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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및 집합 장소 : 2014. 6. 30(월) 오전 07:30분까지 포이동 성당 앞 대로변
2. 산행 장소 :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청옥산(1,233m)
3. 인원 : 포이동 상당 산악회 회원 및 비회원 34명
4. 청옥산 소개 :
1) 위치 : 청옥산은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평창읍 고길리와 경계
2) 높이 : 1,233m
3) 특징 : 청옥산은 가리왕산에서 뻗어 내려간 주능선이 서쪽으로 중앙산을 일으키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다리를 놓은 듯 가로 질러 내려가는 능선 끝에 일으킨 산이 바로 청옥산이다.
청옥산은 곤드레 나물과 더불어 청옥이란 산채가 자생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비교적 평탄한 지형으로 그 면적이 볍씨 6백 두락이나 된다는 뜻에서 육백 마지기라 불리어 왔다.
청옥산 등산로는 육백 마지기 정상까지는 도로를 이용하여 접근하거나 기존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등산로에는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무공해 청정 산채들을 접할 수 있으며 청옥산 정상에서는 삿갓봉, 남병산, 가리왕산, 벽파령, 성마령 등 어디든지 닿을 수 있어 사통팔달이다.
5. 청옥산 등산 개요:
6. 6월 28일 갑자기 전라도 광주에 내려가야 할 일이 발생하였다.
큰누나의 8순 잔치가 있어서 무등산 단풍산장에 숙소를 정하여 놓고 밤이 지새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면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 것 같다는 큰 형의 전화를 받고 한동안 난감하여졌다.
광주에 내려가는 것은 확실하여졌으나 돌아오는 월요일 청옥산 산행 일정이 갑자기 안개 속으로 잠수하여버린 듯 불확실하여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날 광주에서 친척들과 만나 한 때를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느님의 큰 보살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다음날 청옥산 등정에도 이상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일요일 오후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내일(30) 청옥산 산행 준비를 대충 갖추어 놓고 파리베케트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려고 하였으나 내일 점심시간까지 변질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아 덥석 살 수가 없었다.
도시락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았고 몸도 피곤하여 그만 지쳐서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을 사리라 생각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월요(30)일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무더위 때문에 온실 효과가 상승하여 종일 찌는 듯 더위가 지속되리라 생각이 들었고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것저것 산행 준비를 하느라 06:50분에서야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배낭을 짊어지고 김밥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내가 늘 찾아갔던 김밥 집은 문이 닫혀있었다.
오늘 산행을 위한 집합시간은 오전 07:30분인데 시간은 촉박하여지고 예감이 불길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김밥 집이 어디에 있지? 하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중소기업은행 앞 양반 김밥 집이 생각났다.
다행이도 영업을 하고 있어서 김밥 두 줄을 사들고 집사람과 함께 집합장소로 이동하였다.
산행 차량은 서울 고속 관광버스로서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였으며 기사의 친절함은 다른 관광버스 기사들과는 차별이 있는 듯 보였다.
이미 도착하여 버스 좌석에 앉아 있었던 일행 중의 일부는 성당에서 자주 보거나 들어 보아서 설지 않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본당 식구들은 거의가 낮이 익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가끔 눈에 뜨여서 이번 포이동 성당 산악회 150차 산행을 계기로 더욱 더 그들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시계를 바라보니 이미 시간은 출발 시간이 지나 07:40분이 갓 넘어가고 있었다.
산악회 회장님은 마이크를 잡더니 버스에 승차한 인원을 점검하고 예상 인원을 초과하여 많은 회원들이 동참하여 준 것에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잊지 않았다.
이번 150차 산악회 회원들의 안전과 모든 회원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금요미사에서 신부님이 직접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오늘의 등산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내실이 충만하고 하느님과 더불어 하는 산행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산악회 대장님의 치밀한 산행 일정 소개가 진행되었다.
산행지도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지도를 보고 설명하는 모습은 리더 다운 기질이 풍부함을 직감할 수 있었으며 산사나이로서 산을 바라보는 현장감과 사고에 대처하는 기지와 순발력이 특출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같은 본당인 포이동성당에 다닌다 할지라도 여러 회원들과 직접 부딪치거나 대면을 하였던 적이 거의 없어서인지 서로가 서먹서먹하여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를 미리 감지한 회장님은 새로 오신 분들을 일일이 거론하시며 자기소개를 시켰던 탓으로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가는 것 같았는데 버스는 어느덧 평창군에 진입하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하여 이상이 없는 한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여 A팀은 우선 하차를 하고 B팀은 그대로 버스 좌석에 앉아서 육백마지기가 있는 고랭지 채소밭과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원시림을 거쳐 거의 1,000m 고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나와 집사람은 A팀이어서 청옥산 등산로 입구에서 하차하였다.
