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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한국의 택일연구의 상례편에 수록하고자 동국대학교 육임학문의 대가이신 이수동 교수님이 부탁하시기에 작성한 글입니다.
❍ 기로의 崇祖精神, 火葬文化의 弊端
모든 生命은 生하면 멸(滅)하는 것이 필연(必然)이다.
인간이 사망하면 좋은 터, 장자승생기야(葬者乘生氣也장사는 生氣에 의지해야 한다)에 장사를 하는 것이 유구한 세월동안 관습(慣習)으로 이어왔는데 급기야 10년도 안 되는 기간에 화장(火葬)이 사회적 관행처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과연 필요한 장례문화인가? 전반적 사회에 미치는 파장의 과실은 어떤 것인가? 심도 있는 공론도 없이 오직 行함에 있어 불편함이란 이유와 무관심으로 숭조정신(崇祖精神)은 근본부터 존립(存立)이 난망(難望)한 지경에 이르렀다.
본인이 우려한 것은 수백 년 동안 지켜왔던 崇本精神이 하루아침에 청산(淸算)되어야할 쓸모없는 유산(遺産)이었던가? 잘못된 인식(認識)에 대한 분노이자 두려움이다. 유구한 세월동안 조상님 봉향(奉香)과 산소관리를 절대적 책임의식으로 알고 어려운 형편에도 정성을 다하여 이어온 전통이 쓸모가 없는 무가치로 전락하였으니 오늘날 정치지도자 종교인 교육자 사회지도층 부모들의 역할이 제 기능을 다 하였는지 대오각성(大悟覺醒)이 있어야 한다.
위기는 곧 탈출해야 살수가 있다. 훌륭한 정신은 지킴이 옳은 것이며, 또 물이 흐르듯 자손들에게 전수되어야 하는데 작금에서 끊기게 되었으니 70성상 넘게 살아온 자로서 앞날이 매우 걱정스럽기에 조금이라도 공감을 얻는다면 헛수고는 아닐 것으로 위안을 삼겠다.
숭조정신은 건강한 국가, 건강한 사회의 주춧돌이 되어왔다.
근거는 역사가 증명한다. 주변국 일본국민은 신사숭배가 남다르다. 오늘날 일본을 강국으로 지탱하게 할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세계에서 기독교인구가 극소수인 일본이다. 그렇지만 그분들은 조상의 신을 압도적으로 숭배하면서 세계가 인정하는 강국이 되었다.
한국처럼 사찰(寺刹), 예배당, 성당의 시설이 잘된 나라도 흔치 않을 것이다.
캄캄한 밤에는 은하의 별처럼 십자가의 광체(光體)는 빛이 나는데 또 목탁과 범종이 울려 퍼지는 사찰은 부지기수인데 왜 사회의 병폐(病弊)와 범죄는 날로 증가하는가? 종교(宗敎)가 존립할 목적은 당연 죄를범하지말자 착하게 살자 어려운사람 돕자 지향(志向)한 목적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시설이 확장되어도 사회의 병폐는 비웃기라도 하듯 늘어만 가는데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복합적인 성향이 있겠지만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人性敎育의 不在가 오늘날 병폐(病廢)를 심화시킨 원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見解)이다.
날마다 TV에서는 위험의 극치인 사건 사고가 봇물 터지듯 보도된다. 그래서 지식에 앞서 인성교육은 배양(培養)되어야 옳다는 것이다. 잘못한 학생을 체벌하면 폭력으로 처벌받는 세상에서는 청소년들의 심성을 바로 잡아줄수가 없다. 체벌과 폭력은 분명 다르지만, 자식을 잘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는데 학생이 말을 안 들을 때 반성하고 뉘우치게 하여 바른 인격으로 거듭나도록 한 교육은 선생님들의 의무라 믿고 학부모님들은 제발 설치지 말고 선생님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사표(師表)의 정의는 거듭날 것이다. 또 선생님 중 자격이 없는 분들은 교단에 계시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오늘날 교권의 권위(權威)가 이토록 추락한 인과(因果)는 선생님들의 책임도 매우 많다는 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몇 년 사이 화장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더불어 납골당 묘장도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정책적 장려와 지원도 있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때로는 실수도 감안될 수 있겠지만 납골당은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라 조상님과 부모님의 유체를 모시는 묘지(石堂)의 장소이다.
