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맨발의 나라
김상미
더 이상 나는 세상의 그늘에 숨어 생활하지 않는다
타인들의 눈 속에서 내 모습 읽지 않는다
타인들의 말 속에서 내 목소리 듣지 않는다
타인들의 그 어떤 증오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나를 확인하지 않는다
나는 내 정신의 모든 질병들과 함께 잠들고
함께 여명이 밝아오길 기다린다
내 질병은 이 시대와 아무런 상관 없이
내가 내 속으로 너무 깊이 내려선 탓에 생긴
잃어버린 한 마리 검은 양의 비명소리이다
그 아픔으로 나는 이 시대를 견디며
타인들이 누리는 모든 안락을 피해 간다
그들의 지름길로 몰래 들어가 절대 빵을 훔치지도,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아무런 억압 없이
얼굴이 불꽃인 고독한 사람들의 페이지 밑으로 들어간다
독서는 노랗고 어두운 땅이다
그 땅은 내 피로부터 솟아난다
인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행동인 피
나는 내 내면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는 모든 독수리떼들에게
그 피를 바친다
형태를 드러낸 감옥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독수리떼들을 날려보낸다
그리고 수천, 수만 번의 걸음 뒤에 남겨진 그림자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는 얼굴들의 숲
―우리는 얼마나 열렬히 그 숲에 매달렸던가!―
나는 무겁게 한숨 쉬는 그 페이지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건강한 걸음걸이,
어머니의 환한 밝음이 내 등을 쓰다듬는 곳으로 떠난다
아주 깨끗한 출산처럼
모든 것을,
모든 것들을 싹둑 다 잘라버리는 그곳으로
맨발인 채로, 맨발로
☆--- 맨발
나태주
강낭콩을 따서 돔부콩을 따서
보리개떡 밀개떡 쪄서 먹어라
보리타작 뒷마당의 남새밭, 납새기 위에
아직도 맨발, 더러는 통고무신인 아이야.
☆---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 벌 벌 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아내의 맨발 - 갑골문 甲骨文
송수권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맨발
오세영
누가 버렸을까,
망초꽃 흐드러지게 핀 산길에
헤진 신발짝 하나,
맑은 이슬이 고여 있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이 담겨 있다.
오피스의 시멘트 바닥을 밟고
자동차의 페달을 밟고
보도의 아스팔트를 밟고 살다가
드디어 맨발이 된 그,
그는 흙과 살의 경계를 벗어나
측백처럼
나무가 된 것일까,
짐승이 된 것일까.
산길은 홀로 걷는 맨발의 길.
돌아보면 세상은
어지러운 구둣발 소리뿐인데
버림으로써 산이 된 그와
버려져서 비로소 호수가 된 그의
신발.
☆--- 맨발
유안진
무엇을 신었어도
늘 맨발이었다
맨발처럼 민망스럽고
맨발처럼 당당했다
등뼈가 휘어지도록 반백년을 걷고 걸어
닳고 닳은 발바닥은 못과 굳은 티눈
발톱은 잦아지고 발가락들 일그러져
그물 힘줄 앙상한 발등뿐인 내 두 발아
무엇을 신겨봐도
아직도 맨발이다
맨발처럼 시리다 저리다
맨발처럼 쥐가 난다.
☆--- 맨발
이정록
묘지끼리도 껴들기가 있다. 햇살 한 올이라도 바른 곳에 모시려 삽 자루며 곡괭이싸움 벌어지는 곳, 일찍 온 할아버지 한 분이 뒤늦게 당도할 食口들을 위해 헛묘 서넛을 거느리기도 한다.
공동묘지 한 쪽에는 일찍이 말뚝을 박고 스물 세 그루 복숭아나무를 심은 사람 있다. 하지만 나라 땅임을 알아차린 다섯 기의 桃下 봉분들. 뽑아낼 테면 뽑아내고 묻으라니까. 어쨌건 예서 따는 복숭아들 여기 무덤 앞에서 죄다 무릎 꿇을 것이여. 그늘아래 잠든 게 안됐다 싶다가도 복사꽃잎 날리는 신선놀음 아닌가. 막 나온 억새 잎이 여린 손을 흔든다.
