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적 버릇이 아직 남아 요즘도 식구들하고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종종 눈흘김을 당하곤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바로 그놈의 멸치 때문입니다. 가령 저는 된장찌개에 들어 있는 굵고 보기 좋은 멸치를 그냥 건져내 버리는 것을 잘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간간한 된장국물까지 배어든 살찐 멸치, 이놈은 제 눈에는 반찬 중에서도 상 반찬인데 아내와 아이들 눈에는 음식 쓰레기로 비치는 모양입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해서 밥상머리에서 짠물생선은 좀처럼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파젯날 아침 흰쌀밥에다 간간 짭조름한 생선살 뚝뚝 떼 얹어 밥을 먹다보면 눈앞이 환해지며 천국이 비로소 우리 집 안방까지 도래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쩌다 오일장 어물전에서 사와 맛보는 생선이래야 굵은 왕소금 덕지덕지 묻은 갈치, 꽁치, 고등어, 전갱어 따위가 전부지만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었습니다. 간혹 제사라도 닥쳐오면 비로소 비린맛을 좀 볼 수가 있었지요. 하얀 속살이 보들보들한 조기, 꼼꼼한 향기에다 살이 깊어 타박타박 베어 먹을 수 있는 돔배기, 비린내 없는 정갈한 맛의 명태전….
그러다 보니 자연 집에서 먹을 수 있는 가장 흔한 짠물 생선은 멸치입니다.(멸치가 생선인지 아닌지 그것도 좀 애매하지만) 우리 집의 멸치는 멸치 중에서도 늘 크고 굵은 왕멸치입니다. 된장찌개에 들어가 있는 멸치도 작은 피라미만한 멸치요, 여름날 집에서 만든 누르스름한 밀국수 말아먹으려고 우려낸 다시물 속의 멸치도 어른들 손가락 하나만한 큰 멸치였습니다. 그리고 비린내를 국물에게 다 빼앗겨 버린 밍밍한 멸치지만 결코 그것을 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혹 안 먹는다고 밥상 위에 건져내 버리면, 웬 횡재냐 하며 순식간에 다른 식구가 냉큼 물고가 버립니다. 그래야만 여덟 식구 배가 그나마 조금은 부르고 넉넉해지니까요. 작고 자잘한 멸치는 맛이야 있었지만 참 구경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지리멸치’란 놈의 맛과 이름을 나이 마흔을 넘기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끔씩은 밴또(도시락)안 보리밥 속에 쑤셔 박혀 있는 갸름한 반찬통에 멸치가 들어 있기도 했습니다. 크고 굵은 멸치라 반으로 배를 갈라 똥을 빼내고 거기에다 풋고추 듬성듬성 썰어 섞어서 볶아 놓으면 아주 먹을 만했습니다. 그런 날은 밴또 뚜껑으로 밥과 반찬을 가리지 않고도 당당하게 점심을 먹을 수가 있었고요.
오늘 아침 두레생협에서 가져온 프리미엄급 멸치볶음을 먹다보니 문득 그때가 생각나네요. 매콤한 풋고추살과, 호두, 해바라기씨까지 넣어 볶아낸 이 명품 멸치볶음으로 밥을 먹으니, 아, 조선시대 왕의 수라상이 이랬을까 싶습니다. 물엿을 안 썼는지 담백해서 더욱 입맛에 맞습니다.
야, 정말 맛있어요! 두레생협 반찬!
첫댓글 선생님의 글이 더 맛있네요. 백석의 시를 읽는 느낌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