그런데 시설의 전문성과 관리가 허술하여 여러 문제점이 노출된 바는 기 알려진 사실이다. 거금을 투자하여 납골당을 축조한 분들은 풍수사상의 담겨진 중요한 가치는 보려하지 않고 외부로 나타난 장점만을 골라 들먹인다.
◦산재(散在)한 조상님 묘소를 한곳에 뫼시게 되어서 바쁜 세상 여러 곳에 갈 필요가 없고,◦한 장소에서 합동제사를 모실 수 있어서 비용절감과 더불어 벌초를 할 필요가 없다. 최상의 묘장이라고 둔갑(遁甲)된 논리를 강조한다.
간편성만을 골라 말하면 장점이 많다 할 수 있겠다.
본래 진귀한 보물은 허술하게 보관할 수 없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풍속이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보관을 잘하려면 노력도 배가 되어야하고 시설도 좋아야 한다. 허술한 관리를 하면 보물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비유법이 될지 모르겠지만 조상님 묘소관리와 승조정신도 이와 같은 정성이 없으면 지켜낼수 없는 것이 된다.
火葬을하게 되면 DNA가 파손된다는 상식은 다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상님과 동기감응(同氣感應)은 파기(破棄)되어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즉, 음택 운기를 받을 수 없으니 풍수학설로 본다면 좋은 후손이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국가적 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인재출산은 제품생산(製品生産)이 아니다 인과(因果)로 인한 태생(胎生)이라서 머리가 아무리 좋은 인간도 이 문제는 넘 볼수 없는 즉 신의 영역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집안간 혼사(婚事)때 그 집안에 뼈대가 있는가를 매우 중시했다. 참 뜻은 명당 묘소가 있느냐의 물음이다. 명당이란 조상님 체백(體魄)을 오랜기간 보존하고 그 氣運이 직계후손에게 미치면 가풍(家風)이 번창할 것으로 믿는 것이 풍수지리의 근본 바탕에 깔려있다.
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고 잘 살고 출세하고 현덕(賢德)한 아내를 만나고 훌륭한 자식을 두기를 희망(希望)한다. 희망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될지언정 그게 어디 쉽게 될 일이 아니다. 어렵기도 하고 가능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의 팔자인연법이다. 그 차별(差別)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묘소의 등급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구분할 방법은 풍수학문이 일조를 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집터는 살기 편리한 기능과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의 차별성이 강하여, 경제적 가치도 다르다. 잘 꾸민다 하여 그 집터가 좋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땅에 뿌리를 뻗지 못한 나무는 성장할 수 없듯이 모든 생명체는 土에 의존하면서 일생을 살다가 마감한곳도 土라는 환경에서 종말(終末)을 고한다.
그만큼 土란 가치가 중차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陽宅(집터)과 陰宅(묘지)에도 그대로 적용할 법칙인데 집터는 본인들이 살고 있기에 귀한 가치로 알고 경제적 여력에 따라서 관심도가 높지만, 정작 음택의 존귀한 가치는 외면하고 홀대를 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눈으로 볼 수가 없으니 玉石을 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발음(發蔭)을 있게 할 조상님이 계시는 환경을 중시할 의식(意識)이 없으니 요즘 火葬이 성행한 것이다. 因緣의 고리는 8字와 같이 연결되는데, 화장을 하게 되면 인연의 고리가 끊어진 것으로 본인은 알고있다.
본인은 풍수지리 공부하기 전, 조부님 아버지 묘이장(墓移葬)을 하였다 대부분 나이가 들고 경제적 형편이 좀 풀리면 묘소를 들먹이는 세속(世俗)처럼, 본인도 자손된 도리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6대조〜증조님까지 계시는 선영산에 조부님과 아버지 묘소를 이장하게 된다.
