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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조에서 바벨까지"를 읽고
기동연 교수님의 창세기 주석은 히브리 원어와 고대근동의 문화에 대한 박식함을 선보이고 있다. 주석으로 들어감에 앞서 오경의 모세 저작성과 관련하여 모세 당시의 문헌에서 독립인칭 대명사의 3인칭이 남녀 성구분이 없었음을 밝힌 것은 타의 입장을 잠재우기에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성경을 바르게 알기 위해 원어공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인식하게 되었다.
기동연 교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고대근동의 창조신화들을 성경의 창조 기사와 대조하여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처음에 고대근동의 문헌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데 무슨 유익이 있을까 하고 의심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고대근동의 문헌을 성경의 기사와 대조해보는 것이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양자를 대조해봄으로 성경 기사의 구속사적인 독특성을 인식하게 된다. 둘째로 고대근동의 문헌들은 성경 기록 당시의 배경 문화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셋째로 성경 기사와 유사한 고대근동의 문헌들은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우매함을 일깨워준다.
창세기 1장 주석을 읽으면서 필자는 창조 기사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후 안식일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것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해보았다. 기동연 교수님은 안식일을 복되게 하심에 대하여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그 사람을 축복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는 그야말로 안식일 제도의 배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서 성경의 주요 주제들 중 하나인 안식일의 개념에 대한 더 폭넓은 연구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창세기 2장 주석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에덴이 하나님께서 거니시는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처를 함께 하리라.”는 임마누엘의 복이 과거 에덴동산에 실재했던 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에덴동산은 그야말로 인간 본연의 주소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에게 섬기는 직분이 수여된다. 기동연 교수님은 ‘아바드’의 직분을 레위 제사장의 섬기는 직분과 연관 짓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기동연 교수님이 성경 이해에 있어서 일관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관성과 더불어 기동연 교수님은 점진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를 나뭇잎으로 가리던 데서부터 나무 뒤에 숨어버리게 되며, 더 나아가서 성 속에 자신을 숨기는 것으로 점진적으로 전락한다. 이와 같은 타락한 인간의 특징은 가인의 후손에게서 잘 보여진다. 반면에 이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대한 점진성을 요청하는 것으로서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창세기 후반부에 대한 기동연 교수님의 주석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동연 교수님의 창세기 주석이 구속사나 언약의 파노라마를 앞세우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성경본문 자체에 충실한 주석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5장 주석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대조하고 있다. 뱀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이름들의 의미를 히브리 어원으로부터 해석한 것은 인간의 타락상을 더 한층 각인시켜주고 있다. 원어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히브리어 공부가 성경 이해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똑 같은 용어 ‘엘로힘’이 장엄복수이냐 단순복수이냐 라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어에 내포된 의미를 충분히 밝혀주고 있는 기동연 교수님의 창세기 주석은 그야말로 모든 신학도에게 있어서 필독 지침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 7장 주석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하나님의 신 또는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원어상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의 코에 루아흐를 불어넣으신 것과 “나의 루아흐가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코로 루아흐를 호흡하는 피조물들을 홍수로 멸하신 것, 그리고 홍수로 덮인 땅에 하나님께서 루아흐를 보내신 것은 참으로 일관성 있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지평을 한눈에 바라보게 한다.
창세기 9장 주석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복과 노아에게 주신 복을 대조하였고 아담과의 언약과 노아와의 언약을 대조하였다. 여기서 기동연 교수님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창조 언약의 갱신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언약의 파노라마를 염두에 둔 해석으로서 성경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노아를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한 표현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한 신약의 표현(고전 15:47)과 어긋나는 표현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서 필자는 기동연 교수님이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음과 노아의 벌거벗음을 연관 지은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필자의 깨우침이 부족해서인지 이 양자의 표현상 반복은 단지 문자적인 반복에 불과해 보인다.
홍수 이전의 족보가 가인 계열의 족보와 셋 계열의 족보로 구분되듯이 홍수 이후의 족보 역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선명하게 구분된다. 뱀의 후손과 관련하여 기동연 교수님은 바벨탑을 쌓는 인간 욕망의 특징을 선악과에 대한 하와의 욕망과 연관 짓는데, 이는 타락한 인간 본성의 특징을 적절하게 드러내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백성은 서로 대조되면서 그 특징이 반복되고 있다. 기동연 교수님은 이러한 대조와 반복을 놓치지 않고 있다.
