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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무비스님 문수원 강의 16강
(71.雪山肥膩更無雜이라~ 76.彈指圓成八萬門이요)
오늘은 71번부터 할 차례입니다.
雪山肥膩更無雜이라
(설산비니갱무잡이라)
설산의 비니초 밭에는 잡된 풀이 하나도 없어
설산비니갱무잡(雪山肥膩更無雜) 순출제호아상납(純出醍醐我常納) 이라 그랬습니다.
그 위에 이야기가 법의 우레를 진동시키고 또 북을 쳐대고 자비의 구름을 펼치고 또 감로를 뿌린다.
그것은 전부 깨달음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불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영가스님께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역시 영가스님께서 이 『증도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그 내용이 그대로 법뢰고, 법고요 자운이고 또 감로다.
그러면은 온갖 수준의 여러가지 종류, 많이 배우고 적게 배우고 관계없이 그런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영가스님의 『증도가』를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
여기는 오로지 진리만 논할 뿐이지 또 깨달음에 의한 상승법 최고의 법만 논할 뿐이지 다른 내용은 없다.
전부 깨달음의 법문 속에서 이렇게 노닌다 그런 뜻에서 용상축답윤무변이라, 용이니 상이니 그런 것, 용이니 코끼리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불교에 귀의한지 오래되고, 불법을 잘 알고, 혹은 또 좀 모르는 사람들, 삼승 또는 오성 이런 등등의 각계각층 또는 지식이라든지 불교에 대한 수준이라든지 또 마음의 문제에 대한 이해의 정도라든지 이런 것들이 설사 여러가지로 차별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성오를 한다. 모두가 깨닫는다 하는 것입니다.
용상축답 윤무변이라 그리고 삼승오성이 개성오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설산비니갱무잡(雪山肥膩更無雜) 하야 설산에, 그야말로 설산입니다. 히말라야 산이죠.
불교에는 부처님께서 설산에 들어가서 처음 고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설산이란 말이 잘 나오고, 또 경전에 설산에 대한 비유도 잘 나옵니다.
인도에서 설산은 아주 성산으로 또는 영산으로 그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소위 그 물, 갠지스강의 물을 성수로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그런 의식들이 인도사람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설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설산에 비니라고 하는 풀이름입니다 이것은.
비니라고 하는 풀이름이 있는데 이 비니초가 자라는 그곳에는 잡초가 없다. 갱무잡(更無雜)이라. 설산에 비니초에는 아무런 잡초가 없고, 또는 다른 맛이 없다.
그런 말인데 이건 무슨 말이고 하면은 설산에 사는 흰 소가 있습니다. 흰 소, 아주 성우(聖牛)죠 그것도. 성스러운 소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인도에는 소를 신봉하는 풍조가 있죠.
그런데 그중에서도 백우(白牛)라고 해서 털이 새하얀 소가 먹는 풀이 이 비니초라고 하는 약초입니다.
다른 초는 먹지 않는다고 해요. 이 비니초는 아주 특수한 약초로서 이 약초를 먹고, 말하자면은 이 백우가 짠 그 소위 백우가 내는 그 우유는, 그냥 다른 소들이 내는 우유하고 맛이 다르고, 다른 소에서 짠 우유를 가지고 아주 가공을 해서 최상미를 만든 것 그대로가 말하자면 이 비니초를 먹은 백우라고 하는 그 소가 짜 논 우유 그대로랍니다.
그래서 순수한 맛만 만들어 낸다. 최상미만 만들어낸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純出醍醐我常納이라
(순출제호아상납)
그것을 먹은 소의 제호를 내가 항상 마시도다.
그래서 설산에서 있는 백우는 흰 소는 비니초만 먹는데 그 비니초만 먹고 내놓는 그 소위 그 우유는 최상미다.
