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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은 호해의 고도
가는 해와 오는 해 보내고 맞기를 함백산과 태백산에서 해온지가
벌써 여러(두자리 수) 해째다.
내 연중 붙박이행사가 이 일과 1월 셋째주말의 백록담 상봉이다.
근년에는 소백산이 앞 혹은 뒤에 첨가되어 삼백산(三白山) 행사로
확대되었는데 이번만은 부득이 소백을 제외하게 되었다.
고장중인 몸 때문이 아니라 평해대로 스케줄이 겹쳐서다.
늘 해오던 대로 이백(二白)프로를 탈 없이 마친 후, 곧 태백역에서
강릉행 영동선 열차에 올랐다.
늙은 나그네의 2009년 일정은 새 해 초하룻날부터 바삐 돌아갔다.
강릉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옛 관아를 일일이 살폈다.
앞 5회 글에서"복원중인 객사문과 임영관, 칠사당 등 옛 강릉관아
일대는 살펴볼 기회가 다음 스케줄에 있다" 말한 그 스케줄이다.
이번에 한해 소백산이 제외된 이유이기도 하고.
객사문(客舍門), 임영관(臨瀛館),칠사당(七事堂)을 비롯해 전대청
(殿大廳), 동대청(東大廳),중대청(中大廳),서헌(西軒) 등이 복원을
완료했거나 복원중이다.
강원도내 옛 건축물중 유일한 국보(제51호)인 객사문을 들어서면
임영관(사적제388호)이 우뚝하다.
궐패(闕牌), 전패(殿牌)를 모셔놓은 강릉부 객사다.
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단속에 관한 일 등, 7가지
정사를 보았다는 칠사당은 강원도유형문화재 제7호다.
강릉관아 객사문(상), 임영관(중1), 칠사당(중2), 관아조감도(하)
강릉의 최초 이름은 '하서랑' 혹은 '하슬라'란다.
고구려15대 미천왕(美川) 14년(AD313) 때부터.
그 후, 명주(溟州), 동원경(東原京), 하서(河西), 경흥(慶興)등으로
개명을 거듭하다가 고려24대 원종(元宗)때 비로소 강릉이 되었다.
'임영'(臨瀛)은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때 얻은 강릉대도호부(江陵
大都護府)의 별호(別號)라고.
관동8경의 1인 경포대(鏡浦臺)가 있는, 바다에 임해 있다는 뜻의
임영 도시 강릉의 이미지는 변함없이 호해(湖海)의 고도(古都)다.
실망스러운 평창
첫 버스편으로 도착한 횡계땅이 아직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 대기한 터미널은 지난 번에 어이없는, 참으로 몰(沒)경우의
해프닝이 일어났던 곳이다.
승객을 위한 배려는 커녕 책임회피, 전가에만 급급해도 콤프레인
(complain)이 없는 신기한 지방이다.
그럼에도, 1970년대 이맘때(겨울)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지금은 흔적도 없을 뿐더러 가늠마저 되지 않는 스키-마니아의 집
대관령산장의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 생각이 왜 간절해 왔을까.
야간스키를 즐기고 돌아와 용광로에 다름 아닌 페치카(pechka)
앞에 둘러앉아 오징어다리로 30도 두꺼비를 마구 죽이던 때였다.
앞은 열대인데 반해 등쪽은 시베리아벌판이지만 마냥 흥겨웠다.
당시에는, 진부령과 횡계의 두곳 스키장중 리프터(lifter)가 설치된
후자쪽을 선호하여 뻔질나게 드나들었건만 어느덧 추억먹고 사는
늙은이가 되어버렸기 때문?
주위가 분간되는 시각에 훌훌 털고 거리로 나갔다.
월정사 입구 월정거리(月精巨里) 30리길, 평해대로가 시작된 것.
차항리를 지나 유천리에서 월정거리마을(간평리)에 들어섬으로서
대관령면에서 진부면으로 진입했다.
국립공원 오대산의 노른자인 진부는 물(水)의 땅이다.
한강의 한 근원이며 조선 삼대 명수의 하나인 오대산우통수(于筒
水)와 방아다리약수가 그 대표다.
