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7회 지용백일장 장원 및 한글상 작품 초등부 장원 작품 죽향초등학교 5 한 지 혜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가족을 부르시니 모든 가족 모두 모여 신하처럼 말을 따르네 할아버지가 방에 앉아 아이들을 부르시니 아이들 모두 모여 이야기를 듣네 할아버지가 밭에 앉아 어른들을 부르시니 하던 일 마저 않고 함께 모여 일을 하시네 할아버지가 몸져 아파 누우시니 모든 가족 앉아 간호하고 기도하네 할아버지가 몸이 나으시니 모든 가족 거짓 아니하고 진심으로 기뻐하네 우리 할아버지 맘씨 좋은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우리 가족 임금님
중학부 장원 작품
옥천여자중학교 2 정 화 영 친 구 -느티나무처럼 어릴 적 내가 살던 곳 저 위 언덕에 말이야 무성하게 가지 뻗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 넓게 벌어진 가지들 밑에서 천진난만하게 뛰놀았던 우리 그 동그랗고 조그마한 얼굴에는 한없이 행복한 미소와 한없이 맑은 순수함이 물들어 있었지 아마 그 친구와 함께 피었던 내 어린 시절이 내 어린 추억들이 이렇게 숨막히는 생활속을 걸어가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도 값진 선물이고 너무나도 간절한 잠시만의 휴식이지 언제나 언덕 위 느티나무처럼 힘든 나를 지켜주고 지친 나를 감싸 안아주는 그런 따뜻한 체온을 가진 그 때 그 친구가 그리워지는 내 마음을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여성결혼이민자부 한글상 작품 옥천군,읍 금구리 비원주택 수베 사또조 고 향 금강 물은 맑은 연둣빛으로 흐르고 노란 송홧가루가 그 위에 얼룩수를 놓는 이 맘 때쯤,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초라한 어두막에 머물던 추억! 내 삶의 소중했던 순간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지난다. 내가 시집 오던 해 1988년도 당시의 시댁 마을은 수도도 들어오지 않았고 전화도 없었다. 밥을 하려면 가마솥에 쌀을 놓고 불을 지펴야 했다. 연기에 눈물과 콧물이 나고 그러다 밥물이 넘쳐 당황하여 더욱 눈물이 범벅이 되었다. 특히 겨울의 꽁꽁 얼어붙은 깜깜한 부엌에서 아궁이에 있는 재를 꺼내어 손과 발을 녹이며 아침을 했던 기억을 잊을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어버님이 주신 덧신을 신어도 발가락이 동상걸려 가렵고 아팠다. 처음으로 경험해 본 일들이다. 무척 힘들었다. 어느 날에는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약간 먼 사랑방으로 나르려다 엎어버리는 등 실수 투성이었다. 시집와서 처음 3년 정도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한 답답함에 식구들에게 짜증도 내고 울기도 했다. 오죽하면 응어리가 쌓이고 쌓여서 식구들이 모여 있는 밥상 앞에서 눈물보가 터졌을까? 24살 어린 나이에 남편만 바라보고 시집 온 나는 낮선 환경 속에서 툭하면 울음을 터트리는 철없는 새댁이었다. 그런 나에게 “없이 사는 집에 와서 고생 많지? 아가” 하시며 아버님, 어머님은 늘 다정한 내 손을 잡아 주셨다. 외국에서 시집 온 며느리라고 해서 절대 차별하거나 역사적인 감정을 들춰내시는 일은 없었다. 두 분은 부부싸움을 자주 하셔서 나를 가끔 당황스럽게 하였지만 나에게만은 참 잘해 주셨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게 두 분만의 애정표현이었던 것 같다. 시골집에 살면서 즐거운 일들도 많았다. 봄철에는 남편이랑 손잡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시골의 봄맞이를 구경하고 다녔다. 쑥,냉이, 달래, 취나물, 또 남편이 알려줘도 이름을 알 수 없었던 향기로운 나물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뜯어온 쑥으로 어머니가 “쑥버무리”를 만들어 주셨다. 쑥에다 밀가루와 약간의 양념을 하여 쪄서 콩가루를 묻힌 소박한 간식거리였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당시 세 살배기였던 우리 아들이 마룻바닥에 앉아 입안에 가득 집어놓고 “하머니 마있다! 더 줘”하며 오물거리던 우스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아들이 지금은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니 세월은 참 빠르다. 어릴 때 아빠를 잃은 아이는 방황도 했고 내 속을 태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대견스럽고 감사하다.
또 여름철에는 금강 물에 발을 담그며 까만 다슬기도 잡았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은 오염되지 않아 더욱 물이 차갑다. 작은 돌들을 뒤집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슬기를 떼어 망에 다 담으면 흐뭇했다. 그날 저녁에는 어김없이 집 뒤 텃밭에 가서 부추와 아욱을 뜯어다 다슬기 된장국을 끓일 준비를 했다. 이제는 제법 다슬기국도 맛있게 끓일 줄 알고, 어머니와 함께 부엌일을 한 덕분에 음식솜씨도 빨리 늘었다. 내가 시골 댁에서 지낸 기간은 불과 2년도 안되지만, 만약 이런 경험들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정서와 풍습을 남보다 빨리 습득을 못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변했고 그때 가슴앓이 하던 젊은 새댁은 어느덧 중년 아줌마가 되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 인생의 동반지인 남편마저 하늘나라에 보낸 지 벌써 4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남편과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내 가슴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되어 영원히 살아있다. 먹고 사는 문제로 항상 바쁘게 동동거리며 지내지만 틈틈이 남편과 시부모님께 기도를 한다. “내 생명과 같은 아이들과 나를 지켜주세요.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아요. 그리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세요. 어려워도 늘 웃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살게 도아주세요”라고, 남편의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 그와 가족을 이루고 살아왔고 이제는 나와 아이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며 나의 또 하나의 고향, 옥천에서 살아 갈 것이다.
파일이 필요 하신 분은 참조하십시요. 감사합니다. 옥천문협 사무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