본 장(章)은 본인과 같은 생각으로 묘소 이장을 하실분께 소중한 경험담이 될 내용이라서 지면(誌面)을 할애(割愛)하니 이해주시기 바란다.
당시는 풍수지리 학문 자체를 알지못하였으며 또 지관(地官)을 초빙하는 준비도 간과(看過)하였다. 다만 윗대 조상님이 계시는 산소에 묘지를 조성하면 좋겠다는 판단이 전부였기에, 그때 어머님께서 고향의 암자(庵子)에 계시는 스님을 모셨왔는데 스님과 일하신 분들의 의견에 따라서 묘장을 하였으니 좌법(坐法) 수법(水法) 풍수의 기본도 적용될리 없었다. 훗날 본인이 풍수공부를 하고 난 후 스님은 풍수상식은 全無였구나 인지하였다.
이장하고 2〜3년 후 무렵 증권회사 장모지점장 후배로 부터 주식투자 제의(提議)를 받게 된다. 내 인생의 큰 시련의 올가미가 된 인연(因緣)이다.
처음 1억 투자로 1주일에 6천만의 순익이 발생하였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는가? 주식투자가 이런 것인가 달콤한 맛을 크게 느꼈다. 처음부터 손실의 쓴맛을 알았다면 그 많은 돈을 탕진하지는 안 하였을 것인데, 생각해본들 부질없는 짓이지만, 만 3년 만에 10억의 재산을 날려버리니 가늠하기 힘든 공황상태로 시련의 굴곡에서 허우적거린 내 삶의 아픈 실화(實話)임을 밝힌다.
일주일에 6천만원의 실익을 얻게 되었어도 시비한자 없고, 또 국가에서 부정한 돈이라고 뒷조사 할 일도 없으니 좋은 돈벌이가 아닌가? 믿는 것이 우환(憂患)의 올가미에 걸린 것이다. 처음 6천만원의 이익에 안주하지 않고 뱃장을 부려 1주일만 참았더라면 1억 5천만원 순익이 발생할 수 있었는데 매도타임을 빨리 잡았구나. 주식의 마력에 깊숙이 빨려들어 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1억 5천만원 돈이 1달 만에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잠시 손실일 뿐, 회복할 것으로 만 믿었다. 열심히 주식투자 공부하고 경제신문도 보았건만, 내가 투자한 주식은 미끄럼만 타는 것이다.
집사람은 이제 그만두세요. 만류해도 통장에 있는 돈은 다 글거모아 주식투자 종자돈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팔면 오르고 안 팔면 떨어지고, 3년이 지난해에 끝장을 보게 된다. 깡통 5천만원의 벼랑 끝에서 나는 손을 들고 말았다. 뛰어내려 죽던지 아니면 어떻게 살지 선택의 기로에서 번뇌도 많았다.
집사람은 당신이 묘소 이장을 하여 가정이 亡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3년에 점포 2체가 사라지고 金 10억의 돈이 탕진되었으니 억장이 무너질수밖에,
지금도 집사람과 사춘기에 이른 3남매 자식들에게 한 없이 미안할 뿐이다.
가장(家長)의 실책으로 아내와 자식들이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님을 화장한 후 부터 풍수지리에 매달린다. 공부가 어느 정도 될 무렵 스승님 모시고 조부님 아버지 산소를 감정해보았다. 탕류수(蕩流水)지형에 水脈이 극심한 凶地에 이장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재산을 일시에 날려버린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墓地가 凶堂임을 확인하고 다시 移葬을 하였다.
심한 상처일수록 시간이 지나야 치료가 된다는 말처럼, 어느 정도 평정심을 찾을 무렵 2003년 12월 31일 오후 6시 어머님이 운명(殞命)하신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영동이 329번지에서 6남매가 출생하고 성장기까지 살았던 삶의 둥지다. 광주에서 생활한 저는 12월 31일 오전 8시 모친께서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여동생으로 받았다. 몇 차례 위독하다 연락을 받고 고향에 가면 노안으로 위태로운 고비가 있었지만 잘 넘기시고 식사도 잘하시고 활동하시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어도 느긋하게 생각했는가 싶다.