그래서 제호다 그래요. 상미제호 제호상미(醍醐上味) 이런 말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는 다른 뭐 비린내라든지 다른 잡스러운 풀을 먹고 짠 우유하고는 맛이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최상미만 내 놓는 그런 소를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그건 비유지요.
그래서 순출제호아상납(純出醍醐我常納)이라 그랬죠.
순전히 제호만 낸다. 설산에 있는 비니초를 먹은 소는 그 비니에 아무런 잡성이 없어서, 그 풀을 먹고 나서는 내는 우유가 그대로 제호상미만 순전히 제호상미야, 순수한 제호상미만 만들어 낸다.
그것을 아상납(我常納)이라. 내가 항상 받아들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일승법문, 최고의 묘법만 가장 높은 법만 내가 받아들인다. 그 속에 무슨 방편이라고 하는 그런 잡스러운 냄새, 잡스러운 맛은 전혀 섞이지 않았다.
근기에 맞춘다든지 남의 어떤 사정을 감안해 가지고 말하자면 진리 아닌 이야기를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은 여기에 전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
그런 순수한 최고의 가르침, 그게 제호입니다 여기서.
제호라고 하는 것은 인도 그 당시로서 최고의 음식이고 그리고 제호는 다른 우유일 경우는 그걸 여러 번 정제를 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제호예요.
그런데 설산에서 비니초를 먹고 자란 흰 소는 바로 짜면은 그 우유 그대로 순전히 제호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이건 그러니까 부처님 법이 다른 방편이라든지 그런 근기에 맞춘다든지 수준에 맞추는 그런 내용이 없고, 순전히 묘법만 또 일승법만 또 대승법만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내용만 내고 또 그것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죠, 사실은.
그럼 그 묘법이라고 하는건 뭐냐? 또 최상승의 법이라고 하는 건 뭐냐? 일불승이다 우리가 『법화경』 공부하면은 일불승이라는 말을 자주 쓰죠.
부처의 길을 이야기하는데 그 부처의 길이란 본래심 우리 마음 그대로의 길입니다 사실은.
그 본래의 마음 그대로의 길이 아닌 것은 다른 어떤 현상적인 이야기, 어떤 인과관계의 이야기라든지 눈 앞에 보이는 문제들이 또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적지 아니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한 어떤 교훈적인 가르침 이런 것은 순수한 마음의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여기서 순수한 제호상미만 낸다.
부처님의 그 법문 속에서도 팔,구십 퍼센트는 사실 방편입니다. 그리고 기껏해야 십퍼센트 남짓한 것이 실법이라고 해서 진실한 진리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뭐 조사스님들의 말씀 속에도 방편이 많이 있죠.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이 이 불교 안에서는 크게 문제로 사실은 대두가 되는 거죠. 그러다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수한 일심법(一心法)이다, 그리고 최고의 깨달음의 법이다. 사실은 조사스님들도 그런 근기를 맞추는 방편의 말이 없으면은 ‘법당 앞에 풀이 한 길이나 자란다. 그래서 놉을 해서 법당 앞에 풀을 매야 할 정도로 사람이 인적이 드물다’하는 그런 표현들이 있어요.
그건 그런 상근기, 일심법만을 좋아할 그런 상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근기를 낮은 근기를 자꾸 성숙시켜서 키워가지고 나중에 일심법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대한 또는 성불에 대한 법을 가르쳐야지 당장 처음부터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하기로 하면은 손님이 크게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증도가』를 말하는 입장에서 당신의 깨달음의 내용을 이야기 하는 입장에서는 그런 저런 것을 감안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 한다 하는 내용입니다.
一性圓通一切性이요
(일성원통일체성이요)
하나의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일성원통일체성(一性圓通一切性)일법변합일체법(一法遍含一切法)이라,
그 법은 그런 묘법, 깨달음의 법, 한마음 또는 본래 마음의 그 이치는 한 성품이다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 한 성품은 한 성품은 일체성품에 다 통한다.
원통(圓通) 원만히 통한다 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소위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이론을 밑바침하고 있죠.