창세기 11장 주석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가 10세대인 것 같이 셈에서 데라까지의 족보 역시 10세대로 산정하기 위해 본문에 가이난을 포함시키고 있다. 필자는 여기서 창세기 기록자가 아브라함을 포함시키려는 의도에서 가이난을 제외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무튼 기동연 교수님의 창세기 주석을 통해 필자는 성경신학적으로 많은 사고를 해보게 되었다.
2. "아브라함아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를 읽고
본서에서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와 관련하여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우선 서론에서 언급된바 아브라함의 족보가 데라의 톨레도트에 속한 것이라는 점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음을 상기시킨다. 기동연 교수님은 고대문헌과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논리 정연한 주석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아브라함과 사라와 관련하여 사용된 문구를 간간이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된 것과 비교하여 유사성을 언급한 것은 창세기 신학의 통일성과 더불어 구원역사의 맥을 확인시키고 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자신에 대하여 별도로 소개하지 않으셨다. 이에 대해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이 그 당시 이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이 맹신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음은 합리적인 해석이 된다. 이는 출애굽기 6:3에 대한 기동연 교수님의 해석과 자연스럽게 매치된다. 기동연 교수님은 출애굽기 6:3에서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이름을 조상들에게 알려주셨음을 수사학적인 의문문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기동연 교수님은 ‘하나님의 사자’와 ‘여호와의 사자’라는 용어의 의미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기록 당시에 천사와 구별되는 메시아적인 사자 개념을 추측하게 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겠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는 노력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세상 백성의 삶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것과 인간의 보기에 좋은 것이 대조를 이루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의 복을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사적인 복으로 언급하면서 이 축복이 범세계적인 축복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 축복이 선교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인 성격이 있음을 부언하고 싶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연합군에게서 롯과 더불어 전쟁의 아픔을 겪는 포로들을 구원해낸 것은 구속의 의미와 더불어 하나님의 정의와 샬롬의 개념에서도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복을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다. 기동연 교수님은 이러한 떠남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부친 데라의 직계가족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이 데리고 떠난 롯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되었던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롯을 데리고 떠난 아브라함의 처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이 거느린 사람들과 가축들 중에서 롯이 언급된 위치를 주목하면서 창세기 저자의 의도를 언급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주도면밀한 해석으로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사람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물론 - 기동연 교수님은 사람의 이름에 담긴 의미들까지 놓치지 않고 있다. - 단어의 기록 순서에 이르기까지 축자적인 영감이 깃들어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한편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의 불신에 대하여 ‘구속사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관점을 염두에 둘 때, 창세기는 그야말로 성경신학의 초석을 놓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상기시키신 반면에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였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기동연 교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앞에서 짐승을 쪼갠 사이로 지나가신 것에 주목하고 있다.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이 준비한 이 짐승들이 제사를 위한 것이 아니며, 이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생명을 걸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이 사건이 이삭을 드리는 사건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두 기둥과 같다고 부언하고 싶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두 번째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사건에 대하여 기동연 교수님은 그것이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배치된 것이 아님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브라함의 불신은 그가 롯을 자신의 후사로 의심했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삭의 출생과 함께 이러한 불신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이삭의 출생을 앞둔 아브라함이 다시 이러한 불신에 휘말리는 것은 어쩌면 아브라함 스토리의 문맥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배치를 고집한 창세기 저자의 의도에 대해 기동연 교수님은 두 가지 근거를 밝히고 있다. 첫째로 해당본문을 교차대칭구조에 맞추기 위해, 그리고 둘째로 소돔에 대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와 해당본문의 연관성을 제시하기 위해 19장(소돔 이야기) 뒤에 배치하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여기에 굳이 필자의 세 번째 소견을 첨가하자면 이러한 배치는 아브라함의 불신으로 인한 굴욕적인 처사와 더불어 이삭을 주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대조하기 위해 21장(이삭의 출생 이야기) 앞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복적인 불신은 이삭의 출생에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직 이삭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이삭의 출생 자체가 절정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 것이 비록 약속의 성취를 의미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약속하시는 것에 비교해볼 때 역시 절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기동연 교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아브라함 이야기의 절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기동연 교수님은 역대하 3:1에 근거하여 모리아산이라는 지명에 담긴 신학적인 의미를 절정으로 제시하고 있다. 필자가 볼 때, 이 지명은 그야말로 성경 전체를 향해 흘러가는 물줄기의 원천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