오후 1시에 고향에 도착했는데 막내여동생이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지금부터 이어갈 사연은 사실 그대로를 가감(加減)없이 설명하겠다. 어머님은 둘째가 고향에서 모시고 생활하였다. 막내여동생의 설명은, 엄마는 오빠가 도착하기 30분전 기도(氣道)가 막혀 말씀을 못하신다는 것이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을 뵈울때 입술만 약간 움직일 뿐, 의사소통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광주에서 생활한 여동생이 어떻게 어머님 운명을 알고 고향에 가게 되었으며 무슨 말씀을 남기셨는지 궁금하였다.
여동생은, 전복죽을 끓여서 어머님께 드리려고 일찍 고향에 갔는데 방안에 계신 모친은 죽을힘을 다 하여 둘째아들 이름을 불렀건만 대답이 없었다 하셨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알고 왔느냐? 황급히 불타사 스님께 전화하여 오시게 하라 하셨다 한다. 그런데 기묘(奇妙)한 일은 스님께 전화를 하니 암자 공양보살 말씀이 스님은 노보살께서 무슨 일이 분명 있다 하시고 아침식사를 서두르시고 자전거로 가셨다는 것이다. 이생에서 작별 하시려고 영(靈)과 영(靈)의 교감이 있었다고 지금도 자식들은 믿고있다.
그리고 어머님이 스님과 나눈 말씀중 내가(모친) 지금 가는데 하나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화장을 부탁했는데 장남이 가장 싫어하니 다시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면서 아들에게 원망될 것 뭐 있소? 장남 생각처럼 화장하지 말고 장사하도록 해주세요. 하셨다 한다. 거처하신 방 위에는 입고가실 수의(壽衣)와 버섯신발이 단정히 놓여있고 평소 사용하신 용품은 모두 정리해두시고 또 소각할 물건들은 보자기에 싸놓으셨다.
오후 5시 30분경 말없이 누워계신 어머님은 손에 힘을 불끈 쥐고 일어나시려고 하셔서 집사람이 등 뒤에서 받치고 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그런데 쉼 없이 염주를 돌리듯 손가락은 까딱까딱 움직이고 입술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끝임 없이 움직이는데 평소 생활처럼 금강경(金剛經)독송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15분쯤 지나서 손가락과 입술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리고 긴 숨을 3번 내쉬고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잠든 모습으로 비치기에 자리에 뉘어 드렸는데 그 찰나가 운명(殞命)의 순간인줄 꿈에도 몰랐다. 기력이 딸려서 잠시 쉬시는가 보다 착각을 하였으니, 눈뜨고도 알 수 없는 어리석음과 가슴이 여미어지는 그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어머님은 청정(淸淨)한 한생을 마감하시고 저 하늘로 가셨다.
2003년 12월 31일 오후 6시에 운명하셨으니 3일장으로 장례를 치러야 하므로 시간이 촉박(促迫)하였다. 다음날은 新年, 1월 2일이 운상 날인데 생각지 못한 제의(提議)를 2째매형이 한다. 평소 장모님 생각이 화장을 원하셨으니 그 결정은 장남의 뜻이 아니라 고인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을 하신다.
6남매 아들 며느리, 딸 사위들이 의논을 하였지만 첨예한 의견 대립으로 끝내 고성(高聲)으로 이어졌다. 평소 장남 말이라면 군 말없이 따라주던 동생들도 매형 의견에 동조하고 운명 전 큰아들 뜻대로 하여라. 전해준 막내까지도 화장은 엄마의 원하신 뜻이니 큰오빠가 접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격앙된 화를 진정하려고 밖으로 나와 보니 1월 1일 밤, 웬 비가 내리는지 순간 기이(奇異)한 생각으로 감정을 싹였다. 한겨울 밤중에 눈보라가 아닌 빗줄기가 내리다니 어머니 죽음 앞에 자식들이 싸우는 꼴을 보신다면 영혼인들 편히 갈수 없겠구나, 나는 주장을 접고 火葬에 동의를 하였다. 밤새 내리는 비는 다음날 9시경에 멈추었다.
