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독후감은 김영춘 의원이 공식 홈페이지 "함께쓰는 독서노트"에 올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민족주의자 이청천
지복영이 쓴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1995, 문학과 지성사)와 이덕일이 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2001, 웅진닷컴)을 읽었다. 우당 이회영은 내가 전에 쓴 독서노트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에서 소개했듯이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자 형제와 일가를 모두 이끌고 출국하여 만주와 중국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분투했던 애국지사였다. 그는 형인 이석영이 영의정을 지낸 조선 갑부 이유원의 양자였고 동생인 이시영이 망국 전 조선의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던 명문사대부 출신이었으나 그의 종말은 아나키스트 독립혁명가로서의 순국이였다.
이덕일이 말하듯이 아나키스트는 단순히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철학 위에 지역과 국가 간의 자유로운 연합과 상호부조를 주창하는 이념이다. 하지만 개인과 집단의 자유가 억압되었을 때는 폭력적 수단으로 저항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적극적으로 실행한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의 세례를 받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그랬고 조선의 독립혁명가들도 그러하였다.
1920년대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이회영뿐 아니라 신채호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의 강고한 탄압에 무력해지고 회의감에 빠진 독립운동진영 다수가 준비론, 문화주의, 외교론 등으로 돌아서는 상황을 개탄하며 직접적인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초석이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가장 쉽게 의탁할 수 있는 운동의 사조였다. 다른 일각에서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운동에 경도되었으나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당 일당 독재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이 이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인 이념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운동은 견원지간의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산 이청천(본명은 지석규, 이청천은 나중 만주로 망명하면서 지은 변성명)은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가 아닌 민족주의자이면서도 무장투쟁론에 철저했던 분이었다. 청산리전투로 무명을 떨쳤으나 결국 만주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총탄에 모살당한 김좌진장군과 같은 궤적을 걸어간 것이다. 그 자신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양반가의 자손으로서 군인의 길을 걷고자 한말의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하였으나 망국의 순간을 당하여 무장투쟁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애국심과 더불어 지극한 현실감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 결과 이청천은 강성한 일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현대적 군사전술을 배우고 익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거꾸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졸업 후에는 일본군 장교로서 1차 대전에도 참전하였으나 1919년 일본 주둔지에서 3.1독립운동을 지켜보며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 동지인 일본육사 출신 기병장교 김광서와 함께 병가를 내고 조선을 경유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회영 등이 설립한 남만주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의 삶을 시작한 후 26년 동안 그는 남만주와 북만주, 러시아와 중국 대륙을 종횡하며 청산리전투(1920), 쌍성전투(1932), 대전자령전투(1933) 등 우리 민족이 일본과 제대로 싸움다운 싸움을 해봤다고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독립군의 지도자이고 참 군인이었다. 1940년 임정이 창설한 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조선 진공을 위한 군대 증강을 꾀하다가 해방을 맞았고 1947년 귀국했다. 제헌의원과 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애초부터 정치가 체질이 아니었던 그에게 외세 주도의 해방 정국과 정부 수립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차라리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는 1957년 병사했다. 그의 죽음을 읽으며 혁명가이자 군인이었던 이청천은 차라리 조국광복전쟁의 와중에서 숨을 거두기를 내심 원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이회영은 1932년 만주 대련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던 중 사망했다. 당시 상해에 거주하던 60대 후반의 노인이 만주군벌 장학량의 지원약속에 고무되어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주에서 무장투쟁 준비활동을 하겠다고 대련행 배를 탔다가 그만 밀정의 첩보를 받은 일본경찰에 의해 피체, 순국하였던 것이다. 광복을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죽음의 순간까지 고통이 뒤따랐을지라도(체포 후 10여일 동안 심한 고문에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은 혁명가다운 죽음이었다. 광복된 대한민국을 별 고민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자세를 가다듬게 만드는 그런 죽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