사사무애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물과 사물이 서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밀접한 관계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부 서로 호상섭입(互相涉入)이라, 서로서로 스며들어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관계를 맺는다 하는 것은 서로 얽혀있다 이런 정도이지만 사사무애에서 소위 호상섭입이라고 할 때는 말하자면 그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부정 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다. 부정하면은 모든 것이 다 부정된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를 꿰뚫어 보고 사는 게 사실은 현명한 삶이죠. 그런 관계성을, 그래서
一法遍含一切法이로다
(일법변합일체법이로다)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을 두루 포함하도다.
일법(一法)이 변합일체법(遍含一切法)이라, 한 법이 일체법에 두루 포함되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박씨 성품 다르고 김씨 성품 다르고 A라는 사람이 성품 다르고 전부 B라는 사람의 마음 다르고 따로따로 노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보이고 이해됩니다.
그것만이 우리 안목으로는 이해할 수 밖에 없죠.
그러나 좀 더 열린 눈으로 보면은 사실 우리 한마음의 도리라고 하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통해있다.
그 통해 있는 것은 어디까지 통해있느냐?
우리 이웃사람들끼리만 통해있느냐?
그게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하고 다 통해있다 이거예요.
그리고 이 시대에 있는 존재하고만 통해있느냐?
그게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아직도 오지 아니한, 아직도 오지 않은 미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본성하고도 통해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 정도로 통해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래서 만물이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이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하늘과 땅은 나하고 한 뿌리다’
만물은 여하일체라. ‘삼라만상 이 눈앞에 펼쳐지는 만물은 나하고 한몸이라’ 그래요.
좀 열린 눈으로 보면 그렇게 돼 있는 거죠.
우리는 아주 좁은 눈으로 보니까 나만 생각하게 되고, 자꾸 이제 개인주의화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만 생각하는 그 눈이 자꾸 좁아져요.
그래서 나만 생각하는 그런 입장이 되는건데 좀 더 열린 눈으로 보면은 사실은 전부 하나로 통일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품만 그런 것이 아니고 눈앞에 보이는, 성품이라 하더라도 현상하고 또 다를 것도 없어요.
눈앞에 보이는 현상도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하고 전부 얽혀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작은 나뭇잎을 예를 들어서 흔들면은 사실은 온 우주가 흔들린다 하는 그런 표현이 있듯이 사실 그렇습니다, 알고보면은.
그렇게 연관관계를 맺고 있어요.
성품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성품이 곧 상이고 현상이고 그게 나눌 때는 나눠서 보지만 또 하나로 볼 때는 또 역시 그게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디까지 그게 하나로 통일돼 있나?
원통(圓通) 아까 말씀드렸듯이 중생에서부터 부처에 이르기 까지 원만히 통해있고, 현재 이 자리에서 이웃에 아니 온 우주에까지 통해 있고, 먼 미래에 까지 통해있고, 먼 과거에 까지 다 통해 있다,
그러니까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해서 우리 한 순간의 나 속에는 삼천 종류의 각 분야 모든 성인 범부 할 것 없이 전부 그 속에 다 포함된다.
그래서 『법화경』에서 일념삼천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 모습 요것만이 그대로 고수 될 것 같지만은 고수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 그것은 전부 다른 것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
어찌해서 우리가, 뭐 다른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는 건 놔두더라도 우선 이제 ‘귀가 뜨인다’고 표현을 한다면은 내 자신의 성품에서 부처의 성품에 까지 이른다,
부처의 성품에 까지 이른다 라고 하는 것은 그건 또 어떻게 보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지요 사실은,
그래서 뭐 중생과 부처가 전부 한 데 엉켜 있다.
