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미술사적인 흔적, 융성했던 고전주의 문학과 초기 자본주의의 실마리.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유산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어찌됐든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는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불과 백 수십 년 전만 해도 왕국 깊숙이 영국의 영토가 있고, 남부에는 독립 공국이 버티고 있으면서 지방마다 제각기 관습과 종교를 가지고 때마다 툭탁거리던 나라. 그 나라가 부르봉 왕조에 이르러 하나의 국가로 정비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왕조의 역량을 자기 대에서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 따라서 후계자가 될 두 왕은 이미 자체적인 생명을 가진 프랑스 국가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었고, 그 허울을 걷어내고 ‘국민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는 루이 14세가 죽은 뒤 겨우 70년이 필요했다.
한국사의 인물 중에서 루이 14세와 가장 비교되는 인물은 누구일까? 광개토왕? 고려 광종? 연산군? 뜻밖에도 지금까지 나와 있는 학술논문을 기준으로 하면 그처럼 한 시대를 진동시켰던 군주가 아니고, 군주조차도 아니었던 사람, 효명세자(1809~1830)다. 효명세자와 루이 14세를 비교한 논문이 여러 편 나와 있는데, 다만 두 사람을 철저히 비교했다기보다 무용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을 비교한 것들이다. 루이 14세가 발레의 진흥에 앞장서고 직접 발레에 출연까지 했듯, 효명세자도 병자호란 이래 궁중연회에서 사라졌던 정재(呈才) 무용을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현존하는 정재 53종 중 30종 이상이 효명세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무용에 열정을 쏟은 동기 또한 두 사람이 엇비슷했다. 루이 14세처럼 효명세자도 세도정권의 압박을 받던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조선을 국왕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나라로 개조하려 했다. 이미지와 예법을 권력 강화에 활용하는 것은 본래 동양의 장기였고 보면, 왕권 강화에 부심했던 두 사람 모두 무용의 효과에 착안했음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래도 결정적 차이를 갖고 있었다. 루이 14세의 이상이 알렉산드로스 같은 정복자, 아폴로 같은 초월적인 존재였다면 효명세자의 이상은 요순과 같은, 또는 세종이나 정조와 같은 유교적 성인군주였다. 효명세자는 루이 14세처럼 놀라운 볼거리를 제공하기보다 유교 경전 공부와 수신에 힘쓰라는 압박을 크게 받았다. 더구나 그에게는 루이 14세처럼 정치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배출할 길도 없었다. 결국 루이 14세는 수십 년 동안 절대군주로 행세한 끝에 심신이 무너진 반면, 효명세자는 부왕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 지 불과 4년 만에 심신쇠약으로 죽음에 이른다. 군주란, 그리고 최고지도자란 역사에 놀아나는 광대와 같다. 하지만 그 광대짓의 범위와 정도는 역사 나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