공동묘지 안에도 길은 있으나 무덤을 에돌아 둥글게 굽을 따름이다. 억새나, 꽃잎이나, 나비처럼, 맨발이 아니라면 무덤을 타고 넘을 수 없다. 제 몸 위에 참깨를 말리고 고추를 널어놓을 때만 무덤은 이마를 숙여 잘 익은 복숭아, 그 껍질 한 가운데처럼 외줄기 곧은길을 내어 준다.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복숭아씨를 닮은 木棺도 보여줄 듯한 저 安着의 편편한 이마들. 풀뿌리말고, 무덤이 무덤에게 무엇을 더 건네주겠는가. 애초 생의 지름길이란 없는 것이라. 사방팔방에서 굽이쳐온 길들이 제 무덤 앞에 무릎을 모았다가 아장아장 묘지의 등에 업힌다. 여기 와서야 푸른 신발을 신는, 길의 맨발들
☆--- 맨발로 산을 가다
설태수
고운 흙, 굵은 모래, 서늘하거나 따스한 곳을
맨발로 산을 왼종일 걸었다.
몇십 년 만인가,
두꺼운 구두를 벗은 것이?
밤나무와 물푸레나무
철쭉과 적송의 숲을 지나
이끼 돋은 바위를 조심조심 걷는다.
짜디짠 땀을 흘리며
비어가는 내 마음 얼마만인가.
홀연, 검은 구름에 소나기 쏟아져
적막강산에 홀로 두려우나
비로소 畏敬에 눈 뜨는 순간,
망각했던 귀한 글귀
天地神明, 天地神明이여.
어느덧 소나기 걷혀
발 아래 흰구름 두둥실
텅 빈 머리 속에 솔바람 가득 일고
뻐꾸기 휘파람새 더불어
산마루에 올랐네.
의기양양 내닫다가 아뿔싸 피가 나네
발가락에 붉은 피가.
누군가의 병조각이 내 방심을 찔렀네.
조심조심 유리조각 줍는 것도
조각난 내 마음 어루만짐도
얼마만인가, 얼마만인가.
이제는 내리막길.
흘릴 만큼 땀 흘린 몸으로
꾸불꾸불 산길을 따라
내 영혼도 조금씩 부드러워지네.
갑자기 등 뒤에 光風이 일고
저녁 구름 사이로 광채가 쏟아져
숲과 나무가 초록빛으로 춤추고
검푸른 산의 파도가 후광이 되니
맨발인 내가 오늘은
善한 짐승이 되는 날.
천지신명에 안기는 날.
☆--- 발
손현숙
1.
엄마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든
아가의 맨발이 포대기 밖으로 쏙 빠져 나와 있다.
한번도 자신의 무게를 실어보지 못한 발.
아무 것도 경계할 줄 모르는 태초의 꽃.
아가의 말랑말랑한 발을 보며
언젠가는 저 발이 견디며 가야 하는
땅위의 돌들과 음모와 때로는 돌아서야 하는 사랑과
어느새 두터워진 발바닥의 감각들로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모멸들을 생각하며
엄마의 등에 업혀 환하게 잠든
아가의 발을 좇아 횡단보도 초록불의 깜박임을 건넌다.
2.
장난스럽게 떠돌던 어린 발이 쉴 곳을 찾아 숨어든다.
신설동 로터리 노벨극장 동시상영관,
모르는 발을 따라 슬며시 의자 속으로 몸을 묻는다.
월하의 공동묘지, 한 발 잘려 한 발로만 떠도는 영혼.
내 다리 내놔! 내 다리 내놔!
스크린 밖으로 나를 잡으러 오는 저 맨발의 귀신
한 발로 콩콩거리며 아직도 나를 따라 다닌다.
무서운 세상으로 사정없이 내몰아 친다.
오래 전 어머니 등에 업혀 꽃처럼 피어났던 저 발.
그 이후로 일평생 죄를 싣고 다녀야했던 에덴 그 이후로의 족적.
3.
깜박임도 없이 켜지는 빨간 신호등의 의미는 단호하다.
상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34번 국도변에
검정 하이힐 한 켤레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
횡단보도 선에서 조금 비껴
삶의 기억을 담은 채 비틀거리는 발은
우리들의 내일처럼 방향이 모호하다.
운명을 달리 하는 바로 그 순간
이승을 움켜잡았던
꼬일 대로 꼬여진 생의 발바닥
그녀 살아 마지막 체온을 감당했을
신발 속으로 사운거리는 가을 햇살이 차다.
☆--- 장자莊子의 맨발
장수현
광화문역 지하계단에 웅크려 잠든 사내
얼룩무늬 부전나비 같은 맨발을 보았지
그 사내 해몽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있었지
헐벗은 아이들 그렁그렁 매달고
무수히 짓밟히며 거리를 떠돌았을
저 순한 맨발의 전생은
나비가 아니었을까
퇴화된 날개 접고 절뚝이며 꿈길 가는
장자莊子의 젖은 맨발 가만히 엿보았지
가파른 생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지