역조실록(歷朝實錄)을 보관한 월정사옆 사고(史庫)와 평해대로의
연관성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로 인근에 사고를 지었는가 사고 부근으로 대로를 만들었는가.
대로 주변에 사고들이 있는 것이 우연인가.
평창군(平昌)의 BI(Brand Identity)는 <HAPPY 700>이다.
해발 700m지점이 가장 행복한 고도(高度)라는 뜻이란다.
그러나 고백컨대 나는 평창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우선, 다툼의 소지가 다분한데도 일방적인 대관령면 개명이다.
오대산(우통수)이 한강발원지라는 주장도 억지에 다름 아니다.
'해피700'이라는 BI도 그러하다.
전국 기초단체중 3번째로 광대하나 인구4만4천에 자립도 19%에
불과한 현실 극복의 자세에 문제있다는 말이다.
700m 고지대의 행복 실현에 소요되는 비용은 고려하지 않는가.
동계올림픽 3수중인 것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이다.
평창군은 물론, 광역시.도중 지립도 23%로 최하위인데도 천문학
적인 빚으로 해보겠다고 고집세우는 강원도 역시 무책임하다.
동계올림픽 개최지들 여행중에 확인한 것은 저투자에도 고수익을
보장하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자본이 없고, 불안한 자연과 불확실한 기대수익 임에도 재수,
3수하면서 책임전가에 열올리는 그들이 실망스럽다.
상환능력이 없으면서도 빚으로 호화생활 하겠다는 배짱같아서다.
진부의 추억과 청심대 미스테리
월정사, 진고개길 6번과 456번도로의 접점 월정삼거리로 나왔다.
중무장을 했으나 시려오는 코는 어쩌지 못해 갑갑해도 머플러로
둘러싸고 걸어야 했는데 자유로워졌다.
해결사는 역시 햇볕이다.
오대천(월정교)을 건너 진부역(珍富驛)이 있던 하진부로 나갔다.
2002년, 월드컵축구경기가 경향각지에서 열리고 있던 어느 날 밤,
백두대간 종주중에 도착했던 곳이다.
거리의 대형 모니터 앞으로 모여든 군중의 함성은 도농 불고하고
온 국민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월정사 입구 삼거리
이 시기에, 서울을 떠나 이곳 상진부에 정착한 P는 이단처럼 백두
대간에만 올인하고 있는 늙은이의 편의를 위해 헌신적이었다.
얄궂게도 우리팀 경기가 있는 날마다 그는 나를 위해 차를 몰았다.
대관령과 진고개 등 상거가 꽤 먼데도 손수 지은 자기집 황토방을
나의 대간 기착지로 삼게 하느라.
P가 어느 날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그가 있어 늘 가깝고 편한 진부였건만 그가 가버린 후로는 아득히
먼 이역만리에 다름 아닌 땅이다.
신년 초부터 진부가 송어축제로 들떠 있는가.
오대천이 모여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대천을 끼고 청심대점(淸心臺店:진부면 마평리)으로 가는 평해
대로는 59번 국도로 거듭났으나 여전히 한가로운 시골길이다.
동으로 오대산 제봉을 응시하며 우뚝한 남반도의 제5고봉 계방산
(桂芳1577m)이 남으로 뻗어 만든 백적산(白積)의 여맥이 멈춘 곳.
인락원(仁樂院)이 설치되었던 마평리(馬坪)의 도로개설로 잘려난
오대천변 각지(角地)에 청심대(淸心臺)가 서있다.
강릉대도호부사 양수(大都護府使梁需)의 부실(副室) 청심이 투신,
산화한 지점이란다.
청심대(상, 중1, 중2), 청심사당(하)
내직으로 영전하는 부사를 따라 강릉에서 예까지는 왔으나, 더는
동행할 수 없는 기녀(妓女)임을 비관하여 오대천에 투신했다나.
이 곳에 여러 해를 머물며 희소식을 고대했으나 끝내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투신했다고도.