이 일진법계(一眞法界) 진리의 세계 속에는 사실은 둘로 나눠 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영가스님께서는 그런 이치를 꿰뚫어보고서 하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가 이해하기로 하면 본래심의 세계에서는 또는 하나인 마음의 세계에서는 아까 ‘설산비니갱무잡’해서 잡됨이 없어가지고 순전히 일심법, 깨달음의 법 그것뿐이다 라고 이야기 했듯이
그런 차원에서 보면은 일성(一性)이 원통일체성(圓通一切性)하고 일법(一法)이 한 가지 법이 변합일체법(遍含一切法)이라, 일체법에 두루 포함된다.
『법성게』에서 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하는 내용 그대로죠.
그래서 이제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말로써는 오온산두고불당에 『화엄경』 법계에 대한 게송을 말하는데 보면은
‘오온산두고불당(五蘊山頭古佛堂)에 비로주야방호광(毘盧晝夜放豪光)이라’ 그랬어요.
오온산두라고 하는 것은 우리 지금 현재 육신 그대로입니다. 육신의 옛 고불당이라는거 옛 부처의 법당이라는 거지.
거기서 비로주야방호광이라 비로자나 부처님이 항상 백호광명을 놓고 있다 이거예요. 그렇게 통해 있어요.
현재 우리는 하잘 것 없는 중생이라고 자신을 그렇게 비하하지만은 사실은 내용인즉슨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오온으로 된 이 육신 그 자리에 그대로 비로자나가 광명을 놓고 있는 그런 차원입니다.
그게 일성이 원통일체성하고, 부처님 성품까지 통해 있으니까, 일성이 원통일체성이예요.
부처님 빼놓고 우리 중생들끼리만 통한다는 이야기 아니고 또 부처님 빼놓고 중생들끼리의 법만 변합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모든 법이 다 이 속에 포함되고, 모든 성품이 다 그속에 포함된다 그걸 이제 밑에 비유로써 멋지게 나타내고 있죠.
一月普現一切水하고
(일월보현일체수하고)
하나의 달이 일체의 물에 널리 나타나고
일월보현일체수(一月普現一切水)하니 일체수월일월섭(一切水月一月攝)이라
우리 염불속에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라는 말이 있듯이
일월이 보현일체수라 하늘에 떠있는 하나의 달이 모든 물에 보현(普現) 일체 물에 다 비춘다 그랬죠.
물가에 보면 달이 비출 때는 전부 어느 강에서도 다 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이 있는데는 다 달이 있어요. 보현이니까 널리 비추니까.
一切水月一月攝이로다
(일체수월일월섭이로다)
일체 물에 있는 달은 하나의 달에 모두 포섭되도다.
그래서 일체 물에 곳곳에 떠있는 그런 그 물에 떠 있는 달을 사실은 한 달, 하늘에 떠있는 하나의 그 달에 다 포섭이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은 내 한 마음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다 나타나고 그 모든 한 마음은 그 모든 사람들의 그 마음은 결국 내 한 마음에 전부 포함된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할 것 없이 본래의 한 마음에 근거를 두고 우리의 업 따라서 우리의 능력 따라서 우리의 수행력 따라서 또 인연에 따라서 개개의 개체를 이루고 있는 거죠.
우리 개인의 개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체를 이루고 있으면서 또 근원적으로는 하나로 통해 있는 거죠.
마치 하늘에 있는 달이 하나지만은 물이 있는 곳에는 전부 각각 달 그림자를 나타내 보이듯이 우리의 성품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 그 물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 달 그림자가 다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은 하나니까 그거야 뭐 다를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물에 가서 달 그림자를 보느냐에 따라서 달이 달라요.
컵에다 물을 떠놓고서 달을 보느냐, 강가에 가서 보느냐 아니면 여울, 여울지는 흐르는 물에 가서 보느냐 고여 있는 물에 가서 보느냐, 넓은 물이냐, 좁은 물이냐, 거기에 따라서 비치는 달 모습이 다 달라요.
그건 뭐겠습니까? 하나의 부처성품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람 사람의 그 인연과 또 과보와 또는 지은 업과 여기에 따라서 한 마음이 나타나는 게 다 다릅니다.
