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우먼파워<< 백제 건국한 고대사 최초의 여걸
황원갑...소설가,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召西奴 소서노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남성 못지않은 기개와 역량으로 국운을 개척하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걸출한 여장부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의 위대한 업적은 그러나 '남존여비'라는 유교문화적 전통의 대물림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있었다.
새로운 21세기, 여성의 시대를 맞아 그동안 베일 속에 가려져있던 우리 여걸들의 삶을 백일하에 드러내어 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시조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온조왕(溫祚王)이 아니라 그의 형 비류(沸流)라는 이설도 있고, 또제 는 이 두 형제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라는 이설도 있다. 일부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인데, 이들의 이 내세우는 건 <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의 기록이다.
우리 고대사는 대부분의 기록이 멸실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도 불분명해서 정확한 복원이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기록만으로도 몇 가지 사실은 추정할 수가 있다. 첫째는 백제의 뿌리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을 이은 부여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둘째는 비류와 온조가 분립한 두 개의 백제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이들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동명성왕(東明聖王)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함께 건국했으며, 뒷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하하여 새 나라를 세운 백제 건국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백제의 국모 소서노야말로 우리 고대사에 등장한 최초의 여걸이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기록 일부와 재야 사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뼈대로 삼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걸이요, 어쩌면 최초의 여왕이었는지도 모르는 소서노의 생애를 재구성해본다.
<삼국사기>는 소서노의 가계에 대해 그녀의 아버지가 부여왕, 또는 졸본 사람 연타발이요, 전 남편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요, 나중 남편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라고 했다. 그리고 온조와 비류는 동명성황 사이의 소생이 아니라 소서노의 전 남편 우태의 소생이며, 뒷날 고구려가 건국되자 북부여에 있던 동명성황의 본처 예씨(禮氏) 부인이 낳은 아들 유리(孺璃)가 찾아오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떠나 백제를 세웠다고 했다.
이 기록이 전하는 바는 분명하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에 내조가 컸으므로 소서노를 왕비로 삼고 비류와 온조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그런데 장차 동명성왕이 세상을 뜨고 북부여에서 찾아온 유리가 임금이 되면 의붓자식인 비류와 온조는 물론이요, 왕비에서 하루아침에 후비 자리로 전락한 어미니 소서노의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 찬밥 신세가 되기보다는 멀리 떨어진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해서 두 형제는 어머니와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미추홀에서 새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곧 백제 건국사의 자초지종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기록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고구려를 떠나는 일을 주동한 사람은 맏아들 비류요, 따라서 백제의 시조도 온조왕이 아니라 그의 형인 비류왕이 정확하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도 하남 위례성이 아니라 미추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남 위례성은 오늘의 서울 강남설과 충남 천안 직산설 등이 있고, 미추홀도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한 인천이 아니라 충남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라는 이설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해본다.
한 무리의 인마가 오늘의 만주땅 졸본성에서 남하를 시작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부자에게 쫓겨나다시피한 이들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들어선 이후 계속 살기좋은 땅을 찾아 남쪽으로 남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미개한 원주민의 습격도 받고, 도중에 사고나 병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가운데 살수(청천강)를 넘고, 패수(대동강)와 대수(예성강)를 건너 마침내 아리수, 오늘의 서울 한강에 이른다.
형인 비류왕은 내륙보다는 해안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강줄기를 찾아 서쪽으로 이동을 한다. 넓은 강변이 살기는 편해도 강적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적으로 공격을 당하면 재빨리 배를 타고 도망칠 수 있는 해안 지역에 근거를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젊고 패기만만한 아우 온조의 생각은 달랐다. 이왕 나라를 세울 것이면 농사에 소출이 많을 드넓은 강변 평야에 자리잡는 것이 좋고, 강적이 쳐들어오면 싸워서 물리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처음 세운 작고 힘없는 나라 십제는 둘로 갈라서게 된다. 해안의 비류백제와 내륙의 온조백제로.
두 형제의 어머니 소서노는 어느 편도 들 수가 없어 크나큰 비탄에 빠진다. 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두 아들을 거느리고 남하해 십제를 세운 여걸이었으나 그녀의 최후는 두 아들의 골육상쟁으로 인해 비극으로 끝난다. 두 아들의 나라를 오고가며 달래고 야단치고 했지만 어느 쪽도 승복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류의 온건파도, 온조의 강경파도 더 이상 국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
소서노는 최후의 방법을 택한다. 어느날 밤 그녀는 다섯 명의 용사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비류왕의 미추홀에서 강물을 따라 온조왕의 위례성으로 잠입한다. 작은 아들 온조를 감사고 도는 십신 가운데 강경파 몇 명을 제거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맏아들 비류에게 기울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난전이 벌어져 남장한 국모 소서노는 창칼에 맞아 죽고 만다. 그해가 서기 6년(온조왕 13년), 그때 그녀의 나이 61세였다.
<삼국사기> 온조왕 13년조에 이런 기록이 있다.
'2월에 왕도에서 노파가 사내로 변하고 다섯 호랑이가 입성하니 61세의 왕모가 돌아갔다(春二月 王都老軀化僞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그 뒤에 비류백제는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버렸고, 온조왕만이 백제의 시조로 남게 되었단다.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걸이었던 소서노는 한많은 생애의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건국한 백제는 한때는 동북아 최대 강국이요 자신의 뿌리였던 고구려와 맞서 고구려의 도성 평양성을 공략하고 임금을 전사시키는가 하면, 한때는 중국대륙의 요서지방과 양자강 유역 및 왜 열도를 식민지로 경영하는 부국강병의 나라, 해양강국으로 성세를 떨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