아무튼, 그녀의 정절을 기리고자 남상철(南相哲)외 107인 진부면
유지의 성금으로 1927년에 대를 창건하고'청심대'라 명명했단다.
이조3대 태종때(1418년)의 일이라고 중건기(重建記)에 적혀있다.
한데, 강릉대도호부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고위관리다.
임진(任辰)~무술(戊戌)간, 6년 봉직했다는 그의 행적이 묘연하다.
1418년은 세종에게 선위한 해였으므로, 정상적이라면 승차(陞差)
했을텐데 세종조의 기록들을 뒤져도 양수는 보이지 않는다.
미색 관기가 목숨을 걸었다면 범상한 사또는 아니었을 것인데.
청심대 미스테리(mystery)?
21세기의 진짜 청심대 미스테리가 방송을 탔단다.
(2006년?: MBC-TV의 놀라운 세상)
문이 꽁꽁 잠기게 된 청심사당(祠堂)과 관련된 이야기다.
2001년 한 청년이 청심대를 다녀간 후 마을 청년들이 석연치 않은
사고로 연이어 죽어갔다.
온 마을이 공포분위기인데 이장(里長)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청심사당 안에 있던 청심의 영정이 없어진 것.
영정 도난이 원인이라고 믿은 마을은 2003년에 영정을 복원했다.
그 후, 사고가 잠잠해짐으로서 청심의 한(恨) 때문이라고 생각한
마을에서는 매년 9월 28일 청심사당에서 청심제를 지낸단다.
사당문에 자물쇠가 달리게 된 까닭이기도 하고.
삼척시 원덕읍 신남리 해신당과 맥이 흡사한 사건이다.
청심대에 오르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소름이 끼쳤을까.
해당사항 없는 늙은이인데도?
평해대로 스케치5(대화)
청심대점은 인락원의 개명일까.
아는 이를 찾기는 고사하고 말 상대가 없다.
청심대에서 수향, 장전, 양계곡을 거쳐 정선쪽으로 달아나는 59번
국도를 놓아주고 늙은이는 모릿재길 6번군도 걷기를 재촉했다.
길가, 평범한 주택 2층방머리에 붙은'喜留堂'현판에 눈이 끌렸다.
누군가 나오길 기다려 내력을 물었더니 맥빠지게도 아무 뜻 없이
그냥 걸어 놓았을 뿐이란다.
하긴, 누군들 방안에 기쁨이 늘 차있기 바라지 않겠는가.
희유당
그나저나, 간밤 이후 입때껏 아무 것도 먹지 못하였는데 산속으로
갈수록 먹을 것이 있겠는가.
평창이 송어회로 유명하다 해서 그런가.
맞닥뜨리는 집마다 온통 회집뿐이고 그나마도 정초탓인지 모릿재
직전의 마지막 식당까지 모두 문들이 꼭꼭 잠겨있다.
신년초일 뿐 명절이 아니므로 설마 했는데 소정의 염려대로였다.
역시 무비유환(無備有患)이다.
899m모릿재를 넘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지만 인도가
없는 터널을 통과할 일이 옥계의 방재처럼 난감했다.
잠시 쉬며 궁리중인 내 앞에 한 소형 승용차가 멎고, 차에서 내린
젊은 한쌍이 고맙기 그지 없게도 권했다.
"할아버지 타세요"
조금 전에 청심대쪽으로 가다가 고개를 오르는 나를 보았다는 것.
신리 대로(31번국도)까지 모시겠다는 그들의 호의는 고마웠으나
한적한 산간길이 천천히 걷고 싶게 마냥 평화로워 보여 사양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건만 허기가 분위기에 우선하지는 못하는가.
모릿재 옛길(상)과 터널(하)
그러나, 신리마을에 있다는 식당을 기대하고 한동안 참을 수 있었
는데 식당은 휴업중이고 구멍가게 하나도 없으니 어쩐다?
신리는 자기네 지역에 서울대학교 농업생명대학 첨단바이오 연구
단지가 들어온다고 축제분위기지만 내 안중에 들어올 리 없다.
시장할 수록, 오로지 먹기 위해서 더 빨리 걸어야 했다.