사람들 따라서 다 한 마음의 작용이 다 달라요.
마음은 부처님하고 연결이 돼 있는데, 그 마음의 근원자리는 부처님하고 연결이 돼 있는데 우리들의 인연과 과보와 그다음에 업에 따라서 그 나타나는 게 다 달라요.
그러니까 전부 얼굴이 다르고 수용하는 복이 다르고 음성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또 안목이 다르고 전부 다르죠.
다르면서도 또 근원적으로는 또 하나로 통일이 돼 있는 거죠. 그것 참 묘한 이치죠, 알고보면은.
전기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발전소에서 전기가 온다고 하더라도 어떤 전구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불빛이 달라요.
조그만한 걸 키면은 작게 오고, 요즘 뭐 5촉짜리도 있고, 아주 뭐 반촉짜리도 있고 그렇죠, 조그마한 거, 인등하는 거 그거는 뭐 불이 그저 있는동 마는동 깜빡깜빡 하는 고런 작은 것도 있고
한 이백촉 짜리 좀 켜놓으면 큰 방에 그냥 환하게 비추기도 하고 형광등 같은 건 몇 개만 켜도 환하기도 하고 그거 다다르거든요.
그렇다고 전기의 성질이 다르냐? 천만에 전기의 성질이 다르지 않다고요 그게 일성이야. 그래 일체성에 온갖 전구에 다 통하는 거야 하나의전기가 일체성.
그래 일성이 원통일체성이요, 일법이 변합일체법이라
비유컨대 그 때 전기가 있었으면 전기 이야기 하면 더 쉬웠을 텐데, 달이니까.
일월보현일체수하니 일체수월일월섭이라 그랬어요.
이건 비유니까. 계속 비유를 따져들어가보면 이치에 꼭 맞아 떨어지진 않아요. 그 하나의 달인데 물마다 비치는게 다 다르죠. 그러나 비치기는 다 비칩니다. 그 나름의 그 달이 다 비쳐요. 누구의 눈동자에도 달이 비친다 하듯이. 사실 다 비쳐요.
비치는데 비치는 그림자가 달라.
큰 호수에 맑은 호수에 떠있는 달하고 컵에 떠있는 달하고 다르다고요.
하나의 하늘에 있는 달은 그거 오직 하난데 그렇게 달라, 참 그거 묘한 거예요. 우리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지은 인연에 따라서, 고 컵이냐 호수냐 하는 것은 인연의 문제고 업의 문제고 과보의 문제라. 거기에는 우리의 의지가 포함된다고요.
근원자리는 똑같은데 우리의 의지가 그렇게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어둡게도 만들 수가 있고, 밝게도 만들 수가 있고, 작게도 만들 수가 있고 크게도 만들 수가 있는 거라.
그러니까 그건 연기의 문제고 현상의 문제기 때문에 우리 노력여하에 있고 마음씀씀이 여하에 달려있는 거지.
그러니까 사는게 전부 다르죠.
생각하는 게 다르고, 지능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재주가 다르고 각양각색으로 그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달을 보려고 그릇을 작은 그릇을 가지고 오느냐 뭐 바게쓰를 가지고 오느냐 아니면 강에 가서 보느냐 바다에 가서 보느냐 이것이 다르듯이 그렇게 다른거죠.
다르다고 해서 다른 것만 생각해선 안 된다. 그 근원의 달은 하늘에 하나이듯이 또 우리의 그 사람사람의 다른 업력 따라서 또 내면의 근원자리는 본래의 마음자리는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諸佛法身入我性이요
(제불법신입아성이요)
모든 깨달은 사람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고
제불법신(諸佛法身)이 입아성(入我性)이요 아성(我性)이 환공여래합(還共如來合)이라 그랬잖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진리의 몸이 입아성이라 나의 성품 속에 다 들어온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어떻게 보면 황공한 소리입니까? 굉장히 죄송스런 소리같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본래 그렇게 들어와 있어.
