 임금이 敎書(왕이 내리는 문서)와 함께 그 한 쪽을 내리면 地方官은 두 쪽을
맞추어 보고 틀림없다고 認定되면 군대를 동원하였다.
(35) 賜符諭書 -보물 제1564-6호(복제)-
선조 30년(1597) 7월 23일 三道水軍統制使로 다시 임명되면서 받은 유서로, 李舜臣은
漆川梁海戰으로 흩어진 朝鮮水軍을 수습하려고 南海沿岸을 가던 중 8월 3일 晋州 水谷에서
이 諭書와 起復授職 敎書를 함께 받았다.
(36) 尙州 方氏 貞敬夫人 敎旨 -보물1564-9호(복제)-
露梁海戰에서 戰死한 李舜臣을 右議政으로 贈職 후 宣祖 36년(1603) 부인 尙州 方氏를
貞敬夫人에 封하면서 내린 교지이다.
*貞敬夫人은 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正∙從一品 文武官의 嫡妻에게 내리는 名號로
外命婦 부인으로서는 最上級의 品階이다.
(37) 忠武公 贈諡敎旨 -보물 1564-12호(복제)-
李舜臣이 戰死하고 45년이 지나 仁祖 21년(1643) 生前의 功德을
기리고자 ‘忠武公’이라는 諡號를 내린 교지이다.
*諡號는 正二品 이상의 文武官과 功이 많은 臣下나 德이 높은 선비가
죽은 후에 내리는 이름이다.
(38) 領議政 贈職敎旨 -보물1564-16호(복제)-
正祖 17년(1793) 7월 정조가 “충무공이 충성과 威武로 나라를 위해 죽은 뒤에 아직까지
영의정으로 높이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고 하면서 李舜臣을 領議政으로 높이면서
내린 교지이다.
39) 李薈 定略將軍 敎旨
선조 35년(1602) 이순신의 장남 李薈를 五衛都摠府의 실무책임자인 經歷에 임명하는
교지로 이회는 이순신의 幕下에서 參戰하여 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經歷은 從四品의
武班職으로 品階의 이름은 政略將軍이다. (*薈: 염교 회)
(40) 몸을 바쳐 나라를 살리다.
사진에 올린 이외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된 문서들은 아래와 같다.
*李舜臣 等 宣諭犒賞敎書(보물 제1564-2호)
宣祖 29년(1596) 9월 15일 선조가 이순신 이하 諸陣에 宣諭하고 호상하는 敎書이다.
@宣諭: 임금의 訓諭를 백성에게 널리 알리던 일.
@犒賞: 군사들에게 음식을 차려 먹이고 상을 주어 위로함. (*犒: 호궤할 호)
*李舜臣 妻 方氏 告身敎旨(보물 제1564-8호)
선조 24년(1591) 11월 26일에 이순신의 처 방씨에게 ‘淑夫人’으로 내리는 교지로 당시
이순신이 折衝將軍 全羅左道 水軍節度使였으므로 경국대전에 의하여 夫君의 職을 따라
‘淑夫人’을 내린 것이다.
*李舜臣 贈職敎旨(보물 제1564-10호)
1604년 7월 선조가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事
德豊府院君에 증직하는 교지이다.
*李舜臣 賜牌敎旨(보물 제1564-11호)
선조 38년(1605) 正月 이미 작고한 이순신에게 전라도 扶安, 高山, 충청도 溫陽, 稷山, 天安,
珍山, 恩津 등지에 있던 官奴婢(奴1, 婢7)를 상으로 내리는 사패교지이다.
*李舜臣 有旨(보물 제1564-13호)
선조 28년(1595) 正月 21일 이순신에게 당시 부족한 軍糧을 보충하기 위하여 屯田開墾 등의
방안을 지시하는 내용의 유지이다.
*李舜臣 別給文記(보물 제1564-14호)
선조 9년(1576)에 武科에 급제한 三子(셋째 아들) 李舜臣에게 토지와 노비를 別給했는데,
1584년 화재로 집안의 文記(文券)가 모두 소실되어 1588년 3월 12일에 다시 별급문기를
작성해준 것이다.
*李舜臣 關聯 古文書-賜牌敎旨(보물 제1564-15호)
임진왜란이 끝난 뒤 宣祖는 宣武功臣 敎書로 約定된 賜給奴婢는 13具(人) 중 賜給하지
못했던 5구를 孝宗 4년(1653) 2월에 사급한 교지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