우리를 찡하게 했던 "배고픔을 잊으려 달렸다"던 어느 여자단거리
선수의 고백이 와닿았으니까.
대화면 다운타운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동고속국도의 개통(1975년)전에는 경강교통(京江)의 요지였고
예전에는 평해대로 대화역창(大和驛倉)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산지가 많고 농경지가 적기 때문에 영세농이 전체 농가의
80%이상이라는데, 옛날에는 더했을 텐데 역창이 들어선 까닭은?
대화면의 자랑은 금당계곡인가.
독립된 산줄기, 산중의 섬이라는 금당산과 그 계곡을 내세운다.
평창군내 열두 마을을 흐른다 해서 십이개수라고도 부른단다.
많은 담수어종의 서식지이며 인기 래프팅지로 홍보하고 있다.
규모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한 대화장(4,9일)터를 지날
때, 그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평창人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문득 떠올랐다.
특히, 걸리는 대목이.
동업자 허생원과 조선달의 대화다.
<"봉평장에서 한 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이 있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겠네. "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걸."
. . . . .
. . . . .
내일은 진부와 대화에 장이 선다.
. . . . .그 어느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된다.>
재미 보지 못하면서도 거를 수도 없는 봉평장에서 한 몫 기대하고
밤길을 걸어야 할 대화장은 내일이 아니라 내내일이다.
(옛부터 봉평장 다음 날은 진부장이고 다다음 날이 대화장이니까
진부장, 대화장, 평창장으로 돌아갔던 것인데)
아마, 이효석이 날짜를 착각했던가 보다.
대화장터
평창 해프닝
대화면소재지 하나로마트에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래고 저번의
약속대로 황토방 소정네에 전화했다.
약속이란 운교리 수가솔방(찜질)에서 그 가족이랑 보내기로 한 것.
그러나 계획을 변경했으니까 따라달란다.
"새 해 벽두인데 노인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찜질방이 웬말이냐"는
판타지(fantasy)소설가인 딸 '뽀'의 권(勸)이란다.
아무튼, 방림까지는 갈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대화리 이후에는 하안미리가 용평면 장평을 거쳐온 31번국도따라
방림삼거리 한하고 계속된다.
대화 문화마을이 이름처럼 컬쳐럴(cultural)한 느낌이다.
하안미사거리에서 평창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당계곡이다.
방림삼거리에 도착할 무렵부터 해가 백덕산 문재너머에 걸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삼거리 중앙에 검문소가 있다.
필(feel)에 따르는지 오가는 차량들중 선별해서 검문을 하고 있다.
검문 당하는 쪽은 기분이 좀 상하겠다.
어둡기 전인데 음주측정기를 들이대면 더 그러겠다.
잠시 그런 장면을 보고 있는데 저 경찰들이 돌연 호패를 조사하던
옛 기찰(譏察)로 둔갑하는 듯 했다.
옛길에 집중한 탓일까.
방림삼거리에서 31번국도는 평창읍쪽으로 가고 42번국도가 방림
(芳林)면소재지를 거쳐 횡성, 원주로 나아간다.
어둠과 거의 동행, 방림 다운타운에 도착했으나 약속한 훈(勳)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소통(疎通)에 장애가 온 때문이다.
이 지역 상황에 서툰 사람간의 통화의 결과다.
내가 예상보다 빨리 방림삼거리를 통과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
그가 방림삼거리에서 나를 맞으러 대화 한하고 달려갔다니까.
전번에도 하마터면 큰 고생할 뻔 했다.
그와의 도킹(docking) 지점을 방림터미널로 정했는데 내가 깜박
조는 사이에 버스가 통과해 평창읍까지 가게 되었다.
버스기사의 호의로 곧 방림 경유의 버스에 환승하려는 참에 그가
불쑥 나타났다.
그는 도킹장소를 평창읍터미널로 알고 있었던 것.
내가 졸지 않았거나 평창에서 방림행버스를 바로 탔더라면 밤중에
방림과 평창읍 양쪽에서 각기 목이 마냥 길어질 뻔 했으니까.
잠시 졸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던 것.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