등산로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1:00시여서 등산대장님의 말씀대로라면 한 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만 걷는다면 청옥산 정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등산로 입구 주변의 해발고도는 600m 이상이어서 1,233m의 청옥산 정상까지는 그리 어려지 않게 정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느긋하게 음악을 들어가며 걸으리라 생각하였다.
나는 등산로 입구에서 우리 일행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화살표 안내 방향대로 진입하였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등산로 입구 왼쪽 도로가에 그림과 같은 집을 지어 살고 있었던 주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서 왔느냐며 묻기도 하고 아주 자상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여주는 것을 보고 대다수 일행은 아무 생각 없이 일러주는 방향대로 진입하고 말았다.
그 도로는 임도로서 차량이 이동할 수 있도록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도로 왼편으로는 계곡이 있어 맑은 벽계수 같은 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청정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을 상쾌하게 하였으며 산딸기가 도로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평소에 등산객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현직에 있었을 때 두타산과 청옥산을 종주하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머리에 떠올라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청옥산의 옛길을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MP3 음악소리가 경쾌하고 들렸고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하였다.
내가 청옥산과 두타산을 종주한 것은 15년도 전의 일이어서 산행 일정과 코스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지루하고 피곤한 산행이었다는 것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슴 한 곳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일행이 지나가고 있었던 이 길은 전혀 옛 추억의 느낌이 오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는데 15년의 세월이 흘러갔으니 변해도 한참이나 변했으리라 생각이 들었고 내가 과거에 지나갔던 길이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말마다 산을 종주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다졌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희미하게 시야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주말만 되면 대장으로부터 어느 장소로 모이라는 지령이 떨어졌고 지령을 받음과 동시에 각기 근무 학교가 다르기는 하였으나 어김없이 정확한 시각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운명처럼 지정한 장소에 정확히 모여들곤 하였던 추억들 아름답게만 나타났다.
서울 근교 산행을 모두 마치고 전국 산행을 쏘다녔던 추억들이 새삼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가끔씩 토요일 오후 밤 10시나 11시에 서울 양재동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발하여 설악산과 지리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산을 거르지 않고 등정하였던 기억을 되살리니 감개무량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밤 10시에 출발하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다음날 새벽 3시쯤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친구들과 백담사까지 묵언수행을 하는 승려들처럼 말없이 걸어갔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였고 오세 암을 거쳐 봉정 암을 오를 때는 70세 정도로 보였던 노인의 발걸음이 어찌나 사뿐하고 날렵하였던지 한동안 노인의 발걸음을 유심히 바라보며 감탄하였던 적도 있었다.
소청봉을 거치고 중청봉에서 대청봉을 향하여 다시 걸어갔을 때는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아서 수만 가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도 하였지만 오로지 땅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대청봉에 올라섰을 때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온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 고통이 엄습해 오기도 하였지만 순간의 고통이 지나고 나면 성취감에 도취되어 한동안 먼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나 자신이 성숙되어 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대청봉에 앉아 사색에 잠기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밤새도록 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산만이 나의 유일한 친구인양 등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산에서 배우고 찾으려 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면 우뚝 솟아있는 대청봉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현실이 두려워지기도 하였다.
다시 하산하여야 한다는 강박감이 온 몸에 엄습하여 왔을 때는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음양의 조화 속에 진행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감정의 기복이 사람을 단련시키고 강인한 인간으로 성숙하게 한다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기복적인 염원을 무시할 수 없을 경우에 무아의 경지를 직접 체험하여보고 산행을 하면서 뒷등에서 흐르는 땀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은 보약보다 더 값진 인생의 산 경험이라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새벽 3시에 출발한 대청봉과 공룡능선 산행은 때로는 16시간이 소요될 때가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오후 밤늦게 백담사에 도착할 무렵이면 지쳐서 녹초가 되어 넉 다운되고 말아야 하였겠지만 정신력으로 또다시 용대리까지 7km를 걸어야 하였다.
산행 대장이 직접 운전을 하였지만 지독한 독종이기도 하였다.
곧바로 운전대를 잡은 대장은 서울까지 가야하는 고행을 전혀 흐트러짐이 없이 이행하였다.