광주 영락화장터에서 어머님 육신은 함 줌의 재로 변하고 장남이 유골함을 인수받는 순간 또 스님이 언성을 높이셨다. 화장을 하면 유골을 그대로 인계해야지 왜 가루를 만들었느냐 하시는 것이다. 스님까지 야단법석이라니 장례기간 내내 심사가 복잡하였다. 화장터에서 작업하신 분들은 스님의 완고한 말씀에 당황한 표정으로 화장하면 당연 분쇄하여 유골함에 담아드린다는 것이다.
본인 생각도 별 하자(瑕疵)가 없는 문제를 왜 스님께서 저러시나, 왜 그러십니까?
스님 말씀은 노보살은 분명 사리가 나올 것인데 분쇄하여 너무 화가 난다 하셨다.
어머님 유골은 고향 선산 아버지 묘소 주변에 뿌리는데 유난히 에메랄드색이 선명하게 보였다. 스님은 사리가 분명하다고 하셨다. 유골을 뿌리는데 집사람이 뿌리지 말고 한곳에 묻은 후 다음에 아버지 산소에 합장해드리면 좋지 않겠습니까 한다. 일리가 있어서 아버지 묘소 옆에 얕게 묻고 고유제(告由祭)를 모시고 49제는 생전에 다니셨던 불타사에서 祭行을 하기로 무일스님과 합의를 하였다.
※ 요즘은 다들 49祭를 생략하는데, 49祭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 49제 유래!
6세기경 중국(中國)에서 생겨난 의식(儀式)으로 유교적(儒敎的)인 조령숭배(祖靈崇拜)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사상이 절충된 것이라고 한다.
불교의식은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재(齋)를 올려 죽은 이가 그 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다음 세상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제례의식이다. 그래서 칠칠재(七七齋)라 부르며, 이 49일간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이 기간에 죽은 이가 생전의 업(業)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 인연 즉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원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따르면 개인의 생전 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業報)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자녀 또는 그 후손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가 없고 전가시킬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교사상은 이 49일 동안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그 후손(後孫)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後孫)들에게 복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과는 다른 육도(六道)사상적 해석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육도 즉 천상(天上) 인간(人間)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지옥도(地獄道)등 여섯 세계를 윤회하고 있으므로 죽은 가족이 이 중 이른바 삼악도(지옥도 아귀도 축생도)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는 기도 행위가 49재라 한다.
49제 4회가 끝나고 5회째 스님이 위장암 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게된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제사를 중단할 수도 없어서 법당에서 가정 제사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49祭는 전남대학교 퇴직한 매형과 함께 전국사찰을 다니면서 불교공부를 하시는 외사촌 누님이 참석하셨다. 스님이 안계시므로 스님 가사를 입고 목탁 치고 독송하시면서 스님께서 주관하신 것처럼 진행을 하셨다. 그때 마지막 어머님께 올린 祭文을 읽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던 내용이라서 첨자(添字)하였습니다.
祭 文
어머님 오늘이 49제입니다.
불타사 법당에서 무일스님과 함께 어머님 극락왕생을 축원하였는데 지금 불타사 스님은 깊은 병고로 병원에 계셔서 이생과 작별을 서두르고 계신다 하니 무거운 마음으로 저희 자식들이 49제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불타사 스님이 계시는 법당에는 언제나 어머님이 계신다는 믿음으로 어머님이 보고 싶을 때 이 법당을 찾으려 하였는데, 이 또한 저희 마음대로 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정 제사법으로 정성껏 봉행하오니 흠향하시고, 천상세계의 좋은 인연으로 가시길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어머님!