하나로 이미 처음부터 그렇게 하나인거예요.
그래 내 성품 속에 들어오고, 부처님의 법신이 내 성품 속에 내 마음자리 속에 들어와 있어.
我性還共如來合이로다
(아성환공여래합이로다)
나의 성품이 또 여래와 함께 합하도다
그리고 또 내 성품 또한 여래와 같이 합한다 이말이요.
부처님과 합해져 있어 하나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 있는 것을 우리가 본래는 그 뿌리는 여래, 부처님에게다 뿌리를 두고 있어요.
내 능력 따라서 그 부처의 보고를 얼마나 끌어다 쓰느냐 하는 것은 내 능력에 달렸다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전부 우리가 뿌리는 발은 전부 부처자리에다 내리고 있어요.
내 능력 따라서 그 부처의 힘을 얼마만치 끌어다가 표현하느냐? 그러니까 그 생각을 늘 해야 돼요.
뭐 현상적인 것만 가지고 자꾸 자기 어떤 한계성에 부딪쳐 가지고 뭐 ‘되느니 안 되느니’ 그럴게 아닙니다, 절대.
근원자리는, 부처라고 하는 그런 위대성에 나도 뿌리 내리고 있다.
내가 얼마나 어떤 원력과 희망을 가지고 이끌어 쓰느냐 거기에 따라서 이제 내 삶이 달라지고 내 표현이 달라진다 하는 것입니다.
一地具足一切地하니
(일지구족일체지하니)
하나의 지위가 모든 지위를 다 갖추고 있으니
일지구족일체지(一地具足一切地)하니 비색비심비행업(非色非心非行業)이라
그러기 때문에 이 한 지위, 한 마음 낸 것이 일지(一地)예요.
그 한마음 내 가지고 닦아 올라가는데 예를 들어서 뭐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이라고 여러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그런 모든 지위들은 한 마음 내는데 다 있어.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그런 말도 있고,
예를 들어서 서울 가려고 마음을 딱, 한 마음 딱 낸 것이 그게 서울 가는 일이라.
서울 가는 모든 일은 그 한 마음 속에 포함 되어 있는 거예요. 출발 안해도 이미 가겠다고 작정 했으면 이미 그거 서울 가는 일은 그 속에 포함된다구요.
가느냐 안가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시간문제라.
도착하고 안하고는 시간문제기 때문에 시간만 가면, 갈려고 했던 그 시간만 가면 틀림없이 도착하게 된 거야.
대개 상식이 그렇거든요.
그래서 일지(一地)에 구족일체지(具足一切地)라, 일체지위를 전부 구족한다. 보살의 십지 내지 등각 묘각의 지위까지도 다 구족한다.
그래서 이 이런 그 묘한 이치, 이런 묘한 이치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또 그렇다고 ‘마음이다’ 라고 이렇게만 또 물질을 배제한 어떤 마음이다 라고만 말 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
非色非心非行業이라
(비색비심비행업이라)
육신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다
비색비심(非色非心)이라, 그리고 행업도 아니다.
색도 아니고 심도 아니고 행업도 아니다, 행하는 업, 어떤 우리의 노력, 거기에 있는 것만도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예요?
색 현실, 또 우리의 마음 그리고 내 실천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동원이 되는 거죠. 다 포함 되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는 말 속에는 그것도 포함 된다.
그런데 고것만이라고 주장하면은 그건 아니죠 분명히.
색이라고 하는 거는 이 육신을 두고 한다면은 또 개체라고 한다면은, 이 개체만 가지고는 안 된다 하는 거죠, 또 마음 마음 해 가지고 마음 일변도로 이 육신 무시하고 마음 일변도로 나가면은 그것도 안 된다. 그것도 아니다.