용대리에서 출발한 승용차는 문막과 여주와 이천서부터 지옥적인 정체가 시작되기 시작하고 양평부터는 살인적인 지체가 계속되어 몇 시간이고 운전대를 잡고 잠과의 싸움을 투지로 극복하여야 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배낭을 내려놓을 때는 보통 밤 12시이거나 새벽 한시 무렵이었다.
그러하니 사모님들이 남편들을 좋아할 리 없었다.
대장 보기를 눈의 가시처럼 여겼었다.
청옥산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길은 엇갈리고 있었다.
음악을 감상하면서 임도를 걸었던 들뜬 상쾌한 기분은 잠시였을 뿐 임도에서 왼쪽으로 꺾어지는 곳에 폐쇄되다시피 한 등산로가 나타났다.
청옥산 정상까지의 등산로를 알리는 푯말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미 폐쇄된 등산로 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 A팀은 각자가 내로라하는 등산 경험이 있는 베테랑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령층이 각기 달랐으며 형제님들보다는 자매님들의 수가 다 많았다.
형제님들도 어려운 나무 넝쿨이 욱어지고 돌 부스러기 천국인 고난도의 나무 숲 사이를 자매님들이 뚫고 개척하여 앞으로 나가기란 아주 힘이 겨웠고 골짜기로만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형제자매님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맨 앞 선봉에서 길을 개척하여 열어주는 형제님은 저보다 훨씬 연배가 많으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함에도 말없이 솔선하여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으며 나중에 인사조차도 하지 못한 채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였다.
대장님의 말씀대로 12시 30분이나 오후 한시 무렵이면 청옥산 정상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골짜기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골짜기 숲 속에서 하늘을 가리고 있는 나무 가지들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고 일기를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일기가 고르지 않다는 것만은 예감할 수는 있었다.
약 두 시간 동안을 산속 골짜기에서 등산로를 찾느라 헤매다가 능선을 찾아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다보니 임도가 나타났다.
임도에 올라선 그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기도 하였다.
겨우 일행 모두가 골짜기에서 빠져나온 후의 감정은 가지각색이었겠지만 죽음 일보 직전까지 다다랐다고 한마디씩 하는 것으로 보아 고생이 많았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임도를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삼거리가 나왔다.
삼거리까지는 포장이 되어 있었고 삼거리에 우리가 타고 왔던 관광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B팀은 이미 이곳 삼거리에서 청옥산 정상까지 산행을 하였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 A팀은 청옥산 정상에 올라가기도 전에 골짜기를 빠져나오느라 힘이 소진되어 기진맥진하여 삼거리에서 주춤하고 있었다.
여기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가 소나기는 아닌 듯 보였으나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어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화창하였던 날씨가 돌변하여 먹구름으로 하늘을 덮고 있었으며 뇌우와 함께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일행이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 비가 갑자기 쏟아졌더라면 사고로도
이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가슴을 쓸어안고 말았다.
금요일 날 밤 신부님이 미사 중에 특별히 산악회 회원들의 무사고 귀환을 위하여 기도를 하였다는 회장님의 말이 떠올라 역시 신부님의 기도 효험을 톡톡히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비가 그치기만을 무한정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도로 가장자리에 자리를 펴면서 분위기는 다시 무르익어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광주에서 올라오기는 하였으나 시간이 지체되어 도시락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다음날 아침에 김밥을 사가지고 산행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성당 형제자매님들은 각가지 반찬과 돼지고기 수육까지도 이른 새벽에 준비하여 배낭에 넣어 등에 짊어지고 산을 오르셨다.
여기에 무거운 술과 음료수는 물론 상추와 고추까지도 가지고 온 것을 뒤늦게 서야 발견하고 나는 그만 감복하고 말았다.
가벼운 물 한 병까지도 줄여보려는 산행에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어떻게 높은 산을 오르셨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등산로를 찾지 못하여 땀을 흘리며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때의 고통이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던 때와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무겁게 짊어지고 올라온 음식 한 가지라도 같이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랑과 호의를 먼저 베풀어주는 풍족한 형제자매님들의 마음이 너무 인상적이고 가슴에 각인되어서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둥그렇게 둘러 앉아 맛있게 식사를 하는 모습이나, 자신보다는 주변을 먼저 배려하려는 호의와 성의가 영락없이 하느님의 종 그 자체로 보였다.
이러한 사랑을 베풀어가는 포이동 성당이야말로 주변의 등불이 되리라 확신이 들었고 영원히 발전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포이동 성당 안토니오 이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