이생에서 어머님의 모든 흔적 유골마저 흙 돌 잔디에 뿌려드려서, 아들은 밤잠을 설치다가 현세와 후세들에게 극락화보살(어머님)께서 無想正覺 구도심으로 평생을 청정한 삶 사시다가 2003년 12월 31일 18시 念佛三昧로 入定하셨다는 와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어머님의 모습이 빛거울이 되어 영원이 비춰지길 소망하는 마음을세기고자 합니다.
금년 4월 2일(음2월 13일) 선조 묘 정비사업때 증조 조부 아버지 상석과 함께 세우고자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습니다. 우매한 자식들이 뜻을 모아서 하는 일이니 헤아려주시고 무탈하도록 도와주시기 간절히 바라옵니다.
어머님!
이제 모든 이생의 인연 버리시고 천상세계의 좋은 인연으로 가십시오!
편히 천상세계로 가시옵소서!
어머님 생전에 불효한 죄 용서하십시오,
2004년 2월 17일
아들 며느리 사위 딸 올림
본인이 풍수지리 공부한 동기는 어머님 화장을 하고 난 후, 10년간 산천을 누비며 수학(修學)을 하였다. 풍수지리 원로이신 雲月 朴鳳柱 스승님으로 부터 풍수학문을 전수받았다. 스승님은 5개시 교육장을 역임하시고 科學을 전공한 교육자이시다.
스승님이 풍수지리를 전공하게 된 연유는 조부님 유언(遺言)에 의하여 60년 동안 풍수지리 理氣 形氣를 공부하시고 후학지도에 전념하시다가 乙未년 8月 1일 오후4시 운명 하셨다.
스승님께서 10년 전에 본인에게 하신 말씀은 앞으로 10년 못가서 火葬이 압도적으로 盛行할것이다. 나는 나이가 많아서 그 결과를 볼 수 없지만 너는 아직 젊으니 火葬한 子孫과 明堂에 모시는 後孫의 삶과 정신세계를 관찰해 보아라.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말씀이 엊그제처럼 기억되는데 말이 씨가 되 듯, 작금은 스승님 예언처럼 화장을 선호한 장례문화로 급변되었다.
이글을 쓴 동기는 六壬 이수동 선생님의 부탁에 의한 기고(起稿가 되겠지만,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 줄거리라 하겠다. 작금의 화장문화의 폐단은 오랜 세월동안 잘 관리해온 조상님 산소가 급기야 난도질당하고 가스통을 가지고 가서 현지에서 조상님 유체(遺骨)를 태우고 그도 모자라서 유골을 깨부숴서 나무에 뿌리고 산천초목에 뿌려지는 행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거금 투자로 납골당 석조물을 만들어서 여러 조상님을 유골함에 담아 모시면 편리하다는 이유로 여기 저기 흉물스럽게 보이는 납골당은 과연 권장할만한 묘장문화라 할 것인가?
본인은 납골당에 대하여 否定的 思考를 하고 있다. 왜냐면!, 凶地에 계신 조상님은 좋은 장소에 모실 수 있지만 화장을 하게 되면 선택의 여지마저 없기 때문이다. 저희 부모님과 조상님들께서는 선조님 섬기는 정성이 대단하셨다. 본인도 어려서 부터 부모님 따라서 20리길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제사음식 들고 산소갈때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현재까지는 산소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자식부터가 사실 염려스럽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정신을 각인(刻印)시키고자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자식 놈 눈치를 보면 진실성이 결여되어 보여서 매우 앞날이 걱정스럽다.
요즘 각 문중에서 말께나 하고 잘난 자손들이 묘장의 중요성을 모르고 무지(無知)하다 보니 간편하고 쉬운 것이 최선인 냥 조상님 산소를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가스불로 태워서 그도 모자라서 돌 위에 놓고 파쇄(破碎)까지 하니 이게 인간이 할 짓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간편함이 좋다고 하지만 모름지기 人間이라면 行하면 안 되는 일이 바로 이런 행위가 아닐까 싶다.