실천에만 달렸다, 그럼 마음도 없고 몸도 없는데 실천만 한다, 그것도 아니라는 거죠. 행업도 아니다.
그러면서 마음도 좀 필요하고 몸도 필요하고 우리의 실천력도 필요하다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되는 거죠.
비색비심비행업이라.
그래서 이 마음의 도리는요, 경을 보다가 선문을 보면, 선문을 보면 참 시원시원한 것이 그저 일심의 문제, 일심의 문제를 관심을 가지고 설명을 하거든요.
그리고 이 일심의 문제는 아주 근원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자리에서만 다 해결이 되면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입니다.
지엽적인 문제고 시간의 문제기 때문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 한 마음먹기에 따라서 금방 간다고요. 금방 가. 한 생각 딱 굳혀 놓으면 그 다음 가는 거는 문제도 아니야. 그러기 때문에
彈指圓成八萬門이요
(탄지원성팔만문이요)
손가락 한 번 튕기는 사이에 온갖 수행을 원만하게 이루었고
탄지원성팔만문(彈指圓成八萬門)하고 찰나에 멸각삼지겁(刹那滅却三祇劫)이라 이런 말을 씁니다.
탄지(彈指)라고 하는 건 손가락 딱 튕기는 사이예요.
탄지, 경전에도 그렇고 선가에도 그렇고 탄지 ‘손가락을 튕긴다’ 하는 소리가 많은데 손가락으로 이마를 튕기는 게 아니고 미륵보살이 『화엄경』에서도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라고 했어요.
보십시오, 손가락 이렇게 튕기는 거예요. 불법에서 튕기는 건 요렇게 딱 해가지고 요렇게 튕기는 거예요.
이렇게 소리 간단하게 내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렇게 튕기는 게 아니라고요. 그거 정확하게 알아두세요.
이래가지고 소리 딱 내요. 이건 옛날부터 소리 내는 신호로 사용하게 돼 있다고요. 그래서 이걸 말하는 거예요.
이거 옛날부터 내려오는 일이라고요.
그래서 아주 짧은 순간 아닙니까? 손가락이 딱 이래 지나가면 일초도 안 걸리거든요.
그런 짧은 시간에 팔만사천 온갖 수행의 문을, 공덕문을 수행내지 공덕 위의 온갖 갖춰야 할 그런, 바라밀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팔만사천 바라밀을 전부 다 원만히 성취한다.
그러니까 뭐 삼아승지겁 닦아가지고 어떤 부처님 되고 하는 그런 것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되는 소리예요.
어느 것도 정설은 없습니다.
또 이소리만 가지고 꼭 이렇다 이렇게 주장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상이고 그것도 집착이 되니까.
팔만사천 공덕의 문을 다 이 속에서 한 마음 속에서 이룬다.
이를테면 한 마음의 이치를 알면요 그다음에 사실 이루어 가는 것은, 시간의 문제는 시간은 무한의 안목을 가지고 보면은 백년이 걸린다, 이 백년이 걸린다, 하는 것은 그거는 시간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취급을 안 해요.
한 생각 딱 먹었을 때 그때 이미 그건 다 그 한 생각 속에 포함되어 있다. 서울 가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서울 간 거나 다를 바 없는 거지. 가는 것은 시간문제지 그 때 되면은 이미 가 있는 거야 벌써 그거는. 어떤 뭐 노력을 기울였든지 안 기울였든지 가 있는 거야.
꼭 가야 된다고 생각을 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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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性圓通一切性이요 一法遍(含)一切法이로다... 하나의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을 두루 포함하도다. 諸佛法身入我性이요 我性還共如來合이로다...모든 깨달은 사람의 법신이 내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또 여래와 함께 합하도다...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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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性圓通一切性(일성원통일체성)이요 一法遍含一切法(일체변합일체법)이로다.ㅡ하나의 성품이 일체의 성품에 통하고 하나의 법이 일체의 법을 두루 포함하도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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