만약 자손들이 조상님 묘소 관리를 할 형편이 안 되면 묘소를 파 해치지 말고 그대로 놔두시기 바란다. 묘소는 관리를 안 하면 3년 후가 되면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자연의 모습으로 동화되기 때문에 굳이 음택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납골당은 천년이 가도 큰 변화가 없는 흉물(凶物)이라고 생각한다.
❍ 부관참시(剖棺斬屍)는 大罪人에게 내리는 형벌(刑罰)이다
조선왕조 연산군시대 술사로 유명한 한명희씨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받았다.
성종때 연산군 어머니였던 윤씨의 폐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연산군은 김종직,
정여창, 남효온, 성현, 송흠과 한명회를 부관참시라는 극악한 형벌을 내렸다.
한명회는 1487(73세)년에 卒하고, 연산군은 1494년에 왕위에 즉위(卽位)하지만, 치정(治政)을 잘못한 폭군(暴君)의 유산은 긴 역사의 흐름도 그 죄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가장 극악한 역적죄인(逆賊罪人)에게 加해지는 형벌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인물을 거명한 이유는 조상님이 罪人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손에 의해서 행하여지고 있다는 심각성을 한분이라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 조상님 산소를 없애는 분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 산소 벌초가 힘들고 산소 관리가 힘들다.
② 산소가 멀어서 가기가 힘들다.
③ 제사(祭司)모시기가 번거롭다.
본인은 풍수지리 공부를 하면서 당대의 최고 권위 있는 지관(地官)들이 점혈(點穴)하고 재혈(裁穴)한 이씨조선의 왕릉(王陵)과 전국 각지의 관작(官爵)이 높으신 분들의 묘소를 10년 동안 풍수 동호인들과 함께 열심히 공부한 시절이 있다. 사람의 얼굴과 성향이 다르듯 천차만별의 형상(形象)이 다른 자연의 품안에서 萬年香火地氣 봉사(奉祀)를 행한 자손들의 노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장소가 묘소다.
명당지의 묘소는 대부분 관리가 잘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뜻이 함축되어 있다.
분명한 것은 묘소로서 품격을 겸비한 명당의 자손들은 경제력 또는 관직 직위도 분명하지만, 흉당에 모신 자손들의 현주소는 그 반대라 하겠다. 또 풍수 내공이 있는 분들은 凶地인지 吉地인지 바로 볼 수가 있다.
본인은 묘소 감정할 때 묘 봉분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매우 삼가 한다.
믿을지 모르겠으나 처음 공부할 때는 묘소 위로 올라가서 氣脈 水脈이 있는가 확인 하였는데 3차래 까닭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몸이 아픈 것이다. 한마디로 죽을 고생하고부터는 가능한 묘소위에 올라가는 법이 없다. 특히 묘소 주인공이 관작이 높을수록 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답산할때 조심해야 할 것은 묘소는 말이 없으니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의 집을 방문할 때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이치로 생각하면 이해하실 것이다.
즉, 예를 갖추어야 한다.
본인의 경우는 꼭 香을 피우고 묵념을 하든지 아니면 큰절을 한 후, 방문한 목적을 마음속으로 告하고 그리고 묘소감정을 한다.
인간은 죽음 앞에 서열(序列)도 없고 건강(健康)과 신약(身弱)의 차별도 없다.
예고 없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한 경우, 평상시 건강하다고 자부했던 사람이 간단한 병원 진료를 받고 난 후, 체내에 잠복한 암증(癌症)을 알고 충격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급격이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누구나 死後의 당면문제는 가야할 곳을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뜻있는 분들은 身後地를 미리 定한다. 그리고 매년 가꾸면서 자식들에게 정신교육을 시킨다. 묘장문화의 급진적 변화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받아드리지만 正穴에 모셔있는 산소까지 무차별 파헤치는 것은 해당 자손을 위해서도 백해무익(百害無益)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끝맺음 합니다.
2016년 4월 1일
宜泉 李 帝 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